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에 깃든 석당(石堂) 최남주의 향기따라 <41>
전답 팔아 무열왕릉 비각‧석탈해왕릉 석상 건립
편집부 기자 / 2024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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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 최 정 간 매월다암원장 차문화연구가 |
전장 속 신라문화유산 사랑
세상에서 그 흔한 명리(名利)와 이재(理財)를 멀리하고 한없는 낯은 자세로 신라문화유산들을 돌보았다. 석당 최남주의 이와같은 실천적 행동철학은 한국전쟁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꽃피웠다.
세상에서 그 흔한 명리(名利)와 이재(理財)를 멀리하고 한없는 낯은 자세로 신라문화유산들을 돌보았다. 석당 최남주의 이와같은 실천적 행동철학은 한국전쟁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꽃피웠다.
1952년 한국동란의 전황은 유엔군과 공산군간의 중부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을 계속하였다. 석당은 당시 자신이 조직한 경주고적보전회 사명에 충실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전쟁 중에 경주지역외 신라문화유산들의 피해조사에 나섰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신라왕릉들의 훼손상태도 점검하였다.
1960년 4‧19혁명 직후 허정은 과도정부수반(대통령직무대행)으로 경주를 방문하였다. 석당 최남주가 사재를 털어 건립한 석탈해왕릉의 석상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왼쪽부터 석당 최남주, 이호 내무장관, 허정 과도정부수반, 장도영 2군사령관) |
경주지역 문화재 피해 현장조사
특히 북한 공산군과 유엔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경주 북쪽 안강지역에 있는 흥덕왕릉과 정혜사지석탑, 옥산서원들을 답사하면서 혹시 모를 피해를 살폈다. 다행히도 큰피해는 면하였다. 신라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의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석조미술품의 보존상태도 돌보았다. 경주 서쪽지역의 관문인 금척리 고신라시대 고분군들의 도굴상황도 조사를 하였다.
석당이 경주 신라문화유산보존에 첫발을 내디딘 후 가장 마음아프게 생각한 유산은 바로 경주 서쪽 서악리에 자리잡고 있는 무열왕릉 귀부(龜趺)와 비신(碑身)을 잃은 이수(螭首‧비석의 머릿돌)였다. 신라최고 석조예술품이 천년의 비바람을 맞으면서 비각도 없이 노천에 방치되어 왔다. 비록 한국전쟁 중이였지만 석당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신라무열왕릉비각 재건에 착수하였다. 우선 비용을 마련하기위해 무열왕릉 가는 길에 있는 석당 소유의 일등호답을 매각하였다. 석당의 이같은 행동을 본 주변사람들은 모두가 미친 짓이라고 말렸다고 한다. 전쟁 중에 당장 가족들의 생존을 위한 식량을 책임져야할 가장으로서 말도 안되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석당은 세상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신라인의 후예답게 신라문화유산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당시 전쟁 중인 상황이라 건축자재와 대목장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특히 지붕을 덮는 기와는 더욱 구하기가 어려워 마침 6‧25전 내남면 덕천리 노 참판댁에 고와가 많이 남아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적당한 가격을 쳐주고 가져왔다. 비각 건축공기는 1952년 가을에 시작하여 1953년 봄에서야 완공되었다.
비각이 완공되는 날 석당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신라 삼국통일의 설계자인 태종 무열왕의 위대함을 우리 역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역사적인 인물의 얼이 서린 태종무열왕릉비가 석당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천년의 풍찬노숙을 끝내고 비각에 잘 모셔지게 된 것이다.
과도정부 허정 석탈해왕릉 참배
6‧25 한국전쟁이 끝난 후 순수 민간단체인 경주고적보존회는 지방행정관청으로 통합되었다. 문화유산보호보존 사업이 민간에서 지방행정관청으로 통합되었지만 전쟁직후라 예산은 한푼도 배정받지를 못하였다.
1954년 석당은 경주 동천동 소금강산 아래 있는 신라 4대 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 재위 AD57~80)의 표지석과 석상(石床)건립에 착수하였다. 이 역시 석당의 사재로 건립되었던 것이다.
당시 경주에서 최고 석수였던 박모씨의 솜씨로 제작되었다. 석탈해왕릉의 표지석과 석상이 건립된 후 이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이곳이 신라 4대 석탈해왕릉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1960년 4‧19 민주혁명 이후 과도정부시절 수반(대통령직무대행)이었던 허정(1896~1988)은 경주를 방문하여 신라 문화유산 보존상태를 시찰하였다. 이때 석당이 건립한 무열왕릉 비각과 석탈해왕릉 석상들을 둘러보고 전쟁 중에도 꽃피운 석당의 신라문화유산보존 정신을 높이 치하하였다. 허정은 젊은 시절 상해임시정부와 프랑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던지라 고대 역사와 문화유산보존에 관심이 지대하였다.
편집부 기자 / 2024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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