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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 11월 25일 심장마비로 별세

含閒 2020. 11. 27. 10:06

박창선 "주장끼리 마주한 마라도나? 표정에 여유가 묻어났지" [이근승의 킥앤러시]

이근승 기자 입력 2020.11.27. 09:55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 11월 25일 심장마비로 별세

-1986년 멕시코 월드컵 한국 축구 대표팀 주장 박창선 “오랜 벗을 떠나보낸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

-“마라도나의 첫인상?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도전하는 우리와 달리 여유 넘쳤다”

-“마라도나 분석 철저히 했지만... ‘뭐 이런 선수가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마라도나와 기량을 겨룬 건 영광스러운 일이자 평생의 자랑”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1차전. 아르헨티나 주장 고 디에고 마라도나(사진 왼쪽부터), 한국 축구 대표팀 주장 박창선(사진=엠스플뉴스, KFA)

 

[엠스플뉴스]

 

11월 25일 세상을 떠난 디에고 마라도나(향년 60)의 이야기를 꺼내자 박창선(67)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이 흐른 뒤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마라도나가 누굽니까. 세계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전설이에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축구인인데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라도나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오랜 벗을 떠나보낸 것처럼 마음이 아픕니다.” 박창선이 마라도나를 떠올리며 꺼낸 첫 얘기다.

 

박창선, 마라도나는 인연이 있다. 박창선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한국 축구 대표팀 주장이었다. 한국은 당시 아르헨티나, 불가리아, 이탈리아와 A조에 속했다. 32년 만에 본선에 오른 한국의 첫 상대는 마라도나가 주장 완장을 찬 아르헨티나였다.

 

1986년 6월 2일 멕시코 멕시코시티 올림피코 스타디움엔 6만 관중이 들어찼다. 경기 전 양 팀 주장인 박창선, 마라도나가 마주했다. 박창선은 이 순간을 또렷이 기억했다.

 

“월드컵 본선 첫 경기를 앞둔 선수라곤 믿을 수 없는 얼굴이었어요. 긴장한 우리 선수들과 달리 여유와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박창선의 회상이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에 1-3으로 졌다. 마라도나에게 실점하진 않았지만 세계적인 선수가 즐비한 아르헨티나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하지만,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다. 0-3으로 패색이 짙던 후반 28분 박창선이 한국의 월드컵 본선 첫 득점을 터뜨린 것. 박창선은 1986년의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기억한다. 득점은 없었지만 차원이 다른 축구를 선보인 마라도나를 말이다.

 

- 마라도나 첫인상 떠올린 박창선 “표정에서부터 여유와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

 

1986년 6월 2일 멕시코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1차전 한국과 아르헨티나의 경기. 한국 주장 박창선(사진 왼쪽)이 아르헨티나 주장 마라도나의 드리블을 수비하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11월 25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에서만 영웅인가요. 마라도나는 한 시대를 풍미한 세계 축구의 전설입니다. 프로축구 선수를 꿈꾸는 유소년들의 희망이고 꿈이었죠. 마라도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에요. 마라도나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라고. 세계 축구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은 친구인데...

 

감독님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마라도나와 대결을 펼친 바 있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 주장은 마라도나였습니다.

 

부고를 접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마라도나의 첫인상이었습니다. 한국의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첫 상대가 아르헨티나였어요.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처음 본선 무대를 밟았죠. 축구는 경기 시작 전 양 팀 주장이 모여 선축과 골대를 정해요. 페어플레이를 약속하고 사진을 찍죠. 긴장감을 감출 수가 없더라고.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처럼 세계 강호와 친선경기를 하고 유럽 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즐비했다면 달랐을 거예요. 당시엔 상대팀 분석부터 쉽지 않았어. 세계 최고 기량을 갖췄다는 마라도나만 알았지. 다른 선수에 대해선 정보가 없었어(웃음). 멕시코시티 올림피코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6만 관중의 함성에 안 떨릴 수가 있나요. 마라도나는 달랐습니다.

 

어땠습니까.

