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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含閒 2010. 3. 11. 17:12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 이미지출처/경향신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남은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나를 채찍질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경주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우월하고 또 다른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무력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앞서 간다 해도 영원히 초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 또한 나의 적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피라미드 위쪽에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전문과정에 돌입한다. 고비용 저수익의 악순환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세계화, 민주화, 개인화의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아니, 이런 건 잊은 지 오래여도 좋다.
그런데 이 모두를 포기하고 바쳐 돌아온 결과는 정말 무엇이었는가.
우리들 20대는 끝없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깊은 분노로.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유지자가 되었던 내 작은 탓을 묻는다.
깊은 슬픔으로.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학비 마련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하고 계신 부모님이 눈 앞을 가린다.
'죄송합니다, 이 때를 잃어버리면 평생 나를 찾지 못하고 살 것만 같습니다.'
많은 말들을 눈물로 삼키며 봄이 오는 하늘을 향해 깊고 크게 숨을 쉰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자퇴하며

 

 

 

어떻게 사는 게 바른 삶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모두가 자기 기준의 삶의 방식이 있게 마련이니까 

 

김 예슬 양 !

초원을 질주하는 말처럼 

멋진 삶 살아 가시길 빕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군요” 고대생 ‘자퇴선언’ 학생 지지 쇄도

문화제로 증폭지지 대자보·각계 블로그 글로 응원

경향신문 | 김지환 기자 | 입력 2010.03.17 03:02 |

 
16일 오후 5시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서 '자발적 퇴교'를 선택한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를 응원하기 위한 작은 문화제가 열렸다. 지난 10일 김씨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으로 대자보를 붙인 곳의 맞은편이다. 대자보는 치워졌지만 김씨의 뜻에 공명한 대학생들이 모였다.

응원 문화제에선 대학생들로 구성된
인디밴드의 공연과 한 줄씩 댓글을 달아 단체 대자보를 제작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대자보에는 "언니 멋있어요"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문화제를 준비한 이들은 "김예슬씨의 선택을, 그리고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 자신의 삶을 응원하고자 준비된 작은 공연"이라고 말했다.

'니 맘대로 자유발언대'에서 대학생들은 김예슬씨의 선언이 자신들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애써 피하려 했던 지점을 환기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모씨(25·고려대 법학과 3학년)는 "김씨의 대자보를 보고 나만 힘들어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돼 반가웠고, 또 안심했다"고 했다. 김모씨(26·고려대 철학과 4학년)도 "김예슬씨가 제기한 문제의식은 우리 모두의 고민"이라며 "대학 사회 내에서의 토론을 통해 다니고 싶은 대학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온라인에서도 김씨의 대자보에 공감하는 각계의 글이 이어지고 있다. 오슬로국립대
박노자 교수는 개인 블로그에 '대학거부자에게 지지를 보내며'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을 통해 "고려대 경영학과 김예슬 학생의 '자퇴 선언'에 대한 기사를 읽었을 때에 거의 눈물 날 정도로 기뻤다"고 말했다. 이어 "대학이란 이미 충분히 '길들여진' 인간 기계들 중에서 고가로 판매될 수 있는 고급 기계들을 생산해내는 '공장'"이라며 "서로 연대를 해, 대학에서 '인간'과 '사회'를 다같이 복원해보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제2의김예슬, 서울대에도 대자보 "싸우겠다"

머니투데이 | 황무성 인턴기자 | 입력 2010.03.30 09:26 





↑ 지난29일밤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건물 앞 게시판에 붙은 08학번 채상원 씨의 대자보

지난29일 저녁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08학번 채상원씨가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아니 싸움을 시작한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교내에 부착했다.

