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퇴계 이황의 시

含閒 2007. 2. 16. 21:55

퇴계 선생과 관련 인터넷을 돌다가 좋은 자료가 있어 빌어 가져다 놓았습니다.

 

 

자 료 실
 

1. 퇴계 시에 대하여

2. 도산십이곡

3. 도산십이곡의 특징

4. 한시

 

1. 퇴 계 시 에  대 하 여

1. 퇴계가 읊은 시는 중국의 최고 시인 두보보다 그 양이 많은데(제목을 아는 것만 3560수, 퇴계 문집에 전하는 시는 2000수가 넘음), 제 1회 퇴계학 국제 학술상을 받은 퇴계시 연구의 권위자인 대만의 왕소(王甦) 교수는 '퇴계시학'에서 퇴계 시의 연원을 도연명, 두보, 소동파,주자에 대어 도연명의 감정과 주자의 사상을 지녔으며, 두보의 격율·체제와 소식(소동파)의 문장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퇴계의 경우는 일반 시인들과 달리 성리 탐구의 학문정신때문에 사물을 만나 우러나오는 흥의 표현이 시이고, 그래서 지극한 정취와 오묘한 이치가 시에 담겨 있으며, 표현은 담백하나 맛이 깊고 심오한 이치가 드러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왕소 교수는 송나라 시인이 즐겨 쓰던 비안입군(비안입군)의 변격을 퇴계는 15세 때 지은 '석해(石蟹 : 가제)'라는 시에서 이미 쓰고 있다고 감탄하였다.
 
2. 퇴계의 시를 해독할 때는 생애 전반을 개관하고 있어야 하며, 그 시에 표현된 상황이 생애의 어떤 과정에 처해 있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선생의 시는 생활과 사상 전개과정의 기록이기 때문에 전후 생활과 전후의 시에 대해서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선생은 또한 집을 개조할 때마다 와사(보선당), 양진암(계장), 한서암(정습당, 퇴계 초옥, 계사), 계상서당(계당, 초당, 계와), 도산서당(산당, 정사, 산사, 도사)으로 칭하고, 시·서·기·서·발 등에 뚜렷이 구별해서 기록하였다. 또 아호도 영지산인(33세), 지산(40대초), 퇴계·퇴옹(46세), 도수·도산병수·퇴계노인(60세 이후) 도산기인 등으로 바꾸거나 첨가해서 썼다. 교육 또한 와사·경저(서울의 집)·양진암·소수서원·한서암·계상서당·도산서당으로 바꾸면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선생의 주거와 생활의 변화가 시에 반영되어 있으며 사상전개과정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를 해석하는데 있어 이와 같은 연계적인 흐름과 선생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3. 퇴계는 특히 매화를 사랑하여 많은 시를 남겼다. 퇴계의 매화시는 75제 107수에 달하며 그 중에 61제 91수가 그의 '매화시첩'에 수록되어 있다. 매화를 꺾어 책상 위에 꽂아 두고 바라보기도 하고, 뜰의 매화를 바라보며 매화와 서로 묻고 화답하는 시를 여러 차례 읊고 있다. 달이 밝으면 매화를 바라보며 시를 짓기도 하고 매화가 겨울 추위에 손상되었음을 개탄하는 시를 읊어 제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때 매화분을 가져가지 못하여 그리워하다가 제자가 매화분을 보내주자 그 회상을 시로 읊기도 하였다.
 그의 매화시는 서호 고산에 은거하였던 송대의 은사 임포(林浦)가 보여주는 매화와 일체화된 삶을 본받고자 하고, 표현에서는 소동파와 주자의 매화시에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지닌다고 한다.

 

2. 도 산 십 이 곡

주 제

내                           용











1. 기일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료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믈며 천석고황(泉石膏황[亡+月])을 곳쳐 무슴하리

이렇게 산들 어떠하며, 저렇게 산들 어떠한가
초야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서생이 이렇게 산들 어떠할 것인가
하물며 자연을 몹시 사랑하는 병을 고쳐서 무엇하리

2. 기이
연하(煙霞)에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으로 늘거가뇌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믈이나 업고쟈

안개와 놀을 집으로 삼고 풍월을 친구로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가지만
이 중에 바라는 일은 사람의 허물이나 없었으면

