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가면서(在生活裏)

[스크랩] 綠苑 李 文 浩선생의 일대기 - 기구한 인생 서사시[9편]

含閒 2013. 3. 29. 10:25

 

기구한 인생 서사시

 

-밤의 길이 1,300 m

 

 

綠苑 李 文 浩

     

    웃지 못 할 브라 구입

     

    1964년 10월 초

    첫째 임무인 코티 분은 샀는데

    브래지어는 또 어디서 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유명한 백화점 Macy에 들러

    “브래지어 파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질 못한다

    얼른 발음이 틀려 그렇구나 하고

    이번에는 “브레이저”해보았더니 또 같은 표정

    ‘a’자가 발음하는 모든 발음을 다 동원해도 모른다

    할 수 없이 만국 공통어를 동원했다

    얼른 알아차리고 “아, 브라 -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단어는 원래 프랑스어로‘brassiere’이고

    발음은 [brəziə:r]인데 보통 [bra]로 부른다

    주인이 알려주는 대로 찾아 갔더니

    어떤 것으로 달라느냐 물기에 그냥 동양인이

    쓸 수 있는 사이즈로 달랬다

     

    국내에 있을 때 미국에 다녀온 친구들이

    브라를 구매한 체험담이 제법 재미있어 소개한다

     

    무슨 물건이던 사려면 꼭 사이즈를 묻는데

    브라를 살 때는 “유방 사이즈가 얼마냐”고 묻는다

    부인의 사이즈를 아는 한국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손짐작으로 손바닥을 둥글게 하고

    “이만한 사이즈요”했단다

    그러면 이번에는 “꼭지 사이즈는요?”하고 물으면

    엄지손가락에서 새끼손가락까지

    다 빨아 보고 나서 “이 사이즈요” 했다고 한다

     

    이렇듯 어려운 쇼핑을 끝냈다

    미국에 와서 처음 혼자서 ‘뉴욕’의 거리거리를

    걸어보았다

    오번가, 타임 스크웨어, 록펠라 센터, 센트럴 파크 등

     

    첫 시험

    1964년10월 말 즈음

    교육이 시작되었다

    대학을 방금 나온 ROTC와

    외국장교로는 캐나다 대위 그리스 중위 그리고 나

    모두 십팔 명

     

    처음에는 원리 학리 등 기초 학문들이다

    한심스러웠다 영어로 씨부렁거리는

    강의를 알아듣겠다고 두 손을 귀에 대고

    정신을 바짝 차리면 오 분도 못 되어 잠에 빠진다

    일주, 이주 삼 주를 배우고 사주 째 금요일

    오전 네 시간을 내리 시험을 치렀다

     

    여기 시험은 교과서 참고서 모두 내 놓고 치른다

    교과 내용이 모두 기초였기 때문에 책도

    필요 없었고 또 있어도 볼 사이도 없었다

    네 시간 치르는 시험을 두 시간도 못 되어

    다 마치고 교실을 나오는데

    웅성웅성 소리가 들려왔다

    뒤통수에 대고 맨날 자더니

    쓰지도 못하고 나간다고 그랬으리라

     

    다음 주 화요일 날 첫 시간

    시험 결과 발표가 있었다

    맨 처음에 카나다 장교의 점수가 발표 되었다

    97점 격려의 박수가 크게 터졌고

    다음에 내 점수가 발표되였다

    95점! “Bravo!” 하는 소리와 합께 큰 박수가 터저 나왔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수군수군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공부시간 마다 잠만 자더니

    어떻게 저런 점수가 나왔느냐 하는 소리들 일께다

    교관이 간단한 멘트가 있었는데

    나를 칭찬(?)한 모양이다

    모두 나를 보며 박수와 부라보를 외쳐주었다

    나도 일어서서 간단히 머리를 굽혀 답례를 했다

    다음 날부터 class mate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고

    나도 모름직이 어깨도 펴지는 것 같았고

    떳떳해 지는 것이 스스로 느껴왔다

     

    Washington Tower에서

    1964년 12월

    세계 각국에서 유학 온 장교의 여행이 있었다

    뉴욕 워싱턴 펜실바니아 5일 코스

    워싱턴에서 시간이 없어서

    워싱턴 탑에 아침 식사 전 여섯 시경에 올라갔다

    한 바퀴 쭉 돌고 있는데

    우리 보다 조금 먼저 올라 온 듯한 머리 까만 민족

    그때만 해도 한국인은 미국여행이 아주 적었던 탓에

    친구에게 "쪽발이 녀석 되게 할 것 없었군

    새벽부터 여기를 다 올라오고" 하고 얘기를 하는데

    “나도 한국인이요”한다

    참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분은 서울 농대 교수였는데

    우리 같이 시간에 쫓겨 새벽에 올라 왔다고 한다

     