채 씨는 글에서 지난10일 있었던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자퇴선언을 언급하며 "이렇게 낡고 답답한 대학에 우리의 미래가 있을까"라고 비판했다. 그는 "세상은 이미 변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했다"며 "격변의시기,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우리를 구속하는 대학 내의 모든 구습과 싸워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발적 퇴교와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그러면서도 지금의 대학을 거부하기로. 대학의 주인이 되어 대학의 변화를 주도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30일 오전 현재 이 대자보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 건물 앞에 게시판에 붙어있다.
다음은 이 대자보의 글 전문.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아니, 싸움을 시작한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이 또한 나의 적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제공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대학 거부를 선택한 고려대 김예슬씨의 자보 中
얼마 전 고려대학교 김예슬 씨의 자퇴선언이 있었다. 혹자는 부적응자의 현실도피라 말하지만, 문제는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적응할 수 없는 현실의 구조 그 자체에 있다. 대학 거부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 우리들도 잦은 회의감에 휩싸이며 때로는 현실에 타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방황하기도 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12년간 어른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대학교에 들어가면 누릴 수 있다는 '자유', '낭만' 따위에 대한 환상을 가슴에 품고 묵묵히 내 친구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노력해왔다. 간신히 그 과정을 거쳐 대학교에 들어온 지금, 나는 우리가 어린 시절 가졌던 대학생활에 대한 환상은 그저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히려 대학이란 곳은 본격적 무한경쟁의 닫힌 공간일 뿐이며 그 공간은 우리에게 그 어떤 삶의 의미도, 방향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제2전공 의무화, 영어강의 확대, 상대평가제 등의 제도는 더욱 많은 것을 강요하고 무조건 일렬로 줄을 세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위기를 그 어떤 주류 경제학도 설명하지 못하고 패닉에 빠진 마당에 대학은 별 고민 없이 지난 수 십 년간 사용해온 커리큘럼을 답습하고 있다.

이렇게 낡고 답답한 대학에 우리의 미래가 있을까? 무한경쟁의 쳇바퀴에서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가지만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듯한 불안감, 가만히 있으면 남들에게 뒤쳐지는 것만 같은 불안감을 강요하는 이 대학에 우리가 상상한 대학생활이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해야 하는 사람, 대안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내야 하는 사람은 대학 교수님도, 정치인도 아니다. 바로 우리 대학생들이다. 우리의 삶을 그들에게 내맡길 수는 없다. 이에 나는 오늘 조용히 다짐을 해보려 한다. 자발적 퇴교와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그러면서도 지금의 대학을 거부하기로. 대학의 주인이 되어 대학의 변화를 주도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기로.

세상은 이미 변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했다. 보수적 인사들이 아무리 사회주의적 발상이다, 포퓰리즘이다 해도 우리 국민 대다수는 이제 무상급식이 아주 상식적인 정책이고 필요한 정책임을 느끼고 있다. 체벌 금지, 보충수업 선택권 보장 등이 포함된 경기도의 학생인권조례가 입법예고 됨으로써 학생들의 인권이 충분히 보장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이미 2007년에 "더 이상 세상은 평평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세계화의 시대가 아닌 지역화의 시대라는 의미이다. 또한 자유무역도 그 수명을 다하고 보호무역이 힘을 얻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변화의 시기에 한국 사회와 대학은 여전히 철지난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만을 외치고 있다.

격변의 시기,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우리를 구속하는 대학 내의 모든 구습과 싸워야 한다. 경쟁 일변도의 신자유주의의 피해들이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이 기존의 가치들이 더 이상 아무런 대안도 제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이 싸움은 더욱 절실하다.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커리큘럼, 창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획일화된 교육방식에는, 대학생을 미래 사회의 주체로 보지 못하는 낙후한 교육관이 근본에 자리하고 있다.

새 사회의 동력을 창출할 수 없는 대학에서는 그 어떤 비전도 찾을 수 없다. 우리 대학생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서 수업내용과 수업방식에서부터 시작해서 병든 대학 사회의 본격적 수술에 나서야 한다. 전체 대학 내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끌고 대학생 스스로가 대학의 주인으로 거듭날 준비를 해야 한다.

김예슬 씨는 자보에서 대학과 자본의 거대한 탑에서 자신 몫의 돌멩이가 빠져도 탑은 끄떡없을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이 탑을 반대하는 모든 우리 돌멩이들이 힘을 합쳐 흔들어보자. 그리고 우리들의 새로운 탑을 세우자. 시대는 더 이상 낡은 탑을 거부하고 새로운 탑을 요구하고 있다.

