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산책(漢詩散步)

서거정의 수기(삼도헌의 한시산책246)

含閒 2012. 9. 15. 22:49

서거정의 수기(삼도헌의 한시산책246)

 

 

 

 

 

울진 봉평비를 본 뒤 불영사를 제가 촬영하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睡起)

 


서거정(徐居正)

 


 

簾影深深轉(염영심심전) 발 그림자는 깊숙이 들어오고

   荷香續續來(하향속속래) 연꽃 향기는 끊임없이 풍겨오네.

   夢回孤枕上(몽회고침상) 꿈에서 깨어난 외로운 목침맡에

          桐葉雨聲催(동엽우성최) 오동잎의 빗소리 들리누나(재촉하네).

 

 


 

        주(註)

 

          ◎심심(深深) : 깊숙한 모습. ◎속속(續續) :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습.

       이 시를 허균은 “개미둑에서 방향을 틀고 선회한다”는 말로 평하였다.

       즉, 좁은 곳에서 몸을 잘 움직인다는 뜻이다.

       기구와 승구가 대로 되어있고 운자는 래(來), 최(催), 평성(平聲)이다.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서거정의 시는 대체로 “용容富艶”(찧을용, 얼굴용, 풍성할부, 고울염)

      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 작품 역시 관각문인(館閣 文人)의 여유와

      멋을 풍기고 있다.

      잠깐 낮잠에 빠졌다가 비소리에 깨어난 시인의 모습이 몽롱한 여름

      정경과 잘 어우러져 있다.

      기구는 발그림자가 시간이 감에 따라 길어지는 것을

      심심전(深深轉)으로, 승구는 연꽃향이 솔솔 풍기는 것을

      속속래(續續來)로 표현하여, 깊어가는 여름 오후를 정중동(靜中動)의

      미감으로 잘 그려내었다.

      전구와 결구에서 오동잎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에

      낮잠을 깬 시인이 비소리를 듣는다.

      여기서는 시인 자신의 모습조차 여름 정경 속의 일부인 듯하다.

      허균의 “개미둑과 같은 비좁은 곳에서도 몸을 잘 움직이니

      또한 좋다(折旋蟻封(꺽을절, 돌선, 개미의, 봉할봉) 亦好: 蟻封은 개미둑)”

      는 평은 평범하고 자그마한 제재를 가지고 세련되고

      아름다운 정경을 만든 시적 능력을 지적한 말이다.

 


     [감상]

 

      이 시에서는 여름 오후 집안은 텅비어 있고 낮잠을 즐기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후두둑 오동잎을 때리는 소리에 잠을 깬 순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정경 묘사는 음악이라면 상징할 수 있어도 그림으로

      잡기는 쉽지 않다. 그 순간적인 놀라움을 맑은 시어로 잡아내고 있다.

      깊은 사상이나 강한 이념이 전달되는 시는 아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심상을 곱게 드러내는 서정적인 시다. 이런 시적 감흥은 깊은

      사색과 관조를 통해 걸러진 것이다.

      여름날 비내리는 오후에 잠시 단잠이라도 잔 뒤 나뭇잎에 떨어지는

      비소리를 들어보면 더 실감이 날 것이다...

 


      서거정(徐居正) 1420(세종 2)-1488(성종 19)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사가정(四佳亭).

      권근(權近)의 외손자.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후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1457년(세조 3)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文風)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 그는 사가집 四佳集〉등의 저서를 남겼고,

      글씨는 충주의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