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국수가 먹고 싶다

含閒 2016. 3. 25. 09:41

국수가 먹고 싶다       ㅡ 이상국  ㅡ


사는 일

밥처럼 물리지 않은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치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국회의원 예비후보에서 떨어진 친구의 페이스북에서 가져 온 시입니다.

친구의 원상회복을 빕니다.





“시인으로서 그럴듯하게 행세했으나… 아비로선 무력하게 살아온 슬픔이”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이상국(67) 시인은 좀 심심한 사람 같았다. 허세나 객기도 없고, 말을 재미있게 구사할 줄도 몰랐다. 점심상에 막걸리가 없었다면 그와의 만남은 상당히 갑갑했을 것이다.

"제 시에는 세상에 패배한 자들의 비애(悲哀)가 있다고 했어요. 소시민적이고 대강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늘 2선, 3선에 서있는 삶의 슬픔이 있는 거죠. 제가 살아온 삶을 봐도 당당하거나 양양(揚揚)했던 적이 없어요."

그는 베스트셀러 시인이 아니었고, 여성지나 TV 연예 프로에 초대되지 않았고, 스스로는 트위터 등을 날려 군중을 모은 적도 없었다. 말하자면 각광받는 시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젊어서는 몸을 팔았으나/ 나도 쓸데없이 나이를 먹은 데다/ 근력 또한 보잘것없었으므로/ 요즘은 시를 내다 판다/ 그런데 내 시라는 게 또 촌스러워서/ 일년에 열 편쯤 팔면 잘 판다…/ 가끔 장부를 펴놓고 수지를 따져보는 날이면/ 세상이 허술한 게 고마워서 혼자 웃기도 한다/ 사람들은 내 시의 원가가 만만찮으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우주에서 원료를 그냥 퍼다 쓰기 때문에/ 팔면 파는 대로 남는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아서다.'〈시 파는 사람〉



	이상국 시인
이상국 시인은“삶에는 모범 답안이 없고 결국 자기 위안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그의 시를 읽으면서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계기가 없다가 마침 그가 '박재삼문학상'수상자로 결정됐다. 서울에서는 비바람이 쳤지만 강원도 미시령 터널을 넘어 그가 사는 속초에 닿으니 화창한 봄날로 바뀌었다.

―시를 팔면 얼마나 남습니까?

"제가 시집을 여섯 권 냈어요, 초판 2000부를 찍어도 다 팔렸을 리 없죠. 정가 8000원에 인세가 10%이니 한 시집당 100만원 벌이가 됐을까요. 후후후. 네 번째 시집은 꼭 10년 만에 300부를 더 찍는다는 연락이 왔어요. 내 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죠."

―이 자리에서는 '내 시에 미안하다'고 하면서 이런 시를 썼지요? '사람이 살다가/ 누구에겐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몇 사람이라도 꼭 들어줬으면 하는 말이/ 시라면/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고.

"그런 면도 있고(웃음). 시인이라는 간판은 그럴싸해도 경제적인 면과 결부하면 허당이지요. 누가 시를 쓰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안 쓴다고 벌주지도 않잖아요. 시가 나를 지탱해주는 것이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지만. 어떤 이들에게 시는 아무것도 아니죠."

―선생의 시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시가'국수가 먹고 싶다'이지요?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 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 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그렇게 알려질 줄 알았다면 더 잘 쓸걸. 쓰다가 시가 안 돼서 내버려두다가 2~3년 걸렸어요.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어요. 그래도 제가 음식은 선택을 잘한 거예요(웃음). 스테이크나 햄버거가 아니었으니."

―세상에는 잘난 사람보다 못난 사람이 더 많으니 이런 선생의 시가 마음에 와 닿는 걸까요?

"시를 쓰다 보면 대중이나 문단을 의식하게 되죠. 남들이 칭찬해주는 시를 쓰고 싶고, 또 시단의 경향과 유행도 있지요.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집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따라간 것 같아요. 정처 없이 헤맨 거죠. 그 뒤로 내가 잘 아는 것, 내가 발붙이고 사는 땅, 내가 속한 계급에 대해 쓰기 시작했죠. 하지만 이도 너무 오래 했어요. 시적 모색을 해보자며 변하려고 하지만, 누가 이런 시가 좋다고 하면 그걸 자꾸 유지하려고 해요. 그게 함정인 줄 모르고."

―선생의 시에서 '나는 늘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여름이 또 가고 나니까/ 민박집 간판처럼 허술하게/ 떠내려가다 걸린 나뭇등걸처럼/ 우두커니 그냥 있었다'고 했지요.

"사람들은 늘 내가 강원도 속초에 있었으면 하고, 구닥다리 같은 시를 쓰면 좋겠다고 해요."

―어느 나이가 되면 사는 것은 오늘의 내 존재를 내일로 연장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변해본들 거기에서 거기지만. 아직도 내부에는 욕망과 갈구가 있는데. 물론 살아온 게 있으니 다 벗어날 수는 없겠지요. 맨날 아버지 어머니 가족 얘기와 농사짓는 얘기를 팔아먹으니 어디 공감을 얻겠나요(웃음)."

―선생의 시 '밥상에 대하여'는 우리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오래 받아먹던 밥상을 버렸다/ 어느 날 다리 하나가 마비되더니/ 걸핏하면 넘어지는 그를 내다버리며…/ 때로는 밥상머리에서 내가 지르는 호통소리에/ 아이들은 눈물 때문에 숟가락을 들지 못했고/ 그럴 때마다 아내는 공연히 밥알을 줍거나/ 물을 뜨러 일어서고는 했지/ 나는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나의 가족들에게, 실은 나 자신을 향하여/ 어떤 때는 밥상을 두드리고 숟가락을 팽개치기도 했지/ 여기저기 상처난 몸으로 그도 힘들었을 것이다.'

