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불경(佛敎·佛經)

석탑의 명칭 및 직지사3층석탑

含閒 2010. 6. 3. 14:13

석탑의 명칭 및 직지사3층석탑(답사자료 5) 

 

                                                       1. 탑의 역사  

 

 

     탑(塔)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만들어졌을까요?

    탑은 인도의 범어(梵語)인 스투파(stupa)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탑파 혹은 탑이라고 읽습니다.

    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무덤양식인데,

    일반 승려의 사리가 안치된 사리탑 혹은 부도(浮屠)와는 구분됩니다.

    불탑의 경우 사찰의 중심부(주로 대웅전 앞마당)에 위치하며 신앙의

    중심역활을 하지만 부도탑은 사찰 밖이나 뒤에 위치하며 승려의 무덤일 뿐입니다.


     탑은 기원 1세기경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가장 중요한

    예배 대상이었고 불자들이 기도하는 사찰도 탑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복발형의 인도 스투파는 동아시아로 전해지면서

    누각형태로 변하고 그릇을 뒤짚어 놓은듯한 복발형의 스투파는 현재 탑의

    가장 윗부분인 상륜부에 남아있습니다.

    동아시아의 탑은 재료에 따라 목탑(나무), 석탑(돌), 전탑(벽돌)으로 구분되는데

    자연적 여건과 관련되어 중국에서는 전탑, 일본에서는 목탑,

    한국에서는 석탑이 유행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은 황토가 많은 자연환경이고,

    일본은 수목이 우거진 나라이며,

    우리나라는 주변에서 쉽게 화강암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불교의 창시자는 인도의 석가모니(영어로는 싯다르타)인데, 부처가 열반하자,

    부처의 제자들은 당시 인도의 장례풍습에 따라 화장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화장 후 일반 뼈 조각이 아닌 영롱한 사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때 인도의 여덟나라는 부처의 사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하였습니다.

    부처의 제자인 도로나가 부처의 사리를 똑 같이 여덟나라에 나누어 주어

    싸움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리 신앙이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부처의 진신사리는 곧 부처와 다름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부처의 사후 백년이 지나 인도의 전설적인 제왕 아쇼카는

    대인도 제국을 세우고, 부처의 진신사리가 안치된 8대탑을 발굴하여,

    그것을 다시 8만 4천개로 나누어 전 인도와 동아시아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인도인들에 있어 8만4천이라는 수는 많다는 뜻으로 동시에 인간의 육신이

    8만4천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졌다는 믿음의 반영이었습니다.

    이렇게하여 불교는 사리탑과 함께 크게 번영을 누릴 수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산치대탑은 기원전 3세기 것으로 가장 오래된 불탑양식입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이 산치대탑입니다. 

 

 

                                                          기원전 3세기 조성된 산치대탑

 


    그렇다면 한국의 탑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가요?

    인도의 탑이 불교의 전래와 함께 중국을 거치면서 고층 누각형태로 변하였고,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초기에는 중국의 전탑흉내를 내다 건축구조를 따라

    목탑으로 제작되었고, 후에 석탑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렇더라도 석탑에는 목탑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백제시대 석탑은 주로 5층으로 조성되었고,

    신라의 석탑은 3층이 주종을 이루게 됩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는 한국석탑의 전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석가탑이 그 대표입니다.

    석가탑은 그 후 많은 석탑의 모델이 됩니다.

    특히 이형탑(異形塔)의 대표인 다보탑도 이 시기에 만들어 집니다.

    고려는 불교의 국가였지만 탑이 양식상 퇴행을 보였고,

    조선은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탑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게됩니다.

    우리가 답사에서 살펴볼 직지사 삼층석탑도

    통일신라기에 조성된 탑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탑의 대표스타인 통일신라기의 석가탑을 아래에서 감상하겠습니다. 

    석가탑은 일반적으로  751년경(경덕왕 10년, 742년설도 있음)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수할 때 조성한 것으로, 높이 10.4미터이며, 2층 기단의 웅대함과 탑의 아름다움이

    잘 조화된 당대의 대표적인 석탑입니다.

