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큰스님 큰스님을 생각합니다
한국불교 현대사의 큰 거목 퇴옹 성철스님(1912~1993) 탄신 100년을 맞아 불교계가 스님의 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다채로운 기념사업을 펼치고 있다.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이 지난 9일 퇴옹 성철스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일대기 특별전’을 개막했다.
<성철스님 생애 특별전, 자기를 바로 봅시다>는 주제로 열린 이번 전시회는 6월 3일까지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니 조계사에 꼭 다녀올 생각이다.
스님을 상징하는 누더기 두루마기와 여러 번 기운 고무신 등도 전시된다는데....-.-
3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퇴옹당 성철 대종사 탄신 100주년 기념법회'가 열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고요하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보인다'
속명은 이영주(李英柱), 법명은 성철(性徹), 법호는 퇴옹(退翁).
1912년 2월 19일~ 1993년 11월 4일 1912년 음력 2월 19일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난 성철은 25세 되던 1936년 봄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한다.
승려 하동산(河東山)에게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하동산은 한국 불교의 계단(戒壇)을 통일시킨 승려로서, 그의 제자들이 소위 범어문중(梵魚門中)을 형성했는데 성철도 여기에 속했다.
그 해 운봉화상에게 비구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은 후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를 시작으로 범어사 원효암, 통도사 백련암 등 선원에서 수행했다.
젊은 날의 성철스님... 28세인 1939년 경북 은해사 운부암 등 수많은 암자에 거하면서 수행의 길을 걷는다.
? 1947년 경상북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답게 살자"고 청담·자운·월산·혜암·성수·법전 등과 결사를 하는 등 현대의 선풍(禪風)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55년 대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으로 들어가 주변에 철망을 치고 10년을 밖으로 출입하지 않고 수행했다(동구불출).
1965년 김용사에서 최초의 대중법문을 시작했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방장에 취임하고, 그해 겨울 동안거 때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門)’을 설했다.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의 제 6대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었다.
1981년에는 한국 선불교의 주요특징으로 지적되었던 지눌(知訥)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비판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한 〈선문정로 禪門正路〉를 펴내 불교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유명한 법어가 회자되면서 세인들의 관심을 받는 등 한국불교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저서로 〈한국불교의 법맥(法脈)〉(1976)· 〈본지풍광 本地風光〉(1982)· 〈돈오입도요문강설 頓悟入道要門講說〉(1986) 등이 있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하라’는 마지막 한 말씀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성철스님이 남긴 유언(열반송)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유언은 다음과 같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 하니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라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이로다.
일생 동안 미친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수미산을 덮은 죄업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서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송이 꽃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성철 큰스님에게는 출가 전에 낳은 딸이 있다.
성철스님은 출가하고 얼마 지나 세속에 떨치고 온 부인이 딸을 낳았다는 얘기를 풍문에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 따님이 바로 속세의 나이로 올해 75세인 '불필不必스님'....
지난 93년 열반한 성철스님의 딸로, 불교계에서는 유명하지만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불필스님은 1937년 5월 아버지 이영주(성철스님의 속명) 와 어머니 이덕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한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수경(壽卿) 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를 처음 뵙기 전까지 수경에게 아버지란 그저 상상 속의 인물이었다.
불필스님은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은 어려서 누군가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그저 동화 그림 속에서 나오는 사람인가 싶은 정도" 라 기억했다.
불필不必이라는 법명은 필요 없는 딸'이라는 의미로, 성철스님이 출가후 출생한 딸에게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오호라 필요 없는 것이 태어났도다. 그리하여 필요 없는 년이라는 이름 불필(不必)이라는 이름으로 어영부영 자라나그 이름값 다하느라 청량산 기슭 불필암 이승(尼僧)이 되어.....' 시 '불필' 중에서....
진주사범학교 졸업후 10대 후반에 출가한 불필스님은 지난 1961년 3월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정식 비구니계를 받은 뒤 경북 문경 대승사 묘적암, 경남 합천 해인사 국일암, 지리산 도솔암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행했으며 현재 해인사 금강굴에 머물고 있다.
