시(詩)

[이태수] 물 속의 푸른 방

含閒 2013. 7. 10. 11:05
[이태수] 물 속의 푸른 방 - OOO| 참문학동인회_자료실



물 속의 푸른 방



--------------------------------------------------------------차 례

自 序

Ⅰ. 섬이 보입니다
물 속의 푸른 방/11
섬이 보입니다/12
먼 섬/14
나의 섬/16
나의 슬픔에게/18
詩, 조그맣고 아름다운/20
어느 여름날/22
망아지가 뜁니다/23
낮달에 가린 별 하나 찾아나서듯/24
나는 다만 하나의 모래알로/25
나의 새는 이윽고/26
어두운 마음 벗어 하늘에 걸고/27

Ⅱ. 기다림을 위하여
기다림을 위하여 1/31
기다림을 위하여 2/32
기다림을 위하여 3/34
기다림을 위하여 4/36
기다림을 위하여 5/38
기다림을 위하여 6/40
기다림을 위하여 7/42
기다림을 위하여 8/44
기다림을 위하여 9/45

Ⅲ. 절망, 또는 비구상
눈 위에 눈이 내리고/49
뭘 한다고, 마음이여/50
그해의 봄은/52
절망, 또는 비구상/54
이젠 꿈을 뒤집어 꾸는 게 편하다/56
더 내려갈 데가 안 보인다/58
비 밀/60
나는 여기 서 있고/62
세월에게/64
쑥불을 지피며/65
유리알의 詩/66

Ⅳ. 예감
또 하루 해는 지고/71
예 감/73
불현듯 그는/73
그는 대체 누구일까/74
꿈, 부질없는 꿈/76
어떤 실종/78
에디트 피아프/80
이윽고 은장도 하나 내 손안에 들어/81
東城路에서 3/82
東城路에서 4/84
아직도 길은 안 보이고/86
이 쓸쓸한 힘으로/88

Ⅴ. 물 위에 희미하게
식은 밥을 먹으며/93
해질 무렵/94
산 길/96
오솔길을 걸으며/98
새해의 기도/100
盆地葉信/102
파도 위에 금빛 깃을/105
네 피는 하늘로 오르고/106
상 처/108
물 위에 희미하게/109

해설·분열된 자아의 꿈, 혹은 원의 위상학·정과리/111


自 序

{우울한 飛翔의 꿈}(1982) 이후의 작품들을 모아 세번째 시집을 묶는다. 부끄럽고 참담하다. 그러나 어쩌랴. 아직도 저만큼 흔들리는 오솔길을 더듬어 다시 떠날 수밖에…… 나의 말들이 나를 깊숙이 끌어안아줄 때까지. 나의 말이 조그마한 날개라도 달 수 있을 때까지……
1986년 9월
李 太 洙





물 속의 푸른 방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다.
서늘하고 둥근 물소리……
나는 한참을 더 내려가서
집 한 채를 짓는다.
물소리 저 안켠에
날아갈 듯 서 있는 나의 집, 나의
푸른 방에는
얼굴 말끔이 씻은 실바람과
별빛이 술렁이고
등불이 하나 아득하게 걸리어 있다.


섬이 보입니다

서늘하게, 마음의 골짜기에 굴러가는
물소리같이, 옷자락 흔들며 가는
나직한 바람 소리같이,
꿈속의 먼 나라에 내리는 아침 햇발이나
가만히 걸어가는 선율과도 같이,
쓸쓸하지만 휘지 않고 언제나 부드럽게
오직 사랑의 말과 몇 가닥 전율을 안고 오는,

섬이 보입니다. 끝없이 일어섰다 슬리는
말의 포말과 잿더미 속에서 이마를 드는
조그마한 불씨,
황량한 바다 위에 다시 태어나는 말들……
날개를 파닥이며 새들은
옥빛 하늘로 오르고
눈감으면 섬광이 되고 오로라가 되는,

바람이 지나갑니다. 오늘도
빈 수레의 바퀴 소리, 뒤집힌 말의 홍수, 그 가운데
고고하게 앉아, 섬은
꺼질 듯 타는 불꽃을 부둥켜안으며
은은한 불빛을 흘립니다. 서늘하고 견고한,
물소리, 바람 소리, 아침 햇발이나
융단처럼 부드러운 시 한 편을 빚고 있는……


먼 섬


거룻배 한 척
저만큼 흔들리고 있다.
바람은 오늘도 닳아버린 말들을
토해내고, 갯바위에
이마를 부닥치기도 하고……

섬은 멀었다. 언제나
꿈속에 야트막하게 떠 있는
그곳엔 늘푸른나무들이 자라고
꽃들은 서로 가슴을 비볐다.
마음을 드높이, 사랑만 숨을 쉬는……

낮달이 하얗게 돛폭에 걸리어
소리질렀다. 부활절 아침에
하얀 피를 끌어안고 할딱이는
누이의 하늘, 누이의 애달픈
꿈속의 섬에 글씨를 썼다.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하지만 내가 쓴 글씨는 자꾸만 지워지고
목소리는 입 언저리에 말라붙었다.
누이의 신음 소리는 바람에
하얗게 흩어져갔다.

멀리, 흔들릴수록 눈은
더 멀리, 라고 누가
등뒤에서 속삭였다. 닿을 듯 닿을 듯
아득한 섬을 향하여 까치발을 디뎠다.
오직 먼지 바람 부는 이 지상에서
누이의 하얀 하늘을 아파하며, 노를 저으며……


나의 섬

섬을 하나 빚는다. 아무도 모르게
내 마음속 깊이,

푸른 물 아득히 두르고
싱싱한 숲길이 기지개를 켠다.

끼룩끼룩, 푸른 물감이 번지는
하늘 저편으로 이따금
갈매기들 날아오르고

거룻배 한 척, 밀리어오면
나의 기다림에도
환하게 꽃잎이 벙근다.

우리는 뜨락에 앉아
별들이 이마를 비출 때까지
잘 익은 술을 마시며

가슴을 열어젖힌다. 푸른 공기, 푸른
꿈을 엮어서 지붕을 만들고
방을 만든다.

잠속에서는 그래도 못다 이룬
꿈들 불러모아
탑을 만든다. 그 눈부신 언저리……

이승에서는 언제까지나 가 닿을 수 없는
멀고 먼 마을. 이윽고 그곳에 당도해서
푸르게 숨을 쉬던 나는

다시 나의 섬이 차츰씩 가라앉고 있음을
눈을 비비며 바라본다.

이곳에선 다만 하나의 티끌, 하나의
상처인 나를 눈을 감으며 바라본다.


나의 슬픔에게


나의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불을 켜서
오래 꺼지지 않도록
유리벽 안에 아슬하게 매달아주고 싶다.
나의 슬픔은 언제나
늪에서 허우적이는 한 마리 벌레이기 때문에,
캄캄한 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거나
아득하게 흔들리는 희망이기 때문에.

빈 가슴으로 떠돌며
부질없이 주먹도 쥐어보지만
손끝에 흐트러지는 바람 소리,
바람 소리로 흐르는 오늘도
돌아서서 오는 길엔 그토록
섭섭하던 달빛, 별빛.

띄엄띄엄 밤하늘 아래 고개 조아리는
나의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 불을 켜서
희미한 기억 속의 창을 열며
하나의 촛불로 타오르고 싶다.
제 몸마저 남김없이 태우는
그 불빛으로
나는 나의 슬픔에게
환한 꿈을 끼얹어주고 싶다.



詩, 조그맣고 아름다운


산길을 걷는다. 따스한 시 한 편을 만났으면……
안개를 밀며 나직한 목소리로
새들이 지저귄다.
바람은 서늘한 물소리에 실리고
흩날리는 나뭇잎.
물소리에 가만히 귀기울이면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다가온다…… 멀어진다……
흔들린다…… 머리칼 날리며 바람은 또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문득 상수리나무들이 가지를 흔든다.
뿌리에 힘을 모으며, 남은 햇살을 끌어안으며……

산길을 오른다.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찾아,
풀죽어 뿌옇게 흩어져 있는 내 발자국들을 찾아
더욱더 어두워질 때까지……
날개 상한 내 마음은
서산 가장귀, 어둡게 흐르는
개여울에 버려져 있다. 실눈을 뜨고
쓸리는 들풀들과 이마를 비비며.
아아, 오늘은
이름 모를 풀꽃보다도 조그맣게 흔들리며
따스하게 물이 오른 시 한 편을,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잡힐 듯 잡힐 듯 아득한
그런 시 한 편을 낳았으면……
아주 조그맣고 아름다운,


어느 여름날


그가 켜는 첼로의 저음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가끔 피라미들이 뛰어오르고
돌부리를 스치는 물소리가 아련했다.
그는 더욱 아래로 내려서며
깊은 소리를 끌어올렸다.
물풀들이 흐느적거리고 나뭇잎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한참 뒤에

그는 차츰 높은 음자리를
더듬어 올라갔다.
신발을 벗어들고 나는 뛰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구름들이 서둘러 어디론가 떠가고
첼로의 목청은 떨리고 있었다. 더 높이 높이……
나무들은 몸을 비틀고
한차례 마른 번개가 번뜩였다.
물가의 돌멩이들도 후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망아지가 뜁니다


망아지가 뜁니다. 안개 걷히고
내 마음속 야트막한 언덕에는
달리는 풀밭, 그 사이로 낮게 구르는
개울물 소리…… 물 속엔
보석 상자 또는 돌멩이 하나.

망아지가 뜁니다.
간밤의 무거운 꿈 밖으로 걸어나와
날 것만 같이 푸른 숲, 풋내를 가르며
막 뛰어내리는 햇살
을 껴입으며 저 먼 하늘 트인 곳으로……

망아지가 뜁니다. 잃어버린 말들을 찾아
말들이 피워올리는 푸른 불빛,
푸른 공기를 들이켜며 거짓말같이.
언덕 위엔 구름도 한가로이 안아올리는
보석 상자 또는 돌멩이 하나.



