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과 死

'무소유' 법정 스님 입적

含閒 2010. 3. 11. 14:32

往生極樂願  편히 쉬소서

 

<긴급>'무소유' 법정 스님 입적

연합뉴스 | 입력 2010.03.11 14:02 | 수정 2010.03.11 14:06

 



 

‘무소유’ 법정스님 입적(2보)

헤럴드경제 | 입력 2010.03.11 14:26

 

산문집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法頂)스님이 11일 오후 1시52분께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55세. 세수 78세.

법정스님은 3~4년 전부터 폐암으로 투병, 지난해 4월19일 길상사에서 열린 봄 정기법회 법문을 끝으로 지난해 6월7일 하안거 결제 법회, 12월13일 길상사 창건 기념법회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지난해 연말에는 제주도에서 요양했으나 올들어 병세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왔고, 입적 직전인 11일 낮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로 옮겼다.

법정스님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의식한 듯 2008년 11월에는 길상사 소식지에 실었던 수필들을 모아 수필집 '아름다운 마무리'를 출간했고, 지난해 6월과 11월에는 2003년부터 했던 법문을 묶은 첫 법문집 '일기일회'와 두 번째 법문집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이상 문학의숲 펴냄)을 냈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스님(속명 박재철)은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1955년 오대산을 향해 떠났지만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선학원에서 당대 선승인 효봉 스님(1888~1966)을 만나 대화하고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았다.

이튿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시작한 스님은 1959년 2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이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 통도사를 거쳐 1960년대 말 봉은사에서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작업에 참여했다.

스님은 1975년 10월부터는 17년간은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았으며 불일암 시절 초반인 1976년 4월 대표적인 산문집 '무소유'를 출간한 이후 불교적 가르침을 담은 산문집을 잇따라 내면서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스님은 1992년부터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지내면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잘하지 않았지만 1996년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기부받아 1997년 길상사를 개원한 후에는 정기적으로 대중법문을 들려줬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무소유', '영혼의 모음',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산방한담', '텅빈 충만', '물소리 바람소리', '버리고 떠나기', '인도 기행',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그물에 걸지 않는 바람처럼', '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깨달음의 거울(禪家龜鑑)', '진리의 말씀(法句經)', '불타 석가모니', '숫타니파타', 因緣이야기', '신역 화엄경',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스승을 찾아서' 등이 있다.

조계종과 길상사, 법정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 문중 등은 현재 장례절차를 논의 중이다.

 

사회

`버리고 또 버렸던` 법정스님의 생애 [연합]

11일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1990년대 초반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금생에 내가 익히면서 받아들이는 일들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대학 재학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집을 나선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로 서울에 내린 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삭발하고 먹물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바퀴 돌았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부목(負木.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부터 시작해 행자 생활을 했다.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이 함께 공부했다.

법정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4.19와 5.16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법정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기부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다.

산문인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스님은 해인사에 살 당시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가리켜 "빨래판같이 생긴 것이요?"라고 묻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스님의 이런 원력은 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법정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이밖에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연합뉴스)


 

[법정스님 입적] 사리도 찾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마라… ‘무소유’ 가르침

서울신문 | 입력 2010.03.12 02:42 | 누가 봤을까? 

[서울신문] "사리를 찾으려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도 행하지 말라.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이 오래전 써놓은 '미리 쓰는 유서'의 한 토막이다. 그가 평생 지녀온 무소유 행보는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가르침을 남겼다. 스님은 스스로 깨친 가르침을 평생 어기지 않으려 했던 단정한 구도자의 표본이자 그 정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대학 때 삶의 본질 의문에 출가 결심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스님은 전남대 상과대를 다니던 1954년 홀연히 출가를 결심한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몸소 경험하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경남 통영 미래사로 입산, 다음해인 1956년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 스님 문하로 출가한다. 28세에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구족계(具足戒·정식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고 송광사, 해인사, 쌍계사 등에서 안거 수행을 한다.

1960년부터는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동국역경원 초대원장인 운허(1892~1980) 스님과 더불어 '불교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한다. 이후 '한글대장경' 역경(譯經)위원,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불교신문 역경국장을 거치며 경전 한글화 분야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그가 번역한 서산대사의 불교개론인 '선가귀감(禪家鑑)'('깨달음의 거울'로 번역)을 비롯, '숫타니파타', '불타 석가모니', '진리의 말씀(법구경)', '신역 화엄경' 등은 지금도 국내 역경 사업의 주요 업적으로 평가된다.

