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뉴시스】박오주 기자 = 현암 최정간(玄菴 崔楨幹)씨가 우리나라 차문화를 동아시아 한·중·일 3국의 문명사적인 시각으로 30년 동안 연구를 통해 '한차(韓茶) 문명의 동전(東傳)'이란 역저를 출간해 눈길을 끌고 있다.
경남 하동 현암도예연구소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도예가이며 차문화 연구가인 저자에 따르면 세계 유일한 다도(茶道)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서기 8세기 후반 중국 당나라 때 식음료인 차가 무상선사(無相禪師, 신라출신의 고승)에 의해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에서 불교의 선수행(禪修行)에 중요한 수단으로 인정돼 이른바 ‘선차(禪茶)’가 탄생됐다. 무상선사는 세계선차의 종조인 것이다.
이어 또다른 신라출신의 김지장 보살에 의해 선차는 더욱 대당제국에서 융성하게 됐다. 그는 입당할 당시 신라에서 차씨를 가지고가 안후이성(安徽省) 구화산(九華山) 일대에서 그곳의 민중들과 함께 차농사 재배운동을 전개했다. 김 보살의 이 같은 차농병선(茶農竝禪) 운동은 당나라의 선승 백장회해(百丈懷海)보다 70여 년이나 앞선 운동이다.
이같이 대당제국에서의 선차는 고국신라로 전래되어 신라불교의 주류인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통해 발전했고, 고려조에서는 일연선사(一然禪師)가 이를 이어 받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에 의해 선차가 신개념 ‘한차(韓茶)’로 재탄생됐다.
김시습에 의해 그동안 사찰 중심의 ‘승가집단(僧家集團)이 전유(專有)한 다도를 조선사회의 엘리트인 선비계층을 비롯한 만백성의 다도로 확대, 발전시킨 것이다. 다도의 이념과 사상도 출가(出家)사상인 ’무소유(無所有)‘에서 일상생활인의 재가(在家)사상, 즉 유교의 청빈, 최소유(最小有)로 전환하면서 다도의 외연은 보다 넓어지고, 이념은 보다 현실화됐다.
매월당이 한차, 즉 초암차(草庵茶)를 1493년(세조9년) 경주 남산 용장사 초암에서 창시한 것도 이러한 청빈과 최소유가 그 사상적인 배경이 된 것이다.
매월당은 조선왕조 세조 9년에 일본 국왕사절로 조선을 방문하게 된 일본 교토 텐류지(日本 京都 天龍寺)의 승려 월종준초(越宗俊超) 사행을 통해 새로운 다도인 초암차(草庵茶)를 일본에 전수했다.
이어 일본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의 고승 잇큐(一休)선사를 거쳐 평민 출신인 무라다슈코(村田珠光), 센노리큐(千利休)에 의해 새로운 ‘일본다도’가 탄생됐다는 것이 저자가 이책을 통해 제시하는 새로운 학설이다.
오늘날 세계문명사상 가장 인정받는 다도는 일본의 다도이다. 다도의 역사를 조감하면 처음 중국에서 무상(無相)이 ‘선차’를 창시하고 그 뒤 조선의 김시습이 선차를 ‘한차(초암차)’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어령 선생은 이 초암차가 매월당에 의해 일본으로 옮겨져 ‘와비차’가 된 후 오늘날의 일본 다도가 이뤄졌다는 것은 저자 최정간의 창의적인 탁견이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학설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자는 1988년 강원대에서 열린 매월당에 관한 국제학술회의에서 한·중·일 학계에서 최초로 '일본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의 초암차에 끼친 매월당의 영향'이란 논문을 발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오늘날까지 김시습의 문학, 종교 사상에 관해 많은 연구가 있었으나 '김시습과 일본다도'라는 새로운 시각과 구도는 저자에 의해 처음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밖에 이 책을 통해 학계에 새롭게 밝혀진 몇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매월당이 만난 일본 승려 ‘준장노’에 대한 자세한 신원을 밝혔다. 준장노는 15세기 중반 일본 교토오산(日本京都五山)을 중심으로 활동한 문학승인 동시에 외교승이었고, 텐류지(天龍寺)의 부주지였다. ▲16세기 일본다도계의 성기(聖器)로 추앙받았던 소위 이토다완(井戶茶碗)의 일본 전래경로도 밝혔다. 