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史記이야기- 陶朱公의 敎訓

含閒 2012. 12. 17. 10:08

 

 

 

陶朱公의 敎訓
兎死狗烹


범려

한(漢)나라 무제(武帝)때 사관(史官)이었던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은 중국의 전설시대 때부터 자신이 살던 그 이전까지의 역사를 130권의 방대한 기록으로 사기(史記)를 후세에 남겼다.

사기에 기록된 수많은 나라와 사람들이 어떻게 흥하였고 어쩌다가 망했는지 이천년 이상 지난 지금 읽어봐도 재미있고, 공감을 느끼며, 교훈을 얻는다.

결초보은(結草報恩), 관포지교(管鮑之交), 사면초가(四面楚歌)처럼 현대인들에게 회자(膾炙)되는 수많은 사자성어(四字成語)들도 사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사기가 우리 생활 속에 이미 깊이 스며들어와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 얘기는 춘추(春秋)시대 때의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에서 일어난 얘기다.
吳越同舟. 臥薪嘗膽, 兎死狗烹의 사자성어들이 이시대에 생겨났다..

오나라는 고소산 아래 지금의 강소성 소주(蘇州)시에, 월나라는 회계산 아래 지금의 절강성 소흥(紹興)시에 위치했던 이웃나라로써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처럼 사이가 안 좋았다.

춘추시대 초기 이 두 나라는 관심 밖의 아주 미미한 나라였으나, 후기에는 지모(智謀) 있고 충직(忠直)한 신하들의 활약으로 춘추오패(春秋五覇)에 드는 강성한 나라들이 되었다.

그 신하들이란 바로 오나라에선 오자서(伍子胥)와 손무(孫武) 이고, 월나라에는 범려(笵려)와 문종(文種)이었다.

 

 

 

오자서는 본디 초(楚)나라 사람이었다. 충신이었던 아버지와 형이 초평왕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하자 그는 천신만고 끝에 조국을 탈출하여 오나라로 망명하였다.

지혜가 많고 담력이 있는 그는 계략을 꾸며 오나라에서 합려(闔閭)가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우고 재상이 되었다.

그는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왕에게 초나라를 침공하자고 부추겼다. 당시 초나라는 상대적으로 큰 나라였기 때문에 합려는 침공을 망설였다.

그래서 오자서는 오왕 합려에게 탁월한 전략가 손무를 천거하였다. 손무는 그 유명한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저자이며 그때 그는 한적한 산중에서 은거 중 이었다.

 

 
손무(손자)

 

상장군으로 발탁된 손무는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오자서와 합력하여 초나라를 침공하였다. 수도인 영성이 함락되자 초소왕은 달아나고 오자서는 이미 죽은 초평왕의 시신을 무덤에서 끌어내어 부관참시함으로써 부친의 원수를 갚았다 한다.

강대국인 초나라를 크게 이긴 오나라는 그 위세가 중원에 떨치며 패자(覇者)가 되었다. 오왕 합려는 손무를 이 승리의 일등공신으로 꼽고 높은 벼슬을 내리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다시 산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오자서 역시 간곡하게 만류했으나 손무는 오히려 그에게 충고하였다. “그대는 심성의 이치를 아는가? 강하면 교만해지고, 교만하면 주위가 위태로워진다네. 공을 세우고 물러서지 않으면 불행해질 것이니 이는 내 목숨을 부지하려함 일세.”

미련 없이 손무는 떠났고 오자서는 남아서 오나라의 상국(相國)이 되었다. 그 후 몇 년이 흘러 월나라에선 월왕 윤상(允常)이 죽고 그 아들 구천(句踐)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날 초나라와 전쟁 시 배후에서 싸움을 걸어왔던 일이 있는지라 오왕 합려는 이 기회에 월나라를 혼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적국이지만 국상(國喪)중에 침범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 이라고 오자서는 말렸지만, 합려는 이를 듣지 않고 자신이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월나라를 침공하였다.

오나라 대군을 맞은 월왕 구천은 해괴한 작전을 세웠다. 사형수 300명으로 자살 특공대를 만들어 전선의 맨 앞줄에 늘여 세우고 한사람씩 자살을 연출함으로써 적군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멍하니 얼이 빠진 적진을 향하여 구천은 단숨에 군대를 휘몰아 짓쳐 들어가니 오군은 태반이나 죽었다. 이때 오왕 합려는 큰 부상을 입고 후퇴하다가 복수해달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숨을 거두었다.

합려의 뒤를 이어 그 아들 부차(夫差)가 오나라 왕이 되었다. 부차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잠자리에 섶을 깔고(와신;臥薪), 불편한 잠을 자며 원한을 불태웠다.