●스님들이 뽑은 '닮고 싶은 생존스님' 1위

스님이 본격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 1970년대 당시 민주화 인사들을 만나면서부터다. 스님은 이들과 함께 잡지 '씨알의 소리'를 발행하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1975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이라는 이름의 작은 암자를 짓고 홀연히 수행승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세상에 허명(虛名)이 너무 많이 알려졌다는 이유에서였다. 그후 스님은 글쓰기에 매진하는 한편 조금씩 써왔던 글들을 책으로 묶어내게 된다. 스님의 대표작 '무소유'(1976년)도 이때 출간됐으며, 이후 나오는 책마다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며 문명(文名)을 떨치게 된다.

한동안 스님의 보금자리 및 대중들과 만나는 광장이 됐던 서울 성북동 길상사와의 인연은 1996년부터다. 스님은 서울 도심의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이곳에 길상사를 창건하고 회주(會主) 자리를 맡았다. 그 뒤 해마다 개원일(12월14일)에 가까운 일요일이 되면 기념법회를 열어 대중 법문을 해왔다.

●환경보호·생명사랑 운동 실천도

2003년 스님은 "내 스스로가 말이 너무 많았다."면서 길상사 회주 자리마저도 내놓고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가 스스로 땔감을 구하고 밥을 짓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그러나 최근 건강이 악화돼 병상에 눕기 직전까지도 길상사 대중법문만은 멈추지 않으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수행자의 길'을 꿋꿋이 걸었다.

그런 모습에 일반 대중들뿐 아니라 수행자들도 존경심을 나타냈다. 지난해 10월 조계종 불학연구소가 실시한 설문에서 스님은 원효, 성철, 달라이 라마 등에 이어 '스님들이 가장 닮고 싶은 스님' 6위에 뽑혔다. 설문조사 당시 생존해 있던 스님 중에는 1위였다.

그렇다고 스님의 삶이 무소유의 실천과 법문, 글쓰기에만 그친 것은 아니다. 그는 1994년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발족, 환경보호와 생명사랑 운동도 꾸준히 실천했다. 세상을 향한 쓴소리는 입적 직전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반독재·민주화 운동은 물론 최근 대운하 사업을 두고는 "생명을 파괴하는 대재앙이자 국토에 대한 무례"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홍라희 전 관장, 열반한 법정스님 병원비 대납

지난 9일 문병 후 결정...6000만원 가량 사재로 기부

  • 머니투데이
  • 입력 : 2010.03.12 09:10|조회
image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사진)이 11일 열반한 법정 스님의 병원비 6000만원 가량을 대납키로 했다.

이같은 결정은 법정스님이 입적하기 전인 지난 9일 삼성서울병원으로 문병을 간 홍 전 관장이 병원 측에 알리면서 이뤄졌다. 이 사실은 법정 스님을 간호하던 간병인 중 한 사람을 통해 외부로 알려지게 됐다.

삼성 관계자는 12일 "독실한 원불교 신자인 홍 여사가 평소 무소유를 표방했던 법정 스님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며 "법정 스님이 지난 2007년부터 서울삼성병원에서 폐암 치료를 받으면서 나온 6000만원 정도의 병원비를 개인적으로 부담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은 2007년부터 삼성서울병원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투병하면서 여러 차례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았고, 올 들어 병세가 악화되면서 최근까지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홍 전 관장은 불교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조계종 불교여성개발원이 지난 1월 '여성불자 108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법정 입적> "평상 위에서" 법구 송광사로(종합)

연합뉴스 | 입력 2010.03.12 12:02 | 수정 2010.03.12 13:27 |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법정스님의 법구가 12일 정오 스님이 입적한 서울 성북동 길상사를 떠나 전남 순천 송광사로 운구됐다.

길상사 행지실에 모셔져 있던 법정스님의 법구는 이날 오전 11시께 모시던 상좌스님들과 신자, 조문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극락전 앞으로 천천히 이운됐다.

