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문제의 고통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하소서
[황장엽 사망] “암살가능성 0%에 가깝다”
서울신문 | 입력 2010.10.11 02:47
경찰은 서울 가락동 경찰병원에 임시 안치한 황씨의 시신을 곧바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내 부검을 실시하고, 오후 7시45분쯤 다시 장례를 위해 서울 아산병원으로 옮겼다. 북한민주화위원회 등 30여개의 북한 단체 관계자와 지인들은 시신이 아산병원에 도착한 뒤 황씨의 수양딸로 알려진 김숙향씨를 상주로 정하고 임시 장례위원회를 꾸렸다. 위원회는 장례를 국가에 현격한 공로가 있는 인물에게 시행하는 '사회장'으로 5일간 치르고 시신을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하는 방안을 정부와 논의하고 있다. 또 장례위원장은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장례위원회 명예위원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맡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인 1997년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여 황씨의 한국행을 성사시켰던 인연이 있다.
경찰에 따르면 황씨는 이날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졌다. 오전 9시 30분 평소 황씨와 함께 안가 2층에 머무르던 신변보호팀 직원은 방에서 기척이 들리지 않자 방문을 두 차례 두드렸다. 황씨는 보통 이 시각이면 거실에 앉아 헛기침을 하는 등 활동을 시작하는데 이날 따라 방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 든 직원은 "안 나오십니까."라고 재차 질문했지만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그제서야 직원이 당직실에 있는 비상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 급히 방안 욕실을 확인한 결과 알몸 상태의 황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씨는 욕조 속에서 따뜻한 물에 몸을 반쯤 담근 채 호흡이 이미 정지된 상태였다.
그러나 황씨가 공교롭게도 북한이 대내외에 '3대 세습체제'를 발표한 미묘한 시점에 사망해 일각에서는 암살 의혹도 제기됐다. 그는 지난 3월 말 미국을 비밀리에 방문, 3대 세습체제를 강도 높게 비난한 바 있다. 또 황씨가 사망한 10일은 북한의 최대 국경일 중 하나인 '노동당 창건일(10·10절)'이어서 이런 의혹이 더욱 부각되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북한 전문가는 "천안함 사태와 북한의 3대세습 등 굵직굵직한 이슈가 잇따라 터지면서 보수단체를 중심으로 황씨의 사망시점에 대한 의문과 암살을 당했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은 황씨가 기거했던 논현동 안가에 외부인의 침입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암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입장이다. 24시간 출입과 외부 연락은 물론 식사 등을 모두 철저히 검사하기 때문에 암살 가능성은 '0%'에 가깝다는 것이다.
실제로 황씨가 거주했던 안가는 3m가 넘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담장 안쪽으로 쇠고리와 가시철망이 설치돼 외부의 침입이 쉽지 않다. 또 지붕과 담장에 7대의 CCTV가 설치돼 있고 10여개의 적외선 센서도 작동되고 있다. 건물 안쪽에는 각종 화기로 중무장한 20여명의 신변보호팀이 황 전 비서를 밀착경호했다. 저격에 대비해 2층에는 창살과 불투명 방탄유리를 설치하고, 마당에 맹견(猛犬)을 풀어놓기도 했다.
<與 지도부, `황장엽 빈소' 대거 조문>(종합)
연합뉴스 | 입력 2010.10.11 12:04 | 수정 2010.10.11 12:15
김 원내대표 등 지도부는 이날 조문을 한 뒤 상주인 수양딸 김숙향씨와 탈북자 대표들에게 "북한이 자유의 나라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셔서 안타깝다"고 위로했다.
그는 "김정은 세습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가셔야 하는데.."라며 "아마도 김정은의 3대 세습은 보지 못하겠다고 일찍 가신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김 원내대표는 면담이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황 선생은 2천300만 북한 동포들이 고통받는 것을 알리기 위해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의 희생을 감수하며 이곳에서 많은 역할을 하셨고,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황 선생의 월남으로 북한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사파나 종북주의자들이 많이 전향했다"면서 "황 선생이 국가 차원의 예우를 받아야 하고 그렇게 노력하겠다고 장의위원장에게 말했다"고 전했다.