3. 기삼
순풍(淳風)이 죽다하니 진실로 거즛말이
인성(人性)이 어지다하니 진실로 올흔말이
천하(天下)에 허다 영재(英才)를 소겨 말슴할가

예부터 내려오는 순수한 풍습이 줄어 없어지고 사람의 성품이 악하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거짓이다
인간의 성품은 본디부터 어질다고 하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므로 착한 성품으로 순수한 풍습을 이룰 수 있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많은 슬기로운 사람(영재)을 속여서 말할 수 있을까
 

4. 기사
유란(幽蘭)이 재곡(在谷)하니 자연이 듯디 죠희
백설(白雪)이 재산(在山)하니 자연이 보디 죠해
이 중에 피미일인(彼美一人)을 더옥 닛디 못하얘

그윽한 난초가 골짜기에 피어 있으니 듣기 좋아
흰눈이 산에 가득하니 자연이 보기 좋아
이 중에 저 아름다운 한 사람을 더욱 잊지 못하네
 

5. 기오
산전(山前)에 유대(有臺)하고 대하(臺下)애 유수(有水)ㅣ로다
많은 갈며기는 오명가명 하거든
엇더타 교교(皎皎) 백구(白鷗)는 멀리 마음 하는고

앞에 높은 대가 있고, 대 아래에 물이 흐르는구나
떼를 지어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거든
어찌하여 희고 깨끗한 갈매기는 나로부터 멀리 마음을 두는고
 

6. 기육
춘풍(春風)에 화만산(花萬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萬臺)라
사시가흥(四時佳興)이 사람과 한가지라
하믈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내그지 이시리
 













1. 기일
천운대 도라드러 완락재 소쇄(瀟灑)한듸
만권(萬卷) 생애(生涯)로 낙사(樂事) 무궁(無窮)하얘라
이 중에 왕래(往來) 풍류를 닐러 므슴할고
 

2. 기이
뇌정(雷霆)이 파산(破山)하여도 농자(聾者)는 못 듯나니
백일(白日)일 중천하야도 고자(고者)는 못 보나니
우리는 이목 총명(聰明) 남자로 농고같지 마로리

우뢰 소리가 산을 깨뜨릴 듯이 심하게 울어도 귀머거리는 못 듯네
밝은 해가 하늘 높이 올라도 눈 먼 사람은 보지 못하네
우리는 귀와 눈이 밝은 남자가 되어야 하리
 

3. 기삼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봇 뵈
고인을 못 봐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졀고

옛 어른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그분들을 못 보네
그러나 그분들이 행하던 길은 아직도 앞에 놓여 있네
그렇듯 올바른 길이 우리 앞에 있는데 그를 따르지 않고 어찌할고
 

4. 기사
당시(當時)에 녀던 길흘 몃 할을 버려 두고
어듸 가 다니다가 이제아 도라온고
이제야 도라오나니 년 듸 마음 마로리

그 때 뜻을 세우고 학문 수양에 힘쓰던 길을 몇 해씩이나 버려 두고
어디에 가서 무엇하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고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다른 곳에 마음 두지 말고 옛날에 하던 학문 수양하리라
 

5. 기오
청산(靑山)은 엇데하야 만고(萬古)애 프르르며
유수(流水)는 엇데하야 주야(晝夜)에 긋디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디 마라 만고상청(萬古常靑)호리라

푸른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흐르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영원히 푸르리라
 

6. 기육
우부(愚夫)도 알며 하거니 긔 아니 쉬운가
성인도 못다 하시니 긔 아니 어려온가
쉽거나 어렵거나 중에 늙는 줄을 몰래라

어리석은 자도 알아서 행하니 학문의 길이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성인도 다하지 못하는 법이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쉽든 어렵든 간에 학문을 닦는 생활 속에 늙는 줄을 모르겠다

 

3. 도 산 십 이 곡 의  특 징

1.
 제 작
 연 대

도산십이곡발과 시조에 나타난 천운대와 완락재의 지은 시조 등을 살펴 볼 때 이는 퇴계의 61세 때인 1561년(명종 16년)에 그의 고향인 도산에서 이별(李鼈)의 육가를 모방해서 지은 것으로 도산십이곡은 그의 60세인 1560년(명종 15년) 11월에서 발을 쓴 1565년(명종 20년) 3월 16일 사이에 지은 것이라 여겨진다.

