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불경(佛敎·佛經)

[스크랩] 천년향기가 깃든 해인사로 가는길(필독)

含閒 2011. 5. 25. 10:18

 

사전답사기 미리 읽어보세요^^

 

 

  천년의 문화향기가 깃든 해인사를 찾아서

          

 

 

 정태수(서예세상 지기)

 


 금년은 초조대장경 조성 1000년, 고운 최치원 입산 1100여 년, 해인사 창건 1200여 년이 되는 해이다. 그 천년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사전답사를 다녀왔다. 이번 서예세상 답사는 천년세월을 함께 해 온 대장경, 최치원, 해인사 등 세 갈래의 문화향기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역사탐방길이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에 있는 해인사는 경남과 경북이 서로 잇대어 있는 위치에 있고 가야산의 웅장한 산세에 감싸여 있다. 가야산은 우리말로 가람[江], 개[浦口]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하고, 또한 석가모니부처가 수행한 인도의 붓다가야에 있는 가야산에서 빌려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삼남(三南)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명산이다. 이러한 이름에서 짐작되듯이 가야산은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높이가 해발 1430m나 되고 경치가 썩 빼어나서 해동의 십승지(十勝地)로 일컬어졌다. 예로부터 전란을 피해 은거할 10군데 가운데 제1의 장소로 꼽히던 곳이 가야산 자락이다. 가야산에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은거했고, 구국의 심정으로 민심을 모아 만든 팔만대장경이 있고, 천년고찰 해인사가 있다.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늘 푸른 침엽수와 철따라 계절의 빛깔을 담아내는 활엽수가 온산에 울창하다. 문인화에 등장하는 기암괴석이 숲과 어울어져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산 아래의 계곡사이로는 푸르고 맑은 이른바 벽계수(碧溪水)가 쉼없이 흘러 내린다. 가야산 입구 매표소에서 해인사로 올라가는 길에서부터 우리의 답사는 시작된다.

 

 

 

해인사 입구 진입로


 

 첫째 마당.  최고운이 걸었던 홍류동 천년숲길

 

 

 

 요즘 걷기 열풍이 전국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제주도 올레길은 바다를 보면서 걷는 음(陰)의 길이고, 지리산 둘레길은 산속을 걷는 양(陽)의 길이다. 이 곳 해인사 진입로 10리길은  계곡을 끼고 굽이굽이 송림이 우거진 길이니 음양이 공존한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해인사 매표소를 지나면서 시작되는 홍류동 계곡길은 우리나라 팔승 가운데 으뜸이라는 그 명성이 무색하지 않게 여느 산에서는 볼 수 없는 기묘한 바위와 노송, 그리고 맑은 물이 삼중주를 이루어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홍류동(紅流洞)이란 이름은 봄철에 피는 진달래와 가을에 물드는 단풍잎이 홍류동구 깊은 물 위를 붉은색으로 물들이기 때문에 홍류동이라고 지었다 한다.

 

 

 이런 지형에 마음이 뺏긴 통일신라의 문인이자 서예가인 고운 최치원(857~908? · 얼굴)이 전국의 명산대천을 유람하다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은 이 길을 따라 가야산의 넉넉한 품에 안겼을 것이다. 그는 서예가 이전에 시문과 사상으로 우리 한문학의 문을 연 사람이다. 그가 남긴 시문은 현전하는 ‘계원필경’(20책), ‘사산비명’을 포함하여 ‘삼국사기’에만도 문집 30권이 전한다. 이 중 당나라 유학시절인 25세(881년) 때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적장 황소가 그 문장을 보고 혼이 빠져 말에서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올 정도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는 또한 한국유학의 선구자였다. 38세 때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로 아찬에 임명된 것에서 보듯이 통일신라 사회의 혼란상을 유교로 개혁코자 한 경세가였다. 이처럼 그의 사상은 한국유학사에서 최초로 불교 도교와 회통(會通)할 수 있고, 유교 입장에서 양교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기하였다는데 의미가 있다.

 

고운 최치원상

 

 우리는 무엇보다 최치원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서예가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의 글씨는 경남하동 쌍계사에 있는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비>가 백미이다. 이 비에는 통일신라 고승 진감선사 혜소(774∼850)의 주요 행적이 담겨있다. 최치원이 당에서 귀국한 후 3년 만인 31세 때 직접 짓고 쓴 것으로, 당나라 구양순과 그의 아들인 구양통의 필의가 있는 해서체로 총 38행 2,414자이고 글자 한자의 자경(字徑)은 2.3㎝이다. 이 비는 만수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890년), 초월산 <대숭복사비명>(886년 이후), 희양산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893년) 등과 함께 ‘사산비명’으로 불린다. 사산비명 외에도 곳곳에 각석으로 그의 글씨는 남아있다. 부산의 해운대에도 몇 점의 각석이 남아있다. 

