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편지에서 모셔왔습니다.
퇴근길에 남편이 불쑥 노란 국화다발을 내밀었습니다.
"웬 꽃이래? 생일도 아닌데."
"당신한테 주는 가을 편지야."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아무 이름도 붙지 않은 날
꽃을 선물한 건 난생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꽃병에 꽃을 꽂아두자 남편도 흐뭇해했습니다.
"그렇게 좋아? 이거 단돈 천 원으로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걸 몰랐는걸?"
다음 날 퇴근길에 남편은 또 꽃을 내밀었습니다.
문제는 그 후에 생겼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퇴근하는 남편의 손엔
국화다발이 들려 있었습니다.
집안이 온통 꽃밭으로 변했고
꽃을 둘 마땅한 장소를 찾는데
점점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됐습니다.
물병에 담아 신발장에 국화꽃을 올려 놓기도 했지만
이젠 온집이 국화꽃 천지였습니다.
"어우, 이젠 사양해.
꽃이 너무 많으니까 둘 데도 없잖아요".
혹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기분에 취해서 꽃을 사거나
아님 꽃집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
매일 들르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생길 정도였습니다.
오늘도 꽃을 사 오면 꼭 따져봐야지 하고
잔뜩 벼르던 날 남편은 다행히 꽃을 들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핀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거."
세상에! 꽃 대신 속옷에 넣는 고무줄과 옷핀 좀약을
잔뜩 사들고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다음 날도 남편의 그 이상한
사들이기는 계속됐습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물었습니다.
"대체 왜 그래요 당신. 왜 자꾸 이런 걸 사 날라?"
잠시 머뭇거리던 남편이 머리를 긁적이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습니다.
"그게 말야."
얼마 전부터 회사 앞 골목에 웬 할머니가
어린 손녀를 데리고 나와 장사를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국화꽃을 팔더니 사흘 전부턴
목판에 고무줄 옷핀 같은 걸 늘어놓고 판다고 했습니다.
"너무 딱해소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구."
나는 말없이 남편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거칠고 주름져가지만 아직 따뜻한 손.
"미안해, 당신은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애쓰는데"
"아니야 여보.
그 할머니가 장사를 하는 동안은 매일 하나씩 사 와."
"그러다 집안에 고물상 차리게?허허."
남편의 그 말에 나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다 쓰자구요. 옷핀도 고무줄도 다 쓸 때까지 쓰다가
다 못쓰면 그땐 팔자구요.
그럼 당신같이 맘씨 고운 사람이 또 사줄 거 아니냐구요."
- 김혜은 옮김 (행복한 동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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