김예슬씨 “거대한 적 ‘대학·국가·자본’에 작은 돌을 던진 것”

고려대 자퇴생 김예슬씨 인터뷰

경향신문 | 김지환 기자 | 입력 2010.04.14 03:22 | 수정 2010.04.14 04:18

 

"안녕하세요." 지난 12일 오후 7시 경향신문사를 찾은 김예슬씨(24·여)는 밝게 웃었다. 대학 교정에 대자보를 붙이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한 달째. 세상으로 다시 나온 그의 손엔 「김예슬 선언」이라는 125쪽 분량의 작은 책자가 들려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대학을 거부한다는 게 단순히 치기어린 행동은 아니었다"며 "대학생활 내내 스스로에게 던졌던 물음 중 일부가 대자보의 내용이고 더 많은 고민들을 책으로 담아봤다"고 말했다. "사실 답보다는 물음이 많은 책"을 썼다는 그와의 인터뷰는 경향신문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ERISS) 사무실에서 2시간 넘게 진행됐다. 그의 이야기는 차분했지만 때로 단호했고, 함께 고통 받는 이들을 말할 때는 따뜻함도 느껴졌다. 다음은 일문일답.

고려대 경영학과를 자퇴한 김예슬씨가 지난 1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앞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지난달 10일 대자보를 붙이고 한 달 사이 비판이든 지지든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어떻게 지냈나.

"생각지도 못하게 격렬한 반응이 있었던 것 같다. 나로선 한 달 동안 (스스로) 차분해지는 시간을 보냈다. 김예슬이라는 개인보다는 메시지에 주목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처음엔 루머나 개인에 대한 관심이 제기됐지만 많은 분들이 갈수록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주셨다. 생각의 힘도 부족하고 살아낸 것도 부족한 터라 비판해주시는 분들이나 속울음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많은 분들이 쏟아낸 이야기를 통해 어떤 것을 느꼈나.
"3월 첫 수업시간에 대자보 전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선생님과 중학생, 거대한 시스템에서 빠져나오고 싶다고 토로하는 직장인들, 대학을 그만둘 용기는 없지만 마음만으로라도 대학 보이콧을 하겠다는 대학생이 있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접하며 서로의 생각이 연결되는 시간이었다. 이것이 정말 우리 사회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라는 걸 느꼈다. 교육과 대학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고통이 돼 버렸다."

-조용히 그만둘 수도 있었는데 대자보를 붙이고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이유는.
"너무나 약해서였다. 다시 비겁해질까봐, 다시 받아달라고 학교 문을 들어설까봐. 내 안의 비겁함과 싸우기 위해 그렇게 했다. 거대한 사회적 모순은 은폐되고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인 양 떠넘겨지는 세상이다. 그래서 무력한 개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고통이 깊어가고 있으니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했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대학생들이 대기업 하청업체가 된 대학에 절망하면서도 트랙에서 계속 경주를 이어간다. 실존적인 결단을 내리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용기라기보다는 끝이 안 보였다.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좋은 결혼을 하면, 뭐 하면, 뭐 하면…. 언제까지 트랙에서 경주마로 달려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앞으로 달려가야 할 길은 보이는데 내 영혼은 등을 돌려 불화하기 시작했다. 아파야 나으니까. 나부터 끝도 없는 트랙에서 멈춰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지? 왜 살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런 큰 물음을 할 수 있도록 특권처럼 주어진 게 대학 시절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불가능해진 시대다. 대학(大學) 없는 대학이 인생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지 않은가."

-대학생활의 고민을 압축해 본다면. 대학이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고려대에서 보낸 생활은 스펙에 매달리자니 젊음이 아깝고, 다른 걸 하자니 뒤처질까 두려웠던 시간이었다. 크게는 세 번의 사건이 있었다. 2005년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을 짓는 데 400억원을 기부한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가 수여되는 것을 막으려던 학생들이 출교당한 사건, 2006년 이스라엘과 미국이 석유자원 확보를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불의한 전쟁에 침묵하는 '글로벌 코리아' '글로벌 고대'에서 지내고 있는 나를 되돌아본 사건, 2008년 경영대 '이명박 라운지'에 앉아 신문에서 '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다'라는 말을 읽었던 사건이다. 이건 비단 고려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학이 이런 가치관을 부추기고 기업의 탐욕에 활짝 열려도 좋은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대학 내에서 대학을 바꿔보는 운동을 해볼 수도 있지 않으냐는 얘기도 나왔다. 이른바 '극단적인 선택'이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대학 내에서 대학을 바꾸려는 움직임도 중요하고 그런 분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대학은 공고해진 하나의 거대한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됐다. 기업에 인재를 조달하고 채용 일제고사를 기업 대신 실시해 등급을 매기고 있다. 대학의 존재 자체가 변화된 상황에서 안에서 바꾸는 것 이외에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성적경쟁의 의자에 앉아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야 하는 지금의 삶이 되레 더 극단적인 것 아닌가."