성철스님은 임종 하기 전 불필스님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때가 되어서야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1964년 도선사에서 청담스님과 함께
1965년 북한산 비봉 부근에서 함께한 청담,성철 스님.
성철 스님(오른쪽)은 열 살 많은 청담 스님과 친구처럼 지냈다. 봉암사 결사를 추진한 동지이기도 했다.
청담의 딸 묘엄 스님을 출가시킨 이도 성철이다. 성철 스님은 번잡한 서울 나들이를 극히 꺼렸다.
성철스님과 법정스님....
'한해 여름, 부탁받은 일이 있어 백련암으로 스님을 뵈려갔더니 나를 보자마자 '법정스님도 변했네'라고 하셨다.
왜요? 라고 물으니 전에는 무명못만 입더니 이제는 화학섬유로 된 옷을 입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사실 나는 고집스럽게 면직옷만을 입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혼자 자취를 하면서부터는 때도 덜타고 빨아서 입기도 편안한 섬유옷을 걸치기도 한다.
그리고 시줏것을 얻어 입는 처지에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주는대로 입어야겠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큰스님께서는 당신이 입으려고 챙겨둔 무명옷 한벌을 내 성미에 맞게 행건까지 캥겨주셨다.
나는 아직도 그 옷을 기워가면서 잘 입고 있다. 큰스님의 자상하고 인자한 성품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일이었다.'
1993년 11월 10일...
경남 합천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에는 만장(輓章)과 인파의 물결이 이어졌다.
마침내 인파가 멈춘 곳은 해인사에서 3km 떨어진 다비장이었다. 성철 스님 열반 7일째.
모인 이들은 물론이고 이 땅의 많은 사람이 함께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스님! 집에 불 들어갑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세 번의 외침에 이어 화답이라도 하듯 불길이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다비식에서는 100여 과의 사리가 수습됐다.
암 투병 중에도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으로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준 이해인 수녀님은 성철스님과 법정스님의 글을 읽고 삶의 위안과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어쩌다 초심을 잃고 수도정신이 흐려지는 나 자신을 느낄 때, 편리주의에 길들여져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하는 나를 볼 때, 인간관계에서 수도자다운 겸손과 인내가 부족한 나 자신을 발견할 때 성철 스님의 말씀은 나를 깨우치는 죽비가 돼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수행이란 안으로는 가난을 배우고 밖으로는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
어려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이다.
용맹 가운데 가장 큰 용맹은 옳고도 지는 것이다.
공부 가운데 가장 큰 공부는 남의 허물을 뒤집어 쓰는 것이다.'
(성철스님의 '공부노트'에서)
1936년 출가해 해인사에서만 57년 동안 칩거해 온 스님은 해인사 퇴설당에서 가부좌한 채 제자 스님들에게 기대 입적했다. 남겨진 스님의 유품은 일생 동안 입었던 옷 한 벌, 지팡이, 삿갓, 검정 고무신, 1950년대 공책 한 권, 몽당연필 한 자루였다. 출가에서 입적까지 성철 스님의 삶은 화제의 연속이었으나 속세와 모든 관계를 끊고 오로지 구도에만 몰입한 승려였다. 16년간 날것만 먹는 생식을 하고 8년 동안 한 번도 드러눕지 않고 잠도 앉은 채 자는 장좌불와로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정치인들에게는 먼저 해인사 대웅전의 불상을 향해 3000번 절을 하도록 했다. 물론 대부분의 정치인은 포기했다. 자신의 수행과 불교 자체에 회의를 한 것으로 오해되는 열반송까지 논란은 끝없이 계속됐으나 이미 해탈한 그에겐 한낱 사바세계의 무상함일 뿐이었다.
성철스님은 만년까지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 108 참회를 거르지 않으셨다. 스님께 여쭸다.
스님, 무슨 큰 죄를 지으셨기에 그토록 평생토록 참회를 하십니까?
자기가 지은 죄만 참회하면 수행자가 아니지.....
生이란 구름 한점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구름 한점 흩어짐이니
있거나 없거나 즐거이 사세
웃지 않고 사는 이는 바보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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