낮달에 가린 별 하나 찾아나서듯


낮달에 가린 별 하나 찾아나서듯
그런 아픔과 목마름으로,
마을을 지나 다시 마을로.
말을 안고, 말들이 밝혀주는 오솔길로.
걸어서 가리. 걷고 걷다가 불빛이 흐려도
이 조그마한 등에 불을 지피고, 심지를 돋우고
기다리고 기다리리. 바람 불거나
눈보라 흩날릴 때
작아지고 작아지는 그대를
이 떨리는 손과 가슴으로
껴안아주리. 지워도 짙어지는 어둠을,
살을 에이는 추위를, 부둥켜안으며
벌판을 지나 벌판으로. 절며 절며
말을 안고, 말들이 밝혀주는 오솔길로,
걸어서 가리. 작아지고 작아지는 그대를 위하여……
낮달에 가린 별 하나 찾아나서듯
그런 아픔과 목마름으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다시 마을로.



나는 다만 하나의 모래알로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린다.
칠흑의 바다에 떠 있는
한 점
섬의 불빛, 또는 조각배.
나는 다만
하나의 모래알로 뒤채인다.
문득 누가
우주의 저켠으로 뛰어내리고 있는지,
성급한 유성이 하나
따라가고 있다. 끝간데 없이,
바람 불고 파도가 거칠어져도
나는 다만
하나의 모래알로 뒹굴며
꿈을 꾸고 있다. 가혹하게
피 속에 불을 지피고 있다.



나의 새는 이윽고


어디로 갔다 왔는지,
나의 새는
부리가 하얗다. 발톱이 파랗다.
땅거미 지는 이 지상에서,
사시사철
먼지 바람 부는 이 마을에서,
닳고 닳은 내 마음에
나의 새는 이윽고
비릿한 날개를 퍼득이고 있다.
옥빛 하늘 깊숙이
날아오르고 있다.



어두운 마음 벗어 하늘에 걸고


어두운 마음 벗어 하늘에 걸고
아직 남은 마음에는
조그맣게
울타리 없는 집 한 채 짓고,
이제야 겨우겨우 길이 보인다.
빈손으로도 가슴이 차오르는,
안 보이는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이
어깨를 두드려주는……



기다림을 위하여 1


부활, 이라고 적어본다.
강가에 앉아
여뀌풀물을 먹고 눈이 뒤집힌
물고기들과 함께,
물을 먹고 둥둥 떠 있는
물 위의
내 마음 오랜 그늘들과 함께.

마을 어귀에는 꽃 상여가 지나가고
처마가 낮은 강 건너 조그마한 집엔
막 태어나는 아기의 울음 소리.
하늘이 낮게 내려앉는 동안
강물은 가끔씩 일어서고
이 고장난 시대의 물살에
시든 물풀들, 그냥 흔들리고만 있다.



기다림을 위하여 2


밤이 깊다. 나는 이 언덕에서, 흔들리는
저 언덕의 불빛을 향해 팔을 뻗는다.
머리엔 언제나 물먹은 솜뭉치,
솜털보다 희디흰 갈증.
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며칠째

뒤채이는 바다, 부서지는 파도.
물거품 사이로는 문득문득
번뜩이는 몇 마디의 말, 아득히 떠 있는
한 점…… 섬…… 빈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바람은 거칠어지고

하나의 나뭇잎처럼 허공에 매달려 떤다.
상처 입으며, 입 언저리를 맴돌거나
입 안에서 녹아버리는 말…… 말들…… 언제까지나
가 닿을 수 없는 불빛을 향해,
다만 물거품과 함께,

돌아오지 않는 별이나 기다리고
잠 흔들어 깨어나려 하건만, 캄캄한
하늘, 부서지는 파도 위를
낮게 날으는 새들,
새들은 뼛물 말리며 오늘밤도

내 마음 깊은 골짜기에 무덤을 파고 있다.
먼지 바람 흩어지는 이 황량한 언덕에서
버려진 돌멩이처럼, 엎드려, 꿈꾼다.
저 언덕의 불빛, 밤이 깊을수록 점점 더
목마른, 별들을. 오랜 기다림의 말들을……



기다림을 위하여 3


다시 밤이 깊다.
해질 무렵 길을 떠난 나의 말들은
지금, 어느 먼지 바람 속을 헤매고 있는지,
어느 물거품 위에 부서지고 있는지……

별들은 저리도 흩어져 앉아 손 내밀고 있건만
나를 떠난 말들은 신발이 닳고 닳아
발바닥이 해지지나 않았는지…… 내 가슴에
손 흔들며 돌아와

불을 지펴줄 것만 같은, 이마에
불을 달아줄 것만 같은
말들은 어디쯤 걸어가고 있는지.
미리내에 떠 있는 낯선 별 하나

이토록 가혹할 줄이야,
눈시울 밝혀 적셔줄 줄이야……
눈썹달 나뭇가지에 걸겨 몸살을 앓고
내가 켜든 촛불은 이내 꺼져버리고
한밤, 남몰래 벙그는 꽃들의 몸짓,
퍼득이며 태어나는 말들……
그 언저리에 앉아 퀭한 눈 비비며
기다리는 내 마음아, 허공에서
땅 위에서, 물 위나 물 아래서 불 지피는,
불이 붙은 내 마음아.


기다림을 위하여 4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인다.
며칠째 구겨져 더듬더듬
팔을 뻗었다. 머릿속에는 비 내리는 필름,
희미한 자막,
이따금 들풀 몇 포기가 새로 돋는 것도 보인다.

누가 이 대낮에
촛불을 밝히고 있는지, 이 먼지 바람 속에서 누가
푸른 이마를 쓸어올리며 내 마음 갈피에
기름을 부어주고 있는지,
안 보이던 길이 문득 마을 쪽으로 열리고
그 길을 저만큼 가는 사람의 등뒤엔
햇살이 퍼득이고 있다.

눈을 떠보면 강가에는
돌부리에 부딪치며
흐르는 물소리, 퉁퉁 부어 드러눕는 말들.
자꾸만 떠내려가는 내 모습도
얼비치곤 했다. 희미한 옛
꿈의 가장자리에 가 닿아본다.
어지러운 필름의 자막 사이로 한 줄기
낯선 빛이 흐르고 있다.

한 눈만 다시 감아본다.
가슴 저 깊고 황량한 곳에서
들풀 몇 포기, 풋풋한 잎새들을 흔든다.
이제 한 눈은 뜨고 꿈꾸어야지, 꿈나라까지 가서
푸른 크레용을 칠하고 돌아와야지.

속절없이 흔들거리는 이 세월의 뒤안길에서
구겨진 마음 뒤집어 다림질하며
조그마한 촛불 하나 켜들고
두 눈을 떠야 더 잘 보일 때까지,
큰 눈을 떠야 세상이 바로 보일 때까지.



기다림을 위하여 5


무거운 내 마음아, 허물 벗으며 내일은
동해의 구룡포나 대보,
그 언저리의 모래밭에서 발목을 조금 풀고
하늘 한번 올려다볼 수 있었으면.
불볓 뒤집어쓰고
얼음물 한 사발 단숨에 들이켜고
멀리서 뒤채며 다가오는 파도를
타고 다닐 수 있었으면.
꿈에서 가끔 만난 그런 조그마한 섬까지
첨벙첨벙 헤엄쳐가서
그곳의 낯선 돌멩이들과 입맞추고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한 그루
해송처럼 서서
푸른 공기 그윽이 마실 수 있었으면.
눈물겨운 이 지상에서
나를 비끄러매고 있는 모든 끈들을 벗고
가위 누르는, 안 보이는 어깨들도 잊어버리고
잠시라도, 정말 잠시라도 갈매기처럼
날아올라봤으면. 자유의
목마름 가득히 푸른 물 끼얹으며
내 마음 깊고 어두운 골짜기의 그늘들 죄다
떨구어버리고
당당하게 소리쳐 울기라도 해봤으면.
어제도 오늘도 그저 끝간데 없이
바람에 떠밀려 떠돌며, 제 얼굴을 잃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부황이 들어
뒤채는 내 마음아, 으으으 신음만 되씹는
가혹한 내 마음아.


기다림을 위하여 6


나팔꽃 필 때 부스스 눈 비비며
기지개 켜는 자귀나무와 같이,
흐린 날에는
아침이 온 지 한참 뒤에도
잎을 마주 접고 곤하게 잠자는
자귀나무의 밤 아닌 밤과도 같이,
그런 날들은 간다. 오늘도 내일도
꿈속에서 팔을 뻗고 몸을 비트는
그런 세월은 간다.

여름 한낮
불볕 뛰어내리고
시멘트 숲이 흐느적거리고 있을 때,
그 숲속에 허수아비들 이마 부닥치며
잠 아닌 잠에 젖고 있을 때, 솨솨솨
뜨락에서 제 혼자 바람을 빚고 있는
자귀나무들. 잔 바람에도
물결을 가르며 그늘을 드리우는……

저녁놀 서녘을 물들이고
새들이 둥지를 찾을 무렵
서로 몸을 마주 접고 입술 비비고
깊이깊이 꿈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자귀나무의 어김없는 밤과도 같이,
흐린 날에도 새 날개의 깃털 같은 자귀나무 잎들이
"밤이야, 이젠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지."
부드럽게 이르며
마주 끌어안고 잠자듯이,

언제나 성내지 않고 욕망은 눌러앉히고
이 먼지 바람 부는 세상에서
명주실 같은 고운 꽃술로 자귀나무는
옅은 듯 달콤한 향기를 한밤내 풍기며
오직 평화를 부르듯이,
자귀나무 그윽한 마음처럼 때로는
그런 날들을 기다린다. 여름 한낮에는 솨솨솨
불볓을 밀며 바람을 빚어내는,
또는 밤마다 꿈속에서 팔을 뻗고 몸을 비트는
이 가혹한 세월을 위하여.