이토다완은 조선 서민층의 ‘막사발’같은 잡기(雜器)가 아니라 일본 큐슈지방의 통치자 이른바 크리스찬 다이묘오(영주)로 불리운 오오도모 소오린(大友宗麟)의 발주로 대마도의 무역상 바이캉(梅岩)을 통해 조선의 남부지방인 진해웅동과 하동사기마을 가마에서 생산돼 일본으로 유입됐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선사의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는 선종사의 역사적 명저이다. 이 저서가 일본으로 전래된 경위를 고증했는데 이는 한·일문화교류사상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일본불교학자 야나기다세이잔(柳田聖山) 교수와 국내의 민영규(閔泳珪) 선생을 비롯한 국내외의 어느 학자도 밝혀내지 못한 것을 저자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저자는 대마도 종가 문서의 새로운 사료를 발굴해 경남도 양산 창기도요에서 생산된 이라보(伊羅保) 다완이 1635년(인조13)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낸 국서 위조사건의 재판에 대마도주가 진상용으로 사용해 승소했다는 새로운 견해도 제시했다. 저자의 고도의 지적 상상력과 치밀한 한·중·일의 문헌사료 고증과 현장답사를 결합시켜 엮은 이 책 '한차 문명의 동전'은 오랜만에 독자들에게 우리차 역사만이 지닌 낭만, 향기, 미학 등을 제공할 것이다.
이 책 저자의 선친은 1926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국왕과 함께 경주에서 서봉총에서 신라 금관 발굴에 참여한 故 석당 최남주(石堂 崔南柱) 선생이다.
27일 서울 르네상스 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게 된다. 출판기념회에는 외교인사로 주한 외교사절 단장인 우즈베키스탄 펜 대사와 서울에 상주하는 50여 명의 주한 외교사절 및 외국인 학자들이 참석할 예정인 가운데 김두관 경남지사가 축사를 맡기로 했다.
이밖에도 권병현(전 주중대사), 손학규(전 민주당대표), 김종규(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이정락(변호사, 경주고도보존회 회장), 최종고(서울법대 교수, 한국인물학회 회장), 이종욱(서강대학교 총장), 최정필(세종대학교 석좌교수), 배기동(세계박물관 위원회 한국위원장) 등 각계 각층의 인사 3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joo4829@newsis.com
<백발 휘날리며 경주 문화유산 빛낸 최남주>
연합뉴스|입력2005.05.25 10:31
서봉총 발굴 유일한 조선인, 탄생 100주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해방 정국으로 우리 사회가 경황이 없던 1948년 7월 27일자 조선일보에는 "신라 흥덕왕릉(興德王陵) 비편(碑片) 발굴"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대구 영남일보 보도를 인용하면서 "신라사 연구의 한 숙제로 되어 있던 경주의 흥덕왕릉(興德王陵) 비석이 발견되었다"면서 발견자가 "경주고적보존회 간사 최남주(崔南柱)"라고 소개했다.
신문에 의하면 최씨는 "지난달부터 경주 부근 각 능묘의 수호현상을 조사 중 동 비석 파편 두 개를 그 부근 밭고랑에서 파내어 방금 경주박물관에서 보관 중으로 비문 전부를 해독하기는 어려우나 이 방면 연구에 상당히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고 한다"면서 "아까웁게도 흥덕왕릉의 비석은 없어지고 그 구질(龜秩)만이 남아있을 뿐으로 학계에서는 크게 궁금하게 여겨오던 것이라 한다"고 말했다.
1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장구한 신라사에 명멸한 왕은 초대 혁거세 이후 마지막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56명. 이 중에서도 능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왕은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와 신라 하대 임금인 42대 흥덕왕, 그 외에 나라를 잃고 죽은 경순왕 정도가 있다.
한데 흥덕왕릉 위치를 확정한 것은 다름 아닌 이 최남주라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런 행적을 더 추적하면 1957년 4월 18일에 다시 나타난다.
