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당대 최고의 知性人들이 白晝에 全裸로 소 탔던 문묘와 성균관

含閒 2013. 8. 12. 15:57


	서울 종로구 성균관에서 전통혼례를 치르는 신랑 신부가 가마를 타고 명륜당 앞뜰로 향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知性人들이 全裸로 소 탔던 문묘와 성균관

 

그저께(8/9) 신문을 보니까 성균관의 명륜당과 운현궁에서 열리는 전통혼례는 불법으로, 경찰에서 업체대표를 고발했다고 한다. 업체는 명륜당을 '전통 혼례식장'으로 이용하면서 신랑 신부 측으로 부터 130만원씩 사용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국가 지정 문화재로, 2011년 문화재청이 명륜당과 운현궁의 전통혼례는 불법으로 규정했지만 그간 관리 관청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채 방치해 두었다는 것이다.

성균관과 문묘는 담장 하나 사이로 이웃해 있다. 성균관의 명륜당을 가려면 문묘를 거쳐야 한다. 문묘는 공자, 맹자 등 중국성현 21인과 설총, 최치원, 정몽주,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등 우리나라 명현 18인을 모시고 1년에 2번, 봄 가을에 제사(釋奠祭)를 지내는 곳이다.

유학(儒學)을 국가이념으로 하고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문묘가 정신적 지주였다. 유학이라는 학문이 종교적 차원으로 까지 발전한 유교는 중국에서는 BC 136년 한나라 때 국교로 선포되었고 조선시대는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정책으로 사실상 유교가 국교였다.

유교가 종교인지 여부에 관하여는 양론이 있지만 브리태니커사전에도 유교가 종교라고 하고 있으며 인구 센서스에 유교인이 80만명으로 나와있다.

하지만 문묘가 있다면 을지문덕, 최영, 최윤덕, 이순신 등 나라를 지킨 무인(武人)들을 향사(享祀)하는 무묘(武廟)도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관우를 제사지내는 관묘도 있는데 무묘가 없다니 도대체 我國은 자고로 국방의식이 있었는지 한탄스럽다.


 

문묘 답사를 마치고 담장 사이에 있는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성균관은 고려말부터 이어진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충선왕때는 국학, 민왕때는 국자감이라 불렀다. 따라서 성균관(성균관대학과는 무관)은 역사가 세계적으로 깊은 국립대학이라 할 수 있고, 지금 개성에도 성균관이 있다. 명륜당은 성균관의 교실 격으로 유생들이 강학을 하던 곳이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조선건국 초에는 150명이었는데 학문을 좋아하는 세종대왕은 50명을 증원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영조 집권시는 74명으로 구조조정했다.
성균관에 입학하면 학비는 물론 숙식과 학비 일체가 국가에서 부담한다.


학자격은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이었고 이외에도 음서( 蔭敍, 시쳇 말로 빽, 父나 祖父가 고위직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운 경우)를 통해서도 입학할 수 있었다. 정원 미달시에는 소과초시합격자나 조관 등에서도 보충하였다.


명륜당 마당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 돌은 벌 받는 자리로 스스로 훼초리를 들었다고 한다. 성적은 대통, 약통, 조통, 불통으로 나누어 매겼다. 성적이 우수하면 문과시험 대과의 초시를 면제해 주었다.

 

성균관 교육과정을 마친 유생에게는 대과응시자격을 주었다. 대과에 합격해야 관료로 등용되는데 이 시험은 창덕궁 後苑(흔히 秘苑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일제가 붙인 이름이고 정식 명칭은 후원임)에서 임금님 참관하에 시행된다. 대과의 합격정원은 33명이다.


성균관에 오니 불현듯 樹州 변영로가 회상된다. 내가 워낙 술을 좋아해서인가? 그는 우리 고교시절 국어교과서에 실린 <논개>를 지은 시인이자 영문학자이며 외무부장관을 지낸 변영태의 동생으로 당대의 대주호(大酒豪)로 수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 중에서 백미는 성균관 해프닝인데, 왕년에 술께나 마신 분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非酒類 諸賢을 위하여 기억을 더듬고자 한다.


樹州가 혜화동에 살 때인데, 하루는 空超 오상순과 誠齋 이관구 그리고 橫步 염상섭이 놀러를 왔다. 이들은 모두 당대를 주름잡는 酒林의 巨頭들로써 不可無 一杯酒, 斗酒不謝를 마다 않는 酒仙들이었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술 사먹는 樹州의 수중에는 수삼원 밖에 없어 이 돈으로는 보통 주당 4인이 대작하기에는 큰 지장은 없었으나 이들 3 酒仙을 대접하기에는 택도 없었다.

궁리 끝에 동아일보사 편집국장 古下 송진우에게 동네 꼬마 편에 편지를 보내 "좋은 기고를 하여 줄 터이니 50원만 선불해 달라" (당시 쌀 한 가마 10원)하여 소주 술 말이나 사고 고기 근이나 사가지고 동네 심부름꾼의 지게에 매고 사발정약수터(성균관뒤)에 가서 남비에 고기를 끓였다.

쾌음(快飮), 고담(古談), 농담, 치담(恥談), 문학담(文學談)을 순서없이 지껄이며 권커니 잣커니 마셨다. 이야기도 길고 술도 길었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옷을 찟어 버리고 대취하여 광가난무(狂歌亂舞)하다가 소나무 그늘에 소 몇마리가 메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몸에 일사불착(一絲不着)한 상태로 그 소들을 잡아 타고 소위 당대의 최고 지성인들인 그들이 공자를 모신 문묘를 지나 큰 거리 까지 진출 하였다가 큰 봉변을 당하였다 한다.

이들은 당대를 풍미하던 로맨티스트로 이러한 호연지기가 마냥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 숨막히는 일제가 얼마나 답답했기에 술로써 망국의 한과 울분을 토했을가 생각하니 숙연해지기도 한다.

                                                                                                  淸閑 執筆室에서

 


                                                                   성균관에 있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淸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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