김 원내대표는 `장지가 국립현충원이냐'는 질문에 "어제 돌아가셔서 절차가 논의 중이다. 결론이 난 것이 없지만 한나라당은 최고의 예우를 받도록 건의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그는 `정부가 북한의 눈치를 보고 있어서 최고 예우를 해줄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는 질문에는 "모든 것이 추측이다"면서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이날 황 전 비서의 빈소 방문에는 김 원내대표를 비롯해 나경원 정두언 서병수 최고위원, 고흥길 정책위의장, 배은희 대변인 등이 동행했다.
한나라당 지도부에 이어 이재오 특임장관도 이날 오전 황 전 비서의 빈소를 찾아 조문을 했다.
상주인 김숙향씨는 이 장관에게 "(황 전 비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만나기 원했는데 워낙 바쁜 분이어서..."라며 안타까워했고 이 장관은 "저도 만나고 싶었다"고 답했다.
이 장관은 조문을 마친 뒤 내실에 들어가 탈북자 대표 등과 장례절차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탈북자 대표들은 이 자리에서 "황 전 비서가 국가유공자는 아니지만 현충원에 묻힐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이 장관은 "통일부와 협의해보겠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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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유서 "평양에 돌아가 가족품에서.." | ||
기사입력 2010.10.10 18:28:01 |
국내에 입국한 지 13년이 흘렀지만 그는 이 유서에는 가족과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면서도 자신이 망명을 선택할 밖에 없는 심경이 그대로 담겨 있다. 황 위원장은 국내 입국 이후에도 유서대로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다. 그만큼 이 유서가 황 위원장의 삶에 대한 회한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의미다.
사랑하는 박승옥 동무에게
내가 당신까지 속인 채 당신을 버리고 이곳에 와 보니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였고 나와 당신의 생명이 얼마나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가를 새삼스럽게 느꼈소. 당신이 걱정하며 머리 숙이고 있는 모습이 떠오를 때면 나처럼 인정 없는 사람도 막 미칠 것 같소.
할아버지에게 욕을 먹고 자기의 자주성을 지켜 항의해 보려고 복도 구석에 누워 있던 지현이, 호의를 표시하며 환심을 사려고 장난감을 가지고 막 달려오던 어린 지성이를 생각할 때는 막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소.
나 때문에 당신과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모진 박해 속에서 죽어가리라고 생각하니 내 죄가 얼마나 큰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오. 나는 가장 사랑하는 당신과 아들딸들, 손주들의 사랑을 배반하였소. 나는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를 가장 가혹하게 저주해 주기를 바라오.
나는 나를 믿고 따르며 나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어온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배반하였소. 그들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욕하는 것은 응당하다고 생각하오. 가슴만 아플 뿐 사죄할 길이 없소.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저 세상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고. 저 세상에서라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소.
만일 조선노동당이 지금의 비정상적인 체제를 버리고 개혁 개방을 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한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한다면, 비록 그것이 나를 속이기 위한 술책이라 하더라도 나는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들의 품속에서 숨을 거두고 싶소.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이별을 한 이 아픈 가슴을 이겨내며 내가 얼마나 더 목숨을 부지할지는 알 수 없으나 여생은 오직 민족을 위하여 바칠 생각이오. 나 개인의 생명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고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며 한민족의 생명보다는 전 인류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내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만 알아주기 바라오.
사랑하는 박승옥 동무!
당신이 이 편지를 받아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언제 목숨을 끊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유서 삼아 적어두는 것이오.
1997년 2월 17일
베이징 한국 총영사관에서
황장엽
현재까지 외부로 드러난 고인의 가족으로는 수양딸 김숙향 씨(68·황장엽민주주의건설위원회 대표)가 유일하다. 그러나 황씨에게는 사실혼 관계인 부인(49)과 아들(11)도 있다고 <뉴시스>가 11일 보도했다.
