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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에서 내려온 함상명(21)의 이 한 마디에 수많은 복싱인은 가슴이 뭉클했다. 국제 복싱계에서 힘을 잃어 추락을 거듭하는 한국 복싱에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함상명은 15일(한국시간) 리우센트루 파빌리온6에서 열린 2016 리우올림픽 남자 복싱 56㎏급(밴텀급) 16강전에서 중국의 장 자웨이를 상대로 분투했지만 0-3(27-30 27-30 27-30) 심판 전원일치로 판정패했다. 애초 단 한 명도 올림픽 본선을 밟지 못한 한국 복싱이었으나 56㎏급에 출전할 예정이었던 아르헨티나 선수가 포기하면서 함상명에게 기적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나흘 전 베네수엘라의 빅토르 로드리게스를 2-1 판정승으로 누르고 감격의 첫 승을 따낸 함상명이었으나 같은 체급 APB(국제복싱협회 프로복싱) 챔피언인 장 자웨이에게 덜미를 잡혔다. 하지만 아쉬운 결과보다 ‘패자’ 함상명의 퍼포먼스가 큰 화제였다. 그는 웃는 얼굴로 장 자웨이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올렸다. 뜻밖에 함상명의 태도에 장 자웨이도 당황한 듯 고마워했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한 함상명은 링에서 내려온 뒤에도 자신을 응원해준 한국 관중에게 큰절을 올렸다. 국내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도 “이기려고 왔는데 졌으니 아쉽지만 이미 지나간 경기다. 큰 무대에서, 링 중앙에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이 기쁘다”며 홀가분하게 웃었다.
함상명의 미소는 어찌 보면 한국 복싱의 쓸쓸한 자화상이다. 리우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한국 복싱은 심한 외풍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 3월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최종예선과 5~6월 남녀 세계선수권 등 올림픽 본선 티켓이 걸린 각종 대회에서 여러 선수가 석연치 않은 판정의 희생양이 됐다. 시종일관 링에서 우위를 점해도 심판진은 좀처럼 한국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스포츠 기본 가치에 어긋나지만 이는 사실 한국을 향한 ‘보복 판정’이었다. 국내 한 복싱 원로는 “현장에서 다른 나라 한 심판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정말 한국 너무했다’고 하더라. 한국 복싱이 아예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더라”고 말했다. ‘그때’는 2년 전이다. 인천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복싱 종목에서 다소 한국에 유리한 판정이 난무했다는 것이다. 함상명도 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승에서 만난 상대가 이번에 리우에서 패한 장 자웨이였다. 함상명이 3-0 판정승하며 금메달을 거머쥐었으나 중국 측에서는 억울해했다. 누구보다 이를 잘 아는 건 선수 본인이다. 당시 함상명은 “실력으로 이긴 경기는 아니었다”고 말해 취재진을 당황하게 했다. 리우에서 패한 그는 또다시 2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솔직히 아시안게임 결승 때 내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애매하게 이겼기에 이번만큼은 깨끗하게 정정당당하게 대결하고 싶었다. 그래야 승부가 어떻게 되든 둘 다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졌지만 기쁘다”고 말했다.
한국 복싱은 지난해 국내에서 열린 세계군인체육대회 복싱 종목에서도 다소 홈어드벤티지를 누렸다는 시선을 받았다. 국내 복싱 한 지도자는 “아시안게임 때 억울해하던 다른 나라 선수, 지도자들이 군인체육대회 이후 반감이 심해진 것 같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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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고난의 행보를 거듭한 한국 복싱은 2년 간 한국이 뿌린 대로 거둔 셈이었다. 그나마 국제복싱협회에서 힘을 발휘한 김호 전 사무총장마저 떠나면서 한국 복싱의 국제적인 영향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가장 안타까운 건 올림픽을 바라보고 땀을 흘린 선수다. 대표 선수의 한 가족은 “상황이 이렇게 됐으면 실무자가 나서서 국제 사회와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 함상명이 올림픽 패배 이후 보인 퍼포먼스는 더욱 의미가 있다. 어른들의 과오를 스물 한 살 앳된 청년이 진정성 있는 태도로 국제 사회에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서글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