2.
 제 작
 목 적

아이들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익혀 부르게 하고 책상에 기대어 들으며, 또 아이들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고 뛰게 하고자 함이다. 그는 60세 때 도산서당을 짓고는 그 다음 해인 61세 때 서당을 지은 자세한 경위와 그 곳의 빼어난 형세를 18절·26절·4절 시로 읊었으나, 한시는 읊을 수 있으나 노래하기에는 마음에 차지 아니함이 있어 18절 등의 시를 지은 연후에 우리 문자로 노래할 수 있는 도산십이곡을 창작한 것이라 생각된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세우고 나서 절구 총 48수로 엮어진 '도산잡영'을 짓고 그것에 대한 기문을 길게 붙였다. 그리고 다시 '도산십이곡'을 지은 것이다.도산서당에 관련해서 퇴계는 한시로 '도산잡영'을, 한문(산문)으로 '도산기'를, 그리고 국문시로 '도산곡'을 창작한 것이다.

3.
 주 제

1) 학문수덕(學問修德)의 시조는 모두 12수 중에서 6수로 후6곡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학문수덕의 시조를 보면 퇴계는 50세 때 한서암을 지어 당명을 정습이라 하고는 그 속에 파묻혀 독서하는 한편 모여드는 학도에게 강학을 하는 나날을 보내었다. 이와 같이 학문연찬과 후진강학에 몰두한 퇴계로서 학문수덕을 주제로 한 시조가 많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고, 또 그의 학문연찬의 태도와 사상은 바로 학문수덕의 시조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학문수덕의 시조는 그 내용이 고아진중(高雅鎭重)하여 동방부자라는 말로 추앙받는 퇴계의 인품이 잘 풍기고 있는 작품이다.

2) 강호한정(江湖閑情)의 시조는 모두 12수 중에서 4수로 전6곡 중의 1·2·5·6곡이 이에 해당한다.

  강호한정의 시조를 보면 퇴계는 철리(哲理)만을 궁구하는 일반 도학자와는 달리 도를 체득 실천하는데 힘쓰는 한편 자연을 벗하고 사랑하는 생활로 일관하였다. 퇴계가 자연에 몰입한 생활을 어느 정도 했는가 하는 것을 도산기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퇴계는 자연을 완상하는 경지를 넘어서 자연에 몰입침잠하는 상태에까지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이와 같이 자연에 몰입한 그의 일상생활은 바로 강호한정의 시조들로 표현되고 있다.

3) 교해경계(敎誨警戒)의 시조는 오직 1수로 전6곡 중의 3곡이 이에 해당한다.

 교해경계의 시조를 보면 퇴계는 정치가로서 보다 학자로서 더 유명하고, 또 그를 동방부자라고 일컫는 까닭도 그의 학문성취가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들을 가르치는 한편 인성의 교화와 예속을 고루는데 힘썼으니, 그의 이러한 생활태도와 사상은 바로 교해경계의 시조로 나타나고 있다.

4) 연주충군(戀主忠君)의 시조는 오직 1수로 전6곡 중의 4곡이 이에 해당한다.

   연주충군의 시조를 보면 퇴계집에는 미인이란 용어를 사용한 연주시(戀主詩)는 별로 없고, 다만 은군·성주홍은·은전·군은·성은·국은·은파 등의 용어를 사용한 시가 있을 뿐이다. 퇴계의 그 많은 한시 중에서미인시(美人詩)는 다만 2편 뿐인데, 그 중의 한 편은 매화를 미인이란 별명으로 읊었고, 나머지 한 편만이 군주를 미인이라 하여 읊고 있다. 하기에 퇴계가 미인이란 용어로써 연주시를 지은 것은 이 시조와 더불어 오직 2편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미인시가 오직 2편 뿐이라고 해서 그의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희박하다고 볼 수 없으니, 이 한 수의 시조에서도 퇴계의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4.
 소 재

사용된 소재는 모두 34종류이고, 이 중에서 인물·산·가옥·계절·질병 등에 대해서는 그의 한시에 사용된 소재와 대비해 보았다. 그 결과 시조와 한시에 사용된 소재들은 퇴계가 잘 쓰는 소재였다. 소재면에서 특기할 것은 퇴계가 임종 직전까지도 종을 시켜 매화분에 물주기를 당부한 정도로 지극히 사랑한 매화가 한시에서는 많이 영매시(詠梅詩)의 소재로 되었는데 비해서 시조에서는 전연 언급치 않았다는 점이다.

