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문화향기가 깃든 해인사를 찾아서
정태수(서예세상 지기)
금년은 초조대장경 조성 1000년, 고운 최치원 입산 1100여 년, 해인사 창건 1200여 년이 되는 해이다. 그 천년 역사의 현장에 사전답사를 다녀왔다. 이번 서예세상 답사는 천년세월을 함께 해 온 대장경, 최치원, 해인사 등 세 갈래의 문화향기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역사탐방길이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에 있는 해인사는 경남과 경북이 서로 잇대어 있는 위치에 있고 가야산의 웅장한 산세에 감싸여 있다. 가야산은 우리말로 가람[江], 개[浦口]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하고, 또한 석가모니부처가 수행한 인도의 붓다가야에 있는 가야산에서 빌려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삼남(三南)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명산이다. 이러한 이름에서 짐작되듯이 가야산은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높이가 해발 1430m나 되고 경치가 썩 빼어나서 해동의 십승지(十勝地)로 일컬어졌다. 예로부터 전란을 피해 은거할 10군데 가운데 제1의 장소로 꼽히던 곳이 가야산 자락이다. 가야산에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은거했고, 구국의 심정으로 민심을 모아 만든 팔만대장경이 있고, 천년고찰 해인사가 있다.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늘 푸른 침엽수와 철따라 계절의 빛깔을 담아내는 활엽수가 온산에 울창하다. 문인화에 등장하는 기암괴석이 숲과 어울어져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산 아래의 계곡사이로는 푸르고 맑은 이른바 벽계수(碧溪水)가 쉼없이 흘러 내린다. 가야산 입구 매표소에서 해인사로 올라가는 길에서부터 우리의 답사는 시작된다.
해인사 입구 진입로
첫째 마당. 최고운이 걸었던 홍류동 천년숲길
요즘 걷기 열풍이 전국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제주도 올레길은 바다를 보면서 걷는 음(陰)의 길이고, 지리산 둘레길은 산속을 걷는 양(陽)의 길이다. 이 곳 해인사 진입로 10리길은 계곡을 끼고 굽이굽이 송림이 우거진 길이니 음양이 공존한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해인사 매표소를 지나면서 시작되는 홍류동 계곡길은 우리나라 팔승 가운데 으뜸이라는 그 명성이 무색하지 않게 여느 산에서는 볼 수 없는 기묘한 바위와 노송, 그리고 맑은 물이 삼중주를 이루어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홍류동(紅流洞)이란 이름은 봄철에 피는 진달래와 가을에 물드는 단풍잎이 홍류동구 깊은 물 위를 붉은색으로 물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이런 지형에 마음이 뺏긴 통일신라시대의 문인이자 서예가인 고운 최치원(857~908? · 얼굴)이 전국의 명산대천을 유람하다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은 이 길을 따라 가야산의 넉넉한 품에 안겼을 것이다. 그는 서예가 이전에 시문과 사상으로 우리 한문학의 문을 연 사람이다. 그가 남긴 시문은 현전하는 ‘계원필경’(20책), ‘사산비명’을 포함하여 ‘삼국사기’에만도 문집 30권이 전한다. 이 중 당나라 유학시절인 25세(881년) 때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적장 황소가 그 문장을 보고 혼이 빠져 말에서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올 정도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는 또한 한국유학의 선구자였다. 38세 때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로 아찬에 임명된 것에서 보듯이 통일신라 사회의 혼란상을 유교로 개혁코자 한 경세가였다. 이처럼 그의 사상은 한국유학사에서 최초로 불교 도교와 회통(會通)할 수 있고, 유교 입장에서 양교를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기하였다는데 의미가 있다.
고운 최치원상
우리는 무엇보다 최치원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서예가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의 글씨 가운데 경남하동 쌍계사에 있는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비>가 백미이다. 이 비에는 통일신라 고승 진감선사 혜소(774∼850)의 주요 행적이 담겨있다. 최치원이 당에서 귀국한 후 3년 만인 31세 때 직접 짓고 쓴 것으로, 당나라 구양순과 그의 아들인 구양통의 필의가 담긴 해서체로 총 38행 2,414자이고 글자 한자의 자경(字徑)은 2.3㎝이다. 이 비는 만수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890년), 초월산 <대숭복사비명>(886년 이후), 희양산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893년) 등과 함께 ‘사산비명’으로 불린다. 사산비명 외에도 곳곳에 각석으로 그의 글씨는 남아있다. 부산의 해운대에도 몇 점의 각석이 남아있다.
