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가면서(在生活裏)

아빠의 이력서

含閒 2007. 11. 5. 10:18

새벽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소위 나는 취업컨설턴트로서
이력서 잘 쓰는 법, 이력서 수정 보완...
뭐 그런 일들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아빠의 이력서를 보고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9XX ○○고등학교 졸업
19XX △△산업 입사
2005년 △△산업 퇴사
담당업무 운전

△△산업은 아빠가 몇 년 동안 운영하던 회사였지만
아빠는 이력서에 담당업무를 '운전'이라고 썼다.

아빠는 소위 명문 K대 출신이다.
그리고 유명한 대기업에 다녔었고
대기업에 다닐 때는 무지 일을 잘해서
우리 엄마는 아빠가 받아오던 보너스 덕에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칼라TV를 가졌다고 했다.

어쨌든 그렇게 잘 나가던 회사를 그만두고
△△산업을 운영하게 되면서
그때부터 우리 가족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내 기억으로 나는 풍족하게 산 적이,
돈 걱정을 안 하고 산 적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러한 빈곤의 정서에는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사업을 시작한 아빠에 대한 원망이 항상 함께했다.
그리고 그 미움이 이해로 바뀔 때까지
무지 많은 시간이 걸렸음은 말할 것도 없고.

아빠는 최근 모 정수기업체에
배달사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모든 경력을 덮고
그저 운전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취직을 했다.

자신의 이력서를 쓰면서 자신이 다녔던 회사를,
자신이 운영했던 사업체를
부정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엄마에게 아빠의 취직소식을 듣고 그저 쿨하게
'취직 축하해'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력서는 이렇게 쓰면 안 되지,
아빠가 했던 업무 중에서 강조할 부분을 찾아서
성취업적을 만들어야지, 그리고
학교는 왜 빼?'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저 나는 모른척했다.
아빠랑 같이 밥을 먹으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밥만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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