5.
 형 식

시조 12수에서 사용된 음수율을 조사한 결과 초장에서는 3 4 3 4조가 7회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중장에서는 2 3 3 4조와 3 5 3 4조가 다같이 3회, 3 4 3 4조가 2회 사용되었고, 종장에서는 3 5 4 3조가 6회, 3 5 2 4조가 3회 사용되고 있다. 또 각장을 음보로 나누어 각 음보에서 사용된 자수를 통계내어 기본음수율을 내어 보았더니, 초장은 3 4 3 4, 중장은 3 3(4·5)3 4, 종장은 3 5 4 3이었다. 이렇게 볼때 도산십이곡에서 실지로 사용되고 있는 음수율과 각 음보에 사용된 자수로 통계낸 기본음수율은 다같이 그 중장 제2음보가 단형시조의 기본형에서 파괴되고 있다.그러나 도산십이곡은 단형시조의 기본음수율에서 볼 때 정형의 시조인 것이다.

6.
 출 전

진본 '청구영언'
   -명종 20년(1565)에 작가 친필로 쓴 목판본이 '도산서원'에 보관 중이다

7.
 특 징

'도산십이곡'의 특징은 속기와 작위가 배제된 순수시라 할 것이다. 물론 근대 이후의 순문학·순수시와는 역사적 성격뿐 아니라 자체의 속성도 같지 않다. 동양문학의 일반 범주로는 한정시·자연시 계열에 속할 것이다. 내면적 주체성을 지키는 한 학자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 특이하지만, 특히 퇴계 자신이 이 노래를 부르고 듣게 하면 인간들의 마음을 맑고 융화시키는 유익함이 있을 것이라고, 그 효용에 사회적 의의를 크게 부여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하나의 미학론으로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의 시 이천여편은 주자의 천이백여편의 배에 가깝고, 시를 전업으로 한 웬만한 시인에게도 밑지지 않을 양이다. 그러나 이 양적인 풍부함과, 그리고 시에 대한 긍정적 발언 및 시를 짓는 태도의 진지함이 바로 그대로 그의 시인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제자 권응인(權應仁)의 이른바 '澹薄風月'의 일화나, 그의 시에 대해 체재상의 결함을 드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시가 과거 문인 일반에게 다분히 소극적으로 또는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일면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시를 보는 눈이 한결같을 수는 없다. 그의 시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한 다른 한 쪽이 있어 왔음도 동시에 상기해야 한다. 그 가운데 권씨의 설을 반박하면서 퇴계의 '贈林錦湖亨秀二律' 등을 들어 그의 시적 역량을 높이 긍정한 이익(李瀷)의 논평과, 그리고 허균(許筠)이 그의 '國朝詩刪'에서 '비단 이학만이 아니라 시에 있어서도 역시 모든 사람을 압도한다.'고 한 말은 특히 유의할 만하다.
 퇴계의 시의 바닥을 가장 돋보이게 흐르고 있는 시인의식은 '청정한 세계에의 희구'다. 그의 시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매화'와 '달'과 '신선'의 이미지는 '청정한 세계'의 표상으로 되어 있다. 특히 매화는 퇴계의 집요한 시적 추구의 대상으로 유명하다. 
 

 

4. 한  시

나 이

풀           이

원     문

해     설

15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저절로 집이 되네

앞으로 가고 뒤로 달리니 다리도 많구나

평생을  한웅큼의 샘물로만 살아가니

강호의  물이야  얼마이든 알 바 없네

負石穿沙自有家

前行각走足偏多

生涯一국山泉裏

不問江湖水幾何

실개천의 작은 웅덩이 속에서  돌아다니는 가제를 보며 자신이 지향할 삶의 모습을 그려 본 듯하다.

18

이슬 머금은 어린 풀 물가에 둘러 있고 

작은 못은 맑디 맑아 모래도 없이 깨끗하네

구름 날고 새가 지나가는 한 폭의 구름 속에

어쩌다 제비가 날아와 물을 찰까 두려워라

露草夭夭繞水涯 

小塘淸活淨無沙

雲飛鳥過元相管

只백時時燕蹴波

61세 때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그 당시는 득의의 작품이라 생각했으나 지금와서 생각하니 매우 가소로운 일이다."하셨다.

