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사경(妙法蓮華經寫經)

속죄하는 마음으로

含閒 2012. 1. 4. 01:15

 

작년 가을 동화추모공원에 계신 스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올 한 해 법화경 전부를 사경하려합니다.

올 해 다 끝낼 수 있을런지 시작하는 마당에 걱정이 앞섭니다.

 

1. 序品   (2012년 1월 1일부터)

                                                                                세로 : 60 Cm입니다.

                                                                     (가로는 한 6~700m 예상합니다)

 

 2. 方便品   (2012년 1월 23일부터)

 

 

3. 譬喩品   (2012년 2월 12일부터)

 

 

4. 信解品   (2012년 2월 27일부터)

 

 

5. 藥草喩品   (2012년 3월 4일부터)

 

 

6. 授記品   (2012년 3월 9일부터)

 

 

7. 化城喩品   (2012년 3월 12일부터)

 

8. 五百弟子授記品   (2012년 4월 9일부터)

 

 

9.  授學無學人記品 (2012년 7월 1일부터) 

 

 

10. 法師品 (2012년 8월 5일부터)

 

 

11. 見寶塔品 (2012년 8월 26일부터)

 

 

12. 提婆達多品 (2012년 9월 9일부터)

 

 

13. 勸持品 (2012년 9월 17일부터)

 

 

 

14. 安樂行品 (2012년 9월 22일부터)

 

15. 從地涌出品 (2012년 10월 13일부터)

 

16. 如來壽量品 (2012년 10월 30일부터)

 

 

17. 分別功德品 (2012년 11월 4일부터)

 

 

18. 隨喜功德品 (2012년 11월 24일부터)

 

 

19. 法師功德品 (2012년 12월 16일부터)

 

 

20. 常不輕菩薩品 (2012년 12월 31일부터)

 

 

21. 如來神力品 (2013년 1월 5일부터)

 

 

22. 属累品 (2013년 1월 7일부터)

 

 

23. 藥王菩薩本事品 (2013년 1월 8일부터)

 

 

24. 妙音菩薩品 (2013년 1월 13일부터)

 

 

 

25. 觀世音菩薩普門品 (2013년 1월 20일부터)

 

 

26. 陀羅尼品 (2013년 1월 22일부터)

 

 

27. 妙莊嚴王本事 (2013년 1월 24일부터)

 

 

28. 普賢菩薩勸發 (2013년 1월 27일부터)

 

 

29. 妙法蓮華經完了 (2013년 2월 3일 완료)

 

 

 

 

사경의 유래는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말을 제자들이 산스크리트로 기록했던 것을 불법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다라(多羅)나무 껍질에 베껴 쓴 패엽경(貝葉經)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관습은 중국·한국·일본에도 전해져 사경이 성행했다. 이렇게 필사된 경전은 서(書)의 연구에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사경의 목적으로는 첫째, 불법의 광선유포(廣宣流布)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사경의 일차적 목적으로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붓으로 일일이 필사했으나 당(唐)나라 말기인 9세기경에 목판인쇄에 의한 판본경(版本經), 즉 인경(印經)이 제작된 이후에는 인경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사경은 장식경(裝飾經)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둘째, 서사(書寫)의 공덕(功德)을 들 수 있다. 즉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 중 법보에 속하는 경전을 정성을 다하여 베껴쓰는 일은 불교도들에게는 곧 미래에 좋은 과보(果報)를 얻을 수 있는 선업(善業)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특히 〈법화경〉 같은 대승경전에서는 서사의 공덕을 설하고 사경을 권장했으므로 인경이 출현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경이 제작되었으며, 인경 출현 이후 사경은 많은 재정과 공을 들여 화려하게 꾸민 장식경으로 발전했다. 장식경의 사경지(寫經紙)는 이전의 소박한 백지(白紙)나 황갈색지에서 감지(紺紙)·자지(紫紙)와 같은 염지(染紙) 또는 금은절박(金銀切箔)·사자(砂子)·양모(羊毛) 등을 놓아 염색한 장식지로 바뀌었고, 글씨 또한 단순한 묵서(墨書)에서 값이 비싸고 쓰기에도 힘이 드는 금자(金字)·은자(銀字)로 바뀌었다. 이러한 금자·은자 사경에는 책머리나 경문 중에 섬세하고 화려한 변상도(變相圖)가 그려지며, 표지도 금이나 은으로 당초무늬·보상화무늬를 그려 장식했다. 따라서 장식경은 지난날의 서체(書體) 연구뿐만 아니라 염직·문양·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금자·은자 사경과 같은 의미로 제작된 것들로는 금경(金經 : 금판경)과 석경(石經 : 석판경)·동경(銅經)·돌경(乭經)·와경(瓦經) 등이 있다. 이밖에 사경은 부모·조상의 추복(追福)이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며, 올바른 경전의 유포·송독·기록 등을 위해서 행해졌으며 탑 안에 봉안되거나 불상 복장(腹藏)에 사용되기도 했다.