기다림을 위하여 7


시계는 바보, 멈출 줄도 모르는
강물은 바보. 하릴없이 강가에 서서
시계 바늘을 들여다본다.

흙탕물이 흘러가고 악다구니로 거슬러오르는
쏘가리 한 마리. 제자리에서 바둥거리는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

시계는 바보, 거슬러오를 줄도 모르는
강물은 바보. 내 머릿속은
물먹은 솜뭉치, 터질 것만 같은 풍선,
녹슨 놋쇠 조각과 되다 만 몇 마디의 말……

요즈음은 시가 씌어지지 않는다. 가느다란 꿈마저
지워지고 있다. 흙탕물에 휩쓸리어, 오랜
안개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는다. 보고 싶다.
말을 잃어버리고
말의 홍수에 둥둥 떠 흔들린다.

정지된 시간, 무중력의
시간, 잊어버리고 싶은 바람 소리, 별이 잘
안 보인다. 악다구니로 버티고 싶은 세월,
한반도의 그늘의 오늘……

시계는 바보, 비정하게 가고만 있는
강물은 바보. 한 많은 강가에 서서
시계 바늘을 들여다본다.



기다림을 위하여 8


해는 저물고
밤이 나직하게 게워내는 중얼거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저만큼서
누가 촛불을 켜고 있는지,
시름에 젖어
제 살이나 뜯다가 고개를 들며
먼눈을 뜨고 있는지,
내가 마시다 남은 물 대접의
물 무늬 위에 문득
낯선 별이 하나 떠오르고 있다.
밤의 옷자락, 그 어른대는 주름 사이로
나의 신음 소리 또한 지워질 듯
희미하게 헤엄쳐가고 있다.
맙소사. 맙소사.
바람 부는데 잠은 멀고
나는 언제나 어둠 속을 서성거리며
별을 꿈꾸며, 아침을 기다리며.


기다림을 위하여 9


밤비를 맞으며 뜨락에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무너질 것 같았다.
바람은 제멋대로 불고
이따금 강물이 거꾸로 흐르며
주먹을 내밀곤 했다.
하지만 눈 내리거나 우박이 쏟아지고 있을 때,
천둥을 안고 밤이 오랫동안
우리 마을 아파트 옥상에서 뒤채다가
지쳐 눕고 있을 때도
소나무 한 그루, 아랑곳하지 않고
서 있었다.
푸른 침을 달고 눈은 푸르게 뜨고
우리의 무너질 것 같은 하늘,
제멋대로 부는 바람을
푸르게 흔들어 깨우곤 했다.
오오, 나의 하염없는 기다림 위에
청솔 가지를 하나 둘 끼얹어주기도 했다.




눈 위에 눈이 내리고


눈 위에 눈이 내린다.
이제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다.
물에 물을 붓듯이 상처에
상처가 깊어진다.
누가 아프다, 아프다고 소리지른다.
하지만
그는 어디가 아픈지는 알지 못한다.
숨을 잠시 멈췄다 깊숙이 빨아들인다.
눈 위에 눈이 내리고
병든 시대에 병든 세월이
자꾸만 드러눕는다.



뭘 한다고, 마음이여


뭘 한다고 마음이여, 해종일
보이지도 않는 집을 짓고 허물고,
두 팔 내린 허수아비 되어
눈을 뜨고 있는지……
먼 하늘 뜬구름에 눈을 주고
어깨로만 흐느끼고, 담배 연기나 흘리고,
마른 땅에 들풀을 심어
그와 함께 자라고 있는지,
퍼득이고 있는지…… 바람에 나부끼며
푸르러졌다 시들었다, 흐렸다
개었다, 비 내리고
비안개 밀려오는 벌판에서
뿌리째 으깨어지며
한숨 푹푹 쉬고…… 마음이여,
뭘 한다고 한밤내 뒤척이며
닳아버린 말들을 안고
뒹굴고 있는지.
지글지글 타오르며 걸어가다,
멈춰섰다, 땅 위에 엎드렸다,
하늘로 오르고……
뭘 한다고 마음이여, 날이 새도록
보이지도 않는 집을 짓고 허물고……


그해의 봄은


그해의 봄은 더디게 왔다.
다리를 절며, 고향 뒷산의
진달래가 울컥울컥
소나무 사이를 뒤덮고 난 뒤에도
소쩍새의 울음 저켠에서 서성거렸다.

도회의 봄기운은
매연을 뒤집어쓰고, 지하도를 지나,
목발에 몸을 실은 채 가끔
창유리를 두드렸다. 어떤 때는
육교의 가파른 계단을 뒤뚱거리며
시멘트 벽에다 객혈하는가 하면,

우리집 뜨락에 당도해서야
간신히 깁스를 풀고
어깨 위의 먼지를 떨구어내기도 했다.
날이면 날마다
거리에는 우중충한 얼굴의 사나이들이
닳은 구두 뒤축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봄은 끝끝내 꼽추처럼
허리를 오그리고 서 있었다.

바람결에는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의……
와도 오지 않은 봄의 변두리에서
나는 고장난 자동차의
액셀 페달을 밟고 또 밟았다.
오오, 이 기다림의 부질없음.
거꾸로 도는 피소리.



절망, 또는 비구상


내려간다. 더 내려갈 데가 없을 때까지
낮게, 허리를 구부리고.
이제는
그가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그의 발자국 소리는 지하도를 울리다가
풍선처럼 가볍게 떠오른다.
나는 땅바닥에 엎드린다. 엎드려서 보면
거짓말처럼, 그의 발바닥이
송신탑 피뢰침 끝에 걸려 있다.
나는 주눅이 든 채 그의 뒤꿈치에 매달려
가물거린다. 흔들리는 불빛……

지금은 기억의 저 끝에 그림자를 드리운
자정의 사이렌 소리.
지금도 발바닥에 박혀 있는 티눈, 또는
꿈속의 하늘.
그가 허연 이빨을 드러낸다. 냉소를 머금고
그가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저으기 내려다본다. 또 한 차례
흔들리는 불빛…… 나는 어둠 속에 묻히고 있다.
내려간다. 자꾸자꾸
낮게 허리를 구부린다. 하지만
그는 나보다 더욱 낮게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다. 바람이 한 박자 더 빠르게
달려온다.
그는 이윽고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흔들리는 불빛……
그의 발자국 소리는 내 귓속에 갇힌다.
나는 풍선을 하나 날리며 내려간다.
더 내려갈 데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그는 비만증으로
오래오래 몸을 뒤채고 있다.



이젠 꿈을 뒤집어 꾸는 게 편하다


이젠 꿈을 뒤집어 꾸는 게
편하다. 찬물을 한 사발 들이켜고
돌아누워도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 나를
저 물 없는 들판으로 몰아세우는
먼지 바람 소리, 창 너머 새벽 하늘에는
내가 오래 안고 뒹굴던 별이 하나
저토록 가혹하게 흔들리고 있다.
눈을 비비며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멍들고 있다. 다시 일어나 앉아
담뱃불을 끄지 않고
그러나 쉽게 흔들리지는 않기로 하고
별빛을 본다. 분명히
그 속에는 잠들지 않는
불씨가 하나 아른대고 있다. 새벽을 건너며
비수를 갈고 있는
한 사나이의 뒷모습이 자꾸만 더
커 보인다.
말하지 않으리라. 날이 밝을 때까지
말을 삼키며 말을 부둥켜안으며
말없음의 말이 아프게 일어서고 있다.
밤은 나의 잠을 천장에 매어달고
점점 가까이 들리는 바람 소리.
이젠 정말
꿈을 뒤집어 꾸는 게 편하다.
돌렸던 마음 돌려세우며
빈 사발에 찬물을 가득가득 채우고,
다 마셔버리고
별빛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면
자꾸만 작은 것들이 더 커 보이고,
그칠 줄 모르는 이 먼지 바람 소리 위에 뜨는
또 하나의 나의 별, 나의 별빛.



더 내려갈 데가 안 보인다


머리카락이 자꾸 빠진다. 빗질을 하면
비듬이 떨어진다. 하나 둘 셋 넷…… 나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이젠
더 내려갈 데가 안 보인다.

점퍼와 만났다.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그는 오른손을 가끔 뒤통수로 보내며
긁적거렸다. 제기랄,
그는 나의 동향을 살피게 됐다고 터놓는다.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저…… 저…… 이젠
그만 손을 떼시지요. 그는
손을 떼겠다고만 적으라고 한다.
하품이 나오려고 한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창밖엔 늦가을 비가 남은 나뭇잎을 흔든다.
나는 떼어야 할 손이 무엇인지 의아해한다.
요주의 인물이라니, 내가
운동하는 손을 가졌다니…… 마옵서.

그가 볼펜을 쥐어준다. 아무래도 난처하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셔도 더는
견딜 수가 없다. 더는 내려갈 데가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피가 거꾸로 돌고 있다.