국보47호 쌍계사 진감선사비
최치원은 12세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당나라에서는 학문과 명성을 드높였지만 29세(885년) 때 고국으로 귀국한 뒤에는 골품제 탓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두터운 신분의 벽에 막혀 좌절하고 만다. 당시 신라에는 진골이라는 혈통만이 출세가 보장되는 시대였다. 6두품 출신의 최치원이 신라보다 훨씬 개방적인 당나라에서 당당히 실력으로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귀국하면서 당연히 신라를 개혁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의 국가개혁에 대한 청사진은 중앙정부의 진골들로부터 견제를 받고 철저히 외면당했다. 함양 태수로 간 것도 그런 연유였다. 그는 미련 없이 세상을 등졌다. 그의 나이 42세(898) 때였다. 최치원이 떠난 것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신라의 불행이었다. 최치원을 버린 신라는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끝내 운명을 고한다. ‘어릴 때부터 산에 들어가서 사는 게 꿈이었다’는 대목이 그의 저서 《계원필경》에 나온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매표소 입구에서 200여 미터를 올라가면 고운선생이 머물면서 시를 남겼다는 농산정(籠山亭)이 나온다. 고운선생의 시 <제가야산독서당(題伽耶山讀書堂)>에 나오는 농산(籠山)이란 말을 빌려서 지은 바로 그 농산정에 앉으면 천년이 지났것만 그의 시정(詩情)에 동감하여 무릎을 치게 된다. 최고운의 시를 감상해 보자.
해인사 농산정
狂噴疊石吼重巒 겹겹이 싸인 돌사이로 미친 듯 흐르며 물줄기는 봉우리를 거듭 울리는데
人語難分咫尺間 사람의 말소리는 가까이서도알아듣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 옳고 그름을 다투는 소리 귀에 들릴까 늘 두려워서
故敎流水盡籠山 짐짓 흐르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둘러싸게 하였다네
조선일보 신사임당아카데미 탁본답사때 마애각석 탁본실습
최고운의 이 시는 농산정 맞은편 바위에 행서체로 전지 한 장 크기에 새겨져 있다. 그의 글씨라고 전해지나 확신할만한 근거는 없다. 함께 간 일행과 탁본실습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인근에는 경주최씨 시조인 고운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고운선생유허비를 세워놓았다. 이렇게 홍류동 곳곳에 고운선생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홍류동 계곡길을 따라 걷다보면, 기암절벽을 골라 자신의 이름새기기 경쟁(?)을 함으로써 크게 자연을 홰손시켜 놓았다. 바위에 이름을 크게 새긴다고 이름이 남겠는가. 그렇지만 진입로 아스팔트길을 끼고 흐르는 계곡과 울창한 소나무로로 만들어진 숲터널은 자연 그대로의 시(詩)가되고 그림이 되어 속세에 찌든 나그네의 땀을 말끔히 씻어준다.
농산정을 넘어 절이 있는 산길을 돌아오르면 큰 자연석에 음각된 <해인성지(海印聖地)>라는 성철스님의 유연한 행서로 된 글씨가 나그네를 반긴다. 성철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중생을 깨우쳐 주더니 입적(入寂)한 뒤에는 많은 사리로 또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스님이 아니던가.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처럼 글씨도 그의 성정을 닮아 순수하고 잡됨이 없는 선필(禪筆)이다.
성철스님의 글씨 <해인성지>
일주문을 눈앞에 두고 석비들을 모아 놓은 비석거리에 당도하면, 옛날 성주님들과 대사님들의 송덕비 수십주가 나열되어 있다. 그 가운데 보물 128호인 <원경왕사비(元景王師碑)>도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는 원경왕사(元景王師)(1045∼1114)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석비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의 속성은 신씨(申氏)이고, 이름은 악진(樂眞)으로 숙종(肅宗) 때 승통(僧統)이 되었으며, 예종(睿宗) 때 왕사(王師)가 되었다. 세수(世壽) 70세, 법랍(法臘) 62세로 입적(入寂)하였다. 그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1년(1104)에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 후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元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비는 원래 가야면 야천리(倻川里) 탑동(塔洞) 반야사(般若寺) 옛터에 있던 것을 1968년 해인사 경내의 현 위치로 옮겼다. 고려 인종 3년(1125)에 건립하였는데 김부일(金富佾)이 짓고 이원부(李元符)가 당나라 우세남(虞世男)의 서풍으로 글씨를 썼다. 비는 높이 2.3m의 화강석으로 두께가 앏은 편이다. 비는 현재 비각이 세워져 보호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많이 파손되고 박락(剝落)이 심하여 육안으로 글씨의 형태를 자세히 살펴볼 수 없다.