 

표정에서부터 자신감이 넘쳤어요. 월드컵 본선 첫 경기를 앞둔 선수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얼굴이 밝았습니다.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죠. 경기 시작만 기다린다는 게 보였습니다. 세계적인 선수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느꼈죠. 경기 전부터 주눅이 든 거야(웃음).

 

멕시코 월드컵 개막 이전 분석한 마라도나는 어떤 선수였습니까.

 

19살 마라도나는 1979년 세계 청소년 대회(U-20 월드컵의 전신)에서 아르헨티나를 정상으로 이끈 선수였어요. 그때부터 ‘축구 신동’으로 불렸습니다. 1984년 7월 이탈리아 세리에 A 나폴리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바르셀로나에서 뛰던 마라도나를 영입하는 데 1천50만(당시 한화 약 102억 원) 달러를 썼어요. 세계 최초 1천만 달러의 사나이였던 거지.

 

이름값부터 남달랐군요.

 

1980년대는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어요. 경기 영상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죠. 그런 시대에 마라도나에 대한 정보와 영상은 많았습니다. 대단한 선수였다는 증거죠. 우리가 잘못한 게 여기에 있었어.

 

어떤?

 

마라도나의 경기 영상만 끊임없이 돌려본 겁니다. 드리블, 패스, 결정력 흠잡을 데 없는 이 선수를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대비를 아주 많이 했죠.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고 느꼈습니다. 정상적으론 막을 수가 없는 선수구나. 속으로 ‘뭐 이런 선수가 다 있나’ 싶었다니까.

 

어느 정도였던 겁니까.

 

일단 엄청나게 빨랐어요. 생각할 틈을 안 주는 거야. 공을 다루는 능력도 남달랐습니다. 두세 명이 순간적으로 달라붙어도 공을 빼앗을 수가 없었어요. 춤을 추듯이 앞에 있는 선수를 하나둘 제치고 공격 기회를 만들어냈죠. 마라도나의 체격조건이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키가 167cm였어요. 그런데 몸이 단단했습니다. 툭 부딪쳤는데 몸이 돌덩이 같았어요.

 

마라도나가 한국전에서 득점을 기록하진 못했습니다.

 

우리의 패착이 여기에 있었죠. 아르헨티나엔 마라도나만 있었던 게 아니야. 당시 마라도나와 전방을 책임진 스트라이커 호르헤 발다노가 멀티골을 기록했습니다.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의 핵심 선수였죠. 두 번째 골을 넣은 오스카 루게리는 A매치 97경기에 출전해 7골을 넣은 선수였죠. 수비수인데 높은 점프력과 헤딩 능력이 뛰어났어요. 그런 정보가 없었던 거야.

 

감독님은 아르헨티나전에서 한국의 월드컵 본선 첫 골을 기록했습니다.

 

전반전을 0-2로 마쳤어요. 전반 6분(발다노)과 18분(루게리) 연속골을 허용했죠. 큰 무대에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기해본 적이 있어야지. 정신없이 뛰기만 했어요. 전반전을 마치고 주장으로서 선수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도 한국에선 역대 최고의 멤버란 소릴 듣는다. 한 번 해보자’고. 그리고 그라운드에 들어섰는데...

 

네?

 

후반 1분 만에 추가골을 내줬습니다. 이때부터 힘을 낸 것 같아요(웃음). 잃을 것 없다는 생각으로 더 강하게 부딪치고 뛰기 시작했죠. 후반 28분 기회가 왔습니다. 공간이 생겨서 중거리 슈팅을 시도한 게 골망을 갈랐죠. 공이 위로 올랐다가 뚝 떨어진 장면이 생생합니다. 경기에선 졌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에요. 득점 장면, 마라도나, 아르헨티나 모두 말이죠.

 

-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마라도나가 최고의 선수지” -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사제의 연을 맺은 리오넬 메시(사진 왼쪽), 고 디에고 마라도나. 당시 메시는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 에이스, 마라도나는 감독이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1차전 한국과의 경기에서 3-1로 승리한 아르헨티나(6승 1무)는 대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5골을 기록하며 팀 우승에 앞장선 마라도나는 대회 골든볼(MVP)을 받았습니다.

