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일(현지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카리오카 경기장 3에서 열린 2016 리우올림픽 태권도 여자 -67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한국 오혜리가 시상대에 올라 기뻐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아시아타임즈=김영봉 기자] 태권도 대표팀 맏언니 오혜리(28.춘천시청)가 브라질 리우 올림픽 태권도 67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마침내 만년 2인자의 설움을 씻어냈다.
오혜리 선수는 그동안 웰터급 체급의 최강자인 황경선에 밀려 두 차례나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결과 8년만에 정상에 오른 것이다.
지난 20일(한국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파크 카이로카 제3경기장에서 열린 2016 리우 올림픽 여자 67kg급 결승전에서 오혜리 선수는 프랑스 하비 니아레 선수에 극적인 1점차(13-12)로 역전승을 거뒀다.
오혜리가 웰터급에서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불굴의 의지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혜리는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선발전에서 같은 체급인 황경선에 지면서 처음으로 올림픽 출전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당시 그는 황경선의 훈련파트너로 올림픽에 참가했다.
이어 그는 지난 2012년 런던대회에서 정상에 오를 기회가 있었지만 최종선발전을 2주를 앞두고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는 바람에 경기를 뛰지 못해 올림픽 도전이 물거품이 됐다.
그의 불운은 끝이 아니었다. 지난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에서도 떨어져 국가대표와의 인연은 더욱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오혜리 선수가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5년부터다.
오혜리는 알마티 카자흐스탄 오픈대회에서 67kg급에서 금메달을 따며 서서히 두각을 드러냈고 모스크바 그랑프리 67kg급 금메달, 첼랴빈스크 세계선수권 73kg급에서 연이어 정상에 올라 마침내 리우 올림픽 출전 기회가 주어졌다.
오혜리의 8년의 기다림과 포기하지 않는 열정은 2인자의 꼬리표를 떼고 웰터급 정상에 오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노트북을 열며] 피그말리온과 헬조선
밤마다 전해오는 승전보를 시시각각 속보로 처리하면서 유독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박인비의 신들린 롱퍼팅도 손흥민의 눈물도 아닌, 여자 태권도 67㎏급에서 금메달을 딴 오혜리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프로필에 올려놨다는 ‘피그말리온(Pygmalion)’이란 단어였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키프로스의 왕이자 조각가다. 그는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의 여인상을 조각했는데, 그 아름다움에 반해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피그말리온의 진심을 전해 들은 여신 아프로디테는 그의 사랑에 감동해 여인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줬다. 이후 그의 이름은 ‘간절히 원하고 기대하면 언젠가 이뤄진다’는 자기 충족적 예언이자 암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심리학에서도 이처럼 긍정적인 기대나 관심이 좋은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실증적 연구도 적잖다. ‘응답하라 1988’의 삽입곡 ‘함께’가 큰 인기를 모은 것은 ‘언젠가는 좋은 날이 찾아올 거야’라는 희망적 메시지에 힘입은 바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만년 2인자’라는 설움에 ‘국내용’이란 비아냥까지 받았던 오혜리에게 피그말리온은 절실하게 붙잡고 싶은 희망의 동아줄이었을 게다. 2008년엔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탈락했고 2012년엔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허벅지 근육이 파열돼 꿈을 접어야 했던 그에게 세 번째 도전은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게다. 과연 할 수 있을까, 내게 기회가 주어지기나 할까 확신조차 들지 않았을 게다. 하지만 그는 피그말리온이란 다섯 글자를 부여잡고 “잘 될 거야”라는 끊임없는 자기암시를 통해 스스로를 응원하며 끝내 꿈을 이뤄냈다.
이 같은 오혜리의 피그말리온에 ‘헬조선’을 살아가는 이 땅의 젊은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맞아, 더욱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날이 찾아올 거야”라며 다시금 각오를 다지게 될까. 아니면 “현실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유리 천장보다 더 단단한 콘크리트 천장을 어떻게 뚫으란 말이냐. 피를 말리는 생존경쟁에 직면한 우리 같은 청년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며 고개를 저을까.
오혜리의 성공은 흔치 않은 사례일 수 있다. 개천에서 용은 더 이상 나기 힘든 세상인 것도 맞다. 그렇다고 긍정의 힘을 애써 무시할 필요도 없다. 시각장애인이자 청각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도 “세상이 비록 고통으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힘 또한 가득하다”고 고백하지 않았나. 베스트셀러 작가 앤 라모트는 “세상의 모든 뛰어난 글의 처음은 대부분 최악이었다”고 했다. ‘글’을 ‘젊은이’로 바꿔도 다르지 않다. 차는 짓이겨질수록 강한 향이 나는 법이다. 리우의 땀방울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박신홍 EYE24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