46

동편 높은 산기슭에 새로 집을 지으니

눕고 선 바위들이 모두 그윽하네

뽀오얀 안개 어둑한 노을의 산 속에서 늙어가고

시냇물 빙 둘러 들판으로 흘러가네

만 권 책 속에 생애를 기꺼이 의탁하니

쟁기질하는 이 마음 무엇을 구하리오

新卜東偏巨麓頭

縱橫巖石總成幽

煙雲杳靄山間老

溪澗彎環野際流

萬券生涯欣有托

一려心事歎猶求

건지산 기슭 시냇가 동쪽 바위 곁에 양진암(계장)을 짓고, 양진암 앞을 지나는 토계를 퇴계라 고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이 때의 심정을 시로 읊었다.

57

비바람 치는 계당 책상조차 못 가릴제

좋은 곳에 옮겨 보려 숲 속 두루 찾았네

어찌 알았으랴 백년토록 학문할 땅이

나물 캐고 고기 낚던 그 곁에 있을 줄이야

꽃은 나를 맞아 웃으니 정이 더욱 깊고

벗 찾는 새소리는 그 뜻이 더욱 길도다

뜰을 옮겨와서 깃들기를 다짐하니

기쁠 때 꽃다움을 뉘와 함께 찾으리오

風雨溪堂不庇牀

卜遷求勝遍林岡

那知百歲藏修地

只在平生採釣傍

花笑向人情不淺

鳥鳴求友意偏長

誓移三徑來棲息

樂處何人共襲芳

계상서당은 너무 허술하고 허약하여 제자들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협소하였다. 제자들이 도산에 정사을 세우겠다고 거듭 청하자 도산 남쪽에 나가서 자리를 잡았을 때의 기쁜 심경을 읊은 시

58

'율곡이 퇴계에게'

시냇물은 수사(공자를 뜻함)에서 나뉘고

봉우리는 무이산(주자를 뜻함)처럼 빼어났네

살림살이는 경전 천 권이요

거처는 두어 칸 집뿐이로다

회포를 푸니 맑은 하늘에 달이 떠오르는 듯

웃으며 나누는 얘기는 거친 물결을 잠재우네

소자는 도를 듣고자 함이니

반나절 한가로움 헛되이 보냈다 마옵소서

 

溪分洙泗派

峯秀武夷山

恬計經千卷

行藏屋數閒

襟懷開霽月

談笑止狂簡

小子求聞道

非偸半日閑

 

율곡이 처가(성주)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길에 예안의 계상서당(溪上書堂)에 퇴계 선생을 찾아 (율곡의 나이가 23세, 선생의 나이가 58세) 시 한 수를 읊어 바쳤다.

'퇴계가 율곡에게'

내 병들어 문닫고 누워 봄이 온 줄 몰랐는데

그대 만나 얘기를 나누니 심신이 상쾌하구나

선비의 높은 이름 헛되지 않음을 알았는데

지난 날 나는 몸가짐도 제대로 못해 부끄럽소

깨끗한 곡식에는 강아지풀 용납할 수 없고

새로 닦는 거울에는 티끌도 침범할 수 없다오

부질없는 이야기는 모두 제쳐 놓고

힘써 공부하여 우리 서로 친해보세

 

病我로關不見春

公來披豁醒心神

已知名下無虛士

堪愧年前闕敬身

嘉穀莫容梯熟美

纖塵猶害鏡磨新

過情時語須刪去

努力工夫各日親

 

율곡의 헌시(獻時)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화답 하였다

69

'매화가 주인에게 주다'

부귀와 명예가 어찌 그대에게 맞으리

흰머리 날리며 티끌 속에 있다가 해를 넘겨 생각했네

오늘 다행이도 물러감을 허락 받았는데

하물며 이 좋은 나의 꽃피는 시절에 왔도다

 

籠榮聲利豈君宜

白首趨塵隔歲思

此日幸蒙天許退

況來當我發春時

 

매화가 퇴계에게 주는 형식으로 읊은 시

'주인이 매화에게 답하다'

재상과 친함은 그대와 인연이 못되도다

맑은 향내 사랑하며 스스로 생각하며 읊조리네

이제 내가 다시 올 약속 지켰으니

밝은 세월을 져 버렸다고 허물일랑 마시오

 

非緣和鼎得君宜

酷愛淸芬自詠思

今我己能來赴約

不應嫌我負明時

 

퇴계가 매화에게 답하는 형식으로 읊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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