이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1997년 입국 후 국가정보원 측이 추천한 비서 후보들 가운데 황씨가 직접 선택한 여성이 현 부인이다. 그녀가 낳은 아들(11)은 북의 위협을 우려,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가 현지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다. 누구의 아들인지 한 눈에 알아볼 정도로 아버지를 빼닮았다.
하지만 황씨의 호적에는 이 부인과 아들이 올라있지 않다. 아들도 ‘황씨’가 아니라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부인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남편 황씨와 아들을 돌본 것으로 알려졌다.
황씨는 또한 상당한 유산을 남겼다. 황씨의 사망 장소인 서울 논현동 안전가옥은 국가재산이 아니라 황씨 개인 소유라는 설도 있다. 황씨는 또 부인에게 이 안가 인근의 5층짜리 빌딩을 양도했고, 부인은 언니 명의로 건물 1층에서 대형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 11일 오전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장례식장에서 황씨의 수양딸인 김숙향씨가 분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
부인은 유산 상속문제를 매우 걱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부인을 잘 아는 사람은 “황씨의 상속인은 수양딸이다. 황씨는 사후 자신의 재산을 일단 수양딸에게 넘긴 뒤 아들, 부인과 분배토록 약정서 같은 것을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황씨는 13년 전 적지않은 돈을 갖고 온 데다 정부과 각계의 후원금, 특강료, 저작물 인세, 석좌교수 강의료 등으로 상당한 부를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산분쟁이 빚어질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편 고(故) 황 전 비서의 빈소에 상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숙향 씨(68)는 13년 전 황 전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할 때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친서를 수차례 전달한 중개인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날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김 씨는 영문학 교수 출신으로 김철호 전 명성그룹 회장(72)의 여동생이다. 80년대 초부터 금강산 관광·개발을 추진해 온 김철호 회장의 대리인 자격으로 북경에 머무르며 북한 인사들을 접촉했고, 이 때 황 전 비서와 함께 망명한 김덕홍씨와 인연을 쌓은 것을 계기로 그들의 망명을 돕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황 전 비서의 망명 후 그를 도와 북한민주화운동을 함께 하면서 수양딸이 됐고, 황장엽민주주주의건설위원회 대표를 맡아왔다. 김씨는 가끔 안전가옥에서 혼자 지내는 황 전 비서를 찾아갔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황 전 비서와 함께 망명한 김덕홍씨는 장례식장을 찾지 않았다. 한 탈북자단체 관계자는 “김씨가 조화는 보냈는데, 조문하러 오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화해무드가 조성되던 2002년 미국에 가서 반 김정일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국정원의 요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지 않은 황 전 비서와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데일리안 = 신동규 기자]
[인터뷰]故황장엽 수양딸 김숙향씨 "피보다 진한 사이"
뉴시스 | 민지형 | 입력 2010.10.11 21:03 |
황 전 비서가 별세한 지난 10일 이후 이틀 째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빈소를 지키고 있는 김씨는 11일 오후 빈소 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아버지를 잃은' 심경을 털어놨다.
특히 처음 만났던 1995년을 회고하며 황 전 비서가 자신을 보고 "남한에 이렇게 정직한 여자가 있냐"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며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고 밝혔다.
황 전 비서가 돌연 별세한 것에 대해서는 "생물학적으로 자연사한 것일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는 북한의 세습 때문이었을 것"이라며 "어른은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단 한 시도 지체하지 않았다"고 추측했다.
다만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다 이루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고통스럽고 괴로웠다"고 심경을 밝혔다.
다음은 김씨와의 일문일답.
-언제 황 전 비서 만났나.
"1995년도에 신양에서 만났다."
-황 전 비서의 사망원인은 뭐라고 생각하나.
"자연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원인은 북한의 세습 체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은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서 한 시간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북한은 변화가 없었다. 울분을 견디지 못해 저렇게 심장마비가 온 것 같다"
-심정이 어떠나.