법구는 일체의 거창한 장례절차를 치르지 말아 달라는 스님의 유지에 따라 화려한 장식의 관 대신 스님이 강원도 오두막에서 평소에 사용하던 대나무 평상과 똑같이 만든 평상 위에 올려진 채 가사로 덮인 모습이었다.

법구는 극락전 앞에서 부처님에게 간단한 인사를 올리는 의식 이후 곧바로 영구차에 실려 스님의 출가 본사인 송광사로 이동했다.

운구행렬이 경찰청의 호위를 받아 경부고속도로, 천안-논산고속도로를 거쳐 송광사에 도착하면 법구는 송광사 문수전에 모셔진 후 13일 오전 11시 다비될 예정이다. 운구행렬은 선도차에 이어 큰스님들차와 영구차, 스님들 차량, 신도들 차량 순으로 이어지고 정안휴게소에서 한번 휴식한다.

다비식 이후에는 49재와 추모법회가 진행된다.
법정스님이 입적한 지 7일되는 초재는 오는 17일이며, 이후 매주 수요일에 재를 치른 후 7주째인 마지막 7재(막재)는 4월28일 송광사에서 치러진다. 초재부터 6재까지는 길상사에서 봉행된다. 길상사에서는 또 3월21일 추모법회를 연다.

한편 전날 밤늦게까지 조문객이 끊이지 않던 길상사에는 이날도 새벽부터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길상사를 찾아 설법전에서 분향하고, 길상사 전신인 대원각의 원소유주였던 고(故) 김영한 여사가 머무르던 길상헌을 찾아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과 환담했다.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 등 정치인의 조문 발길도 이어졌으며, 장경동 목사, 태고종 부원장 법현스님 등 이웃종교인의 추모도 잇따랐다.

이날 오전에는 최고의 수행력과 법을 갖춘 스님에게 주어지는 대종사 법계 추서식도 거행됐다.
산이 산을 떠나다
 류시화  03-11

"강원도 눈 쌓인 산이 보고 싶다."

제주도 서귀포 법환리 바닷가에서 겨울을 나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의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얼마 전, 법정 스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줄곧 병원에 갇혀 계시다가 오늘 오전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그리고 곧 길상사로 옮겨졌고, 오후 1시 52분에 제자 스님들과 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렇게 이 사바 세계와 육신을 떠나셨습니다. 허공에 떠나는 스님의 혼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와 이 글을 씁니다.

"이 육체가 거추장스럽다."

치료되었다고 믿었던 폐암이 작년 재발하면서부터 강원도에서, 그리고 제주도에서 치병을 하면서 스님께서 자주 하신 말씀입니다. 기침이 심했고, 통증이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체중이 점점 줄어 나중에는 걷는 일조차 힘들어질 때 스님은 자주 그러셨습니다. 이 육신이 나를 가두고 있다고. 새장에 갇힌 새를 보는 것 같아 뒤에서 눈물을 쏟은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이제 그 새가 날아갔습니다.

"나는 죽을 때 농담을 하며 죽을 것이다. 만약 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거추장스런 것들을 내 몸에 매단다면 벌떡 일어나 발로 차 버릴 것이다."

20여 년 전부터 스님께서 해오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방사능 치료와 항암 치료를 받고 돌아오셔서도 삶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못했습니다. 누구든 스님을 쉽게 놓아 드릴 수가 없었고,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저런 치료로 고생하시다 입적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법정 스님과 어울리지 않는 마무리라고 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그것이 한 인간의 모습이고 종착점입니다. 어디에서 여행을 마치는가보다 그가 어떤 생의 여정을 거쳐왔는가가 더 중요함을 우리가 알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절대로 다비식 같은 것을 하지 말라.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2009년 6월 스님께서 제자 두 명과 저를 포함해 가까운 사람 서너 명을 불러 유언으로 남기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결연한 의지였고, 특별히 스님께서 우리를 불러 공식적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따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결국 송광사에서 불교 예법에 따라 다비식을 치르기로 정해졌습니다. "세상의 흐름을 따라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그때 스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장례식과 다비식이 어디서 치러지든, 어느 장소에서 그의 육신이 불태워지든, 그것은 단지 무상함이 드러난 결과일 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고 스님도 그렇게 여기시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작년에 하셨던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저의 의무라 여겨져 여기에 밝히는 것뿐입니다.