    뉴욕에서는 뉴요커 호텔에서

    한 사람이 오-다한 메뉴를 나도 나도 하는 바람에

    주방장이 나와 “죄송합니다 재료가 부족하니

    반은 다른 메뉴를 오-다하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귀국 길

    1965년4월

    다음 주 화요일 시험결과 발표가 있었다

    미국 군인들을 먼저 발표하고

    외국장교는 계급 순이어서

    내 점수가 먼저 발표되었다

    그러자 “와!”하고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졌다

    백 점 만점에 구십팔 점 최고였던 것이다

    국위 선양이라 할까 기분 좋은 하루였다

     

    교육을 마치고 대륙횡단 기차를 탔다

    귀국하는 사람마다 TV를 사 가지고

    귀국하는 것이 무슨 규정같이 되어 있는 때

    아직 TV방송도 AFKN뿐이었고

    국내 생산도 일제 녹다운으로 소량씩 나왔었다

    기차역에서 파손 될 우려가 있다고 하기에

    보험에 가입하려고 하니까 역무원이

    당신 생명보험은 안 드느냐? 고 묻는 말에

    그만 부끄러워 왜 아니냐며 얼른 보험에 들었다

     

    열차 내를 뛰어다니던 꼬마 하나가

    우리 엄마도 이런 마크 있다며

    옷에 달린 태극마크를 가리킨다

    국제결혼 한 그의 어머니를 만나보니

    남편은 월남전에 갔는데 시어머니 괄시가

    너무해 라성에 있는 친구 집으로 가는 중이란다

     

    추운 보스턴에서 한 겨울에도 십오 리 밖에 있는

    슈퍼마켓에 차를 주지 않아 걸어서 다녔단다

     

    미국에도 있는 고부간의 갈등인가

    이방인에 대한 학대였던가

     

    미국을 떠나며

    1965년 4월

    밤 낮

    가도 가도 끝없는 평야에

    한가로이 끄덕끄덕하는 기름 인양기

    옥수수 밭

    외국의 두뇌를 철저히 자국에 충성 시키는 나라

     

    세상에 대해 무리수만 안 쓴다면

    오래도록 행복을 누릴 나라

    부디 그 행복을 온 세계에 나누기를 기원하며

     

    지하자원 없는 내 나라를 한탄하며

    다시 온단 기약 없이 기차를 버리고

    비행기에 오른다

     

     

     또 하나의 선택

     

    1972년9월30일

     

    많은 동료들이 베트남 전에 참전했다 돌아온

    친구들 마다 돈을 얼마를 벌었느니

    땅을 샀다느니 집을 샀다느니 하며 자랑들이다

    사실 적은 월급으로 삼 남매를 가르치며

    땅은 고사하고 집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금년도 월남 파병 최후 제대에 나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주 캐나다 대사관 무관으로 계시던 분께서

    “세상의 낙원이 바로 여기니 이민 오라”며

    초청장을 보내왔다

     

    캐나다냐 월남이냐 하는 것은 중대한 선택인 것이다

    이민을 가면 당장 나는 고생이겠으나

    후세를 위해서 좋았고 지금도 그렇지만

    캐나다이민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한편 파월 되면 진급과 연금은 확실했기 때문에

    이것 역시 이민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족회의(기껏해야 장인 장모)결과

    혹 있을 수 있는 딸의 과부 되는 것을 우려하여

    캐나다 이민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서 월남파병을 취소하려고 했더니

    월남파병을 놓고 인사부정이 생겨

     

    장군을 비롯 줄줄이 옷을 벗었기 때문에

    그냥 말로는 취소가 안 되며

    전역이나 입원해야 한다는 것

    기왕 이민 가는 것이니 입원하기 위해

    진단서와 입원증명서를 만들기 보다는

    전역하기로 하고 전역을 했다

     

    이민 가기 전에 몸을 건강하게 한다고

    온 가족이 보약을 먹으며 이민 수속을 계속했는데

    비자가 나오질 않는다

    당시 일본에 있던 캐나다 대사관에

    문의한 바 초청해준 회사가 파산하여

    실업자가 될 사람에게 비자를 발급 할 수 없다는 것

    숙고한 선택도 잘 못되어 대책도 없이

    가족을 거느린 실직자가 되고 말았다

     

                        다음 10편을 기대하세요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靑波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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