"착잡하다. 어른은 햇볕정책을 원하지 않았다. 또 하고자 하는 일을 통제아래서 있다 보니 뜻을 다 못 이루는 어려움 등도 있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워하셨다. 이번 정부가 시작된 지 2년 반인데 이제 조금 활동을 하시고 자유로워졌다. 본인의 뜻을 이루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는 때 어른이 돌아가셔서 아쉽다."
-황 전비서가 하려던 일은 뭐였나?
"북한의 독재가 3세대까지 가는 것과 남한이 온전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남한에 좌파가 너무 많다. 정체성이 올바르지 못한 국민들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하면 이들을 옳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사람으로 엮어나갈까' 등을 고심했다. 우선 탈북자들만이라도 어른이 교육을 시키고 싶어 했다. 그런데 정부의 후원문제도 있고 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부의 후원은 무엇을 말하나?
"교육을 위해서는 정부의 보조가 필요한데 이뤄지지 못했다. 또 국민들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심어주는데 본인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본인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독재 3대 세습에 대해 뭐라고 표현했나?
"독재를 저렇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계속해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내부로부터의 권력투쟁으로 조만간 무너질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사망 소식은 언제 들었나?
"아침에 사망한 뒤 경호하는 데서 신고를 하고나서 받았다. 조사 직후였을 것이다. 저는 어른하고 제도적으로 관계 돼 있으니깐. 부검하는데도 입회를 했다."
-유일하게 한 것인가?
"유족 측에서는 저 혼자 봤다."
-고인의 마지막 표정은?
"조용하고 편안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말?
"지난주 목요일에 어른께서 '제일 앞에 서는 사람이 몸이 불편해서는 안 된다. 건강 조심하라'고 했다. 오히려 제가 평소 더 몸이 좋지 않았다. 본인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아버지였나?
"아버지라기보다는 동지적인 입장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가치관이 같은 동지적인 입장을 뜻한다. 저한테 '동지' 그랬다."
-(황 전 비서가) 동지라고 불렀나?
"김 총재라고 불렀다. 편지를 자주했는데 그 때 동지라고 그렇게 얘기했다."
-아버지라고 불렀나?
"저는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편지는 무슨 내용이었나?
"건강을 절대 잃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너를 믿고 있는데 니가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지 않느냐, 유업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돌진하자는 내용이었다."
-함께 했던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해마다 국회에 갔던 기억이 있다. 윤중로 벚꽃놀이를 14년 따라다녔다. 그런데 올해는 어른이 못 가셨다. 새벽에 가곤 했었는데."
-고인이 나들이를 좋아했나?
"좋아하는데 경호가 있으니깐 어려웠다. 식사 약속 있을 때면 종종 외부로 나갔다. 정치인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때 제가 모시고 다녔다."
-여행은 안가셨나?
"1990년대에 워싱턴을 함께 간적이 있다. 어른이 뉴욕을 가고 싶어 했는데 방문 못했다. 뉴욕이 중심부라며 어떤지 궁금해 하셨다."
-처음 만났을 때 어떤 기억나나?
"그때 기억 때문에 많이 운다. (울먹이며) 1995년도에 만났다. 여러 가지 사연이 있지만 말로 다 못한다. 그리고 '나는 학자로 남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곤란한 질문이다. 남한에 혹시 아들이 있다고?
"황경모씨라고 북한에 있다."
-남한에 와서도 있다는 얘기가 있다?
"전혀 없다."
-초등학생 어린아이라고?
"오늘 거론할 만한 얘기가 아니다."
-그럼 엄모씨를 만난 적은 있나?
"저도 안다."
-언제 가족이라고 느꼈나?
"세곡동 국정원 안가에 있을 때다. 어른은 오신지 얼마 안 됐고 활동에 규제를 받고 있을 때였다. 서로가 많은 대화를 했고 많은 교감을 나눴다. 피를 나눈 것보다 더 많이 됐다."
-언제 수양딸로?
"정확하게 1998년도 12월에 입적했다. 어른께서 먼저 연락이 했다. 가족이 있어 주저했었다."
mjh@newsis.com
[Why뉴스] 황장엽 현충원 안장, 왜 이의를 제기하나?