합려가 죽은 지 2년 후 절치부심(切齒腐心) 복수의 전쟁준비를 마친 부차는 오자서와 백비의 좌우군을 거느리고 월나라를 침공하였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 대군을 맞아 싸웠으나, 크게 패하여 소수의 잔병과 함께 회계산 꼭대기까지 내몰리어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위기를 맞은 구천은 범려의 계책에 따라 오군 백비의 진영으로 문종을 몰래 잠입시켜 화친을 구걸하도록 하였다. 백비는 오나라의 태재(太宰)인데 뇌물을 탐하는 자였다.

뇌물 먹은 백비의 도움으로 구천은 목숨은 건졌으나, 오나라에서 종살이를 해야 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화친이 성립되었다.

오자서는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극력 간하였으나 오왕 부차는 백비의 감언(甘言)에 더 귀를 기울였다.

월왕 구천은 종의 신세가 되어 남루한 옷에다 석실에서 기거하며 왕실의 말을 돌보다가 부차가 행차할 때 말고삐를 잡았다.

범려는 자신의 왕이 비록 비천한 신세가 되었지만 그 곁에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며 성심껏 보좌하였고, 문종은 본국에 남아 종묘사직을 지켰다.

지혜가 많은 범려는 아첨하는 여러 가지 계책을 구천에게 가르쳐 주었다. 심지어 부차의 똥을 한 웅큼 움켜쥐고 혀로 맛을 보며 그의 병세를 진찰하라고 일러 주었다.

갖은 아첨과 백비에 대한 뇌물을 아끼지 않은 결과 구천은 종살이 3년 만에 환국을 허락 받았다.

매가 발톱을 감추고 사나운 눈을 공손히 아래로 내려 뜨는 형상이 바로 구천의 모습이라며 오자서는 새장 안에 있을 때 죽여야 한다고 애써 간하였지만 허사였다.

부차는 아녀자처럼 인정과 후덕함을 내세워 변함없는 충성을 다짐받고 구천을 풀어주었다.
자기 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범려와 문종의 도움을 받으며 심기일전(心機一轉) 부국강병에 온힘을 기울였다. 문설주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오가며 혀로 핥으면서(상담;嘗膽) 백성과 더불어 밭을 갈고, 왕비는 베틀에 앉았다.

 


구천이 쓸개를 핧다

 

지난날 부차가 섶에 누워 잤던 일과 구천의 쓸개 얘기는 그 행위의 목적이 같아서 후세에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범려는 부차에게 거짓 충성을 보이면서 오나라 국력을 약화시킬 여러 가지 계략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었다.

좋은 재목을 보내어 궁궐을 크게 짓도록 부추기고, 많은 미녀들을 보내어 국정을 어지럽혔다. 그 유명한 서시(西施)가 그때 부차에게 총애를 받던 미인이었다.

오자서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충간(忠諫)을 하였지만 허사였고 나중에는 백비의 이간질까지 덧 씌워져 부차의 미움을 사게 되고 왕이 자결하라고 보낸 칼로 슬프게 생을 마감 하였다.

야금야금 오나라의 국력을 갉아내고 나라 안으로는 힘을 기르는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드디어 BC473년 구천은 오나라를 패망시켰다.

부차는 자결할 때 충신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면서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다 한다. 구천은 이 승리로 중원에 크게 위세를 떨치면서 春秋五覇로 등극하게 된다.

기나긴 고난을 겪고 이루어낸 이 성공의 주역(主役)은 당연히 범려와 문종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범려는 도망치듯 구천의 곁을 떠나 사라졌다.

떠날 때 동료인 문종에게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 이라는 말을 남겼다. 적이 없어진 후 공이 많은 사람은 통치자에게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이치를 알려주는 말이었다.

그러나 문종은 이 말을 흘려듣고 구천의 곁에 머물러 있다가 훗날 누명쓰고 버림받아 자결하는 딱한 신세가 되었다.

흡사 죄인처럼 몰래 월나라를 빠져나온 범려는 제(齊)나라로 들어가 이름마저 바꾸고 장사꾼이 되었다.

지혜 많은 모사(謀士)인지라 이재(理財)에도 밝아 몇 년 후 거상(巨商)이 되었다. 이 소문을 듣고 제나라 왕은 그에게 대부(大夫)벼슬을 제안하였다.

이 말을 듣자 얼마 있다가 그는 또다시 제나라를 떠났다. 갑자기 높아지고 유명해지는 일이 불행의 실마리라고 보았기 때문 이었다.

