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테레사' 혼자 주목받기보다 함께 나누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
웃음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개그맨일수록 막상 무대에서 내려오면 과묵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성공리에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온 나승연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대변인을 만났을 때, 그 개그맨이 떠올랐다. 조명이 꺼지면 웃음에 대해 고요히 공부한다는 사색가.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더반의 승부사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나니 그는 맡은 일에 몰두하는 성실한 직장인일 따름이었다. 수수한 옷차림에 낮은 구두, 두꺼운 서류가방을 든 나승연 대변인은 그러고 보니 공항에 입국할 때와 같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급작스레 쏟아지는 관심에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수줍음이 많은 그녀의 모습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숱한 카메라 앞, IOC(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들 앞에서도 세련된 매너로 프레젠테이션을 이어가던 그는, 이를 지켜본 국민들이 수고했다고 잘 봤다고 멋지더라며 응원해주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고마우면서도 송구스럽다고 했다. 그래서 자꾸만 자신에게 비춰지는 스포트라이트를 평창에 비추고 싶어 했다(심지어 기자와 주고받은 나승연 대변인의 카카오톡 제목은 '평창평창평창!!!'이다).단 5분의 프레젠테이션으로 세계의 마음을 두드린 커뮤니케이터와 한사코 드러나기를 꺼려하는 한 겸손한 개인 사이, 어리둥절해지는 건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I have a Dream, 평창의 노래를 되뇌다
"더반에 있을 때 친구들과 식구들한테 화제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어요. '잠깐의 관심이겠지' 생각했는데 입국하는 날 너무 많은 분들이 나와주셔서 놀랐죠."
나승연 대변인은 다른 유치위원들보다 3일 늦게 귀국했다. IOC 위원들에게 일일이 찾아가 평창을 선택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그가 들어온 7월 11일에는 50명이 넘는 취재진과 카메라들로 공항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쏟아지는 플래시 사이로 예의 그 '어리둥절한 표정'이 보였다.
"한국에 돌아왔을 땐 빨리 아들을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유치위원회 일을 시작하고 나서 계속 해외 출장을 다녀서 자주 집을 비웠거든요(지난해 6월 평창은 독일의 뮌헨, 프랑스 안시와 더불어 2018년 동계올림픽 후보지로 선정됐다. 그 후 IOC 실사단의 평창 방문, 5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던 테크니컬 브리핑, 얼마 전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최종 투표까지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이 이어졌다). 아들 나일이가 올해 다섯 살인데 '이제 (출장) 안 가지?'라고 물어보더라고요."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에 머물던 3주는 마치 3개월 같았다. 식구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약해질까 싶어 연락도 자주 하지 않았다. 대신 유치위원들과 모여 최종 프레젠테이션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3주간의 집중 연습은 효과를 발휘했다.
"지난 두 번의 실패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유치위에서 열심히 분석했어요. 이번 프레젠테이션에 가장 중점을 둔 건 실제 IOC 위원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거였죠. 나라면 누구에게 표를 줄까. 거기 있는 95명의 위원 중 영어가 모국어인 분들이 많지 않아요. 저희가 세 도시 중 마지막 순서였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죠.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연습했고 순서로 강약을 조절했습니다."
덕분에 5~10표에 가까웠던 부동표가 평창으로 움직였다. 1차 투표에서 63표를 얻었다. 2위인 독일과 무려 38표 차이. 역대 최고였다. 1차에서 이기고도 2차에서 역전당한 지난 두 번의 아픔을 그렇게 씻었다. 이 한 편의 드라마가 완성되기까지 치밀한 물밑작업이 있었다.
조양호 유치위원장과 이명박 대통령,
김진선 특임대사의 프레젠테이션은 평창에 대한 확신을,
김연아 선수와
토비 도슨(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스키 선수, 2006년 토리노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은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박용성 회장은 모나코 왕자에게 '신혼인데 여기서 평창 프레젠테이션을 세 번째 듣게 해서 미안하다'는 조크를 던져 웃음을 주었다. 오프닝에 이어 클로징을 맡은 나 대변인은 유려한 영어와 호소력 있는 내용으로 IOC 위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더반에서는 긴장이 될 때마다 2,018명의 평창 주민이 IOC 실사단 앞에서 부른 'I have a Dream'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들의 꿈이 꼭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확정 발표가 났을 때 눈물을 쏟은 것도 그 장면이 생각나서다. 그렇게 고대하던 새로운 지평(New Horizon : 이번 평창유치단의 슬로건)이 드디어 열렸다.
새로운 Role Model의 등장, 나승연
이번 유치로 삶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 건 나승연 대변인도 마찬가지다. '더반의 여신', '평창의 영웅'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그의 경력과 성장배경, 가족과 지인들에 대한 연관검색어가 꼬리를 물었다. '나승연 대변인은 누구?'라는 검색어로 매일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됐다.
