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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우칸[良寬]의 하이쿠[俳句] 읽기, 첫 번째

含閒 2025. 2. 12. 18:55

연재)료우칸[良寬]의 하이쿠[俳句] 읽기, 첫 번째

저 달이라도

 

 

 

법념/경주 흥륜사 한주

 

ぬす/ されし/  

  ぬすびとに/ とりのこされし/まとのつき

  도둑이 남겨두고 갔구나, 창문에 걸린 달

  (松山定男 著, 小林新一写真俳句 良寛俳句에서 발췌)

 

국상산(國上山)의 오합암(五合庵)이란 조그만 암자에 료우칸이 홀로 살 때다. 어느 날, 밤중에 도둑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가지고 갈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도둑이 그냥 가려고 하자, 료우칸은 일부러 잠든 척하고 몸을 뒤척여 덮고 자던 이불을 도둑이 쉽게 빼가도록하였다.

휘영청 떠오른 달이 창에 걸렸다. 그는 뜰에 나와 혼자 중얼거린다.

저 달이라도 줄 수 있었으면

 

료우칸(1758~1831)은 에도[江戶] 말기에 살았던 선승(禪僧)이다. 호우레키[宝暦] 8(1758), 에치고[越後(지금은 니이카타켄新潟県)]의 이즈모자키[出雲崎] 명주(名主)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세에 출가해 오카야마타마시마[岡山玉島]의 엔츠지[円通寺]에서 혹독한 선종(禪宗)의 수행을 쌓았다. 나중에 스승인 타이닌코쿠센[大忍国仙]으로부터 수여된 인가(印可)의 게()에 의해 타이구료우칸[大愚良寬]이란 이름을 따랐다.

칸세이[寛政] 8(1796), 료우칸은 고향인 에치고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국상산의 오합암이나 우라하라히라노[浦原平野]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허술한 초암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살았다. 탁발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겨우 이어갈 정도로 지극히 빈한(貧寒)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주위의 자연과 친하고, 사시사철의 변화를 즐기며, 이웃들에게 존경받고 그들과 친하게 지냈다.

료우칸은 좌선(坐禪)이나 독경(讀經)을 하는 한편, 와카[和歌]를 읊고 한시(漢詩)나 하이쿠[俳句]를 짓기도 하며, 때때로 그림을 그리고, 붓글씨를 썼다. 정말로 정신적으로는 여유로운 삶을 즐겼다.

세간의 부귀영달(富貴榮達)에서 멀리 떨어져 이름 없이 살며, 청빈을 친구로 삼는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는 진, , 미 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료우칸은 1,400 여수(餘首)의 와카[和歌], 700 여수의 한시(漢詩)를 남겼다. 그 외 그림과 글씨도 상당수 있다. 그가 쓴 하이쿠는 107편으로 다른 것에 비해 많지 않다.

하이쿠의 형식은 5, 7, 5로 구성된 17자의 짧은 시구지만,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특히 료우칸의 하이쿠는 해학적(諧謔的)이면서 위트가 넘쳐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그뿐만 아니다. 그의 하이쿠는 간결한 시구 속에 자연의 섭리를 담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일러준다. 그러기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청빈한 삶 가운데서도 여유로움을 즐기면서 살다간 료우칸의 삶은, 일본인들이 료우칸처럼 살고 싶다.’라며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인물로 꼽는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정신적으로 가난한 현대인들이 가장 바라는 삶이기 때문일 게다.

료우칸의 하이쿠를 한편씩 읽어가며 그의 삶을 닮아가도록 노력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듯하다.

 

いざさらば/ らん/ あきの 

  いざさらば/ われもかえらん/ あきのくれ  

자 그럼 안녕, 우리도 돌아온 가을 저녁의 해질 무렵

(松山定男 著, 小林新一写真俳句 良寛俳句에서 발췌)

 

무엇으로부터의 안녕일까?

해가 저물어가는 언덕에 돌아와 선 사람. 가을/ 저녁/ 해질 무렵/ 언덕.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안도하는 것일까?