"만나서 행복했고 고마웠다."

그나마 몇 마디 말씀을 하실 수가 있으시던 며칠 전, 스님께서 침대맡으로 저를 손짓해 부르셔서 저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나서 행복했고, 고마웠다고. 저도 지금 스님께 그 말씀을 드립니다. 만나서 더없이 행복했고, 감사했다고. 이 보잘것없는 한 중생을 만나 끝까지 반말 한 번 안 하시고 언제나 그 소나무 같고 산사람 같은 모습을 보여주셔서 행복하고 감사했다고. 이 삶이 고통이고 끝없는 질곡이라 해도 또다시 만나고 싶다고. 해마다 봄이면 "꽃 보러 갈까? 차잎 올라오는 것 보러 갈까? 바다에 봄 오는 것 보러 갈까?" 하고 연락하시던 그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우뢰와 같은 침묵으로 돌아간다."

오늘 법정 스님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서귀포를 떠나기 전 죽음이 무엇인가 하고 묻자 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뢰와 같은 침묵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아마 육신을 벗고 맨 먼저 강원도 눈 쌓인 산을 보러 가셨겠지요. 그리고 그토록 좋아하시던 법환리 앞바다도 슬쩍 보러 가셨겠지요. 오늘 큰 산 하나가 산을 떠났습니다. 이 마음과 마찬가지로 그 산이 한동안 텅 비겠지요. 그러나 곧 꽃과 나무들이 그 공의 자리를 채울 겁니다.

사람은 살아서 작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덜 슬프다는 것을 오늘 깨닫습니다.

"스님 불 들어가요"…법정다비식 '눈물바다'

뉴시스 | 김석훈 | 입력 2010.03.13 13:55

 
【순천=뉴시스】김석훈 안현주 기자 = 13일 오전 11시 '무소유아름다운 향기'를 남긴 법정스님다비식은 지켜보던 불자들의 눈물바다속에 차분하면서도 경건하게 진행됐다.

오전 10시 문수전을 떠나 다비식장으로 향한 스님의 법구는 송광사 경내에 가득찬 1만5000명의 추모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시간 동안 조심스럽게 이운돼 민재 다비장에 도착했다.

집전스님이 맨앞에 서고 위패, 영정, 법구, 상주스님, 문중스님들, 사부대중들이 뒤를 따랐다.

영정을 든 손자스님은 이운되는 내내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참지 못해, 지켜보는 추모객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다비식장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3000여명의 불자들은 법정의 법구가 도착하자 일제히 합장하며 고개를 숙여 애도의 뜻을 표했다.

곳곳에서 신도들은 '석가모니불'을 외며 참나무 단에 모셔지는 법정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더 보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세우며 애쓰는 모습이었다.

이날 법정스님의 다비식은 예정대로 영결식이 생략된 채 초촐하고 간소하게 진행됐다.
다비장에 쌓아올린 참나무단에 법구를 모신 뒤 다시 참나무를 쌓아올리고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비롯해 전 총무원장 지관스님, 송광사 선덕 현호 스님, 덕숭총림 수덕사방장 설정스님, 중앙종회의장 보선스님, 법주사 원로 월탄스님, 송광사 주지 영조스님, 문도대표 길상사 주지 덕현스님, 문도대표 길상사 덕조스님 등 9명의 거화스님이 장작에 불을 붙였다.

"스님 불 들어가요"라는 말로 거화가 시작될 때 숨죽이며 이를 지켜보던 3000여명의 불자들은 '아이고 스님'을 외치며 오열했다. 눈물바다가 되면서 상주스님, 문중스님들의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다비식이 진행되는 동안 바람이 불어 연기와 재가 날리기도 했지만, 법정스님이 살아생전 실천했던'무소유'처럼 소박하게 마무리 됐다.

진화 스님(다비준비위 대변인)은 "법정스님의 유언에 따라 최대한 조촐하게 다비를 치렀으며 송광사 전통대로 의식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법정스님의 법구는 거화의식후 24시간 정도 지난 14일 오전 10시께 습골(뼈를 수거하는 의식)의식이 진행된다. 법정의 유언을 받들어 습골 의식 때 사리수습은 하지 않는다. 이어 상좌스님에게 수거한 뼈가 인수되며 모처에 뿌려지게 된다.

