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상을 마친 뒤 1587년(선조 20) 10월 이원익은 황해도 안주(安州) 목사로 임명되어 다시 관직에 복귀했다. 이 근무에서 그는 다시 한번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가족을 거느리지 않고 혼자 부임한 그는 황해도 관찰사에게 양곡 1만여 석을 요청해 종자로 보급했다. 그의 노력과 순조로운 기상 덕분에 원곡을 갚고도 창고가 가득 찰 정도로 큰 풍작을 이뤘다. 양잠을 확산시킨 것도 중요한 치적이었다. 안주는 양잠에 힘쓰지 않았는데,
이원익의 권유로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그를 ‘이공상(李公桑)’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군정도 개혁했다. 병사들이 1년에 4회 입번(入番- 당번이 되어 근무처에 들어감)하던 것을 6번으로 고쳐 근무 기간을 석 달에서 두 달로 줄였다. 이 제도는 그 뒤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에 실시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은 “그가 근면하고 민첩하고 청렴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해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 자주 포상을 받아 승진해 조정으로 돌아왔다. 재상이 될 것이라는 명망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선조 20년 4월 1일).
임진왜란의 활약
중년 이후 이원익은 나라의 운명과 함께 격동과 파란의 삶을 영위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형조참판, 대사헌, 호조·예조·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그때 조정에는 유성룡(1542∼1607), 이항복(1556∼1618), 이덕형(1561∼1613) 등 그와 비슷한 세대의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원익은 45세였다. 그는 평안도로 파견되었다. 평안도 도체찰사로 임명된 뒤 곧 평안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승진해 1593년 1월 명의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떠남)했던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했다. 이런 공로로 이원익은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되었고(1595년, 선조 28), 이번에는 성주(星州)에 산성을
수축하는 등 주로 경상도 지역에서 근무했다.
정유재란 이후 이원익은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좌의정(1598년, 선조 31)을 거쳐 영의정(1599년)에 제수되었고, 사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 1600년, 선조 33)과 삼도 도체찰사(1601년)로 주요 지방의 국방과 민정을 총괄했으며, 호성(扈聖) 2등공신과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1604년, 선조 37). 당시로서는 사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예순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그의 삶은 30년이나 더 남아 있었다.
광해군대의 파란
수많은 곡절 끝에 1608년 광해군이 즉위했다. 새 국왕은 전대(前代)의 영의정인 이원익을 자신의 첫 수상에 그대로 임명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 그의 위상과
신망을 또렷이 보여준다.
거대한 전란을 겪은 국왕과 재상은 이때 중요한 정책을 도입했다. 그 뒤 대동법(大同法)의 모체가 되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경기도에 시범
시행한 것이었다. 널리 알듯이 대동법은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고 백성의 부담을 줄이려는 목적에서 공납을 쌀로 걷는 제도였다. 이원익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논의되어 온 이 제도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해 시행시켰다. 앞서 황해도 도사, 안주목사로서 보여준 뛰어난 실무적 관료의 면모는 다시 한번 빛났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지만, 광해군의 내치(內治)는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영의정은 그런 풍파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기 쉬운 자리였다. 즉위 직후 광해군이 형 임해군(臨海君)을 처형하려고 하자 이원익은 23회나 사직했고, 결국 윤허를 받아 낙향했다(1609년, 광해군 1).
그러나 그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2년 뒤 국왕은 그를 다시 영의정으로 불렀다(1611년 9월). 그러나 이때도 국왕의 시책에 반대해 이듬해 4월에 체직(遞職- 벼슬이 갈림)되고 말았다.
1614년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사사되었고, 이듬해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원익은 폐모론을 강력히 반대했고, 강원도 홍천(洪川)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4년 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여주에 은거하면서 광해군의 치세를 보냈다(1619년, 광해군 11).
복직과 사망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76세의 노대신은 다시 한번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의 치세는 처음부터 곤욕을 치렀다. 1624년 1월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원익은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공주(公州)까지 몽진한 국왕을 호종(護從- 보호하며 따라감)했다.
그의 마지막 역경은 정묘호란(1627년, 인조 5)이었다. 이원익은 다시 도체찰사가 되어 국왕과 세자를 수행했다. 환도한 뒤 국방을 총괄하는 훈련도감 제조에 임명되었지만, 그런 중책을 맡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는 사직을 주청해 금촌으로 낙향했고, 1632년(인조 10) 6월 인목대비가 승하하자 잠깐 서울로 올라와 성복(成服)한 것을 빼고는 그곳에서 계속 지냈다.
이원익은 1634년 1월 29일 금촌에서 세상을 떠났고, 4월 그곳에 묻혔다. 영예와 고난이 교차한 87세의 긴 생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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