하이쿠는 가장 적은 글로써 언어 너머의 것을 이야기한다. 의미는 설명하지 않는다. 해독(解讀)은 오로지 독자의 몫.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일본 유학 시절, 내가 하이쿠와 만남을 처음으로 가진 곳은 절이다. 사찰 안에 기숙사가 있어 일본불교를 접할 기회가 더러 생겼다. 조린지[常林寺]라는 사찰명이 있지만, 하기테라[萩寺]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리는 곳이다. 대웅전으로 들어오는 길 양쪽으로 싸리나무가 나란히 자라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싸리꽃은 6월 초부터 피기 시작해 중순이 되면 작은 보라색 꽃이 총총히 달려 예쁜 맵시를 자랑한다. 그 무렵이 되면 하기테라에서는 매년 싸리꽃 축제가 열린다. 다회(茶會)는 물론, 싸리꽃을 주제로 한 하이쿠 짓기 대회도 같이 열었다. 하이쿠 당선작은 심사위원들의 심의를 거쳐 일주일 뒤에 발표되고 사찰의 특별 게시판에 올렸다. 법당 뜰에 나란히 걸린 하이쿠를 읽으며 대상 작품이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학부 1년생이어서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아 하이쿠가 뭔지 모를 때라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주지 스님이 주는 공짜 쿠폰으로 메밀국수와 우동을 먹을 수 있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학생 신분이라 돈이 없어 우동 한 그릇조차 돈 내고 사 먹기 힘들어 하이쿠보다 먹을 것에 관심이 많았다. 더욱이 만학도여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야 했기에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가 전연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이렇게 맺게 된 인연이 료우칸선사의 하이쿠까지 이어질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한 고마운 일이다.

 

くほどは/ がもて/ かな 

  たくほどは/ かぜがもてくる/ おちばかな

  불을 땔 만큼은 바람이 가져다주는 낙엽일러라

(立松和平 著 良寛さんの和歌俳句에서 발췌)

 

토굴에서 밥을 짓는 낙엽은, 언제나 바람이 날라다 준다. 자연에 맡겨진 살림살이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은 탐을 내지 않는다.

 

다음은 다테마츠와헤이[立松和平]良寛さんの和歌俳句에 실린 글이다.

어느 때 료우칸이 에치고에 돌아가려고 하는 도중, 마을 사람이 나와 길에서 시주를 청하고 오합암 주변에 풀을 깎고 있다. 풀을 베어버리면 벌레 소리도 들을 수 없지 아니한가 싶어 료우칸은 놀랐다.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나가오카[長岡]번주(藩主-번의 영주領主)인 마키노타다키요[牧野忠精]가 료우칸을 만나러 온다고 한다. 쿠가미무라[國上村]는 무라가미[村上] ()의 비지(飛地-한 나라의 영토이면서도 다른 나라의 영토 안에 있는 땅)이나 다른 영토에도 들어있었던 곳이다.

드디어 오합암에 나타난 번주는 료우칸을 나가오카[長岡] 성하(城下)에 있는 큰사찰의 주지스님으로 모시고 싶다고 말한다. 료우칸의 높은 학식과 깨끗한 언행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나, 그는 세간의 영달에 대한 유혹 등은 미혹(迷惑)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료우칸이 위의 하이쿠를 번주에게 말없이 보여주자, 번주는 료우칸의 마음을 읽고 묵례(默禮)만 하고는 가버렸다고 한다. 이상은 구전(口傳)이지만, 자연을 사랑하는 그의 에피소드를 잘 말해주고 있다.

 

료우칸선사를 알게 된 건 일본에서 본 영화를 통해서였다. 일본 불교에 대해 단편적인 상식 외엔 아는 게 없었기에 선사와의 만남은 내게 충격이었다.

어느 봄날, 동갑내기 일본 친구인 세키가와[関川]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사카[大阪]에 사는 어머니가 교토[京都]로 나들이 오는데 내일 만나자는 내용이다. 다음날, 약속장소인 헤이안진구[平安神宮] 부근 호텔로 갔다. 벚꽃이 피기 시작한 때라 바깥은 상춘객으로 붐비건만 호텔 안은 조용하다. 일본 선종(禪宗)의 하나인 조동종(曹洞宗)에서 참선 강좌를 여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현수막을 보니 1부는 의자좌선(椅子坐禪), 2부는료우칸[良寬]이란 영화를 상영한다는 내용이 걸려있다. 친구는 불자인 어머니를 위해 내 것까지 예약을 해두어 귀한 시간을 가졌다.

良寬이란 영화는 사다나가마사히사[定永正久]라는 감독이 연출하고 마츠모토하쿠오[松本白鸚]라는 가부키슈메이[歌舞伎襲名]를 가진 배우가 료우칸 역으로 나온다. 그는 가부키를 비롯해 연극, 영화, 뮤지컬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유명인이다.

특히 감명 깊었던 장면은, 료우칸이 행각(行脚)하던 도중에 어느 동네에 도착해 아이들과 천진난만하게 노는 모습이었다. 료우칸은 테마리[手鞠]를 가지고 아이들과 서로 손으로 치며 놀고 있는 사이에도 무심(無心)으로 즐겼다.

무심이란 라는 것이 없는 상태이며, 깨달음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장소에 있더라도 깨달음의 세계에서 놀 수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この/ まりつきつつ/ 子供らと/ 春日/ れずともよし

このさとに/ てまりつきつつ/ こどもらと/ あそぶはるびは/ くれずともよし     마을에서/ 공놀이하며/ 아이들이랑/ 노는 봄날은/ 저물지 않으면 좋겠네

(松本市寿編 良寛]-人生에서 발췌)

 

위의 글은 료우칸이 지은 와카[和歌]이다. 료우칸이 무심으로 아이들과 어울려 즐겁게 노는 모습이 잘 그려져있다.

