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도서관 청암 문고 개실을 축하드리며
중국에 살고 있는 셋째 따님과 사위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국회 도서관에 송건호 문고 개실행사
뉴시스 | 입력 2009.06.23 14:06
국회도서관(관장 유종필)은 23일 오전 국회도서관 개인문고실에서 고 송건호 선생 유족과 청암 언론문화재단 관계자등이 참석한 가운데 "송건호 문고" 개실 행사를 가졌다.
송건호 문고는 국회도서관이 언론민주화운동의 증인이자 한겨레 신문사 초대사장을 지낸 고 청암 송건호 선생의 애장도서 총 7,230책을 기증받아 설치하였다.
왼쪽부터 김태진 청암언론재단 이사,고광헌 한겨레신문 대표이사,이정순 송건호 선생 미망인,유종필 국회도서관장,송준용 손건호 선생 장남. /권주훈기자 joo2821@newsis.com
그는 대단한 독서가이자 장서가로 유명하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많다. 부인 이정순(78) 여사의 귀띔. “신혼 시절 함께 길을 가다가 갑자기 ‘잠깐만 기다려 달라’며 책방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곤 ‘잠깐’이 두세 시간이 되곤 했어요. 집 안 정리를 하면서 오래된 잡지류를 버렸는데 하마터면 이혼당할 뻔했어요. 내가 혼자서 울면서 그 책들을 찾아 나섰지요.” 병상의 청암 선생은 필자에게 “세미나 참석차 일본에 일주일간 머무를 때는 숙소와 책방 사이의 길만 익혀서 하루 종일 책방에서 책만 읽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가 평생 모은 책은 2만권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현찰 반 외상 반으로 한 권 두 권 사 모았다고 한다. 낱장마다 주인의 손때가 묻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사 다닐 때 가장 귀찮은 물건이 책인데도 그는 재산목록 1호로 책을 가장 먼저 챙겼다. 집이 좁아 엄청난 양의 장서를 놓아둘 데가 없어 지하 보일러실에 보관했다가 장마철에 두 번 수해를 입기도 했다. 온 가족이 동원되어 젖은 책을 일일이 닦고 말려서 복구하느라 몇 달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도 책에 남아 있는 얼룩은 그런 수난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의 애장서는 인생역정이 담겨 있는 분신과도 같은 것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5년 전인 1996년 한겨레신문사에 기증한 애장서는 ‘청암문고’로 후배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모교인 서울대 도서관에 기증할 생각도 있었지만 결국 자신이 중심이 되어 국민의 힘으로 창립한 <한겨레>를 택했다. 국회도서관에 설치된 송건호 문고는 한겨레에서 옮겨와 과학적으로 보존처리하여 재분류한 것이다. 송건호 문고는 분야도 다양하다. 사회과학은 물론 철학, 종교, 문학, 역사에다 경영학, 자연과학, 예술 오락에 이르기까지 그의 다양한 지적 편력을 말해주고 있다. 그중 230여권은 초판본 또는 국내 도서관에 거의 소장되어 있지 않은 희귀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동국사략>(1907년판), 이광수의 <단종애사>(1935), <꿈>(1947), 홍명희의 <임거정>(1939), 홍기문의 <조선문화총설>(1946), 박태원의 <천변풍경>(1947), <서재필 박사 자서전>(1948), 최남선의 <조선상식>(1953) 등 귀중한 자료가 한둘이 아니다. 이들은 제한적이나마 최대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많은 이용을 바란다.
유종필 국회도서관장 |
지성의 사표, 행동하는 언론인
박상건(시인. 언론인)
험난한 민주화와 언론변혁의 선구자 청암 송건호 선생. 그이는 최근
한국기자협회가 전국 기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장지연
선생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언론인으로 뽑혔다. 올 2월에 출간된 학문
의 길 인생의 길(역사문제연구소)에서는 왜곡된 현실에 굴하지 않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뽑혔다. 그런가 하면 성균관대학교가 일제와 반민
주에 맞서 투옥과 고문 속에서도 굽힘없이 시대적 의리를 실천했던 지
식인 심산 김창숙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 13년째 운영해오고 있는
심산상 제1회 수상자이기도 하다. 또한 역대 정권과 반독재 민주화 운
동을 이끌어 온 공로로 정일형 자유 민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늘 도전과 응전의 그이는 가시밭길 걸어
그렇게 그이는 우리시대 참 지성의 사표로 우뚝 서 있다.