비 밀


말할 수 없으므로 아름다운
너는 빛난다.
누워 있거나 길을 걷고 있을 때
길을 걷다가 신발이 무겁거나 하늘이 푸르고
비 내리거나 문득 비 갠 뒤
나무들이 싱싱하게 몸을 흔들고 있을 때
놀 속으로 새떼들 날고 어둠은 밀려
잠이 먼 밤, 창가로
초승달 가만히 다가오고 있을 때
홀로 술에 젖거나 숙취의 새벽
몇 그릇씩 찬물을 들이켜고, 맹물처럼
머리를 비우고 있을 때
무거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주전자의 물은 끓고 가슴은 식어
구겨졌다 펴졌다 구겨져
커피나 마시고 있을 때
강가에 앉아 물고기들과 헤엄치고 물 먹고
바람 불어 이리저리 떠내려가고 있을 때
눈발 흩어지고 또다시
종이 위에 엎드리거나
가혹한 꿈속에서 목이 마를 때
내가 택한 외진 오솔길에서나
붐비는 거리에서
헌 신발짝처럼 버려지고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 연기나 흘리고
까치발을 딛고…… 금싸라기처럼
흩날리거나 고개를 드는, 건드리면
하얗게 부서져버릴 것만 같은,
언제 어디서나 너는 진주와도 같이
말할 수 없으므로 아득하게 빛을 뿌리며,
내 마음 빈 골짜기에
촛불 하나 켜고, 이토록 폭풍을 잠재워 안고……


나는 여기 서 있고


고목이 쓰러지고
풀잎은 푸르고
그가 떠나던 날 옆집에선
강아지가 태어나고 새 신발을 갈아신다가
마음 바뀐 친구의 얼굴이 스쳐가고 침침한
눈을 뜨며 뜨락의 돌멩이 하나,
며칠 전 끌어안던 물소리도 떠올려보고
마음은 꼭 붙들기로 하고
밤 열두시 이 분 전, 일 분 전……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달아나는 시간의 발자국을 쫓아가다 넘어지고
가슴 죄고 어둡고, 친구는 비웃고
앞집 젊은 미망인의 미닫이 닫는 소리.
불현듯 나갔던 전기가 다시 오고, 창밖엔
바람이 서성거리고 방안을 기웃거리다가
창유리를 두드리고, 별이 뜨고
외출에서 오래 돌아오지 않는 희망에게, 그 뒷모습에
쓸쓸히 웃음을 끼얹고 아침을 기다리고
소나무는 언제나 푸르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손바닥 뒤집듯 허공에 여기저기 뿌리내리는
말과 말 사이,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까마득히 말들이 썩어가고
주저앉아 한숨 흘리는 이 세월의 가슴팍엔
종이꽃들이 피어나고 개울물은 돌부리에 부서지고
느닷없는 총소리, 하늘은 잠시만 찌푸리고
누가 울고 저켠에선 누가 웃음을 깨물고,
탕탕탕…… 강물이 술렁이고
지난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고 이 가을은
너무나 가혹하고, 겨울이 음험하게 걸어오고
봄은 멀고 구름은 흐르고…… 나는 여기 서 있고.



세월에게


불이 붙어 빈 들판을 헤매고
풀숲에 웅쿠리고 앉아 기침을 하고
마음이여, 비워도 비워도 차오르는 이 눈물.
저녁 늦게 돌아와 마주치는
낯선 처마 밑, 가느다란 연기를 게워내는 굴뚝,
언제나 연기처럼 낮게 깔리는
이것은 무엇인가.
무거운 신발을 끌고 어깨를 떨어뜨리고
구겨지는 세월. 그저 흔들리듯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바람. 구름은 떠가고
강가에 엎드려 흩어지는 마음이여,
길은 어두운데 이 밤도
어느 하늘, 어느 땅에 뿌리내리려
또 목을 태워야 하는지…… 마냥 불이 붙어
빈 하늘 언저리를 떠올아야만 하는지……
꿈은 꿈으로만 저만큼 빛나고, 오직
하늘의 별, 물 위의 별일 뿐.
허공에 손 저으며 마음이여,
자꾸만 어디로 흔들리며
가기는 가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



쑥불을 지피며


쑥불을 지피며
무심히 올려다본 밤하늘,
미리내를 건너며
오래 잊었던 별들과 눈 맞추고
눈 맞은 별과
되도록 오래오래 포옹을 하고,

밤이 깊어도
잠들 줄 모르는 모기들과 씨름을 하며,
타는 듯 마는 듯 연기를 게워내는
쑥불을 지피며
모기와 나의 관계를 생각해보기도 하고,

눈물겨워라. 뒤돌아보면
내 모든 발자국은 지우고 싶고
지워도 지워도 되살아나고 있는데,
모기들은 소리지르며 저만큼 물러나고
나는 졸음겨운 별들과 잠을 부르며
쑥 향기에 발까지 담그고……


유리알의 詩


느닷없이 불쑥 주먹이 나오는,
목에 핏대가 서거나 풍선처럼 부푼,
사실은 '잘 봐주시오'가 짙은 화장을 한
그런 시는 말고.
기괴한 몸짓, 옷차림이 야단스러운,
자신도 돌아서서는
끌어안을 수 없이 뻑뻑한
그런 목소리는 말고.
깃발만 높고, 자세히 보면 빈 수레의
바퀴 구르는 소리보다도 시끄러운
어깨의 시는 말고, 야한 시는 말고
부드러운 힘 안으로 안으며 무르익어
건드리면 부서질 듯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알 같은 시, 결코
구부러지지 않는 그런 시를,
빈 듯 그득하고 속이 차서 터질 것만 같은……
곡식과 양념을 곳간 가득 채우고
심지가 바로 박힌 그런 말들의 마을,
그 한가운데서
눈보라 뒤집어쓰고도 중심을 잡고 있는,
일회용 반창고가 아니라 밤하늘의 별,
개울에 흘러가는 물소리 같은 시를,
이 땅에 뿌리내리고
하늘로 발돋움하는,
어둠이 아니라 어두울수록 더욱 영롱한,
마음 가난한 이웃과 서러운
내 누이의 창에
조그마한 촛불이 되어주는 시, 그런
시 한 편을 쓸 수 있었으면.
들꽃처럼 호젓이 학처럼 고고하게,
하지만 다정하고 낮게 스며드는,
없어도 그만, 있으면 한없이 그윽한 시를
쓸 수만 있다면…… 발바닥까지
하늘로 밀어올려주는,
어둠을 흔들어 깨우며 불빛이 되는,
이윽고는
나의 따뜻한 무덤이 되어줄 그런 시 한 편을
빚을 수만 있다면, 유리알의 시를……


또 하루 해는 지고


또 하루 해는 지고
그는 풀어져 걷는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 빛깔의 옷을 입고, 같은 무늬의
시름을 주머니에 구겨넣고
걸어간다. 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손을 잡으며, 오직 홀로, 섬에서, 눈을 뜬다.
술에 젖으면 아득해지고
아득한 마음이 더욱 아득해져서
거리에서 꿈길로, 꿈길에서 집으로,
빗장을 걸고 이불 속으로……
술을 끊기로 한다. 안 끊기로 한다. 술잔 속에는
길이 있어 문득 하늘로 트인다. 그러나
눈을 들어 보면 길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고…… 멀리 가까이, 그의
섬에는 동백꽃, 빨간 꽃잎이 탄다.
비비새와 함께 그는
빈 나무의 얼음꽃 사이를 빗겨 날은다.
천장엔 엉키는 사방연속무늬,
그리고 빈 술잔 하나.



예 감


마음이여, 이제는 어디로 갈까.
저녁밥을 먹고
숭늉도 한 대접 마시고 느긋하게
집을 나서면
강물도 조금은 풀어져 흐르고 있다.
어둠에 길든 내 더듬이가 향하는 곳은
여전히 조금씩 흐트러져 있지만
마음이여, 오늘밤엔
뭔가 실마리가 풀릴 것만 같다.
어디에도, 어디로도 열려 있으므로
흐르고 흔들리던 길이
한 가닥 보일 것만 같다.
나 머무는 이 별자리에서
또 다른 별을 꿈꾸며 마음이여,
그 빛들 한 다발씩 묶어
가슴 깊이 다져넣는 지금은
뭔가 실마리가 풀릴 것만 같다.
신발이 아주아주 가벼워질 것만 같다.



불현듯 그는


비가 쏟아지고
그는 이윽고 천둥과 함께
오고 있다. 나뭇가지에 머물다가
번개와 같이 오고 있다. 나는
팔을 벌려 그를 껴안았다.
껴안아도 껴안아도
아득한 거리.

강의 저쪽엔
희미한 불빛이 하나
흔들리고 있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팔을 뻗으면 불현듯
그는 저만큼
천둥과 함께 가고 있다.
번개와 같이 가고 있다.



그는 대체 누구일까


비 갠 뒤의 풀잎처럼 퍼득이는
햇발처럼 풋풋한 그는 이따금
알몸으로 뛰어내린다.

맑다 못해 퍼렇게 멍든
물 속에 첨벙
발을 담그기도 하고,

숲속으로 흘러가는 물소리
자욱이 드리우고
갈지자로 걸어가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두운 술잔을 기울이다가
술잔에 비치는 그의 얼굴을 발견하고
소스라쳐 놀라는가 하면,

세상 모르고 잠자는 아기의 꿈속에
푸른 물감 풀어 이기는 그를
멀건 눈으로 들여다보기도 한다.

대체 그는 누구일까. 안 보일 듯 보이고
보이다간 문득 모습을 감추곤 한다.
가끔 옥빛 하늘 깊숙이 날아오르고

닿는 곳마다 싱싱한 바람을 일으키는
그는 대체 누구일까. 비 갠 뒤의
풀잎처럼 퍼득이는 햇발처럼 풋풋한 그는……



꿈, 부질없는 꿈


그가 다시 내게로 왔다.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촛불 하나 밝혀들고
이슬처럼 다가왔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
알레그로로 흐르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고
물소리 사이로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랫소리가 섞여 흘렀다.

꽃들이 자지러질 듯 피어올라
하늘거리는가 하면
나는 더욱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속삭였다.

이젠 죽어도 좋아, 정말 나는
끝까지 가 있어도 좋아, 라고
소리질렀다. 하지만
제 소리에 소스라쳐 눈을 떠보니
창유리엔 어둠만이
겹겹이 일렁이고 있었다.

꿈, 부질없는 꿈.



