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서열 1위 최순실부터 집단 자살 이기붕까지..'정권 실세 잔혹사'
박태훈 입력 2017.05.23. 06:03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첫 정식 재판이 열리는 23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 40년 지기인 '비선 실세' 최순실씨와 함께 선다.
역대 정권마다 대통령 측근을 둘러싼 실세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19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를 통해 "빈손으로 취임하고 빈손으로 퇴임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라며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이 되어 이웃과 정을 나눌 수 있는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했겠는가.
이러한 문 대통령 의지를 받들기 위해 복심(腹心)으로 불렸던 양정철 전 청와대 행정관이 최근 "내 역할은 여기까지이다"라며 백의종군을 선언한 바 있다.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최재성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다른 측근도 문 대통령의 당선이라는 목표 달성에 만족한다며 해외로 떠나거나 공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18대 박근혜 대통령까지 최측근 중 자신이 모셨던 대통령과 함께 은퇴해 평화롭게 '저녁 있는 삶'을 누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역대 대통령과 최측근의 잔혹사를 엮어 봤다.
1957년 5월 경무대(청와대의 이전 명칭)에 모인 자유당 1·2인자와 가족. 왼쪽부터 이기붕 당시 민의원(하원) 의장의 장남 이강욱,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이 대통령, 이 의장의 아내 박마리아, 이 의장의 차남 이강석. 이강석은 앞서 3월26일 이 대통령의 83세 생일에 맞춰 대통령의 양자로 입적됐다. |
이기붕은 이승만 정권 말기 대통령의 귀와 입을 틀어잡았던 1인자가 부럽지 않은 2인자였다.
국방부 장관을 거쳐 3차례나 하원 격인 민의원의 의장(국회의장)을 역임한 이기붕은 1960년 3월15일 5대 정·부통령선거, 이른바 '3·15 부정선거'를 통해 꿈에 그리던 부통령이 됐지만 44일 만에 일가족이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앞서 1957년 3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의 83세 생일을 맞아 자신의 큰아들인 이강석을 양자로 보냈다.
그의 부인 박마리아도 이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등 이기붕 일가의 권세는 하늘 끝에 닿았다.
하지만 4·19혁명이 일어나 이 대통령이 하야했고, 같은달 28일 당시 육군 대위이던 이강석은 서울 서대문 집으로 권총을 들고 와 부모와 동생 이강욱을 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현재 서대문역 부근의 4·19혁명학생도서관이 바로 이기붕의 집터다. 서슬 퍼런 시절 그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현 청와대)'라 불렸다. 당시 이기붕의 사상을 찬양하는 전기류 서적이 자주 출간됐는데, 대표적인 게 '민족의 해와 달'이었다. 이 책은 이 대통령을 '민족의 해', 이기붕을 '민족의 달'로 각각 추앙했다.
1961년 5·16 쿠데타 사흘 후인 18일 박정희(가운데) 당시 육군 2군 부사령관(소장)이 박종규 소령(왼쪽)과 차지철 대위를 거느리고 서울시청 앞에 서 있다. 사진=서울경제 |
19년간 철권통치를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측근들을 경쟁시키면서 자신의 권력을 지켜나갔다.
이런 가운데 1961년 5·16 쿠데타부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진 1979년 10월26일까지 총을 들고 그의 곁에 머물렀던 유일한 인물이 차지철 경호실장이었다.
공수부대 창설 멤버이기도 한 차지철은 5·16 쿠데타 때 특전단 중대장(대위) 신분으로 박종철 소령(이후 경호실장 역임)과 함께 박 대통령 경호를 담당했다.
5·16 쿠데타를 상징하는 사진에도 선글라스 차림의 박정희 당시 육군 2분 부사령관(소장)이자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을 가운데 두고 총을 찬 박종규와 수류탄까지 달고 있던 차지철이 좌우로 포진해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박정희 시대를 끝낸 김 중정부장도 박 대통령과 같은 고향(경북 선산)의 후배, 육사 2기 동기로 가장 잘나갔던 인물 중 한명이다.
박 대통령의 총애를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유신정권 2인자로 떠오른 차 실장은 10·26 때 박 대통령과 함께 김 중정부장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김 중정부장도 내란 목적 살인과 내란 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0년 5월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포승줄에 묶인 장세동 전 안전기획부장이 재판을 받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전두환의 오른팔 장세동, 영욕같이 해…문 대통령과 연도
11·12대 전두환 대통령은 백담사 유배와 체포, 옥살이 등 영욕이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이런 전 전 대통령 곁을 변함없이 따라다닌 이가 장세동 전 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이다.
