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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인각사 뒤편서 신라 석조약사여래좌상 발견

含閒 2025. 3. 7. 07:51
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따라 <43>
군위 인각사 뒤편서 신라 석조약사여래좌상 발견
편집부 기자 / 2025년 03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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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 최 정 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1961년 5월 서라벌의 봄은 또 그렇게 다녀갔다. 5‧16군사쿠데타 정부는 경주신라문화유산보존정책에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석당은 이러한 5‧16군사쿠데타 정부에 크게 실망하고 있던중에 부산공고교장 박경원(초대 부산시립박물관장 역임)으로부터 흥미로운 제안을 받게 된다.

동아대학교박물관서 초빙
내용인즉 동아대학교 설립자이면서 총장으로 재직중인 정재환(남해출신)이 대학박물관을 개관하기 위해 적합한 인물을 찾고있다는 것이다. 박경원은 일제강점기부터 경주박물관 경험이 있는 석당 최남주를 정재환에게 추천하였다. 
 
1961년 가을 석당은 경주를 잠시 떠나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박물관인으로서 모든 열정을 쏟아붓게 된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모태는 1952년 설립자 정재환의 개인컬렉션으로 출발하였다. 석당 최남주가 1961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부임했을때 박물관의 모습은 부산구덕캠퍼스 도서관 한모퉁이에 달랑 진열장 하나가 놓인게 전부였다. 말이 박물관이지 도서관에 더부살이하는 빈약한 진열실 형태였다. 
 
 
 
1962년 동아대학교 사학과 학생들과 일연선사의 삼국유사산실인 군위 인각사 답사장면.(왼편 세번째 석당 최남주, 다섯번째 인각사 주지스님, 여섯번째 조개창 교수)
 
석당 최남주는 정재환 총장에게 정상적인 박물관 체제를 갖추려면 우선 전시실을 확장하고 신라‧가야 유물들을 수집하여 특성화해야한다고 건의하였다. 정재환 총장은 법률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 석당의 건의를 대폭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대학들은 재정상태가 열악한 처지라 유물구입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석당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개인소장품을 기증받는 등 초창기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주춧돌을 놓는데 혼신을 다하였다. 그후 후임 관장들에 의해서 박물관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2009년 부민동 옛 경남도청건물로 이전개관하였다. 지금은 명실상부한 한국 유수의 대학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동아대 학생들과 신라유산 답사
석당은 동아대학교 박물관 재직시 봄, 가을에 사학과 학생들을 인솔하여 경주를 비롯한 영남지역에 분포된 신라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현장 강의도 병행하였다. 이때 동아대 사학과 조개창 교수 등이 동행하였다. 
 
1962년 10월 19일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산실인 군위군 고로면(현 삼국유사면) 인각사를 답사하던 중 인근 동정곡(同庭谷) 흙더미 속에서 신라 말기 석조여래좌상을 발견하였다. 높이 150cm, 폭70cm, 불두높이 50cm이다. 석조여래좌상은 조성기법으로보아 팔공산 관봉(갓바위) 약사여래좌상보다 2세기 정도 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현재 이불상은 인각사 경내로 옮겨져 일연선사부도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석당은 약사여래좌상 발견을 통해 신라하대 약사여래 신앙이 팔공산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행한 것으로 보았다.
 
석당이 1962년 팔공산 일대를 답사할 때만 해도 교통사정이 나빠서 하루에도 보통 50리길을 걸었다. 팔공산 관봉약사여래불, 군위군 인각사, 군위군 제2석굴암, 경산 와촌면 굴불사, 하양읍 환성사 등을 답사한 기간은 일주일 정도였다.
 
 
 
석당 최남주가 인각사 뒤편 동정곡에서 신라석조여래좌상을 발견할 당시의 모습.
 

절‧민가에서 숙식한 고단한 일정
숙식은 절간과 민가에서 해결하였다. 석당은 팔공산 답사회고에서 매일매일 고단한 답사일정 속에서도 신라문화유산이 안전하게 잘 보존되어있는 것을 보면 어느새 그 고단함도 사라졌다고 하였다. 
 
경산시 와촌읍 불굴사 답사에서는 완전한 형태의 9세기경 신라3층석탑을 발견하여 최초로 학계에 보고하였다. 석탑의 높이는 7.43m이며, 신라 9세기 전형적인 경주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고, 그 비례도 아름답다. 
 
1965년 문화재위원회에서 석탑을 보물 429호로 지정하였다. 그밖에 11세기경 고려시대 석조불입상도 함께 발견하였다. 현재 경북문화재 자료 401호로 지정되있다. 굴불사는 신라 신문왕 당시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석당이 굴불사를 답사할 당시만하여도 전각들은 폐허가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중창불사를 통해 많은 전각들이 복원되었다. 굴불사를 지나 하양읍 환성사 답사에서는 절 입구에 방치된 신라석조 당간형식의 석주(石柱) 4기를 발견하였다. 석당은 이 석주들을 신라시대 사찰에서 특별한 의식에 사용하던 당간으로 추정하였다. 
 
환성사는 팔공산 아래 신라 헌덕왕의 아들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한 신라고찰이다. 석당이 답사할 당시에는 퇴락한 대웅전(보물제562호)과 요사채만 있었다. 지금은 석당이 발견한 4개의 석주 위에 목조지붕을 얹어 일주문으로 복원하였다.
 
1962년 석당 최남주의 팔공산 일대 신라문화유산발견 기사는 중앙 일간지와 영자신문 코리아 리퍼블릭(현 코리아 헤럴드)에 크게 보도되었다.
편집부 기자 / 2025년 03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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