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제주 김만덕 이야기

含閒 2012. 11. 24. 16:58

 

 

제주 김만덕 이야기

 

김만덕은

조선 영조 15년(1739년)에 태어나 순조12년(1812년)까지

살다간 제주여성이다.

만덕은어린 시절 전염병으로 부모님을 여의고,

평소 어여삐 여기던 퇴기 월중선에게 의탁하여 살게 된다.

잠시 관기로 생활하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적에 올랐던 것이라

그 생활을 청산하고 장사를 시작한다.

만덕은

장사에 소질이 있어, 큰 돈을 모으게 된다.


정조임금 때

제주에는 심한 기근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관에서는 조정에 도움을 청하나,

곡식을 수송하던 배가 오다가 침몰하는 등

제때 도착하지 못해 굶주리는 자가 많았다.

이를 보다 못한 김만덕은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육지의 양곡을 사들였다.

10분의 1은 친족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관청에 가져가 백성들에게

나눠주도록 하자 제주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당시 제주목사는

김만덕의 자선사업을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정조가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만덕이 말하길

"임금님 계신 대궐과 영산 금강산을

한 번 구경하고 싶을 뿐입니다." 하여

당시 제주여성은 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법에도 불구하고 만덕은 서울로 향하게 된다.

김만덕은 궁에 들기전 의녀반수를 제수 받고 임금님을 알현한다.

정조는 친히 만덕의 손을 잡아주며 칭찬하고,

후한 상을 내렸다.

만덕은 서울에 머물며

궁을 구경하고, 금강산 유람을 마친 후 다시 제주도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병조 판서 이가환은

만덕에게 시를 적어 주고,

좌의정 채제공은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란

글을 지어 주었으며 옥지환과 김만덕의 사적을

엮은 책「만덕전」을 선사했다.

사후에는 대정현에 귀양왔던

추사 김정희가 김만덕의 진휼 행장에 감동하여

손수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여러 세대로 이어진다)라는 큰 글씨를 써 주었다.


김만덕의 묘는

현재「구휼의녀 김만덕 기념탑」과 함께

사라봉 모충사에 있으며,

제주특별자치도는 매년 제주여성 중

모범이 되는 여성 1명을 선정, 탐라문화(구 한라문화제)

만덕제 때 '만덕봉사상'을 시상하고 있다.


병조판서 이가환(李家煥)의 시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인인데

육십의 얼굴이지만 사십쯤으로 보이네

천금으로 쌀을 사들여 백성을 구제하였으니

한번 바다 건너 궁궐을 찾아 뵈었구려

다만 한번 금강산을 유람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산은 동북녘에 연기와 안개로 싸여있네

임금님이 끄덕이며 날쌘 역마를 내리셨으니

천리의 광휘가 강관을 떠들썩하게 하네

높이 올라 멀리 바라보는 마음과 눈은 장한데

표연히 손을 흔들면서 바다 구비 돌아가네

탐라는 먼 예로부터 고량부가 살던 곳인데

여자로서 이제 비로소 임금 계신 서울 구경하였네

돌아오니 찬양하는 소리가 따옥새 떠나갈 듯하고

높은 기풍은 오래 머물러 세상을 맑게 하겠지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름을 세움이 이와 같으니

여회청대(女懷淸臺)로

이름은 어찌 족히 몇이나 있으리

<제주도『구원의 여성 김만덕』중에서>

채제공의 만덕전

만덕의 성은 김이요,

탐라의 좋은 집안의 딸이다.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어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기생집에 의탁하여 살고 있었는데

점차 성장하자 관청에서는

만덕의 이름을 기생의 명부에 올려버렸다.

만덕은어찌할 수 없이기생역에 종사한다 하더라도

그 본심은 기생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나이 20여세 때

그는 기생이 된 사정을 들어서 관청에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하니 관에서는 이를 불쌍히 여겨 기생의 적에서 삭제하였다.