그는 산동지방의 도현(陶縣)으로 옮겨가 그 곳에서 스스로 자기를 도주공(陶朱公)이라 칭하면서 벼슬 없이 큰 부자로 만족하며 여생을 보냈다 한다.

부차를 유혹한 西施는 중국4대미인으로 물고기가 헤염치는 것을 잊고 서시를바라보았다고전해지며 범려의 애인으로 그사랑이야기도  재미있다 범려의 일화 하나를 더 소개하면

 

 
西施


어느때 둘째 아들이 초나라에서 사람을 죽이고 붙잡혔다.범려는 사람을 죽였으니 죄를 받는 것은 마땅하지만 돈있는집 아들은 아무데서나 죽지 않는다는 말도 있으니어떻게 하면 사형을 면할 수 있을 테지 하고끝의 아들에게 돈을 잔뜩 가지고 가 초나라에가서 무슨 수단을 써보라고 했더니 큰 아들이 제가 가겠노라고 해서마지못해 큰 아들을 초나라에 보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원래 돈 쓸줄을 잘 몰라서 초나라 관리에게 돈을 퍽퍽 쓰지 않아 둘째 아들은 결국 사형을 받고 말았다. 범려의 식구들은 그말을 듣고 모두 슬픔에 잠겨있는데 홀로 범려만 웃고 있었다. 큰 아들을 초나라에 보낼 때 나는 둘째가 사형될줄 알았다.

큰 아이는 젊었을 때 나와같이 고생을 했기 때문에 돈이 귀하고 아까운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초나라에 가서도 돈을 퍽퍽 쓰지 못했을 것이다. 처움에 끝에아이(막내아들)를 보내려 한것은 끝에 아이는 자잘때 집안이 넉넉했기 때문에  놀줄도 알고 돈쓸줄도 안다. 끝에 아이(막내아들)가 이번에 갔었더라면 초나라에 가서도 돈을 뻑써서라도 제 형의 목숨을 구할지 모른다고 생각한거야  그런데 돈을 쓸줄 모르는 큰 아이가 갔으니 나는 그때 벌써 둘째가 사형당할 것을 각오하고 사체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오늘날로 바꾸어 현실로 돌아와 보자. 얼마 전 청와대와 정부의 고위직에 있던 분들이 뇌물의 혐의를 받고 수감되는 일이 있었다.

그들은 지난 대선 때 선거 캠프의 주요 멤버로써 옛날로 말하자면 소위 공신(功臣)에 속하는 사람들 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별로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건국 후 6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역대 대통령들의 재임 말기나 퇴임 후에 의례 소위 실세(實勢)라는 분들의 감옥행을 늘 보아왔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공신은 국민들이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나 눈여겨 보고 있다.

공을 세워 뜻을 이루었다면 승리자로부터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다가 퇴임(退任)후에 인간적 정을 쌓는다면 좋으련만 그렇지가 않다.

우선 그 입맛 당기는 식탁에 끼어 앉으려 하고 몇 년 동안 맛있는 음식에 취하다보니 결국엔 파국에 이르고 자신을 망친다.

수신제가(修身齊家) 이후에 나라를 다스리는 일(治國)에 들어서라 했다. 요즘 세상에 수신제가가 힘들다면 적어도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한번쯤은 정독(精讀)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사기를 거울삼아 좋은 정치를 베푼 사람으로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을 들 수 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당고조 이연)를 도와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당나라를 창업하느라 학문을 닦고 수신할 겨를이 없이 전쟁에 매달렸다. 또한 태자인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니 제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겐 사람을 평가하는 정확한 눈이 있었고, 좋은 인재라면 한 때 적 이었어도 포용하는 아량이 있었고, 옳고 그름을 가려서 지혜의 말 듣기를 즐겨하는 귀가 있었고, 이를 실천 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그는 지난 역사를 살피면서 창업(創業)보다 수성(守城)이 어렵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명신(名臣)들과 사기(史記)를 담론(談論)하며 과거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당태종 이세민

 

후세 사가들은 그의 치세기간을 정관지치(貞觀之治)라 하여 태평치세의 모범으로 삼으며 그를 중국 역사상 명군(名君) 중에 명군으로 꼽는다.

며칠후에 대선이 있다. 제발 좋은 사람 뽑히고, 그 주위에는 좋은 사람들 많고, 또 좋은 사람 골라 써야 할 텐데….

한 가지 덧붙인다면 역사책을 많이 읽어서 현재와 미래에 대한 확고한 역사인식을 갖춘 인물이라면 정말 좋겠다.

 
김 학남 - 청산에 사르리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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