1967년 월남에서 전두환을 만난 뒤 지금까지 장 전 안기부장은 '의리의 돌쇠'로 불리며 영욕을 함께했다. 5공화국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표최고위원이면서 이후 13대 대권에 오른 노태우 대통령, 직전 안기부장을 지낸 노신영 국무총리와 함께 후계자 경쟁을 벌이며 공공연히 신경전을 벌일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대통령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거친 장씨는 정치공작과 간첩조작을 배후 조종해 노태우 정부의 5공 청문회 등 여러 차례 조사에 불려나갔으나 전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일에 대해선 일체 입을 떼지 않았다.
정치깡패를 동원해 신한민주당 창당을 방해한 이른바 '용팔이 사건'으로 1994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12·12 군사 반란과 5·18 내란에 가담한 혐의로 전 전 대통령과 더불어 기소되어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다시 징역 3년6월을 확정 선고받아 복역하다가 함께 그해 12월 사면·복권됐다.
2002년 12월 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중도 사퇴했고, 2004년 4월 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서울 서초을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장 전 안기부장은 18대 대선을 앞둔 2012년 6월 특전사전우회 주최로 열린 ‘6·25 상기 마라톤 대회’에 참석해 당시 대권 도전을 선언한 특전사 출신 문재인 민주통합당 의원과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1975년 8월 강제 징집돼 특전사령부 1공수 특전여단 3대대에서 1978년 2월까지 군 생활을 했는데, 당시 대대장이 장 전 안기부장이었다.
'6공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오른쪽) 전 의원이 정무1 장관 시절이던 89년 10월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오찬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
▲노태우 시절 '6공 황태자' 박철언
13대 노태우 대통령 시대의 실세는 박철언 전 의원이 꼽힌다. 박 전 의원은 당시 '6공 황태자' 또는 '떠오르는 태양'으로 불렸다.
노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와 이종사촌 간인 박 전 의원은 정무1 장관, 체육부 장관 등을 지내며 정치와 경제 등 모든 영역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노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으로 전임 전 전 대통령의 입김을 제거하는 데도 앞장 선 박 전 의원은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김영삼(YS) 총재의 제2야당 통일민주당, 김종필(JP) 총재의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 간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킨 3당 합당의 밑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렇게 노 대통령은 여소야대 정국을 여대야소 정국으로 반전시켰으나 박 전 의원은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나 YS계와 껄끄러운 관계로 있다가 1992년 탈당하고 말았다.
이듬해 슬롯머신 업계로부터 뇌물은 받음 혐의로 당시 홍준표 검사에 의해 재판에 넘겨져 의원직 상실과 함께 1년 6개월 징역형을 살았다.
역시 민자당을 나온 JP가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해 1996년 15대 총선에서 당선됐으나 2000년 대구 수성갑에서 낙마한 뒤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변호사 사무실을 세워 운영하면서 대구경북발전포럼 이사장으로도 행보를 넓혔으며 시인으로도 활동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오른쪽)씨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김홍걸씨가 지난 4월 광주 북구의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한 뒤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통령선거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두손을 맞잡고 있다. 광주=연합뉴스 |
14대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숙청 등 당시에는 혁명과 같은 조치로 한때 국정 지지율을 83%까지 끌어올리는 등 고공행진을 했지만 차남 김현철씨와 외환위기로 인기가 곤두박질쳤다.
아버지에게 이런저런 민심을 전달했던 현철씨는 '소통령'이라고 불리기까지 했으나 1997년 5월17일 대검 중수부에 의해 기업인 2명으로부터 이권청탁과 관련 46차례에 걸쳐 모두 32억2000만원을 받은 혐의(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알선 수재 및 조세 포탈 등)로 구속됐다.
현직 대통령의 직계가족이 구속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었다.
김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했으나 외환위기와 겹쳐 지지율이 한자릿수까지 떨어졌다.
현철씨는 1999년 징역 2년과 벌금 10억5000만원, 추징금 5억2420만원을 선고받았으며 같은해 8월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2008년 여당인 새누리당의 여의도연구원 부원장으로 정계에 복귀했으나 공천 탈락 등으로 2012년의 19대 총선 출마를 포기했고, 이번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들어와 문 대통령 지지를 선언했다.