 

한국 선수들만 마라도나를 정상적으로 수비할 수 없었던 게 아니에요. 당시 월드컵에 출전한 그 어떤 선수도 마라도나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랜 시간 분석하고 준비해도 막을 수 없는 선수. 요즘 말로 ‘월드클래스’라고 하죠.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어떤?

 

유럽 축구를 안방에서 챙겨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남미월드컵’으로 불리는 코파아메리카, 유럽 최강자를 가리는 유로컵, ‘꿈의 무대’ UEFA 챔피언스리그 등도 실시간 시청이 가능하죠. 마라도나가 지금 시대에 살았다면 훨씬 더 위대한 선수로 남지 않았을까 싶어요.

 

축구계엔 끝나지 않는 논쟁이 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마라도나, 같은 아르헨티나 선수로 2010년대 세계 축구를 호령한 리오넬 메시 가운데 누가 더 뛰어난 선수인가 하는 겁니다.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기억하는 팬들은 메시를 보며 1980년대를 추억할 겁니다. 비슷해요. 메시 역시 아주 빠릅니다. 순식간에 상대 진영으로 파고들어 골을 만들어내죠. 공이 발에 딱 붙어있는 드리블, 수비의 허를 찌르는 패싱력 등도 마라도나와 닮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마라도나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축구계엔 메시가 마라도나를 넘어설 수 없는 이유로 월드컵 우승 경험을 꼽습니다. 메시는 2006년 독일 월드컵부터 4차례 본선 무대에 도전했지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했습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준우승이 최고 성적입니다.

 

월드컵은 세계인의 축제라고 합니다. 펠레, 마라도나 모두 월드컵 우승을 일구면서 세계 최고 선수로 인정받았어요.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마지막 우승이 언제인지 아세요?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의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언젭니까.

 

마라도나가 우승을 이끈 1986년이 마지막이에요. 세계 최고 선수로 평가받는 메시가 있어도 들어 올리기 힘든 게 월드컵 우승 트로피입니다. 그래서 마라도나를 더 높게 평가해주는 게 아닐까 싶어요(웃음).

 

마라도나는 타고난 천재 가운데 천재인 겁니까.

 

마라도나가 빼어난 재능을 타고난 건 맞습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기량을 겨뤄본 마라도나는 다른 선수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이었어요. 마라도나의 드리블, 패스, 슈팅 등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플레이가 가능할까’란 생각을 했죠. 마라도나는 머릿속에 구상한 걸 그라운드 위에서 구현하는 선수였어요. 마라도나의 판단력이나 축구 센스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천부적인 재능이 전부는 아니었다고 봐요.

 

재능이 전부가 아니었다?

 

마라도나는 어린 시절부터 하루 5천 번이 넘는 가슴 트래핑 연습을 했습니다. 남몰래 흘린 땀방울이 멋진 볼 컨트롤 능력으로 이어진 거예요.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이 결합해 마라도나란 전설이 탄생한 거죠. 한국엔 제2의 손흥민을 꿈꾸며 땀 흘리는 유소년 선수가 많습니다. 그 친구들이 마라도나의 삶을 통해 배웠으면 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뭡니까.

 

집념입니다. 선수 시절 마라도나는 축구에 대한 집념이 남달랐어요. 누구보다 축구를 사랑하고 발전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면 현재의 마라도나는 없을 겁니다. 한국의 유소년 축구 환경은 1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어요. 아무런 걱정 없이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졌죠. 이걸 기량 발전을 꾀하는 데 활용해야 해요.

 

기량 발전을 꾀하는 데 활용해야 한다?

 

유소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힘든 일이 생기면 금세 포기하는 학생선수들을 자주 봐요. 꿈은 마라도나 이상인데 훈련량은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학생선수가 많습니다. 마라도나처럼 전설적인 선수를 꿈꾼다면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훈련량이 따라줘야 해요. 학생선수들이 마라도나 역시 천부적인 재능만으로 성공한 게 아니란 걸 기억했으면 합니다.

 

감독님에게 마라도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마라도나와 기량을 겨뤘습니다. 영광스러운 순간이자 평생의 자랑이에요.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축구 선수 마라도나.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