어떤 실종


그를 찾아 떠돌았다.
어깨를 떨어뜨리고 거리에서
거리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에서 구름으로.
어제는 강물을 따라가다가 언덕에 오르고
언덕에서 다시 산으로 올랐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집 안방에도, 베란다에도,
쓰레기통에도, 아내의
비밀 서랍 속에도 없었다.
대체 그는
어디서 글썽이고 있는지,
책갈피에 숨어 있는지, 부엌의
가스 레인지 밑에 엎드려 있는지. 또는
주눅이 들어
기어다니고 있는지, 숲을 헤쳐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소문에는
죽었다고도 하고, 바람이 나서
어디론가 잠적했다고도 하지만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일까.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져버린 것일까.
오늘도 동해의 푸른 파도는
바위섬에 와서 부딪고,
바람은 손잡이를 놓고
머리카락 풀어헤치며 달리고 있다.
내 마음아, 오래오래 목을 놓아
울고 싶은 내 마음아,
낮은 굴뚝들은 이 저녁에도 어김없이
가느다란 연기를 흘리고 있는데,
끝끝내 그는 안 보이고
하늘에는 가득히
허기꽃들만 흐드러져 있다.



에디트 피아프


뼈가 아프다. 흐린 배경을 거느리고
은밀하게 젖어드는 목소리.
어둠을 흔들며 촛불이 하나
푸른빛을 흘리고 있다. 어둡지만 푸르게
심호흡을 한다.
내 마음 저 밑바닥에는
낯선 들풀들이 저희끼리 가슴을 끼얹고
중천에는 달무리가 걸리고 있다.
벌거벗은 채 나는
방바닥에 뒹굴고 있다. 마치 검푸른 파도처럼,

에디트 피아프.



이윽고 은장도 하나 내 손안에 들어


어둡다, 어둡다, 어둡다,
나의 방에는
부황든 말들, 길을 잃고
떠도는 말들.
어둡다. 어둡다. 어둡다.
눈을 감으면
이윽고 은장도 하나 내 손안에 들어
힘겹게 오솔길 한 가닥 흔들어 깨우고
말들이 하나 둘
퍼득이는 날개를 돋우어내고 있다.



東城路에서 3
---김기전의 춤 [세일 또 세일]


바람 불고, 이른 아침
뒤채는 쓰레기들.
백화점 쇼윈도에는 퀭한 눈을 뜬
마네킹들이 빈 거리의 미명을 들여다보고 있다.
어제도 온종일
옷을 입었다, 벗었다, 입었다.
한쪽 팔은 올리고 한쪽 팔은 삐었다.

아침나절, 햇발이 뛰어내리고
몸을 비틀기 시작하는 마네킹들,
거리에 흩날리는 쓰레기들과
꿈틀거리는 무수한 발자국들을 바라보고 있다.
상점들의 창유리에는
저희끼리 이마를 부닥치고 있는 먼지들과
하이힐 뒤축에 찍힌 하늘 몇 조각이
뭉개져 있다.

사람들이 붐비고
리어카의 확성기가 소리를 높이는 동안
가게들은 일제히 입을 벌렸다.
인파를 빨아들였다가 토해내며
---날아오르고 싶어요.
---꿈에도 퍼득이는 날개를 달아주고 싶어요.
정오도 지나고 어둠을 뒤집어쓸 때까지 사람들은
제각기 호주머니에 손을 구겨넣고,
욕망과 허무를 한 꾸러미씩 부둥켜안고
서성거리다 돌아간다.

세일, 세일, 세일……
백화점 쇼윈도, 마네킹들의 윙크도
시들해질 무렵
현란하게 부서지는 불빛 몇 가닥
어깨에 걸치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사람들. 사람들의 가슴은
텅텅 비어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동성로에는 무수한 발자국들이
먼눈을 뜬 채 앓아눕고 있다.


東城路에서 4


나를 비틀어, 쥐어짜도 물기가 비치지 않는
내 영혼을 비틀어.
밤이나 낮이나 딸꾹질하는
한반도여. 나를 비틀어,
(사람들은 왜 모두 우그러졌을까.)
달려도 달려도 쳇바퀴만 돌고
지난 세월의 그 희뿌연
안개와도 같이, 다람쥐와 함께,
허공에 글썽이는 세월이여. 문득
주저앉고 싶을 때,
주저앉아 하늘에 가슴 풀어 이기며
눈물 펑펑 쏟아버리고 싶어질 때
동성로여. 내 영혼을 비틀어, 더는 비틀어지지
않을 때까지, 비틀어, 한반도여.
(사람들은 왜 모두 적의에 차 있을까.)
밤이나 낮이나 딸꾹질하는
이 세월의 골목길에서 달려도 달려도
쳇바퀴만 돌 뿐,
나의 사정거리 안으로 영문도 모르는
새 한 마리 낮게 날으고,
나는 어느덧 영문도 모르는 총을 맞아
시멘트 바닥에 이마를 떨구고 있다.
그렇구나. 동성로여, 정말이로구나. 탕탕탕.
(사람들은 왜 모두 총을 쏘고 있을까.)



아직도 길은 안 보이고
---翠峰 선생께


아직도 길은 안 보이고
해종일 발목을 비끄러매고 있는
그림자에 끌리어다녔다. 동으로 서로
마을에서 마을로, 들판에서 허공으로……
눈길은 하늘에 주고
하늘의 옥빛 속으로 팔을 뻗어보았지만
흔들리기만 했다. 길은
여러 갈래로 달리는가 하면
불현듯 희미하게 쓸리곤 했다.
안경알을 닦고, 마음을 뒤집어보아도
그분은 뒷모습만 보였다.

보일 듯 말 듯 저만큼
걸어가시는 분,
산수도의 물소리 사이, 물소리보다도 푸른
소나무 잎새 위에
고고한 학으로 앉아 계시는 분,
분명 땅을 디디시고도 푸른 이마에
옥빛 하늘의 띠를 두르고 계시는 분,
눈을 감아야 가끔씩 가까이 다가오시어
부드럽게 어깨를 두드려주시는 분,
하지만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보면
옷자락 희디희게 펄럭이시며
저만큼 환하게 서 계시는 분.

해종일 그림자에 끌리어다니며
오늘도 이 먼지 바람 부는 세상에서
동으로 서로, 마을에서 마을로,
들판에서 허공으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안경알을 닦고, 마음을 뒤집어보아도
길은 안 보이고
옥빛 하늘은 먼데 목은 마르고……



이 쓸쓸한 힘으로


잠은 멀고 며칠째
술에 젖었다.
가만히 누워서도 이리저리 떠돌며
사람을 그리워했다.
세월은 몇 번이나
동성로 지하도를 오르내렸고,
사람들은 쉽게 쉽게
손바닥을 뒤집었으며
눈 깜짝하지 않고 얼굴을 바꾸는 동안
작아졌다, 커졌다, 고개나 저었다.
밤은 깊고
할 말은 잊어버리고
젖으면 젖을수록 젖지 않는
이 쓸쓸한 힘으로, 이 넉넉한 흔들림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술잔에는 별들이 떴다간 지고
망망한 바다의 거룻배처럼,
서러운 한반도의 소나무들처럼,
사람들 속에서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람이 더욱 그리울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가슴에는 몇 가닥 불빛을 달고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면서.



식은 밥을 먹으며


식은 밥을 먹으며 하늘 한번 쳐다보고
국물을 들이켜다 다시 땅을 내려다보고

달이 뜬다. 두 팔을 벌리면
어깨 너머로 미끄러지는 달무리.

꽃이 핀다. 두근대며 피어나는
꽃잎에 새겨진 한마디의 말, 그 아프게 환한 언저리.

사월이 오고 나무들 푸르러질 때
푸른 숲에 바람 푸르게 감기고

들판엔 떠돌이별 하나
얼굴 내밀고, 설레이며 물이 올라

초록빛으로 태어나는 말과 말 사이를 서성이며
몸살을 앓는……, 이 먼지 바람 부는 마을에서

국물을 들이켜다 땅에 눈을 박고
식은 밥을 먹으며 다시 말을 부르고,



해질 무렵


서성로를 서성거리며
해질 무렵, 서쪽으로 가는 구름을 본다.
풀어져 어깨를 늘어뜨린 가로수 잎새들은
안간힘으로 흔들리다 흩어지고 있다.

바람이 분다. 한 박자 높으게
시멘트벽을 스치며 가는 바람은
지난 가을, 되다 만 시 몇 행을
보도 블록 위에 흩뿌리다 간다.

한동안 나는 멍하게
구름에 마음을 끼얹는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땅거미 사이로는
비둘기 한 마리 발을 오그리며
바삐 날아가고 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나 둘 낯익은 창마다 불들이 켜지고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등뒤엔
남은 노을 자락이 펄럭이고 있다.

불이 붙는다. 메마른 내 마음 갈피마다
불이 붙어도 쓸쓸한
이 목숨의 잔물결, 목마름의 무늬.
서성로를 서성거리며 오늘도
가슴속엔 허드렛불만 타고, 말을 잃으면서.



산 길


소쩍새 울고
땅거미 사이로 지는 진달래,
진달래 꽃잎 먹고 걷던 산길의
산토끼 발자국.

많이도 걸었다. 나는 이 길을
발목이 쉬도록 서성이며
새로 돋는 풀들과 나뭇잎과 꽃들과
가슴을 대곤 했다. 그 시절엔 언제나
해진 신발을 신고서도 눈은 멀리
들었다. 머리엔 먼 먼 꿈의 빛나는
관 하나를 쓰고서.

아버지는 이 세상을 떠나고, 겨울도 가고
보릿고개를 넘을 때마다 어머니는
멀리 하늘을 보라고 했다.
(한숨을 삼키는 어머니,
노랗게 떠 있는 하늘과 허기)
그러나 눈을 감아야 비로소 하늘은 파랬다.
앞집 굴뚝이 게워내는 따뜻한 연기 때문에,
신발이 너무나 해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때로는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맹물을 마시고, 불현듯 찾아올 것만 같은
낯선 희망을 향하여 목을 내밀기도 했다.

물이 흐르고, 바람은 불어
오늘 다시 걷는 이 길은
꿈속 같다. 꿈속의 희미한 그림,
그림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나는
뜬구름을 가슴에 안고 있는
서늘한 물소리 같다.
산토끼도 보이지 않고
소쩍새만 그때의 그 울음을
울고 있다.
소나무 가지가 그때처럼 변함없이 흔들리고 있다.