노컷뉴스 | 입력 2010.10.13 08:09 | 수정 2010.10.13 08:51
뉴스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뉴스의 행간을 속시원히 짚어 준다. [편집자 주] 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에 대해 정부가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함에 따라 황 씨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국민여론은 추모는 좋지만 국립현충원 안장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그래서 오늘 Why뉴스는 '황장엽 현충원 안장, 왜 이의를 제기하나?' 이런 주제로 준비를 했다.
▶국립현충원 안장이 기정사실화 된 거냐?
=그렇게 가고 있다.
국민훈장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야 하지만 장례일정 등을 감안해 대통령을 재가를 받아 훈장을 먼저 전달하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서 공식 추서하는 그런 절차를 밟게 된다.
훈장추서가 결정됨에 따라 통일부 장관이 12일 국가보훈처에 국립현충원 안장을 신청했다.
이에 따라 국립현충원 안장심의위원회가 13일 오전 열릴 예정이다.
안장심의위원회가 안장을 결정하면 황장엽 씨는 북한 노동당 당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게 된다.
▶안장심의위원회에서 부결되거나 그럴 일은 없나?
= 안장심의위원회는 15명의 민간위원으로 구성이 돼 있다.
부결될 수도 있지만 정부차원에서 국립현충원 안장을 위해 훈장을 추서한 만큼 부결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훈장추서 자체가 통치행위이기 때문에 안장심의위원회가 국민여론을 감안하더라도 부결하지는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안장심의위원회에서는 묘지의 규모 등도 결정하게 되는데 대통령은 264㎡ 이내 3부 요인들이나 사회적 공헌자 등도 26.4㎡ 이내로 규모가 제한돼 있고 일반 안장자들의 경우 3.3㎡로 정해져 있다.
황장엽 씨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규모의 묘지가 주어질지도 관심사이다.
▶그런데 오늘의 주제가 '황장엽 씨의 현충원 안장, 왜 이의를 제기하나?'이니까 현충원 안장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냐?
= 그렇다. 인터넷과 각 언론매체마다 국립현충원 안장 논란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다음 '아고라'에는 한 누리꾼이 < 고 황장엽의 국립묘지행 반대합니다. 전직 공산당원의 국립묘지행 결사반대합니다. > 라는 제목으로 누리꾼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12일 오전에 서명운동을 시작했는데 800명이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다음 달 말까지 50만 명의 서명을 받는 것이 목표다.
이 누리꾼은 서명운동을 벌이는 이유를 "6.25당시 북한군과 전쟁으로 순직하신 분들이 대다수인 국립묘지에 전직 공산당원이 묻힌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더 이상 사유를 말하는 건 구구절절합니다. 국립묘지는 대한민국을 위해서 순직하신 분들이 편안하게 쉬시는 곳입니다. 감히 황장엽 씨 같이 북한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권력투쟁에 패배해 넘어온 이가 묻힐만한 곳이 아닙니다. 국립묘지행 반대합니다"고 밝히고 있다.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몇 개를 소개하자면 "국립묘지에 안장된 호국영령들이 울부짖는다../ 자신도 책임이 있는 사람이지만 그토록 민족분단을 아파했다 하니, 화장해서 임진강에 뿌리는 것이 옳다. / 당연반대 왜 우리 작은아버지께서 6,25때 전사하셨거든요 공산괴뢰도당 과 싸우시다가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호의호식 하면서 살다가 갔으면 됐지 무슨 훈장은.." 등등의 내용이다.
▶추모 자체를 반대하는 거냐?
= 그건 아니다. 여론의 반응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추모는 좋다. 그러나 호국영령들이 쉬고 있는 국립현충원 안장은 반대다"라는 것이다.
남으로 망명해서 탈북자들의 생활 환경개선과 북한의 민주화 그리고 남에서의안보의식 고취 등이 공로가 있는 만큼 추모를 하고 장례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유공자로 보기에 뚜렷한 공적이 있지도 않은데 나라를 지키다 희생된 호국영령이나 독립유공자들과 함께 안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추모에 대해서는 찬성하지만 국립현충원 안장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팽팽하다. 이런 얘기냐?
