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名宰相 淸白吏 李 元翼 이야기

含閒 2013. 2. 5. 14:55

 

 

名宰相  淸白吏 李 元翼 이야기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신의 한 사람이다. 그의 생몰년은 그를 규정하는 대표적 특징을 알려준다. 그는 87세로 당시로서는 이레적으로 장수했고, 그런 까닭에 임진왜란(45세, 이조판서)과 인조 반정(76세, 영의정), 정묘호란(80세, 영중추부사) 같은 조선 중기의 중요한 사건을 모두 격었다. 나이와 관직이 보여주듯이 그는 그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다.

어떤 사람의 지위와 임무가 높고 중요할수록 그의 일상은 평온 보다는 변화와 격동에 지배되기 쉽다.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그것은 그에게 행복이기도 하고 고통이기도 할 것이다. 조선 중기는 뛰어난 인물들이 특히 많이 배출된 시기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조건은 특히 가혹했다. 이원익은 뛰어난 실무적 경륜과 굳은 의지로 그런 국면을 헤쳐간 중요한 인물이었다.

가문적 배경

이원익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종실의 일원이었다. 그의 고조는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고 증조는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 조부는 청기수(靑杞守) 이표(李彪), 아버지는 함천정(咸川正) 이억재(李億載)다. 어머니는 사헌부 감찰 정치(鄭錙)의 딸이다. 이원익의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원익은 1547년(명종 2) 10월 24일 서울 유동(楡洞) 천달방(泉達坊, 지금의 종로구 동숭동 일대)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1555년, 명종 10) 어머니를 여읜 것을 빼면 그의 성장은 대체로 순조로웠다.

뛰어난 실무적 능력

이원익 선생 영정. 선조 13년(1580)에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가로 70cm, 세로 150c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0호. 개인 소장.<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이원익은 17세 때 생원시에 합격해(1564년, 명종 19) 성균관에서 수학했고 5년 뒤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1569년, 선조 2). 이듬해 승문원 부정자(종9품)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35세(1582년)까지 호조·예조·형조좌랑, 사간원 정언(이상 정6품), 예조정랑, 홍문관 응교(이상 정5품) 같은 주요한 당하관직을 거쳤다.

이 기간의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는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다녀온 것(1573년, 선조 6)과 황해도 도사(都事)로 나가 군적(軍籍)의 착오를 시정한 것이었다(1574년, 선조 7). 특히 후자는 국방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이율곡(1536~1584)에게서 큰 칭찬을 받았다. 당시 조정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학문과 현실 모두에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던 이율곡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이원익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이원익은 35세(1582년) 때 동부승지(정3품)가 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상당히 이른 나이의 출세였지만, 그 직후 이런저런 이유로 약간의 공백을 겪었다. 이듬해 8월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알력이 일어났는데, 원인이 승정원에 있다는 탄핵이 제기되었다. 다른 승지들은 도승지의 책임일 뿐이라고 물러났지만, 이원익은 도승지가 연루되었으니 승지들은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원칙론을 견지했다. 그는 결국 파직되었다.

불행은 이어졌다. 다시 이듬해 8월 부친상을 당한 것이다. 이원익은 경기도 금천(衿川, 지금 서울시 금천구)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결국 그는 파직과 복상(服喪)으로 5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 1587년(선조 20) 10월 이원익은 황해도 안주(安州) 목사로 임명되어 다시 관직에 복귀했다. 이 근무에서 그는 다시 한번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가족을 거느리지 않고 혼자 부임한 그는 황해도 관찰사에게 양곡 1만여 석을 요청해 종자로 보급했다. 그의 노력과 순조로운 기상 덕분에 원곡을 갚고도 창고가 가득 찰 정도로 큰 풍작을 이뤘다. 양잠을 확산시킨 것도 중요한 치적이었다. 안주는 양잠에 힘쓰지 않았는데, 이원익의 권유로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그를 ‘이공상(李公桑)’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군정도 개혁했다. 병사들이 1년에 4회 입번(入番- 당번이 되어 근무처에 들어감)하던 것을 6번으로 고쳐 근무 기간을 석 달에서 두 달로 줄였다. 이 제도는 그 뒤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에 실시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은 “그가 근면하고 민첩하고 청렴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해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 자주 포상을 받아 승진해 조정으로 돌아왔다. 재상이 될 것이라는 명망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선조 20년 4월 1일).

임진왜란의 활약

중년 이후 이원익은 나라의 운명과 함께 격동과 파란의 삶을 영위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형조참판, 대사헌, 호조·예조·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그때 조정에는
유성룡(1542∼1607), 이항복(1556∼1618), 이덕형(1561∼1613) 등 그와 비슷한 세대의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원익은 45세였다. 그는 평안도로 파견되었다. 평안도 도체찰사로 임명된 뒤 곧 평안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승진해 1593년 1월 명의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떠남)했던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했다. 이런 공로로 이원익은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되었고(1595년, 선조 28), 이번에는 성주(星州)에 산성을 수축하는 등 주로 경상도 지역에서 근무했다.

정유재란 이후 이원익은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좌의정(1598년, 선조 31)을 거쳐 영의정(1599년)에 제수되었고, 사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 1600년, 선조 33)과 삼도 도체찰사(1601년)로 주요 지방의 국방과 민정을 총괄했으며, 호성(扈聖) 2등공신과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1604년, 선조 37). 당시로서는 사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예순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그의 삶은 30년이나 더 남아 있었다.