중국에서 사경이 시작된 것은 한역(漢譯) 불전이 유포되었던 3세기 무렵으로 추측되는데 진한(秦漢)시대 종이의 발명과 이후의 마지(麻紙)·수피지(樹皮紙)의 발전, 특히 저지(楮紙)의 기술개발은 사경의 발전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 남북조시대 이래 왕실·귀족·대사원에서는 일체경(一切經), 즉 수천 권에 달하는 대장경 전체를 서사하는 불사가 행해졌고, 사경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사경생도 양성되었다. 사경의 문자는 육조(六朝)시대에는 예서(隸書) 등으로, 수(隋)·당(唐) 이후에는 주로 해서(楷書)로 썼으며 글자 배치는 수대부터 1행에 17자로 통일되었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근대 이후 둔황 석굴[敦煌石窟]에서 발견된 다수의 고사경(古寫經)들이 귀중한 예로 꼽히고 있다.

우리나라에 사경의 풍습이 전해진 것은 불교가 전래된 무렵으로 생각되나 삼국시대 사경의 예는 한 점도 전하지 않고, 기록상으로도 고려시대 이후 처음 나타나므로 고대 사경의 양상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현존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호암미술관 소장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국보 제196호) 권43이다(→ 색인 :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이 사경은 통일신라시대 754(경덕왕 13)~755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황룡사의 연기법사(緣起法師)가 자신의 부모를 위해서 발원한 장식경이다. 사경 말미에 14행의 작은 글씨로 쓴 발문(跋文)에는 경전과 변상도를 조성한 절대연대, 발원자 및 조상목적, 제작과정 및 사성의식(寫成儀式), 발원내용, 화사(畵師)·필사·지작인(紙作人) 등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두터운 닥종이를 자초(紫草)로 염색한 자지로 표지를 만들었으며, 겉표지에는 보상화무늬와 역사상(力士像)을, 안표지에는 화엄경변상도를 금니·은니로 그렸다. 이러한 변상도 역시 통일신라시대 회화사의 복원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경문은 너비 29.2㎝, 길이 1,397㎝의 권자본(卷子本) 형식으로 흰 닥종이에 묵서로 1줄에 34자씩 가늘고 유려한 해서체로 썼다.

