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따라 <44>
신라 석탑의 백미 ‘나원리5층석탑’ 도굴범 마수 차단
편집부 기자 / 2025년 0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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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 최 정 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
이어 문화재위원회를 구성하여 초대위원장에 동양사학계 석학이자 서울대학교 교수인 동빈 김상기(東濱 金庠基. 1901~1977)박사가 취임하였다.
일제강점기 진단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김 위원장은 1942년 민속학자 송석하, 조선복식연구가 이여성 등과 경주 단석산 신선사유적을 답사하면서 석당 최남주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해방이 된 이후에도 두 사람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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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14일 한국일보 사회면에 중간 톱으로 보도된 국보39호 나원리 석탑 도굴기사. |
△경주주재 고적 조사원으로 활동
1963년 김상기 위원장은 석당에게 동아대학교 박물관생활을 정리하고 경주로 돌아와 신라문화유산의 지킴이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석당이 누구보다 경주 신라문화유산에 해박한 지식과 보존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봄 석당은 고향 경주로 돌아왔다. 공식 직함은 문화재관리국 경주주재 고적 조사원이었다. 석당에게는 다소 생소한 직함이었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자신이 직접 답사하고 작성한 경주지역의 문화유산자료를 기록한 노트를 적극 활용하였다.
우선 지정문화유산과 비지정문화유산을 분류하여 순차적으로 답사에 착수하였다. 당시만 해도 국민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라 문화유산보존사업이란 힘들고 외로운 길이었다. 경주에서도 예외는 아니였다. 신라문화유산이 워낙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어서 석당 혼자서 지킴이가 된다는 것은 여간 고난의 과업이 아니었다.
△찬란한 신라석탑들의 수난
1966년은 경주를 비롯한 전국 각처에 위치한 아름다운 신라석탑들이 도굴범 마수에 의해 무참히 유린되는 수난의 한해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우리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이들 도굴범들 출신지가 모두 경주라는 점이다. 1966년 9월 3일 밤 11시 신라석탑중의 가장 수작인 불국사 석가탑이 이들 도굴단들에 의해 파괴 훼손되었다.
석당은 이같은 소식은 접하고 직감적으로 평소 신라석탑 중에 가장 애착이 갔던 나원리 신라5층석탑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6월 13일 오후 문화재관리국 경주주재 조사원 자격으로 곧장 택시를 대절하여 현곡면 나원리 석탑으로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해서 우선 육안으로 확인하였다. 석탑의 3층 탑신 왼쪽 아랫부분과 4층 옥개석 아랫부분이 주먹만큼 깨져 있었으며, 맨위층 옥개석도 두동강 나 있었다. 또한 4층 옥개석 뒤편에는 무거운 것을 들 수 있는 잭을 괴는데 필요한 각목(참나무)이 그대로 얹혀져 있었다.
석당은 이와 같은 나원리5층석탑 답사내용을 문화재 관리국장과 김상기 문화재위원장에게 전보로 긴급타전하였다. 석당의 이러한 나원리 석탑도굴 조사결과는 1966년 9월 14일자 한국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대한불교 등 중앙일간지와 TV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불국사 석가탑과 나원리5층석탑이 도굴단에 의해 훼손됐다는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경악하였다. 불교 조계종단과 학계를 대표한 ‘고고미술동인회’의 도굴단 만행 규탄 긴급성명서가 발표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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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당 최남주는 일명 백탑으로도 불리는 나원리5층석탑을 도굴단의 마수로부터 지켜냈다. 나원리 석탑과 최남주. |
△천년 잠에서 깬 백탑 사리함
나원리5층석탑은 일명 백탑이라고 한다. 경주의 석탑 중 유난히 하얀빛의 화강석 재질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높이 880cm이며, 각층마다 비례미가 뛰어난 5층석탑이다. 경주지역에서는 장항리5층석탑과 함께 8세기 중엽 석탑예술의 백미이다.
석당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나원리5층석탑은 도굴단의 마수로부터 무사할 수가 있었다. 1996년 3월 15일 5층석탑 해체보수공사가 진행되던 중에 3층 옥개석에서 눈부신 사리장치와 금동불상, 금동소탑 묵서로 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 8세기 찬란한 신라금속공예품들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이 발견됨으로 해서 학계는 다시 한번 나원리5층석탑을 주목하게 된다.
석당은 안타깝게도 1980년 서방정토로 떠났기에 출토된 유물을 볼 수가 없었다. 석당은 나원리5층석탑이 8세기 중엽 신라왕실의 원찰(願刹)로 조성된 것으로 보았다. 특히 인근 현곡면 오류리에 위치한 전(傳) ‘신라진덕여왕릉’의 12지신상 조각양식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8세기 중반 작품이라고 추정하였다. 석당은 나원리5층석탑과 오류리의 신라왕릉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주목하였던 것이다.
편집부 기자 / 2025년 0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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