감시와 연금, 형무소 생활로 점철되는 가시밭길 삶을 살아왔다. 참으
로 멀고도 험한 여정에서 민주화의 토양을 일구고 다져왔다. 그런 그
이이건만, 정작 기쁨도 보람도 잠시인 채 지금 그이는 8년째 병석에서
시름하고 있다(이 글을 쓴 지 1년 후인 2001년 12월 21일 새벽 6시 운
명하심). 그이가 앓고 있는 파킨슨병은 손떨림과 가면처럼 굳어진 얼
굴, 팔을 흔들지 않고 짧은 걸음걸이를 하는 증상이라고 한다. 의사들
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 1%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 빌 그레이엄 목사, 트
뤼도 전 캐나다 총리, 제닛 리노 미 법무장관 그리고 한국언론 민주화
의 상징인 청암이 이 병으로 고생을 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다.
그이를 처음 만난 것은 <한겨레신문>이 창간된 지 7개 여월의 시간이
흐른 어느 겨울이었다. 당시 한 주간지 기자로서 세계언론의 이목이
집중된 이 신문과 창간 주역인 그이를 신년호 특집 인터뷰키로 한 것
이다. 그이는 예리한 필봉에서 받던 느낌과는 달리 시종 따뜻한 가슴
으로 20대 후반의 풋내기 기자를 맞아 주었다. "신문기자는 민족주의
자요, 민주주의자이며 민중을 지도하는 사상가이지 않으면 안 된다"면
서 "기자 정도면 감옥에도 한번쯤 가봐야 한다"고 일러주던 그이였다.
식민지하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이의 아버지는 집안이 가난한 탓
에 중학교만 마치고 농촌에 남아 농사 일을 거들어 줄 것을 바랬다.
하지만 그이는 서울행을 택했다. 한성 상업학교 입학했으나 일제가 강
제 졸업시킴으로써 앞당겨 졸업한 셈이다. 아버지는 가정형편이 어려
우니 이제 취직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연세대 신학과에 응시했다. 만
만찮은 도전의식의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 다음 시험에는 연대가 아닌
서울대 법대에 응시했다. 순전히 오기로 응시했던 것인데, 결과는 합격
이었다.
"물론 오기로 들어 간 대학인 만큼 특별히 법대 지원 동기가 있었을
턱이 없었죠. 그러나 가정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어요. 새벽에 신문을
배달하고 매일 노동판을 전전했어요, 닥치는대로 일을 했지요. 나중에
생활이 조금 나아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나는 스스로 그 일을 택했고
그 길을 계속 갔어요. 학교 수업을 별로 받아본 적이 없었구요"
그렇다고 그이가 공부를 전혀 못했다는 것은 아닐 터, 그이는 서울시
내 고서점을 돌며 먼지 수복한 책들을 뒤적여 대는 일이 일상처럼 반
복됐다. 읽고 싶은 책들을 구입해서 강의실 한구석에서 책 읽는 재미
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꽤 특이한 책벌레였던 셈이다. 그 때 감명깊게
읽었던 책들이 스케치북, 사선을 넘어서, 흙, 제2의 운명 등이다.
34세에 논설위원, 입바른 소리 대명사
그러던 52년 어느날 그이는 학생 신분으로 교통부 촉탁 번역사원이
되었다. 영어 실력이 만만찮았던 그이는 다음 해 <대한통신> 공채시험
에 당당히 합격해 외신부 기자로 언론계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 기자들의 월급은 무역회사 절반 수준에도 못 미쳤어요. 친구들
을 만날 때마다 커피값 한번 제대로 못 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대부분 기자들은 공갈, 협박 등으로 돈을 뜯곤 했죠. 나는 그런 재간도
없어 고생 꽤나 했어요(웃음)"
1년후 다시 외신부장, 다시 1년후 논설위원으로 언론계에서 위상을 굳
혔다. 그 해 그이의 나이는 서른 네 살이었다. 그이가 <조선일보>에서
<한국일보>로 옮겼던 것도 <한국일보> 창업주 장기영 사장의 스카웃
제의 때문이었다. 이후 <경향신문> 편집국장, <동아일보> 논설위원, 편
집국장 등을 거치며 언론계를 풍미하던 언론인이자 재야 지식인 송건
호는 한 시대 굴곡의 역사 가장자리에서 역사의 풍랑을 헤치며 여울
져 갔다.