오솔길을 걸으며



오솔길을 걸으며 오늘 하루
마음을 비우면
아득해라. 콧마루 시큰하게 밀리던 슬픔도
미움도 얼굴 씻고, 새옷 갈아입고
하늘로 둥둥 떠오르는 것을.
무겁던 마음 저토록
햇살에 미역감으며
날아오르고 있는 것을.
길가엔 키 작은 들풀들
저희끼리 손잡고 어깨를 비비고
얼굴 붉히는 꽃들은 바람 흔들어,
흔들리는 바람결에 가벼워진 내 마음은
은빛 날개를 파닥이고 있는 것을.
숲길 가득 번지는 풀 내음에 젖어
돌아돌아 걸으며 마음을 비우면
언제나 어디서나 꺼지지 않는 불꽃이 하나
내 이마에 환히 타오르고,
멧새 한 마리 제 집에 들어 알을 낳고,
가슴 저 깊이 막 태어나는 말 한마디.
오늘 하루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 가득차오르는
목숨의 이 불꽃,
뒤꿈치가 들썩거리는 내 말의 아득한
아득한 오솔길이 트이고…… 그 길을 걷는……



새해의 기도


밤새 흰눈이 몰래 내려
높낮이와 색깔이 서로 다른
지붕들 죄다 은빛으로 빛나듯이
이른 아침, 산수화 속의
빈 나뭇가지들도 환하게 밝히듯이
새해의 새 빛이여,
내려라, 내려라, 내려라.
너와 나 사이를 갈라놓은
밭두렁 논두렁을 덮고,
자주자주 딸꾹질하는 한반도의
서로운 허리춤을 하얗게 묻듯이
새해의 새 빛이여,
내려라, 내려라, 내려라.
망아지처럼 풋풋하게 달리며
권태와 무기력과 어둠과
모든 그림자를 지우며……
사전 속의 말들이 아니라
이미 빛 바랜
어제의 그 말들이 아니라,
막 태어나 퍼득이는 말들을
가슴 가득 채우며
내려라, 내려라, 내려라.
거리와 공장의 기계 소리와
마을과 들판, 바다와 산과
강물에, 사무실과 시장판에,
꿈에 날개를 단 내 이웃들의
가난한 가슴과 이마에도
내려라, 내려라, 내려라.



盆地葉信
---봄 소식



동촌 강가의 보트들이
새 단장을 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콧노래 부르며 걸어가는 젊은 연인들의
가벼운 구두코.
시멘트 숲 사이에서 겨우내 뿌리로,
뿌리로 힘을 모으던 목련나무 벗은 가지에
설레이는 첫 꽃망울.
몸살을 벗고, 앞산 안지랑골 한 노인이
어깨 너머 아지랑이를 살짝 얹은 채
국세청 앞 지하도 계단을 막 올라오고,
동성로 양장점 안 마네킹들도
연둣빛 드레스를 하늘거리고 있다.

지난 겨울은 길고 추웠다.
수돗물이 하루를 걸러야 힘없이 나오고
연탄 배달부 아저씨는
털모자를 깊이깊이 눌러썼다.
염매 시장 노점 할머니의
손은 부르텄으며
달성 공원 빈 벤치엔
바람도 저희끼리 이마를 부닥치다 가고,
나의 방엔 한밤내
풍란들이 발을 오그리곤 했다.

오늘은 봄이 오는 길목,
조금은 느슨하게
만평 로터리나 약전 골목, 또는 서문 시장으로
내의를 벗은 바람들이 나들이를 하고
수성 들판 양지바른 논둑 밑엔
꽃다지 씀바귀들,
원대동 미나리꽝의 미나리 새순들도
마주서서 맨가슴을 비비고 있다.
아파트의 창들은 반쯤씩 열리고,
중앙로를 미끄러져 가는 시내버스나
제3공단 높은 굴뚝 위의
하늘도 가만가만
고월의 고양이털과 상화의 오는 봄을
읊조리고 있다. 거리마다
가슴을 내민 사람들이 붐비고
뒷짐진 팔공산이
동대구역 쪽으로 다가오는 동안
반야월 과수원이나 만촌동 빈터에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돋아나는 새싹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파도 위에 금빛 깃을


동이 튼다. 미명을 가르며 일어서는 해,
동해는 더욱 먼 가슴을 열어젖힌다.
막 퍼득이는 햇발 사이로
풋풋하게 피어오르는 들풀들.
뜨락의 늘푸른나무 한 그루도 팔을 뻗는다.
추위에 움츠렸던 말, 우리들 뜨거운 말들도 이윽고
일어서는 파도 위에 금빛 깃을 치고
태평양까지, 얼어붙은 북극의 얼음집까지
다리는 야생의 말,
오오 눈부신,
우리의 가슴들은 하늘 높이
금싸라기의 말을 밀어올리고 있다.
오래오래 동해는 몸을 비틀고
미명을 젖히며 일어서는 해,
퍼득이는 햇발 사이로
싱싱하게 날아오르는 우리들의 꿈.
오늘 아침 늘푸른 나뭇가지 사이로
황금빛 파도가 부서진다.
황금빛 파도가 일어선다.



네 피는 하늘로 오르고


차창에 귀를 댄다.
네 피는 하늘로 오르고
달력의 아라비아 숫자가 또 하나
힘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어둠 저켠으로
영문도 모르는 새들은 포물선을 그리고,
눈 내리는 소리보다도 멀어지는
네 발자국 소리.
눈발 사이로는 희미하게 서 있는
나무들이 잉잉대며 울고 있다.
---오늘밤도 안녕.
나는 그저 맹물처럼 라디에터 속에서 식으며
마지막 아프게 타오르는
네 목숨의 올들을
이만큼서 바라보아야만 한다.
뜨겁게 얼어붙는 마음을
이렇게 부둥켜안고 있어야만 한다.
눈발은 차츰씩 굵어지고
얼굴 돌리며 나는, 잘 걸리지 않는
시동을 걸기 위해
초크를 당기고 키를 넣는다.
부르릉 부르릉.
흰눈도 자꾸만 검게 보인다.
헤드라이트를 켠다.
네 모습이 점점 더 크게 떠오른다.



상 처


밤이 깊어갈수록 상처가 깊어진다.
투명한 상처, 아무도
만져주지 못하는 상처.
---그러나 길을 찾아보세요. 길을 찾아……
숲속에는 바람도 곤하게 잠이 들고
잠 못 이루어 서성이는 나를 비웃는 듯
별들이 내려다보고 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정녕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마냥 밤을 지새는 풀벌레 울음을 따라
몸을 던지고, 지향도 없이 흔들리면서
상처의 뿌리를 들여다본다.
내가 만질 수도 없는
상처의 잎새들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길이 있을 거예요. 길이……

오오,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여.



물 위에 희미하게


내겐 손이 없다. 네 상처를 안아줄,
유리안나, 팔이 없다.
사랑은 방법이 아니다. 누군가가
그것은 그저 끼얹어주는 것이라고
손바닥에 못을 박기도 했지만
내겐 그런 가슴이 없다.
불은 꺼지고
지금은 어두운 밤, 귓전에는
갈피 잃은 바람 소리……
간밤 꿈에서 만난, 유리안나,
그 사나이처럼 오늘밤은 멀리서
물 위에 희미하게 글씨를 쓴다.
너와 네 이웃을 향해 가만히 걸으며,
너그러운 손과 팔과 가슴을
꿈꾸며, 자꾸만 이 정전의 시대에
글씨를 쓴다. 이내 지워져버리는
이 헐벗은 사랑의 글씨를……






분열된 자아의 꿈, 혹은 원의 위상학


정 과 리

이태수의 시집 {물 속의 푸른 방}은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것들의 각각의 제목은, '섬이 보입니다''기다림을 위하여''절망, 또는 비구상''예감''물 위에 희미하게'이다. 그 제모들은, 이 시집이 일관된 줄거리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것들 사이의 단절 또한 느껴진다. 가령, 좀 단순하긴 하지만, 섬이 보이는데 왜 기다리는가 하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그 외양의 단절을 이어주는 것은 각 부분들의 세부적 구체성의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을 좇는 것으로 이 짧은 해설을 대신하기로 하자.
섬이 보인다. 왜 섬인가? 첫 시를 보자.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다.
서늘하고 둥근 물소리……
나는 한참을 더 내려가서
집 한 채를 짓는다.
물소리 저 안켠에
날아갈 듯 서 있는 나의 집, 나의
푸른 방에는
얼굴 말끔이 씻은 실바람과
별빛이 술렁이고
등불이 하나 아득하게 걸리어 있다. ---[물 속의 푸른 방]