 

 

국보47호 쌍계사 진감선사비

 

 

 

 최치원은 12세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당나라에서는 학문과 명성을 드높였지만 29세(885년) 때 고국으로 귀국한 뒤에는 골품제 탓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두터운 신분의 벽에 막혀 좌절하고 만다. 당시 신라에는 진골이라는 혈통만이 출세가 보장되는 시대였다. 6두품 출신의 최치원이 신라보다 훨씬 개방적인 당나라에서 당당히 실력으로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귀국하면서 당연히 신라를 개혁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의 국가개혁에 대한 청사진은 중앙정부의 진골들로부터 견제를 받고 철저히 외면당했다. 함양 태수로 간 것도 그런 연유였다. 그는 미련 없이 세상을 등졌다. 그의 나이 42세(898) 때였다. 최치원이 떠난 것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신라의 불행이었다. 최치원을 버린 신라는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끝내 운명을 고한다. ‘어릴 때부터 산에 들어가서 사는 게 꿈이었다’는 대목이 그의 저서 《계원필경》에 나온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매표소 입구에서 200여 미터를 올라가면 고운선생이 머물면서 시를 남겼다는 농산정(籠山亭)이 나온다. 고운선생의 시 <제가야산독서당(題伽耶山讀書堂)>에 나오는 농산(籠山)이란 말을 빌려서 지은 바로 그 농산정에 앉으면 천년이 지났것만 그의 시정(詩情)에 동감하여 무릎을 치게 된다. 최고운의 시를 감상해 보자.  

 

 

 

 

해인사 농산정

 

 

   狂噴疊石吼重巒  겹겹이 싸인 돌사이로 미친 듯 흐르며 물줄기는 봉우리를 거듭 울리는데 

   人語難分咫尺間  사람의 말소리는 가까이서도알아듣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 귀에 들릴까 늘 두려워서  

   故敎流水盡籠山  짐짓 흐르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둘러싸게 하였다네 

 

  

조선일보 신사임당아카데미 탁본답사때 마애각석 탁본실습

 

  최고운의  이 시는 농산정 맞은편 바위에 행서체로 전지 한 장 크기에 새겨져 있다. 그의  글씨라고 전해지나 확신할만한 근거는 없다. 함께 간 일행과 탁본실습을 할 수 있는 곳이다. 홍류동 계곡길을 따라 걷다보면, 기암절벽을 골라 자신의 이름새기기 경쟁(?)을 함으로써 크게 자연을 홰손시켜 놓았다. 바위에 이름을 크게 새긴다고 이름이 남겠는가. 그렇지만 진입로 아스팔트길을 끼고 흐르는 계곡과  울창한 소나무로로 만들어진 숲터널은 자연 그대로의 시(詩)가되고 그림이 되어 속세에 찌든 나그네의 땀을 말끔히 씻어준다.

 

 

  농산정을 넘어 절이 있는 산길을 돌아오르면 큰 자연석에 음각된 <해인성지(海印聖地)>라는 성철스님의 유연한 행서로 된 글씨가 나그네를 반긴다. 성철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중생을 깨우쳐 주더니 입적(入寂)한 뒤에는 많은 사리로 또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스님이 아니던가.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처럼 글씨도 그의 성정을 닮아 순수하고 잡됨이 없는 선필(禪筆)이다.

 

 

 일주문을 눈앞에 두고 석비들을 모아 놓은 비석거리에 당도하면, 옛날 성주님들과 대사님들의 송덕비 수십주가 나열되어 있다. 그 가운데 보물 128호인 <원경왕사비(元景王師碑)>도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는 원경왕사(元景王師)(1045∼1114)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석비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의 속성은 신씨(申氏)이고, 이름은 악진(樂眞)으로 숙종(肅宗) 때 승통(僧統)이 되었으며, 예종(睿宗) 때 왕사(王師)가 되었다. 세수(世壽) 70세, 법랍(法臘) 62세로 입적(入寂)하였다. 그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1년(1104)에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 후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元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비는 원래 가야면 야천리(倻川里) 탑동(塔洞) 반야사(般若寺) 옛터에 있던 것을 1968년 해인사 경내의 현 위치로 옮겼다. 고려 인종 3년(1125)에 건립하였는데 김부일(金富佾)이 짓고 이원부(李元符)가 당나라 우세남(虞世男)의 서풍으로 글씨를 썼다. 비는 높이 2.3m의 화강석으로 두께가 앏은 편이다. 비는 현재 비각이 세워져 보호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많이 파손되고 박락(剝落)이 심하여 육안으로 글씨의 형태를 자세히 살펴볼 수 없다.

 

 

원경왕사비 원경

 

  이 비가 세워진 고려중기는 고려시대 가운데 가장 빛나는 문화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이르면 서체(書體)는 고려초기 구양순체(歐陽詢體)에서 문화적 난만성(爛漫性)을 반영하는 왕희지체(王羲之體)로 변모되던 시기였다. 이원부가 쓴 비문(碑文)에서는 고려건국의 기상을 표현하던 구양순체가 이 시기에 이르러 왕의지체 및 다양한 서가들의 서풍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변화를 볼 수 있다. 대각국사(大覺國師)를 따라 중국 송에 갔던 원경왕사(元景王師) 악진(樂眞)의 행적(行蹟) 때문인지 비문(碑文)은 중국 북송 때 휘종의 수금서(瘦金書)의 분위기와 같이 점획이 파리하여 살집이 적다.  우세남의 필의까지 담겨있어서 고려중기 서예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비석은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었는데, 지붕돌이 이수가 아닌 것이 특징이고, 각 부분이 얇은 것 또한 이채롭다. 이 비는 조각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 등에서 고려 중기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원경왕사비 전경

 

 

원경왕사비 부분

 

 

측면

 

 

원경왕사비 귀부

 

 

       옥개석

 

 

전액

 

 

 

 둘째, 셋째 마당은 이어서 계속됩니다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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