62년 그이는 <민국일보> 논설위원으로서 남대문이라는 칼럼을 집필
하면서 정보과에 불려가기를 반복했다. 1년 후 <경향신문> 논설위원이
된 그이는 박정희 정권이 정권연장을 발표하자, 이를 정면으로 비판했
다. 얼마후 신문사 판권이 타인에게 넘어가는 소위 경향신문 사건이
터졌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나는 새도 떨어 뜨린다는 김형욱이었다.
이 와중에 편집국장으로 취임한 그이는 비장한 화두를 던졌다. "신문
의 정도를 걷자.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국장에게 넘겨라". 독재
정권에 대한 선전포고, 언론자유를 향한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결국
이 신문의 판권이 넘어갔고, <조선일보>로 옮겨 신문의 독립과 자유
를 위한 결전을 시작했다. 곧 연행되었다. 격동기 가장 자리에 들어선
그이는 줄기차게 대정부 비판 글을 쓰면서 격동기에 가로 놓힌 장애물
들을 피하지 않고 이를 제거하는 행위에 매진했다.
동아사태·김대중 내란 음모로 고초
다시 한국 언론사의 최대 격동기랄 수 있는 74년, 그이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이 시기는 언론탄압이 극에 달했고, 3선개헌으로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부정
하는 모든 행위는 보도할 수 없도록 했다. 소위 긴급조치 1, 2호가 이
때 발동됐다. 언론사에는 기관원들이 상주하고 거의 모든 기사에 관여
했으며 걸핏하면 기자들이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가 일쑤였다.
어느 신문도 대학생들의 유신반대 철폐 시위 등을 보도하지 못했다.
이즈음에 그이는 서울대 농대생들의 유신반대 시위를 기사화 했고 이
로인해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4년여에 걸친 참담한 언
론상황에 신물이 났던 기자들은 편집국장의 연행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다음날 10월 24일 오전 9시 15분 <동아일보> 직
원 180여명은 언론인 스스로가 자유언론 투쟁을 벌여나가자며 이른바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했다. 150여 명이 해고되었다. 그이는 중앙정보
부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던 김상만 사장과 이동욱 주필에게 강한 불만
을 쏟아냈다. "부하 기자들의 목을 치면서 더 이상 이 자리를 지킬 수
없다. 이렇게 하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경고한 뒤 사표를
내던졌다. 당시 자유언론 투쟁은
턴포스트> 등 해외언론에 신속하고 상세히 보도되었고, 국제인권단체
인 미국 프리덤 하우스는 이를 공개 지지하고 경의를 표한다면서 자
유 언론상을 수여했다.
"<동아일보>를 박차고 나오니 박정희씨가 이제 고생했으니 청와대로
오시오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나는 언제나 기자다. 어떤 정치권력과도
관련되지 않는다라고 말했죠. 그런데 그렇게 거절하는 나에게 박정희
씨는 솔직히 당신이야말로 가장 소신 있는 언론인이요라고 하더군요.
어쩌면 박씨와 꽤 절친한(?) 셈이었죠. 그러나 뭐라해도 박정희는 당시
의 언론을 그 모양 그 꼴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었어요"
그러면서 당시 권언유착론을 강한 톤으로 비판 했다.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를 하며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괴롭힌 사람이 이승만에 붙었다가, 박정희, 전두환에 붙더니 6공화국에
서는 해바라기 정치인으로 변신하더군요. 그러면서 한쪽으로는 애국애
족을 부르짖고 한쪽으로는 자식들을 미국 유학 보내기에 급급하고…"
입바른 소리의 대명사
행동하는 지성인, 입바른 소리의 대명사격이었던 그이의 면모는 이
미 60년대 한국 지식인론 발표를 통한 널리 알려진 바 있기도 했다.