이해인 수녀 “스님,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법정스님 추모글 (전문공개)

뉴스엔 | 입력 2010.03.13 10:17

 
[뉴스엔 배선영 기자]
지난 11일 폐암으로 입적한 법정 스님을 향한 추모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이해인 수녀의 추모글이 공개됐다.

2008년 암 판정을 받고 부산 성 베네딕토 수녀원에서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는 애잔하면서도 잔잔한 추모 글로 법정 스님의 떠난 길을 그리는 이들의 마음을 달랬다.

이해인 수녀님의 법정스님 추모글 전문

법정 스님께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입니다…한밤중에 일어나(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 공개 >

법정스님 유언 "출판물 더이상 출간말라"

연합뉴스 | 입력 2010.03.17 15:51 | 수정 2010.03.17 16:16

 
맑고향기롭게 "출판사들 스님 책 더이상 출간말기를"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법정스님이 자신의 저서를 절판하라는 뜻을 유언으로 남긴 것으로 확인됐다.

법정스님의 유언 집행인인 김금선씨는 17일 오후 성북동 길상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유산에 대한 유언과 상좌들에게 보내는 유언 등 2010년 2월24자로 서명된 두가지 유언을 공개했다.

법정스님은 첫 번째 유언에서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롭게'에 줘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해 달라.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달라"고 썼다.

또 상좌들에게 주는 유언에서는 "맏상좌 덕조는 결제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중에서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 부터 맏사형으로 존중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달라"며 제자들의 화합과 수행을 당부했다.

법정스님의 유언은 이날 낮 1시께 덕조ㆍ덕현스님 등 법정스님의 상좌스님들에게 전달됐고, 이후 맑고 향기롭게의 긴급 이사회에 전해졌다.

이날 공개된 유언에 대해 맑고향기롭게 측은 "맑고향기롭게는 법정스님의 열반을 전후해 스님의 책이 품절된 사태에 대해 독자여러분께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스님의 유지를 존중하여 그동안 스님의 책을 출판해온 모든 출판사에 스님의 책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아줄 것을 정중히, 간절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또 "스님의 글을 읽고싶은 독자들을 위해 언제든지 스님의 글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맑고향기롭게의 이사진은 입적한 법정스님, 덕현스님(길상사 주지), 현장스님, 윤청광씨(방송작가), 박수관씨(㈜영창대표), 김형균씨(도서출판 동쪽나라대표), 이계진의원(한나라당), 강정옥씨(주부), 변택주씨(사업) 등이다. 감사는 변호사 선병주씨, 김진곤씨(사업) 등 2명으로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맑고향기롭게의 이사이자 아나운서 출신인 이계진 의원은 이날 법정스님의 유언 2가지를 다시 한번 낭독하기도 했다.

법정스님 유언장 전문

연합뉴스 | 입력 2010.03.17 15:56 | 수정 2010.03.17 17:30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맑고향기롭게는 17일 오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지난달 24일 작성한 법정스님의 유언장 전문을 공개했다. 유언장은 출판물 관련 내용이 있는 '남기는 말'과 제자들에게 주는 '상좌들 보아라' 등 2장으로 구성됐다.

다음은 유언장 전문.
◇남기는 말
1.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2. 내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

3.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2010년 2월 24일 법정 속명 박재철
◇상좌들 보아라
1. 인연이 있어 신뢰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가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보내주면 고맙겠다. 모두들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을 다해서 거들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내가 떠나더라도 마음 속에 있는 스승을 따라 청정수행에 매진하여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드러내기 바란다.

3.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

3.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과 덕일은 덕조가 맏사형으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

4. 덕진은 머리맡에 남아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
5. 내가 떠나는 경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

2010년 2월 24일 법정 박재철
서울 성북구 성북동 323
(끝)

법정스님 책 받는 신문배달 소년

연합뉴스 | 입력 2010.03.31 13:25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법정스님에게 신문배달을 했던 소년이 31일 길상사 행지실에서 49세가 되어 법정스님 머리맡에 남아 있던 책을 덕진스님으로부터 전달받고 있다. 2010.3.31



 

"법정스님 뜻 그대로 '맑고향기롭게'이끌 것"

연합뉴스 | 입력 2010.09.14 08:56 

 
길상사주지ㆍ맑고향기롭게 이사장 덕현스님 인터뷰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법정스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스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한다고 생각하면서 스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 사회를 더 맑고 향기롭게 만들 수 있는 공동체 운동으로 살려 나가겠습니다."