 

 

                                              국보 21호 통일신라 석가탑

 

 

                                                  2. 탑의 형태  

 

        이제, 본격적으로 석탑의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석탑은 맨 아래 기단부와 중간의 탑신부 그리고 맨 위의 상륜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초기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의 기단부와 탑신부를

        살펴보겠습니다. 탑의 층수는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의 층수만 계산합니다.

  

 

 

  

 

 

 3. 기단부  

 

 

 


 

석탑의 기단부는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부와 상륜부를 올리기 위해
터다짐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석탑은 처음에는 정림사지석탑에서 보는 것처럼 목탑을

근거로 해서 백제탑은 축대(기단부)가 단층이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오면서 신라탑은 2층의 축대(기단부)를 조성하였습니다

 

먼저, 지대석은 울퉁불퉁하고 자연환경에 의해 쉽게 변형되는
땅을 평평하게 유지토록 하기 위해 깔아 놓은 석재를 말합니다.

다음, 지대석 위로 기단괴임석을 놓습니다.
본격적인 축대쌓기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괴임석은 목조건물의 원형을 따르기 위해서 라고 보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또한 말 그대로 기단을 굳건하게 괴기위해 사용된 돌입니다.

이 기단괴임석을 딛고 기단면석을 세웁니다. 기단부의 중심돌이기도 합니다.
면석(面石)이란 뜻은 굳이 한글로 풀이하자면 얼굴돌인데,
이 돌에 여러가지 문양을 새겨 놓았던 까닭에 그렇게 부릅니다.
기단석에는 모서리에 우주라고 하는 기둥모양의 돌을 세웁니다.
위로 부터의 하중을 떠 받들기 위해서입니다.
무게분산을 위해 가운데에도 기둥을 세웠는데, 이것은 탱주라고 합니다.

이 기단석을 위에서 마치 뚜껑처럼 덮고 있는 돌이 바로 기단갑석입니다.
다시 한번 기단석을 위에서 부터 압박하며 고정시키기 위함이고,
바로 위에서 부터 올려질 탑신부의 평평한 면을 유지시키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기단부는
땅의 수평면을 유지하기 위한 지대석과 본격적으로 탑신부를
받치기 위한 기단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초기석탑의 기단부 그림인데,
통일신라로 들어 오면서 기단이 1층에서 2층으로 바뀝니다.
즉, 똑같은 모양의 기단이 하나 더 얹혀진다는 것인데
전체적인 균형을 위해 아래기단(1층기단)은 큰반면,
2층기단은 작은 모양으로 이루어 집니다.

 

           

  

  

 

4,  우주와 탱주

 

 

 

위의 우주와 탱주는 탑의 각층 몸돌과 기단석에 자주 새겨져 있는 양식입니다.
목조건축물에서는 건물의 무게를 떠받들기 위해서 있는 아주 중요한 기둥이나,
석탑의 우주와 탱주는 사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것이 아니라
그냥 목조건축물의 양식을 본뜨기 위해서 탑의 몸돌에
기둥의 모양을 새겨넣은 것입니다.

이것은 탑의 건축연대를 파악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즉 탱주의 수량이 2개이상일 경우는 통일신라시대와 그 이전의 탑으로 추정하고,
1개이거나 없을 경우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탑으로 추정합니다.

예를들면, 익산의 미륵사지탑은 전형적인 목조형식을 빌어서 만든 석탑입니다.
이곳의 탱주는 마치 목조건축물의 평주와 다름없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지붕돌의 옥개받침과 풍탁(風鐸)

 

 

흔히 '지붕주름', '옥개주름' 이라고도 말하는 옥개받침은
목조건물의 서까래를 응용한 것입니다.
중첩된 주름의 이미지는 옥개 즉, 지붕의 크기를 강조할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초기에는 받침의 수가 5개였고, 후기로 오면서 차츰 줄어드는 경향입니다.