"식구가 한자리에 모이는 게 밥상 자리이니까요. 저도 그렇게 컸죠. 직통으로 날아오는 아버지의 훈계를 피할 수 없었지요. 고개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잖아요."

―요즘 젊은 세대는 밥상에 둘러앉아 먹지도 않을뿐더러 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아내 또한 '밥이 목에 걸려 안 넘어가겠다'고 타박하겠지요. 이 선생께서는 가장(家長)으로서 어떠했나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잘 알지도 못하고 엄격하기만 했지요. 내 잣대로, 내 깜냥만으로. 어느 순간 과외를 시켜야 대학에 보낼 수 있는데 내 경제력이 너무 보잘것없었어요. 가장이란 혼자 사는 게 아니구나. 아이의 미래와 연결돼 있구나. 많은 노력을 하지도 않고 시인으로서 행세했으니 글쟁이로서는 불만이 없지만, 아비로서 경제적으로는 참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무력감을 많이 느꼈지요. "

―결혼을 우리 나이로 마흔둘에 했다고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콤플렉스도 있고. 가정을 꾸릴 자신이 없어서 미적거렸죠. 세월이 잠깐 가버렸어요."

―부인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아요. 천하의 도둑놈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밝힐 순 없고. 집사람이 애를 써 자녀 둘을 대학 보냈지요. 옛날에는 아내가 편안한 상(相)이었는데, 이제는 불안하게 변해 있어요. 내가 아내의 얼굴을 바꿔놓았구나, 미안한 마음이 있지요. 요즘엔 나는 수입이 없고, 집사람이 일을 나가고 있어요."


	이상국 시인(왼쪽)
―직장에서도 선생은 은퇴했을 나이지요.

"아직 자식 결혼을 못 시켰고 노후 문제도 만만치 않으니까. 아내는 힘들고, 나는 도울 방법이 없고."

―젊었을 때 시(詩)보다 돈 버는 일에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하는 마음도 들고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지요. 어쩌면 시인들에게 다른 좋은 경제적 조건을 제시하면 다들 그만두지 않을까요. 제가 농협에 근무할 때 값싼 임야가 매물로 많이 나왔어요. 설악산 대명콘도를 짓는 땅이 평당 50원 했는데 그걸 사놓았으면. 나는 땅을 '경치'로 봤지 돈으로 보진 않았으니."

그는 고졸이다. 청춘의 반항으로 대학을 안 간 게 아니라, 대학을 가려고 몸부림쳤지만 좌절된 '생계형'의 경우다.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 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 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 먹었다….'〈자두야〉

"그때는 심각했지요. 집안 농사일을 돕다가 서울 가서 학교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출했어요. 한 번 실패하고. 그 뒤에 황소 판 돈을 들고 다시 상경했어요. 5, 6년 돌았지. 많은 짓을 했지요. 도매상에서 약을 떼서 소매 약국에 배달해주고, 철강업체에서 경리도 해봤고. 결국 못 버텼죠."

―낙향해서 좌절감이 컸겠군요.

"반듯한 월급쟁이나 대학생이 됐어야 하는데. 낙향해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더듬더듬 쓴 시가 당선됐어요. 그해 겨울 눈은 오고, 마을에 전화가 없을 때인데 신문사에서 연락이 안 되니 면사무소 여직원이 눈을 맞으며 집으로 찾아왔어요. 1974년 양양(襄陽)농협에 입사했어요. 젊었을 때는 좌절과 분노가 배여 있었지요. 그럼에도 넥타이를 매고 25년 근무하다가 IMF 때 명예퇴직했어요."

―나이가 들면 순응하고 체념하게 되지요?'흐르는 강이 나이를 자시면/ 무엇이 되는지/ 양양 남대천 물너름에 와서 보아라/ 한때는 살을 내줄 것 같던 사랑이나/ 몸을 내던지며 울던 슬픔도/ 생의 굽이굽이를 돌며 치이고 닳아/ 이제는 모래처럼 순해졌으니…'라는 선생의 시처럼.

"장차 되고자 하는 희망이 없으니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거죠. 나이가 들면 자기 삶을 합리화하는 것도 강해지죠. 내 삶에서 도망갈 수 없으니까요. 누구나 삼시 세 끼 똑같이 먹는다는 말을 늘어놓죠. 하지만 삶마다 차이는 있죠."

―작년까지 '만해마을' 운영위원장을 8년간 맡았지요?

"아침에 미시령을 넘어가고 저녁에 넘어오는 출퇴근을 했어요. 생활은 안정됐지만 지역 사람들과는 단절됐어요. 퇴근해서 누굴 불러낼 만한 깜냥도 못 됐고."

―그래서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라는 시가 나왔나요?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지난 정권의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전 직원에게 이 시를 이메일로 보냈다고 전해 들었어요. 젊어서는 집에 잘 안 들어가려고 했잖아요. 빨리 들어가면 밑지는 것 같고. 나이 들어가니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어슬렁거려본들 반갑다고 하는 사람도 없고. 정신 차리고 집에 들어가는 게 좋지요."

―60대 후반인데, 아직은 뒤를 돌아볼 나이는 아니지요?

"뒤가 돌아다 보입디다."

―뭐가 보입니까?

"뭔가 해본 것도 없지만 못 해본 것도 없고…. 내가 시인이 아닌 다른 삶을 살았더라도 아마 뒤를 돌아보면 아쉽거나 했겠지요. 삶에는 모범 답안이 없잖아요. 생이란 자기 위안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지요."

바깥에 봄꽃들이 눈부셨지만, 좀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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