-대학거부 선언 후에 많은 '각주'들이 달렸다. 88만원 세대론에 대한 논의도 다시 불이 붙은 것 같다.

"우리 세대의 현실 문제를 88만원이라는 숫자로 풀어낸 부분은 인정한다. 하지만 88만원 세대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숫자만으로 담을 수 없는 진실이 축소되고 단순화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대학 거부선언 이후 88만원 세대의 저항이 시작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88만원을 188만원으로 올려달라는 것이 아니다. 등록금을 인하하고 비정규직 대신 정규직 일자리를 늘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청년실업의 문제를 넘어 국가가 모든 배움을 독점한 의무교육 제도, 자격증 유일잣대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 진보는 몸으로 살아내고 일상과 긴밀히 연결된 진보는 아닌 것 같다. 더 나아가 대학·국가·시장의 3각동맹이 공고히 하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 도시·기계 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의무교육이 아닌 대안적인 배움의 장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안 대학의 구체적인 상은 어떤 것인가.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이 있었다. 인간 자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한 나라 교육의 목표일 수 있는지 궁금하다. 모든 사람들이 인적자원화의 과정을 겪어 대학과 기업에 차근차근 보내지는 것이 의무교육의 실체다. 의무교육 문제는 말 그대로 배움의 권한을 국가가 독점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과정 속에서 배우고 겪는데 학교에서 커리큘럼을 잘 이수해야만 다음으로 갈 수 있는 자격증을 받게 된다. 또 의무교육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한다고 하지만 실은 처음부터 패배자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대안 대학은 구체적인 상을 이거다라고 제시하긴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지옥으로 가는 길을 알면 천국으로 가는 길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나. 문예창작과를 가지 않고도 시를 쓸 수 있고, 미대를 안 가도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의 편리를 위해 개성이 무시되는 걸 인정해선 안 된다."

-지인들과 부모님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특히 부모님의 반대가 컸을 것 같다.
"물론 반대를 많이 하셨다. 사실 부모님은 내가 배신했다고 느끼실 거다.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은 진정한 나 자신의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시대의 부모님들께 말씀을 드리면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모의 기대, 미련 이런 것들이 실상 어떤 것인가를 돌이켜보셨으면 좋겠다. 촛불집회 때 만난 중·고등학생들이 명박산성보다 넘기 힘든 게 부모산성이라고 하더라. 그 자체가 미래인 아이들이 상처받더라도 스스로 독립성의 날개를 키울 수 있게 사랑의 이름으로 길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대학·시장·국가의 3각 동맹에서 예슬씨 몫의 돌멩이가 빠졌지만 탑을 새로 세우려면 개인의 탈주만으론 불가능할 것 같다.

"방법론적인 이야기보다 각자가 품은 씨앗에서 어떤 꽃이 피어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학습된 두려움이나 난 무력한 개인이라는 두려움 앞에 지레 포기하지 않고 서로 격려하고 북돋우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미 균열은 시작됐다고 했지만 일상의 속도로 시스템은 계속 굴러가고 내 선언은 잊혀질 거다. 막막한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큰 존재다'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큰 존재들이 자기 안에 있는 물음들로 시작하고 옳은 일을 옳은 방법으로 밀어가는 힘을 믿으면서 갈 뿐이다."