= 그렇다.
찬성하는 쪽은 "북한 고위 간부였다는 사실은 망명 전의 일이고 망명후북한주민의 인권과 통일을 위해 일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반대하는 쪽은 "황장엽 씨가 아무리 북한 체제를 비판했다고 하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을 입안하고 확립한 사람이므로 잠깐 동안의 뉘우침이 있었다고 해도 일생동안 해온 반민족적 죄를 씻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는 "국가 차원에서 당연한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자유선진당도 비슷한 취지로 찬성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보수를 자처하는 군사평론가 지만원 씨는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주체사상을 현충원에 모시는 얼빠진 나라, 국가에서는 상징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대한민국이 주체사상을 현충원에 모시는 얼빠진 나라가 된 것이다"고 주장했다.
소설가 조정래 씨는 황장엽 씨에 대한 훈장추서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트위터에 올라온 글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황장엽이 훈장 받고 현충원에 묻힌단다. 박정희 때 중정부장 지낸 김형욱이 북한에 망명해서 박정희 비판하고 훈장 받은 후 혁명열사릉에 묻히는 거나 괴벨스가 이스라엘에 망명해서 히틀러 비판하고 훈장 받는 거랑 다를 게 대체 뭐냐?"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리 망명을 하고 북한체제를 비난했다고 하지만 황장엽의 전력을 보자면국립현충원 안장은 안 된다 이런 얘기인 것 같은데?
= 그렇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황장엽 씨가 국가유공자로서 훈장을 미리 받았다면 국립현충원 안장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황장엽 씨의 경우는 유공자여서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것이 아니라 안장하기 위해서 국민훈장 그것도 1등급인 무궁화장을 추서한 것이다.
황장엽 씨의 경력을 보면 김일성대 총장을 10년 넘게 역임했고 노동당 비서를 10년 넘게 역임했다. 특히 주체사상을 입안하고 창시해 '주체사상의 아버지'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인생의 대부분을 북한공산당의 이론적 토대와 엘리트 육성에 몸바쳐오다 말년에 권력투쟁에서 밀리고 부정부패가 발각돼 위기에 처하자 망명길에 올랐다.
북에서도 양지에서 살았고 남에 와서도 비록 안가에서 생활을 하긴 했지만 큰 불편 없이 넉넉한 삶을 살았다.
북한 민주화운동을 한 공적이 있다고 했는데 황장엽 씨의 운동으로 북한의 어떤 부분이 바뀌었는지 어떤 영향을 줬다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중국의 류사오보의 경우를 보자 미국에서 생활하다 천안문사건이 터지자 중국으로 돌아가 단식을 하고 12월 중국의 지식인들과 함께 공산주의 일당 독재를 종식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내용의 '08 헌장'을 발표한 혐의로 중국 정부에 구속돼 지난해 국가전복선동죄로 징역 11년 형을 선고받았다.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황장엽 씨는 망명 후에 북한정권을 비난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공격했다는 이유만으로 국민훈장을 추서하고 국립현충원에 안장해야 하는 것인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고인을 추모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겠지만 무리하게 요건을 갖춰가면서까지 국립현충원 안장을 추진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YS "황 선생 얼마나 외로웠겠나"
명예장례위원장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빈소에 들러 "황 선생과 한 달에 한 번 우리집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며 "탈북 후 부인과 아들, 딸이 모두 죽어 가족이 하나도 없으니 얼마나 외로웠겠느냐. 나와 만나는 것을 큰 위로로 삼았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이어 그는 "황 선생이 하루에 식사를 한 끼만 해 몸무게가 40㎏밖에 안됐다. 그래서 돌아가신 것 같다"고 애석해했다.