"부담스러워요, 실은. 가족 이야기까지 나오니까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요. 저는 좋은 팀의 일원으로 업무를 수행했을 뿐인데요. 2002년에도
한일월드컵 조직위원회에서 일했고 여수엑스포 때도 조직위 일을 했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유난히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혹시나 팀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해요. 물론 이전에는 조직위원회의 일이었고, 이번엔 유치위원회니까 일의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요."
그의 말마따나 이번엔 '유치'다. 삼수생 평창이 드디어 동계올림픽을 치른다. 강원도와 평창 주민들이 유치를 축하하며 터뜨리려 했던 축포와 풍선을 제 손으로 폐기시키는 걸 지켜본 시간만 10년이다. 그 사연만으로도 감격스러운데 한국의 프레젠테이션은 같은 국민이 봐도 자랑스러울 정도로 잘했다. 특히 나승연 대변인의 그것에는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자라서 영어를 쓰는 게 한국말보다 편하긴 해요. 대신 한국어를 할 때 외국인 같은 발음이 나와서 콤플렉스죠.(웃음) 원래 남 앞에 잘 나서고 말을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어요. 고등학교를 캐나다에서 다녔는데 그때 연설수업(Public Speaking) 성적이 형편없었죠. 떨려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대학은 한국에서 다녔는데 그때 영어 동아리 활동을 한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일주일에 여섯 시간 정도 야외에서 연설을 했는데 정말 열심히 연습 했어요. 그때 말하는 재미를 좀 알게 된 거 같아요. 자신감도 생겼고요."
1973년 서울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나 대변인은 다섯 살이 되는 해인 1977년부터 외국에서 자랐다. 아버지 나원찬 씨가 외교관으로 주멕시코 대사와 주케냐 대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12년간의 외국생활은 2, 3년마다 새로운 나라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혼돈스럽기도 했지만, 덕분에 나 대변인을 영어와 불어에 두루 능통한 세계시민으로 만들었다. 나원찬 씨는 당시 딸이 학교를 마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가곤 했는데, 자신이 좀 늦어지면 학교에 있는 쓰레기를 치우며 기다리고 있었다며 '드러나지는 않지만 남을 배려하는 게 몸에 밴 아이'였다고 했다. 한국에 온 나승연 대변인은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서 1년간 근무한 뒤 아리랑 TV 공채 1기로 합격해 1996년부터 2001년까지 방송인으로 활동했다. 안정된 직장에서 나와 아리랑 TV 개국 멤버로 일하게 된 건 '영어방송을 통해 한국을 외국에 알린다'는 설립 의도가 와 닿아서다.
"제가 어릴 때 캐나다, 영국, 말레이시아, 덴마크에서 살았는데 그때 친구들이 한국을 잘 모르더라고요. 사는 곳을 옮길 때마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면 중국이랑 일본 사이에 있는 나라라고 일일이 설명하는 게 어린 나이에도 자존심이 상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꼭 한국을 알리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이제 한국에도 많다. 하지만 원어민의 느낌으로 구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나승연 대변인의 영어는 듣는 사람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는다. 영어 잘하는 사람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냄과 동시에 열등감을 갖게 되는 우리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유다. 그를 직접 만나보니 그의 아버지의 말대로 그는 타인을 배려하는 게 몸에 밴 사람이었다. 기자의 거듭된 개인 인터뷰 요청에 난색을 표하면서도 행여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이해를 부탁드린다"는 말을 꼭 덧붙였고, 그럼에도 만나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고집을 피우자 "따로 차 한 잔 하자. 기다리느라 건강 상할까 염려된다"는 말로 기자를 감동시켰다. 좋은 스피치는 듣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할 때 나온다는 그의 평소 지론을, 일상생활에서도 실천하고 있었다.
- (왼쪽부터) 아리랑 TV 앵커 시절의 나승연 대변인. 동료들과 함께한 모습이 앳되어 보인다. / 남편인 앤서니 킴이 근무하는 이태원의 디저트 카페. 그는 직접 주방에서 요리를 만들기도 한다.