광해군대의 파란

수많은 곡절 끝에 1608년 광해군이 즉위했다. 새 국왕은 전대(前代)의 영의정인 이원익을 자신의 첫 수상에 그대로 임명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그의 위상과 신망을 또렷이 보여준다.

거대한 전란을 겪은 국왕과 재상은 이때 중요한 정책을 도입했다. 그 뒤 대동법(大同法)의 모체가 되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경기도에 시범 시행한 것이었다. 널리 알듯이 대동법은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고 백성의 부담을 줄이려는 목적에서 공납을 쌀로 걷는 제도였다. 이원익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논의되어 온 이 제도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해 시행시켰다. 앞서 황해도 도사, 안주목사로서 보여준 뛰어난 실무적 관료의 면모는 다시 한번 빛났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지만, 광해군의 내치(內治)는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영의정은 그런 풍파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기 쉬운 자리였다. 즉위 직후 광해군이 형 임해군(臨海君)을 처형하려고 하자 이원익은 23회나 사직했고, 결국 윤허를 받아 낙향했다(1609년, 광해군 1).


그러나 그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2년 뒤 국왕은 그를 다시 영의정으로 불렀다(1611년 9월). 그러나 이때도 국왕의 시책에 반대해 이듬해 4월에 체직(遞職- 벼슬이 갈림)되고 말았다.

1614년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사사되었고, 이듬해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원익은 폐모론을 강력히 반대했고, 강원도 홍천(洪川)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4년 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여주에 은거하면서 광해군의 치세를 보냈다(1619년, 광해군 11).

복직과 사망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76세의 노대신은 다시 한번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의 치세는 처음부터 곤욕을 치렀다. 1624년 1월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원익은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공주(公州)까지 몽진한 국왕을 호종(護從- 보호하며 따라감)했다.

그의 마지막 역경은 정묘호란(1627년, 인조 5)이었다. 이원익은 다시 도체찰사가 되어 국왕과 세자를 수행했다. 환도한 뒤 국방을 총괄하는 훈련도감 제조에 임명되었지만, 그런 중책을 맡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는 사직을 주청해 금촌으로 낙향했고, 1632년(인조 10) 6월 인목대비가 승하하자 잠깐 서울로 올라와 성복(成服)한 것을 빼고는 그곳에서 계속 지냈다.

이원익은 1634년 1월 29일 금촌에서 세상을 떠났고, 4월 그곳에 묻혔다. 영예와 고난이 교차한 87세의 긴 생애였다.

업적과 평가

이원익의 능력과 명망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하고 객관적인 증거는 광해군과 인조가 그를 자신의 첫 재상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치세 초반 원로를 임명해 조정을 안정시키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경륜과 인품이 겸비되지 않았다면 있기 어려운 인사가 분명할 것이다.

그의 삶에서 가장 주목되는 요소는, 앞서 말했듯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뛰어난 실무적 능력과 식견을 가진 신하였다는 것이다. 황해도 도사 시절의 군적 정비와 안주 목사 때의 농상(農桑) 진흥, 그리고 광해군 초반 대공수미법의 실시는 그런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 실례다.


또한 이원익은 신념과 원칙을 견지한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그는 이순신(李舜臣)을 변함없이 옹호한 거의 유일한 대신이었다. 유성룡마저 이순신을 비판할 때도 이원익은 “경상도의 많은 장수들 중에서 이순신이 가장 뛰어나다”면서 그를 교체하면 모든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주장했다(선조 29년 10월 5일, 11월 7일).


묘소 및 신도비. 부인 영일 정씨와의 합장묘다. 경기 광명시 소하동 소재.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인조반정 뒤 광해군을 사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을 때도 이원익은 자신이 모셨던 주상을 사사한다면 자신도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맞서 광해군의 목숨을 보호하기도 했다.

탁월한 실무적 식견과 강직한 원칙으로 일관한 그의 삶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원익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몸가짐이 깨끗했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치적(治績)이 가장 훌륭하다고 일컬어졌다. 관서(關西, 평안도)에 두번 부임했는데 그곳 백성들이 공경하고 애모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했다. …… 그는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바로 치사하고 금천으로 돌아갔다.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인조 12년 1월 29일).

이원익은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되었다. 남인의 거두인 허목(許穆)이 그의 손서(孫壻- 손녀사위)로 그 뒤 [오리집(梧里集)]을 간행하고 묘비명과 연보, 유사(遺事) 등을 지어 업적을 기리는데 중요하게 공헌했다.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집에 떨어진 갓을 쓰고 쓸쓸히 지내니
아무도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 인조실록 12년 1월 29일

필부로 고향에 돌아오니 노년에 가진 것은 비 새는 초가집 한 채뿐.
영의정만 여섯 번 40년을 재상으로 지낸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이다

그 청렴함을 기려 인조(仁祖)가 집을 하사하자 사양하며
그가 남긴 말 '신을 위해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을 일입니다.'
- 관감당 하사교서 中

"(인조가) 집 한 채를 지어줬더니 안 들어가겠다는 걸
강제로 살게 해서 집을 한 번 받은 적은 있으나
그 이외에는 절대 사양하고 받질 않았어요."
-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세상을 사랑하는 데는 백성만 한 것이 없고
몸을 다스리는 데는 욕심 버리는 것만 한 것이 없다.'
- 이원익이 손자에게 남긴 글 中


재상 지명을 놓고 말이 있으니 명재상 이원익이 생각난다.

 

 
김 영동- 명상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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