원경왕사비 원경
이 비가 세워진 고려중기는 고려때 가장 빛나는 문화발전을 이룬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이르면 서체(書體)는 고려초기 구양순체(歐陽詢體)에서 문화적 난만성(爛漫性)을 반영하는 왕희지체(王羲之體)로 변모되던 시기였다. 이원부가 쓴 비문(碑文)에서는 고려건국의 기상을 표현하던 구양순체가 이 시기에 이르러 왕의지체 및 다양한 서가들의 서풍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변화를 볼 수 있다. 대각국사(大覺國師)를 따라 중국 송에 갔던 원경왕사(元景王師) 악진(樂眞)의 행적(行蹟) 때문인지 비문(碑文)은 중국 북송 때 휘종의 수금서(瘦金書)의 분위기와 같이 점획이 파리하여 살집이 적다. 우세남의 필의까지 담겨있어서 고려중기 서예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비석은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었는데, 지붕돌이 이수가 아닌 것이 특징이고, 각 부분이 얇은 것 또한 이채롭다. 이 비는 조각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 등에서 고려 중기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원경왕사비 전경
원경왕사비 부분
측면
원경왕사비 귀부
옥개석
전액
둘째 마당. 해인사의 서예유적
법보종찰(法寶宗刹 ; 팔만대장경으로 불리는 무상법보(無上法寶)를 모신 까닭) 해인사는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대사찰로 꼽힌다. 해인사는 한국화엄종의 근본도량이자 팔만대장경을 소장한 사찰로서 한국인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이 땅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왔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3년(802) 10월에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과 그 제자인 이정(利貞) 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화엄종의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경전의 최고봉으로써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온다. 해인사란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이란 의미는 세상의 거친 파도, 곧 중생이 번뇌에서 멈출 때 우주의 참모습이 물[海]속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창건된 해인사는 해동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균여, 의천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였다. 서기 802년에 창건된 뒤로 고려 건국 초기에 희랑스님에 의해 중수되었고, 절이 잇달아 불에 타는 실화를 일곱 번이나 겪고서도 정정하게 오늘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야산 해인사전경
원경왕사비를 지나 몇십보를 걸으면 가야산 정상 칠불봉 능선이 비친다는 작은 연못 영지(影池)가 있다. 지금은 연못이 줄어들어 능선이 비칠 정도가 아니라 능선이 겨우 보일 정도로 변했다. 영지에서 일주문(一柱門)은 100여미터 앞에 보인다. 사찰에 들어설 때 처음 만나는 문이 일주문이다. 모든 중생이 성불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번째 문이자 절의 어귀에 서있는 제일문(第一門)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양쪽에 하나씩 세워진 건축구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신라시대에 지금의 자리에 일주문을 세울때부터 1940년 마지막 중건할때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일주문
일주문 정면에 붙어있는 현판(懸板 ; 절이나 누각 등의 들어가는 문 위, 벽, 처마 밑에 글씨나 그림을 새겨 걸어놓은 널조각)에는 근대서예가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 1868~1934)이 휘호한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라는 해서가 산문의 격을 높이고 있다. 해강은 전국의 여러 사찰에 글씨를 남기고 있다. 일주문 뒷면에는 박해근(朴海根)이 쓴 ‘해동제일도량(海東第一道場)’이란 행서 현판이 걸려 있다.
가야산해인사(해강 김규진)
일주문을 넘어서면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 있는 오래된 가로수가 나타난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간다는 고사목이 사찰의 역사를 말해준다. 그 정취에 취해 걷다보면 두 번째 문인 봉황문(鳳凰門)이 나타난다. 사찰에 따라 이 문을 천왕문이나 사천왕문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안에는 사천왕상이 있어 수문역과 도량 수호역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사천왕상이 사찰에 등장한 것은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인도의 민간신앙과 접합될 때 생긴 사상이라고 한다. 봉황문에는 국전심사위원을 지낸 유당(惟堂) 정현복(鄭鉉輻, 1909~1973)의 편액이 천년고사목을 마주하고 있다.
해인총림(유당 정현복)
봉황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해인사의 제3문인 해탈문에 오른다. 해탈문은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는데 ‘불이(不二)’는 선악(善惡), 시비(是非), 생사(生死)와 같은 대립적이이고 상대적인 것을 초월한 해탈의 경지를 의미한다. 해탈문 정면에는 1865년 만파당의준화상(萬波堂誼俊和尙)이 쓴 ‘해동원종대가람(海東圓宗大伽藍) 이란 편액을 달았다. 지금은 해인사에서 가을에 있을 대장경 천년축제를 앞두고 대대적인 수리를 하고 있어 이 문을 막아놓았다.