섬은 시인의 상상의 움직임이 물과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물은 "서늘하고 둥근 물소리"이다. 시인의 물은 감각을 깨게 하고, 원형의 조화를 전해주는 물이다. 그래서 그것은 "흐르는 물"이다. 그것에 시인은 "발을 담근다." 발을 담그는 행위는 내려감과 동일화되어 있다. 즉 시인의 마음은 깊은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깊은 속으로 들어가서 시인은 자신의 집을 짓는다. 그 집은 푸르르며, 그 방에는 "얼굴 말끔이 씻은 실바람과/별빛이 술렁이고/등불이 하나 아득하게 걸리어 있다." 그렇다면 그 방은 정결하며(말끔히 씻은: 심지어 시인은 표준말 말끔히를 버리고 음가 없는 ㅇ을 쓰고 있다. 정결성에 대한 경사를 보여준다), 작고 미세하려 하며(실바람, 하나), 불을 가지고(별빛, 등불) 있다. 불은 또 하나의 원이다. 작게 응축된 원이다. 동시에 방사(放射) 욕망을 가진 원이다. "별빛이 술렁이고"의 술렁임은 밖으로 퍼져나가려고 하는 어수선한 설레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물소리가 만들어주는 큰 원이 있고 그 원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 시인은 작은 원을 만든다. 그 작은 원은, 큰 원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원, 즉 중심이다. 그 중심은 "소나무 한 그루, 아랑곳하지 않고/서 있었다"([기다림을 위하여 9])라는 구절의 소나무와 같이, "눈보라 뒤집어쓰고도 중심을 잡고 있는"([유리알의 詩]),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선 중심이며, "하나의 촛불로 타오르고 싶다./제 몸마저 남김없이 태우는/그 불빛으로"([나의 슬픔에게])에서처럼 중심 확립을 통하여 외부로 뻗어나가려는 자아 자체이다. 큰 원은 작은 원으로 응축되는 구심력을 가지며, 작은 원-중심은 큰 원으로 확산되려 하는 원심력을 드러낸다. 또한 큰 원은 물소리로 이루어지고 작은 원-중심은, 차라리, 불 자체이다. 물은 퍼진 불이고, 불은 집중된 물이다.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하지만 이 까다로운 분석은 애초의 물음에 대답을 주지 못한다. 왜 섬인가? 처 시에는 섬이라는 단어가 한번도 나와 있지 않다. 큰 원은 그저 물소리이며, 작은 원은 방이다. 이때, 제목이 은근히 들려준다. 시인의 방은 "꿈속의" 방이다. 즉 현실의 방이 아니다. 그러자 큰 원과 작은 원 사이의 단절이 보인다. 물소리 저 안켠의 방은 "아득"한 거리의 방이다. 그 방의 등불은 퍼지려고 하지만 퍼지지 못하는 방사 욕망의 순정성의 불이지, 그 퍼짐을 실현하는 불이 아니다. 그것이 퍼지는 것은, 즉 "섬광이 되고 오로라가 되는" 것은 "눈감"을 때([섬이 보입니다])뿐이다. 애초에 물 속의 불이라는 것이 모순이다. 그런 점에서 그 방-불은 추상적 지향의 세계이다. 구체적 현실성을 갖지 않는다. 또한, 그 점에서 시는 현실/자아의 엄격한 이분법에 기초해 있으며, 작은 원으로 내려가는 '나'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시적 자아이다. 그것은 시집의 낭만주의적 출발을 드러낸다. 하지만, 시적 자아는, 낭만주의자들이 그렇듯, 확실한 시적 자아이다. 그리고 시적 자아에게 있어서 자기 공간은 구체적이다. "나의 집"의 속성을 자세히 나열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구체성은 아니다. 시적 자아는 그것을 현실화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섬'이다. 섬은 그것의 실제적 존재성(방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있지만 섬은 자연적으로 존재한다)에 의해서, 시적 자아의 지향을 실현할 거점이 되어준다. 그런데 앞의 '방'과 섬은 동일시될 수 있을까. 그렇다. 섬은 "조그마한 불씨"([섬이 보입니다]), 자아의 마음의 불이기 때문이다. 섬은 꿈속의 푸른 방의 현실적 모양이다. 그러나 그 섬은 탄탄하게 솟아올라 있는 섬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이 일어섰다 슬리는" 섬이다. "고고하게 앉"은 섬은 여전히 자아와 아득한 거리에 있고, 현실에 파묻혀 "차츰씩 가라앉고"([나의 섬]) 있다. 그때 첫 시에서 시인이 꿈꾸어본 물과 불의 화합은 실현되지 않는다. 현실 속의 물은 불씨-섬을 끄려 드는 "황량한 바다," 혹은 "늪"([나의 슬픔에게])이다. 시인에게 물과 불의 화합을 꿈꾸게 해주는 것은 "물소리"이지, 실제의 물이 아니다. 확산된 불-집중된 물의 이상은 감각에 지탱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섬을 꿈속의 푸른 방의 현실적 모양이라고 얘기하는 것엔 어폐가 있다. 섬은 그러길 열망하는 마음의 구축물이다. 즉 자아/현실의 대립을 대립으로서나마 유지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섬은 자아 자체이지만, 섬으로서의 자아는 시인 저편에 멀리 있다. 즉 현실의 자아와 지향의 자아는 분열되어 있다. 그 단절된 사이에는 현실의 광포함이 가로놓여 있다. 그때 현실의 자아의 일차적 행위는 떨어져나간 지향의 자아를 제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이를테면 "섬을 하나 빚는다. 아무도 모르게/내 마음속 깊이"([나의 섬])와 같은 행위이다. 꿈속의 푸른 방에서 자아가 물 속에 자신을 넣는다면, 이제는 자아 속에 불을 넣는(이미 보았듯, 섬은 불이다) 것이다. 그리하여 "가혹하게/피 속에 불을 지"핀다([나는 다만 하나의 모래알로]). 그리고 기다린다. 섬이 선명하게 솟아올라와주기를. [기다림을 위하여]의 시편들은 그 기다림을 위하여 마련된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기다림의 열망을 노래하고 있지 않다. 기다림이 이미 하나의 행위인바, 그것들은 소극적 기다림의 무기력함을 보여주고 있다. 불의 내재화는 의지일 뿐, 현실 속의 자아는 "고장난 시대의 물살"([기다림을 위하여 1])을 견디어내지 못한다. 자아의 몸 속에 들어차는 것은 물이지 불이 아니다. "물을 먹고 둥둥 떠 있는/물 위의/내 마음 오랜 그늘"로, 무겁고, "부황이 들어/뒤채"인다([기다림을 위하여 5]). "내 머릿속은/물먹은 솜뭉치"([기다림을 위하여 7])이다. 그때 자아의 꼴은 중심을 상실한 자의 꼴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저 끝간데 없이/바람에 떠밀려 떠돌며, 제 얼굴을 잃고"([기다림을 위하여 5]), "자귀나무"처럼 "밤 아닌 밤"([기다림을 위하여 6])을 우연스럽게 지내며, "하나의 나뭇잎처럼 허공에 매달려 떤다"([기다림을 위하여 2]). 그 중심의 상실은, 자아의 무수한 흩어짐, 즉 부서진 작은 원들의 지리멸렬을 낳는다. 그때 물먹은 몸은 포만이 아니라, 오히려 "먼지 바람" 속의 "희디흰 갈증"이다. 그리고 자아가 안에 간직하려 한 또 하나의 자아-불은 깊이 없는 높이로서 "저리도 흩어져 앉"아 있다. 이 시편들에서 모든 것들은 산지사방에 버려져 있다. 도시해보자.





하지만 구심력의 원형성마저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고통스러운 의지의 형태로, 혹은 파괴된 흔적의 형태, 가령, "눈썹달 나뭇가지에 걸겨 몸살을 앓고"([기다림을 위하여 3])에서의 눈썹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원형성이 완벽히 소멸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파괴가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 자아는 넓이에 있어서는 무수히 조각난 흩어진 모습으로, 깊이에 있어서는 원형이 파괴된 파편의 기형성(그래서 "꼽추처럼"[[그해의 봄은]] 같은 표현이 나온다)으로 있다. 그것은 자아의 완벽한 상실의 위험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아는 "기다림의 부질없음"을 고백하기도 하고, "아프다, 아프다고 소리지"르지만, "어디가 아픈지는 알지 못한다"([눈 위에 눈이 내리고]). 더욱이 그때의 자아는 더 이상 '나'가 아니라 '그'로 객체화된다. 세번째 부분의 제목이 '절망, 또는 비구상'인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절망의 나락으로 내려가던 끝에 오히려 자아는 거꾸로 솟아오르게 된다. "더는 내려갈 데가/보이지 않"자, "갑자기 피가 거꾸로"([더 내려갈 데가 안 보인다]) 도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반작용만은 아니다. 그 방향의 변환에는 자아의 자기 발견이 개입되어 있다. 어떻게? 절망의 바닥에 자신을 비추어봄으로써이다.

내려간다. 더 내려갈 데가 없을 때까지
낮게, 허리를 구부리고.
이제는
그가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그의 발자국 소리는 지하도를 울리다가
풍선처럼 가볍게 떠오른다.
나는 땅바닥에 엎드린다. 엎드려서 보면
거짓말처럼, 그의 발바닥이
송신탑 피뢰침 끝에 걸려 있다.
나는 주눅이 든 채 그의 뒤꿈치에 매달려
가물거린다. 흔들리는 불빛…… ---[절망, 또는 비구상]