 

良寛이란 영화를 다 본 뒤, 시대는 다르나 일본에도 원효대사처럼 위대한 스님이 있구나 싶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しの/ ところはここか/

  よひふしの/ ところはここか/ はすのはな

술에 취해 누워 잠든곳이 이곳인가, 연꽃 피어 있는 곳

(松山定男 著, 小林新一写真俳句 良寛俳句에서 발췌)

 

술에 취해 잠들어버린 사람이 머문 곳. 이곳이 바로 연꽃이 피어 있는 곳이다. 여기에 잠든 사람은 료우칸 자신이다.

불교에서는 연꽃 속에 범천(梵天)이 있어 만물을 창조한다고 말하고 있다. 연꽃은 향기롭고 고결한 하늘 세계의 꽃이며 하얀 연꽃은 만다라화(曼茶羅華)라고도 불린다. 료우칸은 그런 추상의 세계에서 그저 취해 있었던 것. 열반의 경지에 들어있었을 것 같다.

위의 하이쿠는 료우칸의 아버지가 지은 것을 토대로 읊은 것이다.

 

료우칸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케라요시시게[解良栄重]양관선사기화(良寬禪師奇話)2단에 료우칸은 언제나 술을 좋아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너무 많이 마시거나 술에 취해 곤드라지는 일은 없었다. 누구라도 상관없이 서로 돈을 내놓아 각추렴해서 마시는 걸 그는 좋아했다. 당신이 한 잔, 내가 한 잔. 이런 식으로 술잔의 수도 같아 누가 득을 보거나 손해를 보는 일이 없었다.”라고 써 있디.

 

醉臥/ 宿はここぞ/ 水芙蓉

よひふしの/ ところはここぞ/ みずふよう

술 취해 드러누운 곳, 이곳이야말로 물 위에 부용(芙蓉) 꽃이 피어 있는 곳

(立松和平 著 良寛さんの和歌俳句에서 발췌)

 

아버지 이난以南이 지은 하이쿠다. 부용은 연꽃의 별칭으로 미인에 비유하기도 한다. 술에서 깨어나니 물 위에 부용 꽃이 피어 있다고 세련된 시구로 마무리하고 있다. ‘가 재치있게 들어있다. 연꽃이라고 하면 분홍색이 떠오르고, 취해서 발그스름해진 얼굴이 연상된다.

이에 료우칸이 아버지에 대해 억누르고 있는 감정을 간파看破할 수 있다. 료우칸은 집과 부모를 버리고 출가를 했다. 가운(家運) 아버지 대()부터 기울기 시작하더니 료우칸의 동생 대가 되자, 집안의 대마저 끊어져 아버지는 고향에서 쫓겨났다. 아버지는 료우칸의 동생에게 남은 재산을 모두 상속해주고 당시 서울인 교토[京都]로 올라가서는 물에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아버지에 대해 료우칸은 일생 참회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는 이러한 참회와 고행을 거쳐 훌륭한 선지식(善智識)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

 

宵暗/ 前栽はただ/

  よひやみや/ せむざいはただ/ むしのこえ

어두운 밤이여, 앞뜰에는 다만 벌레 소리뿐

(松山定男 著, 小林新一写真俳句 良寛俳句에서 발췌)

 

 

자연을 내집 뜰에서 바라본다. 공간은 그저 하나의 세계이다. 고요한 추상(抽象)의 세계에서는 본래적적(本來寂寂). 잠잠해 소리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벌레들이 참억새 이삭의 수만큼 울고 있지 않은가.

가을 밤, 캄캄한 뜰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풀벌레 소리만 들린다. 음정과 박자가 기막히게 맞는 자연의 아름다운 하모니. 료우칸은 풀잎 사이에서 밤새 울어대는 벌레들의 노래를 벗삼아 자연과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었을 터.

 

케라요시시게[解良栄重]양관선사기화(良寬禪師奇話)36단에 료우칸이 자연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측간을 불태운 이야기가 있다.

오합암에서 수행하고 있을 무렵, 암자의 주변에는 맹종죽(孟宗竹)이 자라는 대나무숲이 있었다. 봄이 되자 본채와 따로 떨어진 측간(廁間-뒷간)에도 죽순(竹筍)이 올라왔다. 날이 갈수록 점점 자라 올라가, 드디어 초가지붕에 받힐 정도로 자랐다.

료우칸은 그것을 보고 있다가, 죽순이 지붕에 닿게 되면 가엾다고 생각해 촛불로 지붕에 구멍을 내려고 하였다. 그만 실수해서 측간이 몽땅 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