해동원종대가람(만파당의준화상)
마당을 가로질러 가면 구광루(九光樓)에 이른다. 이 건물은 해인사의 모든 건물 중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구광루의 편액은 남천당 한규(翰圭, 1868~1936)대사가 썼다. 구광루 둥근 기둥에는 대원군이 쓴 주련(柱聯 ; 기둥에 써서 붙이는 한시 등의 연구(聯句)이 칠언율시로 장식되어 있다. 조선말 서화에 조예가 깊었던 대원군은 당대의 명필로 알려져 있다. 해인사에는 대원군과 해강의 글씨가 많이 남아있다.
대적광전
구광루를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네모반듯한 안뜰이 전개되고 2단으로 쌓은 축대위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자리잡고 있다. 한 사원에 있는 큰 법당의 이름은 그 안에 모신 주불(主佛)에 따라 결정되고 그 주불은 바로 그 사원의 정신적인 지주이다. 해인사는 화엄경을 중심사상으로 하여 창건되었으므로 모든 절이 흔히 모시는 석가모니부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가 모셔져있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大雄殿)이 아닌 대적광전이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이란 편액글씨는 조선의 흥성대원군 혹은 연안부원군이 썼다고 전해진다. 활달한 행서체로 큰 글씨는 글자 안에 공간이 없어야 결구상 어울린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된다. 대적광전 서북쪽에는 작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놓여있는데 그 중 ‘명부전(冥府殿)’의 편액은 박이도(朴履道, 생몰연도 미상)의 예서체로 된 작품이다. 대적광전의 위용을 뒤로하고 구광루를 내려다보면 지붕끝선과 산등성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절묘한 가람배치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대적광전의 뒤편에는 가파른 돌계단을 쌓고 담장을 막아 국보 32호 해인사 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다. 해인사의 여러 유적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대장경판이다. 일주문에서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까지는 108계단이다.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고 팔만대장경을 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듯 하다.
대적광전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각 입구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란 현판은 대구의 근대서예가인 회산(晦山) 박기돈(朴基敦, 1878~1948)의 글씨로 대적광전에서 계단을 오르다 보면 첫눈에 들어온다.
팔만대장경(회산 박기돈)
장경각에 들어서면 ‘수다라장(修多羅藏)’이란 현판이 걸린 동서로 길게 뻗은 경판장이 있고 그 뜰을 건너면 같은 규모의 ‘법보전(法寶殿)’이 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은 조선말의 정치가로 서예와 문장에 뛰어났던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 1810~1888)의 작품으로 예서체이다.
수다라장(위당 신관호)
한편, 해인사에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잦은 화재방지를 위해 대적광전의 상량문을 썼다는 구전이 있다.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때 추사로 하여금 상량문을 써서 시주하게 하였고, 추사의 상량문이 걸린 후에는 화재가 없었다고 한다. 상량문은 1961년 대적광전을 수리할 때 발견되었는데 감색비단에 금니(金泥)로 방정하게 필사되어있고 제작년대는 순조 18년(1818)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셋째 마당.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은 우리의 인쇄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국보이다. 불교의 경전은 경(經), 율(律), 논(論)으로 이것을 함께 일컬어 대장경이라 한다. 이 안에는 중생의 8만4천 번뇌를 없애기 위해 8만4천 가지의 법문이 있으므로 그 큰 수만을 들어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고려 대장경은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으로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비교될 수 있는 세계적인 자랑거리이다. 독일의 쿠텐베르크 인쇄보다 200년이나 앞선 정교한 서각과 만듦새는 세계 30여종의 장경판 가운데 첫 자리를 차지함에 모자람이 없다. 해인사는 일곱 번의 화재를 당하였으나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각은 한 번도 화재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700년 동안 고스란히 대장경이 봉안되어 오니 현대과학으로도 그 의문을 풀지 못한다고 한다. 습도와 통풍이 자연스럽게 조절되도록 땅에 숯과 횟가루와 찰흙을 넣어 습기를 조절하고 창문도 격자창으로 아래와 위의 크기를 다르게 설치하여 실내공기가 돌아나가게 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실현한 선조들의 슬기를 엿볼 수 있다.