양가로 복귀한 만덕은

비록 집안 형편은 초라하였다 하더라도 탐라의 대부들이

청혼을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그 재능이

식산 축재하는 데 뛰어났으므로 시기에 따라

물건이 귀하고 천함을 잘 알아 내치기도 하고

사들이기도 하니 수십년에 이르러

큰 재산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정조 19년 을묘에 큰태풍으로

제주에는 큰 기근이 일어나서 백성들이 많이 죽어가므로

왕명으로 구호곡을 배에 실어가서 먹이도록 하였으나

8백리나 되는 험난한 바닷길이라

풍선으로 북같이 왕래하니 오히려 시기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때 만덕이

천금을 연출(捐出)하여 육지 여러 고을에서 쌀을 사오게 하니

뱃사공들이 때를 맞추어 도착하였으므로

만덕은 그 중 십분의 일을 가지고 친족들에게

구호곡으로 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관가로 보내었다.

굶어 부은 사람들이

이를 듣고 관청마당에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으므로 관에서는

그들의 완급을 지어 차등을 두고 나누어 주었다.

남녀 노소는 거리로 나와서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였다.

진휼(賑恤)이 끝나자

제주목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올리니 임금께서 이를

기특히 여기시고 회유하여 말하기를 "만덕이 만약 소원이

있다면 어려운 일이나 쉬운 일을 묻지 말고

특별히 이를 시행하라"하였다.

목사가 만덕을 불러서

임금의 유지(諭旨)를 말하고

"너는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하니

만덕이 대답하기를 "소원하는 바는 없으나

한 번 서울에 올라가서 임금님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 보고,

이어서 금강산에 들어가 1만 2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탐라의 여자는

바다를 건너 육지로 가지 못하도록 금하여 있는 게

나라의 법이었다.

목사가 그의 소원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그의 소원대로 하라 하고

역마를 관에서 주고

이어가며 음식을 대접하라고 하였다.

만덕은

배를 타서 만경 운해를 건너 병진년(정조 20년)

가을에 서울에 들어왔다.

임금께서는

선혜청에 명하여 다달이 식량을 주도록 하고 며칠 있다가

내의원 의녀로 삼아 의녀반수로 있게 하였다.

만덕은

예에 의하여 내합문으로 들어가 문안을 드리니

전궁(殿宮) 시녀를 통하여 전교하여 말하기를

"너는 한낱 여자로서 의기를 내어 굶주린 천백여명을

구호하였으니 기특한 일이다."하시고

상을 심히 후하게 내리었다.

만덕은 서울에 반 년을 살게 하고

정사년(정조21년) 3월에 금강산에 들어가서 만폭과

향기로운 초목과 기승 경관을 모두 역탐(歷探)하였다.

금불상을 만나면

곧 배례하고 정성을 다하여 공양하였다

. 이때까지는 불교가 탐라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만덕이

이때 나이는 58세인데 처음으로 사찰과 불상에

공양하는 것을 본 것이다.

이어 아문령을 넘고 유점을 거쳐

고성으로 내려가서 삼일포에서 뱃놀이를 하고

통천의 총석정에 올라서 천하의 뛰어난 경관을

다 구경한 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며칠을 묵고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내의원에 들러서 돌아갈 뜻을

고하니 전궁에서는 모두 전과 같이 상을 내렸다.

이때 만덕의 이름이

온 장안이 칭찬하여 공경대부와 선비들이 만덕의 얼굴을

한번 보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만덕이 출발에 임하여

채상국(蔡相國)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목이 메여 말하기를

"이승에서는 다시 상공의 얼굴 모습을 볼 수가 없겠습니다."하고는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상국이 말하기를

"진시황과 한무제는 모두 해외에 삼신산이 있다고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한라산은

곧 이른바 영주라하고, 금강산은

곧 이른바 봉래라 하였다.

너는 탐라에서 자랐으니

한라산에 올라서 백록담의 물을 마셨을 것이고,

이제 또 금강산을 편답하였으니

삼신산 중에 그 두 개는 모두 구경한 바이니

천하의 억조 남자들이 있어도

이와 같이 못하는 것인데

이제 작별함에 있어서

도리어 어린 여아처럼 척척거리니 태도가 무엇이냐"고

하면서 그 사실을

적어 만덕전이라 하여 웃으면서 이를 주었다.

성상(정조) 21년

정사 하지일 번암 채상국 78세에 충간의

담헌에서 쓰다.

모셔온 글

 
대금 - 산조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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