맹 장관은 이날 오후 빈소를 찾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임태희 대통령실장은 유족을 위로하면서 "생전이나 돌아가신 후나 국가가 고인을 지켜드리고 영면하시도록 도와드리는 게 도리라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며 "관련 절차가 진행 중이지만 황 전 비서의 현충원 안장이 결정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유족과 장례위원회는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고인의 뜻을 받들어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 방안을 정부와 협의해왔다. 오후 늦게 빈소를 찾은 이정국 천안함 전사자 유가족협의회 전 대표는 "북한에 친누나가 살고 있다"며 "평소 황 선생이 남북관계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점 등을 존경해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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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 안장식이 14일 오후 200여 조문객들의 애도 속에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서 거행되고 있다. 대전=사진공동취재단
'벌써 떠나야 할 시간이라고 /이 세상 하직할 영이별 시
간이라고 /값없는 시절과 헤어짐은 아까울 것 없건만 /밝은 앞날 보려는 미련 달랠 길 없어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가나'
14일 오전 서울아산병원에서 통일사회장으로 엄수된 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영결식에서 고인의 유작시 '이별'이 낭독되자 장내 곳곳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죽음을 예감하고 그토록 바랐던 북한의 민주화와 동포를 보지 못함을 애달파하는 절절함이 고인을 떠나 보내는 상주 김숙향(68)씨와 장례위원회 관계자, 명예 장례위원장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현인택 통일부 장관 등 200여 조문객들의 눈물샘을 크게 자극한 듯 했다. 장례위원장인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이어진 조사에서 "선생님이 들고 계시던 북한 민주화의 깃발이 평양에 힘차게 꽂히는 그날 저희들은 비로소 선생님을 보내드리고자 한다"며 애통해했다. 황망한 표정으로 줄곧 시선을 깔고 있던 수양딸 김숙향(68)씨는 박 전 국회의장의 조사와 조명철 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의 추도사에 연신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황 전 비서와 24시간을 함께 했던 경호요원들은 영결식 후 태극기로 뒤덮인 오동나무 관을 운구하며 마지막 길을 호위했고 인민군 출신 탈북자인 북한인민해방전선 회원 20여명은 전투복 차림으로 운구차 양쪽에 도열, 거수경례를 올렸다. 운구행렬이 대전 유성구 계룡산 옥려봉 아래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도착한 때는 이날 오후 3시. 장례위원들은 위패와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앞세워 관을 운구한 뒤 안장식을 거행했다. 고인이 탈북 후 친하게 지냈던 황인성 전 총리와 주재황 전 대법관도 이날 남향의 양지바른 이곳에 안장돼 장례위원 사이에 "예사롭지 않다"는 말이 나왔다. 하관과 관에 흙을 뿌리는 허토식이 진행되면서 유족과 장례위원들은 눈물로써 고인과 작별했다. 상주인 김숙향씨는 "어른의 위업을 계승하는 일로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에 보답하겠다"며 안장식을 함께한 200여 조문객에게 사의를 표했다. 함께 탈북했지만 2002년 미국방문 문제로 의견충돌을 빚은 후 고인과 갈등해온 김덕홍 전 탈북자 동지회 회장은 조화만 보내고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묘역에는 '제26호 국가사회공헌자 황장엽의 묘'라고 적힌 목비가 세워졌으며 고인의 활동, 저서 등이 기록된 지석은 유족과 합의 후 마련될 계획이다.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탈북인사로는 1983년 2월25일 미그19기를 몰고 귀순해 공군 교수 등을 지낸 고 이웅평 공군대령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충원 관계자는 "고인의 안장을 계기로 묘역을 근접 촬영할 수 있는 폐쇄회로TV와 경비인력을 보강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
"황장엽 발견 전날 이미 심장질환으로 사망"
연합뉴스 | 입력 2010.10.19 10:34 | 수정 2010.10.19 10:46 |
(서울=연합뉴스) 김연정 기자 = 지난 10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고(故)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숨진 채 발견되기 전날 반신욕을 하다가 심장질환으로 이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인조사 결과가 나왔다.
서울지방경찰청은 19일 오전 브리핑을 통해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황씨는 9일 오후 3시10분께 자택에 도착해 반신욕을 하던 중 심장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며 "타살혐의점이 없어 내사 종결한다"고 밝혔다.