-세상에 하고 싶은 또 다른 말이 있다면.
"사실 이 말로 인터뷰를 시작해야 됐는지도 모르겠다. 대학문을 넘지 않아서 수많은 차별을 감내하고 사는 농촌, 노동현장의 수많은 분들에게 나의 선언이 또다른 상처가 되었다면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다. 그런 곳에서 고되게 일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힘들다고 주저앉거나 절망할 수 없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그런 분들도 기업이나 시장에서 제품처럼 쓰고 버려진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박지연씨처럼. 비단 대학생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학 나오지 못한 분들의 고통은 더 크다. 대졸자가 주류인 사회라 더 조명되지 않을 뿐이다. 그분들을 내 삶의 거울로 비추면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20대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 정해진 몇 개의 직업이 꿈이 되어버린 것들에 대해 분노하면서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상상력을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학이 직업 소개소인가? - 정체성을 묻는 이들에게
홍석기 조회수801 등록일2010.04.14 06:39

존재의미와 정체성을 묻는 젊은이들게

 

대학에 입학하여 교수님 강의를 듣고, 도서관에 묻혀 공부를 하며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친구를 만나고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낭만은 대학생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이다.

화려한 캠퍼스를 거닐며 대학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미래의 사회적 공헌을 고민하게 되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최근, 어느 여대생이 나는 누구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사회의 불의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글이 세간에 떠 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나도 그 땐 그랬지." 하는 생각도 든다.


대학생이 고민하고 풀어야 할 숙제가 바로 그것인데 그런 문제를 풀지 않고 대학을 떠나는 것은 책임 회피이며 직무 유기이다. 어쩌면 게으른 자의 핑계며 이유에 불과할 수도 있다.

 


대학생이 고민해야 하고 갈등을 느끼게 되는 모든 문제들이 책에 다 쓰여 있다.

 

괴테와 톨스토이, 모차르트와 아인슈타인, 세종대왕과 안중근,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마키아벨리와 아담 스미스,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아우렐리우스, 바흐와 슈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등의 수많은 사람들이 동서고금을 통해 인간적 고뇌와 삶의 고통을 이야기 하며 인간의 욕망과 심리, 음악과 철학, 정치와 교육, 사회와 경제, 기술과 역사 등에 대해 수 천년 동안 논란을 벌이고 글로 쓰고, 책을 만들며, 작품을 남겨 놓았다.

 

그런 것들을 읽고 연구하고, 배우며 가르치고, 토론하고 논의하는 장소로 가장 적합한 곳이 대학이다.

 


과학의 역사(The history of science)와 군주론을 읽고, 클라리넷 5중주를 들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각하는 방법(How to think like Leonardo da vinci)을 배우고, 반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정치의 기술을 밑 줄 쳐 가며 읽어 보라.

어찌 그대들의 고민과 다를 수 있겠는가?


인터넷으로 뉴욕 타임즈를 읽으며, BBC CNN을 시청하며, 매 학기 원서를 열 권씩 읽을 수 있다면 굳이 별도의 TOEIC 점수가 필요할까?

 


혹시, 그런 학습은 하지 않으면서 인터넷과 문자 메시지와 TV에 빠져 가벼운 즐거움만 기대하면서 쉽게 고민하다가 그만 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어느 대학에 취업 특강을 하러 가서 차를 마시는 중에 어느 교수님이 필자에게 항의 비슷한 불만을 토로했다.

 

대학이 직업 소개소입니까?

대학이 직업 전문학교 입니까?

요즘 대학들은 왜 모두 그 모양입니까?

모든 대학생들이 취업에만 관심이 있는 겁니까?

대학은 학문의 성과를 취업률로 측정하려 합니까?


아니다. 이건 아니다. 대학에서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할 것만 제대로 배우면 취업 특강이 필요하지 않다. 기업에서 특별한 스펙(Specification)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책 많이 읽고, 사회문제와 국가의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가치와 존재 의미를 충분히 고민하고 연구했다면 굳이 이력서 한 줄 잘 쓴다고, 자격증 한 개 더 있다고 기업에서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 교수님께 부탁을 드렸다.

 

애들 제대로만 가르쳐 주십시오.

강의 시간에 졸지 않게 하시고,

좋은 책 많이 읽게 해 주시고,

TV와 인터넷 멀리하게 해 주시고,

강의시간에 문자 주고 받지 않게 해 주시고,

외모만 따지지 않도록 해 주시고, 거울만 보지 않게 해 주시며,

깊이 있게 생각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