팔만대장경이 소장된 장경각 내부
올해는 초조대장경을 발원한 지 꼭 1000년이 된다. 초조대장경은 강화도 선원사에서 1011년 만들기 시작했다. 선원사에서 최초의 목판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을 발원한 이래 1251년 팔만대장경이 완성됐다. 이규보(1168~1241)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판각 동기가 나와 있다. “현종 2년(1011)에 거란이 침입하여 현종이 난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했으나 물러가지 아니하여 군신이 무상의 대원을 발하여 경판을 새기기를 서원한 후에 비로소 거란병이 물러갔나이다.(후략)” 이처럼 고려는 초조대장경의 판각을 통해 불심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려 했다. 이것이 고려에서 처음 만들어진 대장경으로 송나라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판각한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소실됐다. 그리고 다시 대장경 판각을 완성(1251)한 것이 지금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세계 최대의 목판본으로 국보 제 32호이며,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이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 역시 국보 52호이면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이 장경각은 조선 초기에 세워져 여러 번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팔만대장경이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디면서 세 번의 큰 수난을 겪었다.
그 첫 위기가 임진왜란이다. 당시까지 가야산은 십승지지의 오지로 전혀 훼손되지 않은 상태였다. 해인사가 너무 깊은 오지라 왜군이 들어오지 못한 덕분에 다행히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조선총독부 데라우치 총리는 대장경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 양이 너무 많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대장경의 규모는 세로로 쌓으면 경판수가 8만1,350장으로 백두산 높이가 되며, 4톤 트럭 70여 대분에 해당한다고 한다. 한문에 능숙한 사람이 하루 8시간씩 30년을 꼬박 읽어야 전부 읽을 수 있고, 5,200만 자의 글자도 마치 한 사람이 쓴 것같이 똑같은 필체를 자랑한다.
6·25 전쟁 때에도 해인사가 폭격당해 사라질 뻔했다. 지리산의 북쪽 끝 지점과 연결되는 가야산은 빨치산의 거점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잦았다. 연합군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김영환 대령이 폭격하지 않고 직접 소탕에 나서 보호했다고 한다.
팔만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으로 피신해 있던 강화도 선원사에서 제작했다. 그 팔만대장경을 어떻게 합천 해인사로 운반했을까? 현재 학계에서는 대략 두 가지로 유추하고 있다. 강화에서 서해와 남해를 거쳐 낙동강을 타고 상류로 올랐다는 설과 한강 · 한양 · 여주 · 충주의 남한강을 거친 다음 육로로 괴산 · 상주의 산악을 타고 넘어 다시 낙동강 수운을 통해 개경포에 이르렀다는 설이다. 개경(開經)포는 ‘나루터에서 대장경을 풀었다’는 의미다. 대장경에도 개경포라고 나온다. 해인사에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팔만대장경을 기리기 위해 매년 성대하게 이운(移運)식을 거행해 오고 있다.
장경각 바로 옆에 최치원의 흔적이 또 남아 있다. 바로 학사대(學士臺)다. 그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신라 헌강왕으로부터 환대를 받고 첫 벼슬을 받은 직책이 한림학사의 작은 벼슬이었다. 그 한림학사에서 학사를 따와 학사대로 명명했다. 고운이 이곳에 앉아 쇠퇴하는 신라의 운명을 개탄하면서 안타깝게 거문고를 튕길 때 수많은 학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당시 거꾸로 꽂아 둔 지팡이가 살아 지금의 전나무로 자라 천년고목이 되었다고 전한다. 신기하게 고목의 가지들이 전부 아래로 처져 거꾸로 자란듯하다.
최고운의 전설이 서린 학사대
지금까지 우리는 해인사답사를 위해 세 마당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가야산은 천혜의 지리적 여건으로 아름다운 경치 19곳을 품고 있다. 이른바 가야산19경이 그것이다. 지금 합천군에서는 19곳을 돌아보는 둘레길을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천년을 이어온 해인사는 많은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팔만대장경이란 인쇄문화와 건물마다 걸려있는 현판과 주련에 남아있는 선조들의 아름다운 서예유적은 붓을 잡고 있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번 6회 서예세상답사를 통해 가야산에 귀의했던 최치원과 해인사의 서예유적을 살펴보고 한국서예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百聞不如一見].
일주문 주련
해인사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일주문에 걸린 주련을 보았다. “천만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도 옛날은 아니고[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 만년을 앞으로 나가도 지금이다[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 이 말은 불가의 시간관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모습은 과거의 업보가 쌓인 결과요, 지금의 모습이 바로 미래의 모습이라는 의미로 생각된다. 유월의 청정한 홍류동 숲길을 걸어서 주차장으로 내려오면서 시각적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덤으로 현재의 공덕이 중요하다는 가르침까지 얻게 되어 마음이 부자가 된 하루였다.
2011년 늦은 봄날 해인사에서
삼도헌 정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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