반전(反轉)은 처마끝이 위로 치켜올라간 정도를 말하는데
'반전이 심하다'라고 하면 처마끝이 위로 급하게 치켜올라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은 반전이 약하고 다소 밋밋했으나,
후기 고려로 넘어 오면서부터는 옥개석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낙수면의 흐름이 급해졌습니다. 또한 반전이 심하여 경쾌하면서도
상대적으로는 왜소한 느낌을 줍니다.

풍탁(風鐸)이란 말은 법당안에서 스님이 예불을 모실 때 쓰는
목탁을 응용하여 생긴 용어로,
'바람이 불어 와서 종을 친다'는 말입니다.
흔히 탑의 처마끝에는 구멍을 내어 이 풍탁을 달았는데
이는 석탑에서 치장의 의미라고 보면 됩니다.

  

6. 낙수면

 

 

 

 

석탑은 별도의 건축물이나 구조물 내에서 보관하는 
           그런 형식의 문화재가 아닙니다.

           산이나 들녁에 서서 그대로 자연의 풍상을 겪어야 하는 노천(露天)문화재 입니다.
           따라서 자연환경중에서 비[雨]에 대한 구조적인 배려가 가장 중요합니다.
           탑을 자세히 바라다보시면 기단갑석이나 옥개석 밑의 첫 옥개받침의 모양이
           빗물의 흐름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한 흔적을 찾아 보실수 있습니다.

 

7. 상륜부(相輪部)-(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

 

 

 

 

 

1. 옥개석에는 옥개받침 부분이 있습니다.
    마치 기와지붕의 서까래처럼 보입니다.
    우리나라 석탑의 원형은 백제의 목탑에서 가져왔고, 이 목탑의 원형은
    목조건축물에서 본떠 왔습니다.
    따라서 초창기의 석탑에는 이 옥개받침이 5개입니다,
     (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중기까지)
   그 후 통일신라중기부터 고려초에는 4개로 줄어들다가 고려말에는
   3개로 작아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탑이 거의 조성되지 않습니다.

2. 반전이라 함은 옥개석의 귀마루 부분인데 구조명칭은 아닙니다.
    즉, 귀마루(우동) 선이 밑으로 내려오다
    그 끝에서 위로 갑자기 치켜오르는 각도(정도)를 말하는데
    초창기의 석탑에는 이 반전의 정도가 아주 약합니다.
    후기 통일신라시대에 오면서 반전은 심해지고
    고려시대의 탑들은 너무 심해서 날카롭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고려시대의 탑 옥개석은 상대적으로 왜소한데다가 반전이 심하니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몽땅그리한 옥개석입니다.


3. 전각이라고 나와 있는 부분은 옆에서 보면
   옥개석의 두께를 말하는것처럼 보입니다.
   초창기의 석탑에는 이 전각의 높이가 아주 약합니다.
   부여 정림사지 석탑을 보시면 참 갸날프고 애처로워 보입니다.
   통일신라 시대에 넘어 오면서 높이는 차츰 높아지다가
   고려시대에는 몽땅그리한 옥개석의 모양에다 전각도 한층 높아집니다.

4. 낙수면은 비가 오면 빗물이 흘러내리는 경사면을 말합니다.
    초창기 석탑일수록 경사면은 완만합니다.
    어찌보면 평평한 느낌이 올 정도입니다.
    후기에는 이 낙수면의 경사가 높아집니다. 

 

 

8. 직지사 3층석탑(보물 606호)

 

 

     직지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원래 경북 문경의 도천사터에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두 탑 모두 각 부분의 양식이 같아서 1단의 기단(基壇)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러 장의 넓적한 돌로 짜여진 기단은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우주와
    탱주를 조각해 두었습니다.
    탑신의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뚜렷한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습니다.
    얇고 평평한 지붕돌의 밑면 받침으로 1·2층은 5단, 3층은 4단을 두었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습니다.
    꼭대기에 올려진 거대한 모습의 머리장식은 1976년 탑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들어 장식해 놓은 것입니다.

    탑신의 1층 몸돌 높이가 지나치게 높긴 하나,
    전체적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기단이 1단이고, 지붕돌의 들린 정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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