또 시신 발견과 검안 당시 이미 복부가 팽창, 부패해 푸른색을 띄고 있었고, 사체 강직이 상당히 풀려 있었다고 설명했다.
황씨는 강의 수강생인 강모(62.여)씨와 매일 오후 6∼8시에 안부전화를 하는데 지난 9일에는 전화가 없었고, 반신욕 이후에 별도의 식사를 않고 가벼운 간식을 먹는데 가사도우미가 냉장고에 넣어둔 간식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황씨는 사망 당일 오전 9시40분께 강남구 논현동 사무실에 출근해 일과를 보다가 오후 1시20분께 수강생 강씨가 만들어 준 콩나물무침, 배추김치, 부추김치, 과일 등으로 간단히 점심을 떼우고서 오후 3시께 퇴근한 것으로 파악됐다.
오후 3시10분께 자택에 도착한 황씨는 신변보호팀의 부축을 받으며 2층 방에 들어가 평소처럼 안에서 문을 잠그고 휴식에 들어갔으며, 이날 퇴근 후에도 매일 규칙적으로 해온 반신욕을 한 것으로 추정됐다.
황씨는 10일 오전 욕조 안에서 알몸으로 우측 방향으로 비스듬히 누운 채 입과 코가 반쯤 욕조 물에 잠겨 숨진 상태로 신변보호팀에 발견됐다.
경찰은 "평소 황씨가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려 귀가 즉시 방문을 잠그고 아침 출근시간까지 외부 출입이 전혀 없으며 신변보호팀에도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점 때문에 사망 사실을 늦게 안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황씨는 지난해 1월부터 계단을 오르내릴 때 부축을 받아야 하는 등 기력이 쇠약해졌고 지난 3월에는 체력 저하로 야간 강연 요일을 조정했으며 5월엔 경찰병원에서 부정맥 소견을 진단받아 매일 약을 복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황장엽의 탈북비화 말한 수양딸 김숙향 |
황장엽 "주체사상 악용에 자책" |
주체사상의 창시자(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남한으로 탈북한 사건 자체로 남북한의 체제경쟁은 승부가 났다. 황장엽의 탈북은 한반도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만한 사건이다.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의 탈북귀남(脫北歸南)으로 대한민국은 근본적으로 사상전에서 북한을 이겼음을 만방에 선포했다. 황장엽은 남한에서 탈북자들과 더불어 북한사회를 자유민주체제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북한동포들을 해방시키는 데에 황장엽 위원장은 죽는 날까지 헌신했다. 황장엽의 탈북은 주체사상의 탈북이라고 할 수 있다. 황장엽 선생의 유품들은 그의 수양딸인 김숙향씨가 국정원으로부터 모두 돌려받아 관리한다고 1일 전했다.
앞으로 황장엽 선생에 대한 거짓 소문과 악의적 폄하에 대한 교정을 김숙향씨는 계속할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한 좌익세력은 황장엽을 폐인으로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도덕적, 정치적, 이념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에 악용할 것이다. 황장엽 선생이 남긴 바른 말을 파괴하기 위해서, 김정일의 도우미 역할을 했던 남한의 좌익세력은 그의 사생활이 부도덕했다고 비하하는 작업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남한사회에서는 지금 김정일의 세습독재집단을 살려주기 위해서 혈안이 된 종북세작들이 너무도 번성해서, 정관계, 언론계, 학계, 종교계에 김정일의 노비들이 우굴댄다. 황장엽의 예상과는 달리 남북한 좌익세력은 생존에 끈질기다. -조영환 편집인-[최보식이 만난 사람]‘그날의 비밀’에 입을 연 ‘황장엽의 수양딸’ 김숙향"도청을 피해 어른은‘자유를 달라’고 썼다… 그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어른에게 말했다. '만약에 자리를 뜨면 남한으로 오셔야지요.' 그 뒤에 이 말로 인해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 그분이 남한에 내려와 고통받는 것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내가 저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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