저는 수줍음이 많은 성격입니다, 하지만
2003년부터 그는 방송사에서 함께 근무하던 동료들과 '오라티오'라는 영어커뮤니케이션 회사를 운영해왔다. 인터뷰, 프레젠테이션, 회의에서 쓰이는 영어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나승연 대변인은 글쓰기와 프레젠테이션, 영어방송 수업을 진행했다. 12년을 외국에서(1977~1989) 그리고 12년을 한국에서(1990~2002) 보낸 후 '한국인이 가르치는 영어 말하기는 한국어와 영어의 특성을 두루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리랑 TV 동료였던 백은영,
강민정 앵커와 의기투합했다. 당시 나 대변인은 자신이 직접 쓴 소개글에 자신의 성격을 부끄러움을 잘 타는 'Shy Nature'라고 썼다. 하지만 반복연습을 통해 스피치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고, 그러니 누구든 열심히 한다면 좋은 프레젠테이터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오라티오'는 라틴어로 '생각을 표현하는 말'이라는 뜻으로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다. 나승연 대변인의 남편인 앤서니 킴(40)이 이사로 있는 이태원 카페 '쿄토푸'와도 가깝다. 쿄토푸는 두부와 콩을 주재료로 하는 일본식 디저트 카페로 뉴욕에서 인기를 끈 뒤 한국에서는 한남동에 처음 오픈했다. 직원들에게 '앤서니 이사님'으로 불리는 그의 남편은 홀 매니저에서부터 바(bar) 담당, 직접 음식을 만드는 쉐프 역할까지 하고 있다.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았을 정도로 요리에 조예가 깊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989년, 앤서니 씨는 캐나다에 사는 교포 대학생이었고 나 대변인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리고 10년 만인 1999년 결혼해 부부가 됐다. 나 대변인은 귀국 인터뷰에서 "지난 몇 달간 가족에게 소홀해 미안하다. 남편이 나의 일을 이해해주고 자랑스러워 해주어서 늘 고맙다"며 마음을 표했다. 평소 부부는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 평창 유치활동을 하며 가까워진 김연아 선수도 그 인연으로 이곳에 다녀갔다.
"주중에는 서로 바빠서 함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주말엔 되도록 가족과 함께하려고 해요. 더반에서 돌아온 뒤로는 아들이 유치원 갈 때도 데려다주고, 책도 많이 읽어주면서 같이 있는 시간을 많이 보내려 하고 있어요."
- 급작스럽게 진행된 인터뷰였던 탓에 사진은 나승연 대변인의 평소 모습을 담고 있다.화장기 없는 얼굴, 수수한 차림의 그는 "이런 사진이 나가도 되겠느냐"며 걱정했지만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카메라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사진을 찍은 포토그래퍼가 "피부든 윤곽이든 수정할 곳이 거의 없는 얼굴"이라며 감탄했다는 후문.
'테레사 나'의 다음 발걸음
앞으로 나승연 대변인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모두가 주목하고 있지만 아직은 본인도 모른다. 유치위원회에 이어 조직위원회에 참여하게 될 건지도 아직은 미지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떤 식으로든 그가 성공적인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남은 7년 동안 정성을 쏟을 것이라는 거다.
"혼자 남아 IOC 위원들과 인사를 나눌 때 그분들이 공통적으로 한 이야기가 있어요. 앞으로 7년이 더 중요하다고요. Work Out(최선을 다해 성취)해야 한다고. 당장 올해 열리는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도 중요해요. 한국이 스포츠 대회를 열 저력이 있는 나라라는 걸 보여주려면 대회 운영과 국민들의 참여가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저도 식구들과 경기를 보러 대구에 꼭 가려고 해요.(웃음)"
앞으로도 '
스포츠 외교'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문득 궁금했다. 실제로 나 대변인은 운동신경이 좋을까?
"제가 캐나다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서 스키는 곧잘 타요. 운동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요."
이토록 수줍게 웃는 나승연 대변인이 설원 위를 자유롭게 활강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또 한 번의 반전이다.
"지금은 제가 뜻밖에 화제가 되고 있지만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들과 위원들이 많아요. 그분들의 수고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조만간 구성될 '평창조직위'에 참여하게 된다면 더 열심히 해보고 싶어요. 스포츠 외교는 그동안 남자들의 영역이라고 여겨졌지만 앞으로는 여성들이 능력을 발휘할 부분이 많을 겁니다."
머지않은 날 스포츠 외교에 도전하는 이들은 아마 제일 처음 나승연이라는 이름 석 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가 어떻게 첫 문을 열고 길을 닦아왔는지에 대해서. 한국을 알리는 영어방송에 1기 멤버로 활동한 그는 이제 한국을 알리는 스포츠 외교의 첫 번째 주자가 됐다. 아리랑 TV 이후의 활동이 후배들을 양성하는 '오라티오 영어교육센터'였듯 앞으로도 그는 비슷한 길을 걷는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혼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그의 바람이 아니다. 자신을 비추는 그 빛이 골고루 나눠지길 바라는 게 그의 성정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영어이름은 '테레사 나(Theresa Na)',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었던
마더 테레사와 같다. "이렇게 보내서 미안하다"고 "다음에 꼭 다시 보자"고 인사하며 미팅 장소로 총총 사라지는 그를 보내며 '테레사'라는 이름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기자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