이날 역사학자 민영규(閔泳珪. 작고. 연세대 교수)와 함께 경주고적보존회장 최남주가 흥덕왕릉에 들렀다가 돌거북으로 된 비석받침 부근에서 여러 조각 비석편을 더 찾아냈다.
그 가운데 한 비편은 가로ㆍ세로 글씨 크기 12cm쯤 되는 전서체(篆書體)로 된 두 글씨 "興德"(흥덕)이 확인됐다. 이를 통해 흥덕왕릉 위치는 의심할 나위가 없어졌다. 실로 대단한 발견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최남주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해방 뒤 두 가지 행적으로 미뤄 경주 사람으로서, 주로 이 지역 문화유산 애호가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기준으로 이른바 향토사학자인 셈이다.
한데 그의 행적을 더 거슬러 식민지시대로 가면 저 유명한 경주 서봉총 발굴 현장에서 경주최씨로서 이 지역 토박이인 최남주라는 조선 청년을 만나게 된다.
현재 경주시 노서동 고분군 중 사적 제129호로 지정된 터만 남아 있는 이 서봉총(瑞鳳塚)은 원래는 남북으로 두 개 고분이 마치 표주박을 엎어 놓은 것처럼 조성된 소위 표형분(瓢形墳)이었으나 1926년 건축 공사로 남분은 이미 훼손되고 북분만이 조선총독부 박물관 일본인 고고학자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등에 의해 발굴됐다.
발굴 당시 마침 조선을 찾은 스웨덴 구스타프 황태자가 이곳을 지나던 길에 아예 발굴 현장으로 뛰어들어 저 유명한 서봉총 금관을 직접 수습하는 일을 했다. 구스타프는 그 자신 고고학자이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발굴 조사 뒤 조선총독부는 이름이 없던 이 신라 적석목곽분에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서전(瑞典)의 瑞와 이곳 출토 금관에 장착된 봉황(鳳凰) 장식의 鳳 자를 각각 따서 서봉총(瑞鳳塚)이라 이름했다.
식민지시대 거의 모든 발굴 현장에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참가를 엄격히 금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 서봉총 발굴현장만 해도 유일하게 21세 조선 청년 1명이 참여했으니 그가 바로 최남주였다.
이 때 구스타프 황태자와의 인연으로 1972년에는 한국과 스웨덴간 문화교류에 이바지한 공로가 인정돼 스웨덴 왕실이 당시 동양인에게 최초로 수여한 스웨덴 최고훈장인 바자훈장을 수훈(受勳)했고, 1975년에는 현 스웨덴 국왕인 칼 구스타프 왕의 초청으로 스웨덴 왕실을 방문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최남주는 1926-1939년까지 한국 불교미술의 지상 보고(寶庫)로 지목되는 경주 남산 불교유적 학술조사에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참여했고, 1931-35년에는 숭복사(崇福寺)라는 절터를 찾아내는가 하면 1933년에는 경주 외동면 원원사지 석탑을 복원했다.
1938년에는 한국 미술사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과 함께 문무대왕 장지와 그 유적이 있는 동해구(東海口)를 답사했고. 한국전쟁 와중에도 경주문화재보존 연구에 투신했다. 1952년에는 사재를 들여 문무왕릉 비각을 건립했으며 말년에도 백발을 휘날리며 경주 곳곳을 답사하면서 1971년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유신의 통일기도장인 열박산(咽薄山) 유적지를 보고하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그는 1970년 정부가 주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受勳)했다.
석당(石堂) 최남주(1905-1980). 이 위대한 한국 문화유산 보존운동의 선각자이면서 한국-스웨덴 외교의 개척자를 우리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 경주 토박이인 데다, 대학 교수로 재직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그가 28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대학교수가 아니어서 그 업적을 현창해 줄 수 있는 제자를 길러내지는 못했으나, 슬하에 둔 네 아들이 모두 현달(顯達)하는 기쁨을 누렸다.
세종대 박물관장인 최정필 교수와 경주 선덕여중 최정표 교장, 영문 칼럼니스트 최정대, 도예가 최정간이 그들이다.
석당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조촐하지만, 매우 뜻깊은 행사가 28일 오후 3시, 경주 충효동 소재 김유신 장군 묘 입구에 세워진 그의 추송비 현장에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