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퇴계 이황

含閒 2013. 2. 8. 11:08

 

 

 

퇴계 이 황

 
1501.11.25(음력) ~ 1570.12.8(음력)

 

할아버지 제삿날. 제상 차리기가 한창인데 막내며느리가 제상 위의 배를 하나 치마폭에 감추다 큰동서에게 들켰다. 남편이 대신 형수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나서 아내에게 물었다. "왜?" "먹고 싶어서." 그러자 남편은 손수 배를 깎아줬다.

요즘 웬만한 애처가 뺨칠 이 일화의 주인공 남편은 퇴계 이황(1501~1570)이다. 경북 안동 지방에서 전해오는 이 일화의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배 버전' 말고 '대추 버전'도 전해지는 걸 보면 퇴계의 인품에 대한 당시 안동 지방 사람들의 존경이 어느 정도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퇴계는 자연인으로서는 불행했다. 아버지는 생후 7개월 만에 돌아가셨고, 집안은 가난했다. 아들 둘을 낳았으나 첫 부인은 둘째를 낳고 곧 세상을 떠났고, 삼년상을 치른 후 맞은 둘째 부인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앞의 일화에 등장하는 권씨 부인이다. 문상(問喪) 가는 퇴계가 도포 자락이 헤졌다고 하자 부인 권씨는 붉은 천을 덧대 꿰맸다.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불호령 대신 태연히 그 도포 입고 문상 다녀온 이가 퇴계였다. 그라고 왜 불만이 없었겠는가.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제자에게 보낸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두 번 장가를 들었지만 내내 불행했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 결코 마음을 박하게 먹지 않고 노력해온 것이 거의 수십 년이다." 퇴계는 둘째 부인의 부모뿐 아니라 첫 부인의 부모까지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한 그는 요즘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었다. 중국의 여씨향약을 모델로 지역의 규율을 정한 '예안향약'을 가장 먼저 만들었을 뿐 아니라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금을 내는 납세자였다. 둘째 아들이 결혼 직후 사망한 후에는 며느리를 개가(改嫁)하도록 했다.

늘그막 퇴계의 가장 큰 낙은 증손자를 본 것이었다. 1568년 만 67세 되던 해 증손자를 보자 퇴계는 "우리 집 경사 중에서 이보다 더할 경사는 없다"며 좋아했다. 그러나 손자며느리의 젖이 부족해 증손자는 영양실조 증세를 보였다. 손자는 막 아기를 낳은 여종을 보내달라고 했다. 퇴계는 "내 자식 살리자고 남의 자식 죽일 수 없다"고 했다. 여종을 유모로 보내면 그 자식이 젖을 굶게 된다며 보내지 않았다. 애지중지하던 증손자는 결국 두 돌을 갓 넘기고 죽었다. 손자가 원망했을 법도 하다. 그렇지만 퇴계는 편지를 보내 위로하면서도 "너라면 어떻게 처리했겠느냐?"라고 묻는다.

퇴계가 집안 자제와 제자들에게 강조한 말은 '일체경지(一切敬之)',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영일의 글에서

 

며칠전에는 퇴계의 묘비명을 이카페에 올렸는데 그의 일화들을 모아 읽어보면 몸도 그리 건강하지 못한듯한데 삶이 반듯하고 마음이 여리면서도 올곧게 살았음을 알게 되며 군자로서 지킬 것은 힘써 지키되 남에게 보이려함이 아니고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행하였도다. 그리고 때를 알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좋고 물맑은  영남 산골에서 여생을 후학과 더불어 공부하며 세인이 추앙속에서 삶을 마무리 지었음을 알게된다.

 
조 수미 - 그리운 금강산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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