당시 미국 등지에서 연구하고 돌아온 학자들의 민족현실에 대한 반역
사성, 몰역사성을 실랄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사회과학적 가치 및 역사
적 전통과 가치를 배제하는 미국의 심리주의적 학문태도를 맹공하고,
기계적인 지식인이 아닌 한 시대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실천적 지성을
촉구했던 것이다. 그런 그이기에 언론계를 떠난 13년이란 긴 세월이
지옥 같은 것이었을 게다. 말을 하고 싶어도 강단이 폐쇄되고, 글을 쓰
고 싶어도 지면이 주어지지 않았다. 거머리 같은 권력의 철저한 봉쇄
는 계속 되었다. 그리고 서슬퍼런 전두환 정권에 이르러서도 재야 지
식인의 중단없는 길을 걸었다. 그 만큼 갖은 고초도 계속 되었다. 이른
바 5·17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엮이면서 포고령 위반혐의로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정말 그것은 완전히 허위 날조된 공작정치였어요. 김대중씨로부터
70만원을 받은 것으로 했다가 90만원, 100만원으로 올리더니 나중에
딱 100만원이면 이상하다고 해서 120만원 받은 걸로 진술서를 쓰라고
하더군요. 이를 거부하자 야, 이 새끼 정신 못 차렸구먼하면서 공갈과
고문을 자행했어요. 고문 기술자 이근안씨를 그 때 마주쳤어요. 한마디
로 그 사람 정말 치가 떨리고 잔인했어요"
그이는 그 때 고문 받은 후유증 탓으로 투병생활을 했고 끝내 병상을
털고 일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정부는 때늦은 감이 있지만 지난해 11
월 15일 언론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운명하신
2001년 12월 21일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을 추서했고, 한국기자
협회는 성명을 통해 “오늘 우리는 한국 언론의 정신적 기둥을 잃었
다”면서 “선생의 삶은 고단했지만 그것은 개인의 삶을 넘어 한국언
론의 역사가 됐다”고애도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도 “선생은 전국 2
만 언론 노동자들의 스승이며 민족의 지성이었다”고 추모했다. 수여
했다.
그이는 병환중에도 신군부 조작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겪었던 15명의
체험담을 엮은 김대중 내란음모의 진실(문이당)이라는 책의 출판 기념
회가 열려 명예회복의 작은 단초나마 마련했다. 생전에 각종 강연을
통해 권력의 횡포를 폭로하며 반독재 투쟁 의지를 드높였고 다른 한편
으로는 대안언론 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그이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84년 언론운동의 전초기지격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을 결성,
초대 의장이 되었던 그이는 곧 <말>지 창간, 발행인이 되었다. 그이는
<말>지에 보도지침을 폭로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한국 언론의 실
상을 전세계에 폭로했다. 그이는 권력의 눈에 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6·29이후에도 연금 생활은 계속되었다. 각종 강연을 위해 집
을 나서다가, 자동차를 타고 거리를 달리다가, 강연장을 들어서다가 그
이는 정해진 일상처럼 연행되고 감시를 받았다. 그럴수록 자유언론에
대한 불길은 강하게 댕겨졌다.
그이는 김수환 추기경, 소설가 황순원씨 등 각계원로 24명과 새 신문
창간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국민적 지원을 당부하는 메시지를 발표했
다. 전국에서 2만 7천 52명의 국민 주주들이 기꺼이 동참했다. 그렇게
온국민의 땀방울이 축축이 적셔진 50억원의 밑천으로 세계 언론사의
한 획을 그었던 <한겨레신문>은 창간되었다. 당시 편집국을 걸으면 바
닥에서 삐끄덕거리던 소리가 날 정도로 허름한 사옥이었다. 중고 윤전
기에서 잉크냄새를 풍기며 나오던 창간호를 들고 그이가 감격의 눈물
을 흘리자 주위 직원들의 눈시울까지 적셨던 그 때 그 사진 한 장은
아직도 많은 독자들의 기억속에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이는 초대
사장 겸 발행인으로서 "민주·통일을 지향하는 신문" 등을 표방했고
이로써 보수 일변도의 한국 언론 지형은 새롭게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
다.