▲DJ 재임 말년 차남 홍업, 막내 홍걸씨 구속돼
사실상 첫 야당 후보로 대권을 거머쥔 15대 김대중(DJ) 대통령도 말년에 아들들이 구속되는 아픔을 겪었다.
DJ의 세아들 중 막내 홍걸씨는 2002년 5월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돼 39억9000만원의 뇌물을 수수하고 2억2000만원의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구속됐다. 홍걸씨는 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을 맡아 19대 대선에서 문 대통령을 도왔다.
한달여 후인 2002년 6월21일엔 차남 홍업씨가 청와대와 검찰, 국세청, 예금보험공사, 신용보증기금 등 국가기관의 업무와 관련해 기업체의 청탁과 함께 22억8000만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 알선 수재, 변호사법 위반)로 구속됐다. 홍업씨는 2007년 4월 전남 무안·신안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출마 당선되기도 했다.
홍걸씨와 홍업씨는 나란히 2005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사면받았다.
한편 장남 김홍일씨도 나라종금으로부터 인사청탁과 함께 1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2006년 9월 대법원에 의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추징금 1억5000만원을 선고받은 뒤 2007년 2월 특별사면됐다. '홍삼 트리오'라 불리었던 DJ의 세아들은 모두 국정개입 의혹에 연루돼 사법처리를 면치 못했다.
2015년 6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특별사면 의혹과 관련해 소환된 노건평씨가 서울고등검찰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TV 캡처 |
16대 노무현 대통령의 둘째형이었던 노건평씨는 '봉하대군'으로 불리는 등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을 빗댄 별명이다.
2003년 초 인사개입설로 구설에 올랐고 2004년엔 당시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으로부터 연임 청탁과 함께 3000만원을 수수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집행유예 2년)됐다.
2008년 세종증권 매각비리 사건으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2010년 8·15 특사로 석방됐다.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맨 왼쪽)이 2012년 7월 구속적부심을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에 출두하는 길에 부산저축은행 피해자로부터 넥타이를 잡히고 날계란 세례를 받는 봉변을 당하고 있다. |
17대 이명박 대통령을 늘 괴롭혔던 인물은 다름 아닌 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보다 6살 위인 이 전 부의장은 6선 의원으로 이 전 대통령보다 훨씬 일찍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여기에 동생이 대통령이 되자 자연스럽게 이 전 부의장은 권력 핵심으로 주목받았다. 시중에는 이 전 부의장의 힘을 빗대 '만사형통'(萬事兄通∙ 모든 일은 형인 이 의원을 통하면 성사된다)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고향인 경북 포항에 있는 영일항에서 따온 '영일대군'으로도 불렸다.
주변의 이런 우려는 결국 2011년 12월 자신의 비서 이름으로 된 차명계좌 6개에서 수억원에 달하는 부정 자금이 드러나 현실화됐고, 2012년 7월10일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임석 솔로몬저축은행 회장과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퇴출 저지 명목으로 돈을 받고,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의 형이 구속되는 사례를 남겼다.
이 전 부의장은 징역 1년2월, 추징금 4억5000만원을 확정받았으며 형기를 마쳤다.
박근혜 정부 '권력서열 1위'로 지목된 최순실씨가 지난해 12월 서울중앙지법 대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18대 박근혜 대통령만큼 사상 첫 기록을 많이 세운 대통령은 없다.
사상 첫 여성 대통령, 사상 첫 부녀(父女) 대통령, 직선제 쟁취 후 사상 첫 득표율 50% 돌파, 사상 첫 파면 등등이다.
이렇게 만든 이는 40년 지기라는 최순실씨이다.
박 전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만사올통'(萬事올通·모든 일은 동생인 박지만씨 부인, 즉 올케 서향희 변호사를 통하면 된다)이라는 말이 나돌아 동기간을 매몰차게 멀리했다. 그러나 혀 안의 입처럼 움직였던 최씨에게만은 그러하지 못해 온갖 불명예를 자초했다.
'정윤회 문건'의 작성했다가 고초를 겪었던 청와대 민정수석실 전 행정관인 박관천 전 경정은 2014년 12월 공무상 비밀 누설 등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대한민국 권력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박 대통령은 3위이다"라고 말했다.
나란히 옥에 갇혀 재판을 받는 권력서열 1위 최씨와 3위 박 전 대통령은 앞으로 어떤 운명을 맞을지 세간의 이목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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