고려는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았던 만큼 국왕으로부터 개인에 이르기까지 사경제작이 활발했던 시대였다. 고려시대 사경은 국가적·개인적으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기 위한 불사(佛事)의 하나로 성행했으므로 많은 재원을 아끼지 않고 금니·은니를 사용해 제작된 호화로운 장식경들은 그 정교함과 화려함에서 당대 불교미술의 높은 수준을 대변해준다. 고려사경은 발원자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크게 국왕발원사경과 개인발원사경으로 나뉜다. 국왕발원사경은 대부분 대장경으로 외침과 내란을 불법으로 진압하여 나라를 수호한다는 진호국가(鎭護國家) 사상에 기초한 국가적인 차원의 불사였다. 따라서 개인발원사경과는 달리 사경원(寫經院)·금자원(金字院)·은자원(銀字院) 같은 사경전문기관에서 전문사경기술자인 사경승(寫經僧)들이 그 제작을 담당했다. 그러므로 국왕발원사경은 그 재료·본문글씨·변상도·표지장식·제본 등에 있어서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여 당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국왕발원사경의 형식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제본형식면에서는 대개 두루마리 형태로 된 권자본이며, 재료면에서는 감지에 금니·은니를 사용하여 호화롭고 장엄했는데 겉표지에는 보상당초무늬를, 안표지에는 경전내용을 도설한 변상도를 섬세한 필치로 그렸으며, 본문은 금선으로 가늘게 아래위와 행간을 선으로 구획한 다음 해서체로 1행에 14자 또는 17자씩 필사했다. 또한 국왕발원사경에는 반드시 책머리의 경전이름 아래 '천자함'(千字函)이라는 표시가 있는데, 천자함이란 대장경을 간행할 때나 필사할 때 천자문의 순서인 천·지·현·황 등의 문자를 경전이름 아래 써서 경전의 권별 순서를 표시하는 방법으로 개인발원사경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징이다. 그리고 사경 말미에 필사연도 및 고려국왕발원사성(高麗國王發願寫成)임을 알리는 발원문이 적혀 있다. 한편 사경원에 대한 기록은 명종대에 처음 등장하는데 〈고려사〉 명종 11년(1181) 정월조에 '사경원에서 공(公)·사(私) 간에 돈과 재물을 시주하여 은자대장경(銀字大藏經)을 사성하던 중 무뢰배들이 그 물건을 훔치려고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로 미루어 적어도 명종대에는 대장경 필사를 위한 전담기구인 사경원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설치·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185년에 세워진 직지사대장전비(直指寺大藏殿碑)에 국가가 어려움이 많아 복을 빌기 위해 금자대장경의 사성을 발원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또한 사경원에서 국가적인 사업으로 제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금·은자대장경의 사경은 고려 후기, 특히 충렬왕 이후에 매우 성행했다. 충렬왕은 즉위 시절부터 은자대장경을 사성했고, 1281년(충렬왕 7)부터는 금자대장경을 필사하기 시작하여 1289년에 그 완성을 보았는데, 금자대장경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단하여 여러 차례 금자대장원(金字大藏院)에 행차하여 승려들을 공양하여 격려했고 완성되었을 때는 경찬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충렬왕대의 사경기술은 원나라에 알려질 정도로 매우 뛰어났으며 1290년에 원의 요청으로 100명의 사경승을 보낸 이래 1297, 1302, 1305년에도 사경승을 보냈다. 충렬왕대의 대표적 유물로는 〈감지은니불공견색신변진언경 紺紙銀泥不空羂索神變眞言經〉(국보 제210호)·〈감지금니문수사리문보리경 紺紙金泥文殊師利問菩提經〉(1276)·〈감지은니불설보살본행경 紺紙銀泥佛說菩薩本行經〉(1278)·〈감지은니보살선계경 紺紙銀泥菩薩善戒經〉(보물 제740호)·〈감지금니불설잡장경 紺紙金泥佛說雜藏經〉(1284)·〈감지금니묘법성념처경 紺紙金泥妙法聖念處經〉(1285) 등이 전한다. 돈독한 불교신자였던 충선왕은 사경 제작에 몰두하여 1312년(충선왕 4) 민천사(旻天寺)에서 금·은 대장경 2부 및 묵본(墨本) 대장경 50부를 사성했다고 한다. 이때 시작한 금자대장경은 충선왕이 재위 7년 만에 왕위를 물려주고 심양왕으로 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충선왕 때는 원나라에 사경지를 보내기도 했으며 원나라 관리 방신우(方臣祐)가 민천사에 와서 승려와 속인 300명을 모아 금자대장경을 사성하여(1311) 가져가기도 했다. 충선왕 때 유물로는 〈감지금니섭대승론석론 紺紙金泥攝大乘論釋論〉(1319)·〈감지금니불설불명경 紺紙金泥佛說佛明經〉(1319) 등이 전한다. 충숙왕도 즉위하면서부터 은자대장경 사성에 착수하여 현재 〈감지금니아육왕태자법익괴목인연경 紺紙金泥阿育王太子法益壞目因緣經〉(1325)이 전한다. 한편 충렬왕 이후 국왕발원사경과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것은 밀교계 경전이 많이 사성되었다는 점이다. 즉 충렬왕 때의 〈감지은니불공견색신변진언경〉(1275)을 비롯하여 충숙왕대에는 총130권의 밀교대장경이 금서로 사성되었다. 이것은 충렬왕 이후 고려 불교계의 동향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왕실이나 일부 지배층에서는 원나라 라마교와의 접촉으로 밀교적 성향을 강하게 띠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개인발원사경은 주로 중앙 관료나 지방 호족층을 중심으로 성행했는데, 이 경우 개인이 직접 사경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전문사경승에게 의뢰하여 그 공덕을 회향받는 형태를 취했다. 또 개인발원사경은 그 종류가 다양하지만 〈법화경〉과 〈화엄경〉이 주종을 이루어 신앙적으로는 전통성이 강하게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개인발원사경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055년(문종 9)에 당시 금오위대장군이었던 김융범(金融範)이 발원한 〈감지금니대반야바라밀다경 紺紙金泥大般若波羅蜜多經〉(보물 제887호)이다.

조선시대의 사경은 조선초의 태조·세조 등과 같은 왕들과 왕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억불숭유정책과 금·은의 사용금지로 인해 성종대부터는 급격히 감소하여 지방 사찰에서나 그 명맥이 유지되는 정도였다. 따라서 양적·질적으로 고려시대에 미치지 못하며 유물수도 많지 않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감지금니범본성관자재대비총지공능의경록 紺紙金泥梵本聖觀自在大悲摠持功能依經綠〉(1397)과 내소사 소장의 〈법화경절본사본 法華經折本寫本〉(1415, 보물 제278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