우리 사회에 '무소유'의 가르침을 전한 법정스님이 지난 3월11일 입적한 이후 6개월이 지났다.

법정스님의 체취가 남아있는 성북동 길상사에서 주지 덕현스님을 최근 만났다. 법정스님의 상좌인 덕현스님은 법정스님이 이끌던 시민모임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의 이사장도 맡고 있다.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아 온 덕현스님은 스승의 유지를 잇기 위한 활동들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특히 법정스님이 1994년부터 이끌어온 '맑고 향기롭게'의 활동을 서서히 좀 더 적극적이고 폭넓게 펼쳐나가겠다고 말했다.

맑고 향기롭게는 ▲좋은 책읽기, 참선수련회 등을 통한 마음 맑힘 활동 ▲결식이웃을 위한 밑반찬, 도시락, 급식지원활동, 장학금 지급, 복지시설에서의 봉사활동 등 세상나눔 활동 ▲숲기행, 문화유적답사, 친환경물품 만들어쓰기 같은 자연살림 활동 등을 조용히 펼쳐왔다.

철저히 자원봉사 활동으로 유지되는 맑고 향기롭게는 현재 서울ㆍ광주ㆍ부산ㆍ대구ㆍ경남ㆍ대전 등 전국 6개 지부에서 회원 1만여 명이 활동하는 규모로 커졌다.

덕현스님은 오는 17일 맑고 향기롭게 대전모임을 찾아 '불교의 현대적 실천'이라는 주제로 법문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부산, 대구 등 각 지부를 돌면서 회원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덕현스님은 "맑고 향기롭게는 마음과 세상, 자연을 모두 맑고 향기롭게 만들려는 운동으로 그 근본에는 불법(佛法)이 깔려있지만, 인간 내면의 순수함과 온기를 믿고 드러내는 것이 이 세상의 문제나 고통을 근원적으로 해소해갈 수 있다는 통찰을 가진 사람, 또는 그에 동의하는 사람이면 종교의 벽을 넘어 불교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고 소개했다.

또 "언행이 빈틈없이 일치하고 생애를 일관해 청정하고 따뜻한 가르침을 보이신 법정스님께서 입적을 전후해 다시 한번 우리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49재까지 '맑고 향기롭게' 회원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고, 지금도 꾸준히 관심을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불법과 법정 사상이라는 구심력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중앙과 지부를 연계시키고 중앙회관을 건립하며, 국제적인 구호활동도 시작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길상사 내에 맑고 향기롭게 중앙회관이 세워지면 그 안에 채식식당을 운영할지도 모릅니다. 맑고향기롭게의 원칙을 지키면서 친환경적인 채식을 권장ㆍ보급하고, 검박하고 생태적인 식사를 공동체적인 식탁에서 해결하면서 그로부터 이윤까지 생기면 국제 기아문제 해결 등을 위해 회향할 것입니다."

법정스님 입적 후 평상에 법구를 모시고 가사 한 장만 덮은 채 바로 장작더미 위에 올린 장례 모습은 수만 송이 꽃으로 뒤덮인 상여와 만장 행렬이 등장하던 여느 큰스님들의 장례 모습과 대비됐다.

덕현스님은 "평소 저희 상좌들에게 누누이 하신 말씀으로도 모자라 변호사까지 부른 자리에서 공식적인 유언으로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라'고 못박으신 바람에 결국 모두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평생을, 심지어는 사후의 일까지도 당신 고집대로,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가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대로 했다는 것이 안일하고 방만하게 살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 꼿꼿하게 분명하게 자신이 정한 원칙을 절대 무너뜨리지 않고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게 지키며 사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모두의 가슴을 울리는 것입니다."

"더러 물어보시곤 하죠. 언제 어른스님의 빈자리가 많이 느껴지느냐고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법정스님이 입적하신 것을 아직 실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분명히 당신의 입적이 남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긴 했지만, 그 자체가 매우 당신답고 강렬한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당신의 존재감이 더 크게 각인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