인용문의 "나"는 절망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나이며, "그"는 이제는 남이 되어버린, 꿈꾸는 나이다. "그"는 내려가는 "나"에게로 걸어온다. 하지만 "그의 발자국 소리는 지하도를 울리다가/풍선처럼 가볍게 떠오른다." 즉 나에게서 오히려 멀어진다. 그런데 땅바닥에 엎드리니까 그가 비친다. 위태롭게 상승하는 그가 "거짓말처럼" 비친다. "기억의 저 끝"에 있는 "꿈속의 하늘"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꿈속의 하늘은 극히 미세하지만, "지금도 발바닥에 박혀 있는 티눈"으로서, 엄연히 존재한다. 땅바닥을 거울로 현실 속의 자아와 꿈속의 자아는 서로 비추고 있다. 그 비침은 어느 정도는 작위적 비침이지만 내려감(나)/올라감(그)의 대칭 반사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추락과 상승은 표리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때 자아는 자신을 다시 확보한다. 그는 "꿈을 뒤집어 꾸"고, "돌렸던 마음 돌려세우며"([이젠 꿈을 뒤집어 꾸는 게 편하다]), "마음은 꼭 붙들기로" 다짐하고 "나는 여기 서" 있음([나는 여기 서 있고])을 확인한다. 이 자아의 확보는 촛불로서 표상된다. 촛불은 "심지가 바로" 중심에 박혀 타고 있는 불을 말한다. 그러나 이 자아의 확보가 곧바로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아는 또 한 번의 절망에 빠져든다. 대칭 반사의 추락-상승은 서로 밀어내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내려감으로써 만난 상승의 자아는,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그만큼 높아진다. 즉 멀어진다. 그래서 "새벽을 건너며/비수를 갈고 있는," "자꾸만 더 커 보"이는 사나이의 모습은 돌아선 "뒷모습"([이젠 꿈을 뒤집어 꾸는 게 편하다])이며, "꿈은 꿈으로만 저만큼 빛나고, 오직/하늘의 별, 물 위의 별일 뿐"([세월에게])이다. 더욱이 그 꿈꾸는 자아는, 세계를 다 포괄하지 못하는, 오직 홀로일 뿐인 단수성의 자아이다. 그 자아는 "그칠 줄 모르"며 연이어 뜨지만, 여전히 "하나"로서만 뜨는 "또 하나의 나의 별"이다. 그것은 초의 몸매가 그렇듯, 수평적 넓이를 갖지 못하고 수직적 길이만을 가진 가냘픈, 그리고 탈수록 자신을 소멸시키는("목을 태워야 하는",[세월에게]) 마멸성의 자아이다.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와해되는 자아가 가까스로 되잡는 중심 확립은 분열된 두 자아를 이어주지 못하고 서로 멀어지게 한다. 그 이어지려 하면서도, 멀어지고야 마는 안타까운 두 힘의 움직임, 그것이 피워내는 것이 불완전 연소의 "연기"([세월에게]; [쑥불을 지피며])이다. 꿈꾸는 불은, 순정한 욕망의 불로서도 휘황한 밝기로서도 존재하지 못하고, 물이 끼얹어져 이그러지고 부서지는 불("지글지글 타오르며 걸어가다," "하숨 푹푹 쉬"[[뭘 한다고 마음이여]]며, "외출에서 오래 돌아오지 않는 희망에게, 그 뒷모습에/쓸쓸히 웃음을 끼얹"[[나는 여기 서 있고]]는다)로서 좌절된다(촛농의 형태?!).
그렇다면 완벽한 비구상의 절망인가? 왜 다음 시편들을 묶은 제목들은 '예감'인가? "껴안아도 껴안아도/아득한 거리"([불현듯 그는])라는 표현처럼 섬과 자아 사이에는 여전한 단절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눈을 들어 보면 길은 어디에도 있고/어디에도 없고"([또 하루 해는 지고])라든가, "마음이여, 오늘밤엔/뭔가 실마리가 풀릴 것만 같다./어디에도, 어디로도 열려 있으므로"([예감]), 또는 "대체 그는 누구일까. 안 보일 듯 보이고/보이다간 문득 모습을 감추곤 한다"([그는 대체 누구일까]) 같은 구절들이 눈에 띈다. 그것들은 얼핏 앞부분의 시편들의 내용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어조는 훨씬 담담하며, 실현되지 못하는 마음의 격렬함에보다는 있음의 신뢰에 초점이 가 닿아 있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는 '예감'의 시편들에서부터 외부적 대상들에 대한 객관적 묘사가 두드러져 드러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물론 분열된 자아에 대한 객관화, 즉 '그'의 호칭은 이미 출현한 바 있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드러나던 그것은 이제 다분히 긍정적 징후를 담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인식과 결합되어 있다. 그는 "천둥과 함께" "번개와 같이"([불현듯 그는]) 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손을 잡으며"([또 하루 해는 지고]) 걷고 있다. 물론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아직 "홀로, 섬에서, 눈을 뜬다." 사람들은 "욕망과 허무를 한 꾸러미씩 부둥켜안고"([東城路에서 3]) 있다. 아직 '그'와 함께 있는 것은 "비비새" "동백꽃" 등의 자연적 생명들뿐이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이미 변화이다. 꿈꾸는 자아의 복수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런 시구를 만나게 된다. "천장엔 엉키는 사방연속무늬,/그리고 빈 술잔 하나"([또 하루 해는 지고]). 꿈꾸는 자아는 사방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 속 자아의 자기 비우기(빈 술잔)를 통해서이다. 즉 고통스러운 마음의, 고통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이다. 그러면서 꿈꾸는 자아-불들은 작은 원들로 사방으로 퍼진다. 도시하면 이렇다.






그러나 꿈꾸는 자아의 자기 확산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다른 근거를 찾지 못하는 한, 다시 현실 속 마음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것은 모순이다. 자신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그 확산이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도는 부질없어진다. "그 빛들 한 다발씩 묶어/가슴 깊이 다져넣는 지금은/뭔가 실마리가 풀릴 것만 같"([예감])지만, "부질없는 꿈"이며, "끝끝내 그는 안 보이고/하늘에는 가득히/허기꽃들만 흐드러져 있다"([어떤 실종]). 꿈꾸는 자아의 흩어져 퍼진 불들은 세상의 물과 조화하지 못한다. "나는" "검푸른 파도처럼" "방바닥에 뒹굴고 있다"([에디트 피아프]). 하지만 시인은 이 자리에서 또 한 번의 반전을 시도한다. 그것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이다. 첫째, 다양하게 확산되었다가 무기력하게 좌절되는, 꿈꾸는 자아들-허기꽃들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다. 즉 "낯선 들풀들이 저희끼리 가슴을 끼얹고"([에디트 피아프])의 구절처럼, 다양하게 퍼진 것들에, 처지의 동질성을 매개로 상호 친화력을 부여해준다. 그떄, 그것들은 "달무리"처럼 제 모양을 갖춘, 원형의 배열을 이룬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기계적 배열일 뿐이다. 그것들과 현실 속 자아 사이에는 여전히 단절이 있다. 그 단절을 메꾸는 두번째 방법은 시적 자아의 현실적 형세 그대로를 보여주는 외적 대상들, 즉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물론 사람들의 모습은 부정적으로 기술되고 그 허황됨이 폭로된다. 하지만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묘사됨으로써, 사람들/자아의 단절이 거꾸로 사람들-자아의 아픈 유대로 변환한다. "사람들 속에서 사람을 그리워"([이 쓸쓸한 힘으로])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단순히 부정적 외부가 아니라, "서러운 한반도의 소나무들처럼" 자아와 함께 삶을 나누는 내부가 된다. 그 사람들과의 만남은, 퍼진 꿈꾸는 자아들과 응축된 현실 속 자아 사이의 단절에, 그 절망적인 흔들림에 연대의 넓이를 준다. 그러면서 시집은 '물 위에 희미하게'의 시편들로 넘어간다.
물 위에 희미하게 그것이 어린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중의 분열된 자아, 현실에서 고통받는 응집된 자아와 현실로부터 떨어져 자기 증식한 자아들이, 현실의 사람들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낸 큰 원의 공간이다. 도시하면 이렇다.






큰 원은 작은 원들의 이어짐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완전한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진 못하다. 그것은 "환한 언저리"이긴 하지만 "아프게 환한 언저리"([식은 밥을 먹으며])이다. 그것은 조화로운 세상이 이미 도래한 것이 아님을 증거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조화로운 세상을 이루어내려는 현실적 뿌리를 시인이 찾아내고 있음을 알려준다. 자아는 여전히 앞에서처럼 흔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홀로의 흔들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과 함께 흔들린다. 그때 흔들리는 내 마음은 더 이상 무겁지 않고 가볍다. "숲길 가득 번지는 풀 내음에 젖어/돌아돌아 걸으며 마음을 비우"([오솔길을 걸으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태어나는 것이 있다.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말이다. "우리들 뜨거운 말들도 이윽고/일어서는 파도 위에 금빛 깃을 치고/태평양까지, 얼어붙은 북극의 얼음집까지/다리는 야생의 말,/오오 눈부신,/우리의 가슴들은 하늘 높이/금싸라기의 말을 밀어올리고 있다"([파도 위에 금빛 깃을]). 마음의 나눔은 마음의 집착을 버리고 말을 태어나게 하며, 사람들 사이의 나눔의 말은 달리는 야생의 말이 되어 우리의 마음들을 하나로 밀어올린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이긴 하지만, 물과 불이 융화의 기미를 보인다. 지금까지 시적 자아를 억눌러왔던 현실의 물은 "황금빛 파도"로 불과 겹쳐지고, 자아는 첫 시에서처럼 그 물-불에 온몸을 담근다.

오솔길을 걸으며 오늘 하루
마음을 비우면
아득해라. 콧마루 시큰하게 밀리던 슬픔도
미움도 얼굴 씻고, 새옷 갈아입고
하늘로 둥둥 떠오르는 것을.
무겁던 마음 저토록
햇살에 미역감으며
날아오르고 있는 것을.
길가엔 키 작은 들풀들
저희끼리 손잡고 어깨를 비비고 ---[오솔길을 걸으며]

그러나 현실의 뿌리를 찾는다고 해서, 시인의 태도가 이미 낙관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말했듯, 그 뿌리는 아픔의 연대로 있지, 조화의 실현으로 있지 않다. 또한 시집의 각 부분들의 이동을 매개해주는 것은 시인의 의지의 결단들이다. 그 의지의 결단들이 현실의 지반을 찾아낸 것이지, 현실의 뿌리가 의지의 결단들을 자연스럽게 태어나게 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시집의 변모의 줄거리는 본래 복잡하게 얽힌 전체---시인의 감정·앎·열망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인---를 시인이 의식적으로 재구성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값진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조화로운 삶을 향한 감동적인 모색을 보여준다. 그 모색의 구체성에 뒷받침됨으로써 시인은 현실의 뿌리의 실제적 솟아남을 향하여 더 나아갈 것이다. 그 의지의 마음이, 아직은 애타게 이렇게 말한다.

물 위에 희미하게 글씨를 쓴다.
너와 네 이웃을 향해 가만히 걸으며,
너그러운 손과 팔과 가슴을
꿈꾸며, 자꾸만 이 정전의 시대에
글씨를 쓴다. 이내 지워져버리는
이 헐벗은 사랑의 글씨를…… ---[물 위에 희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