각종 저술활동과 <말><한겨레> 창간 주도
진정 한 시대의 한 복판을 그렇게 당당히 걸어왔다. 그이는 집에 가
두면 집필을 통해 외부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스스로 견인해냈다. 민
족지성의 탐구, 한국민족주의 탐구, 단절시대의 가교, 한국 현대언
론사론 등의 저술 활동 등은 모두 이 때 집필한 저서들이다. 79년에는
12명의 의식있는 지식인들과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이라는 책의
집필을 맡았다. "민족의 참된 자주성은 광범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
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되며 바로 이러한 여건 하에서만 민주주의는 꽃
피우는 것"이라는 민중적 역사의식이 돋보였던 이 책은 대학생들의 역
사관을 교정하고 새로 눈 뜨게 하는 데 한몫을 했다. 이 책은 출간 시
점이 부마사태가 터진 날이었음에도 초판이 거의 팔려 나갈 정도였으
나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금서가 되었다.
또한 그이는 우리 민족이 참담한 현실에 처했던 1930년대와 1940년대
일제통치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독재정권 하에서 이 시기의 서술조차
금기시되어 있었지만 민중을 주체로 한 역사의 서술이 이 시대로부터
말미암고 있다는 확신에서였다.
그것은 조국의 자주권 회복을 위한 한 지식인의 몸부림이었다. 이런
의식의 한울타리가 된 사람들이 82년 산악회 회원들인 변형윤, 백낙청,
이영희, 박현채, 이호철, 조태일 교수 등이다. 이들은 사실상 <창작과
비평>을 이끌었던 주요 필진들로 민족논쟁을 지피며 구속과 연금을 되
풀이했던 당대의 문제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이 산에 오르는 날이면 무
슨 음모라도 꾸밀까 봐 형사들이 늘 따라 붙곤 했단다.
그러던 80년 3월 서울의 봄은, 봄은 봄이로되 좀처럼 봄기운이라고는
불어올 기미가 없었던 이상 기류만이 완연한 봄이었다. 신군부 군화발
이 가는 곳곳마다 누비며 시민들의 현기증을 앓게 했다. 시민들의 입
과 행동은 당연히 얼어붙어 있었다. 당시 그이는 한국의 드레퓌스 사
건이라고까지 불렸던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을 주도했다. 당시 <동아
일보> 편집국장이던 그이는 성대 장을병 교수, 이미 작고한 중앙대 유
인호 교수와 함께 이 거사(?)의 연락간사이자 성명서 기초위원으로서
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국
선언은 신군부가 지식인을 탄압하는 빌미로 악용되고 말았다.
참 지성의 사표, 그러나 지금 언론은...
그렇게 살아오면서 그도 솔직히 인간이기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감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공포감과 짓눌려대는 아픔 같은 것들이
수없이 밀려들곤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가장이 직장 없이 눌러 앉아있다는 그 자체로 그 죄책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지요. 고통은 무서운 공포로 엄습해오곤 했어요. 하루를 못 넘
기고 죽을 것만 같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땀이 나고 심한 현
기증이 일어나면 쓰러지고 일어서면 쓰러졌어요. 이런 고통스런 삶들
속에서 묵묵히 견뎌온 나의 최후의 보루는 아내(이정순. 69세)였어요.
그런데 아내마저 쓰러졌을 때 받은 그 엄청난 절망감이란 것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죠. 또한 자식들은 감옥에 있을 때 대학 다니고 출옥
하고 나니 시집가고 장가가서 행복하게 살아 주고 있더라구요. 자식들
학교도 제대로 못 보내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아비의 그 아픔과 죄
책감이란 것은....."
이런 고통스런 삶의 편린을 들여다보노라면, 이 땅의 독립운동가와
민주화 운동가족들의 삶이 왜 이다지도 서글픈 유산으로만 대를 이어
가야 하는지, 안타까운 반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상계>를 창간,
이끌었던 장준하 선생 미망인이 편지봉투 풀칠을 하며 삶을 이어가고,
지사형 저널리즘의 대표격이기도 한 신채호 선생 아들이 단칸방을 전
전하다가 젊은 날에 이승을 떠났다.
정직하지 못한 역사였지만 그 역사 앞에서 한번도 무릎을 꿇지 않았
던 참 지성의 사표. 시대는 변해도 자신의 정체성만은 추호의 얼룩짐
없이 올곧게 걸어온 그 외길. 그이가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그
들 언론사와 언론인들의 현주소를 바라보노라면 반역의 세월들만 덧칠
되어 있는 듯 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그래서 누워 있는 그이가
불떡 일어나 "너희들이 말하지 않으면 돌들이 일어나 소리칠 것이다"
라고 크게 외칠 것만 같아, 그것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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