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례
*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높고 귀한 지위에 있는 인사들이
자신의 신분에 맡는
사회적,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진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도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온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한 노블레스들이 많다.
우리에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역사는 분명히 있었다.
<Case 1>
- 경주 최부자 -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 경주 최부자 집안이다.
''부자가 3대 가기 힘들다''는 옛말이 무색하게도,
경주 최부자 집안은 무려 300년 12대 동안
만석의 재산을 유지했다.
이렇게 장기간 한 집안이 부를 유지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최부자 집안이 칭송을 받는 것은
부를 많이 축적했고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선행과 독립운동의 후원자 역할을 통하여
지도층으로서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씨 가문은
''부자가 천당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는 것 처럼
고금을 막론하고 부자가 존경받기는 어렵지만,
부자로서는 드물게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최부자 가문의 기본적인 생활지침은
육연(六然)이라는 가훈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최부자 집안의 가훈은 육연 외에도
보다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양반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하되
권력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과거를 보라는 것은 학문을 가까이 하여
지적능력을 기르라는 가르침이다.
진사는 일명 생진(生進)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시대에 생원과 진사를 뽑았던
소과(小科)에 급제한 것을 일컫는다.
때문에 생원이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신분상 선비로서 사회적 공인을 받는다는 의미가 컸다.
일테면 생진과보다 더 높은 과거에 급제하여
권세의 자리에 있게 되면,
그것은 마치 작두 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으므로,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지위는 필요하나
권력까지 가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이 되겠다.
2)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마라.
대단히 역설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집안을 존경받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가르침 때문이다.
최부자집의 후손들은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부에 대한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그들은 이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다른 부자집들이 70% 정도 받던 소작료를,
40%로 낮추어 부의 혜택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로 퍼져나가게끔 하였다.
경주 일대의 소작인들이
앞다퉈 최부자 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섰으며,
수많은 소작인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고
최부자집의 재산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박수를 치지 않았을까...?
말하자면 윈-윈(win-win) 전략의
선구자적인 실천이었던 것이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 ▲ 100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
불에 타버리고 주춧돌만이 남았다
최씨 집안의 셋째 원칙은
지나가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함으로써
덕을 쌓고 인심을 얻으라는 가르침이다.
과객(過客)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선행을 베푸는 것이기도 하지만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정보 전달자 역을 하던 과객들을 통해
최씨 집안은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지역의 민심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한 대접을 받았던 이들은
조선팔도에 최 부자집의 인심을 소문내고 다녔는데,
‘적선지가(積善之家:선을 쌓는 집)’란 평판은 사회적 혼란기에도
이 집을 무사할 수 있게 만든 비결이기도 했다.
동학 이후에 경상도 일대에는
부자집을 터는 활빈당이 유행해서
다른 부자집들은 대부분 털렸지만
최 부자집 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 집의 평판을 활빈당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흉년기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남의 불행을 치부의 기회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정의로운 경제활동을 하라는 뜻도 될 것이며,
이웃의 원성을 살 일은 하지 말라는 의미도 되겠다.
최부자집은 이웃의 어려움을 통해서
재산을 늘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웃이 어려울 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그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흉년이 들면 수 천명씩 굶어 죽던 시대에,
흉년은 없는 사람에게는 지옥이었지만
있는 사람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급하니까
흰죽 한 그릇 얻어먹고 그 대가로 팔게된 논을 말하는
''흰죽 논''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 부자 집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이는 가진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렇게 얻은 인심은 다른 기회에 재산을 늘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런 금기는 또 있었다.
‘파장 때 물건을 사지 않는다’ 가 그것이다.
석양 무렵이 되면
장날 물건들은 값이 뚝 떨어지기 마련이다.
다른 부자집들은
오전에는 절대 물건을 사지 않고
파장 무렵까지 ‘떨이’ 물건을 기다렸으나,
최씨 집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항상 오전에 제값을 주고 물건을 구입하였다.
그러다 보니 상인들은
제일 질이 좋은 물건을 최 부자 집에 먼저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러한 최부자집의 재물에 대한 철학은
부를 축적하는 데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이 어려울 때를 축재의 기회로 삼는 요즘 기업인들에게도
크게 교훈이 되는 가르침이다.
5)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 최부자 집의 창고.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는 가훈처럼,이곳에 쌓인 곡식들은 최씨 일가만을 위해 쓰이지는 않았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지 말고
이웃과 나누라는 가르침이다.
그것도 사방 백리안의 이웃과 나누라는 것은
그 스케일 면에 있어서도
로마제국 귀족들의 선행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규모이다.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100리를 살펴보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이고,
남쪽으로는 울산이고
북으로는 포항까지 아우른다.
최부자집은 춘궁기나 보릿고개가 되면
한 달에 약 100석 정도의 쌀을 이웃에 나누어 주었고,
흉년이 심할 때에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바닥이 날 정도로 구휼을 베풀었다고 한다.
최 부자집에서 1년에 소비하는 쌀의 양은
대략 3000석 정도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썼다.
그 다음 1000석은 과객들의 식사대접에 사용했다.
그리고 나머지 1000석은 빈민구제에 썼다는 것이다.
최씨 집안의 이러한 전통은
1대 부자인 최국선의 선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최국선은 신해년(1671)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지켜서 무엇 하겠느냐"며
곳간을 헐어 이웃을 보살폈다고 한다.
그 이후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르침이
가훈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6)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 온 후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
남자가 아니라 안방 마님이 가지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 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정신이 중요했다.
집안의 살림을 사는 여자들에게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강조하는 이 가르침은
자신들에게는 박하고 엄격하게,
타인들에게는 후하고 자비롭게 대하는
최부자집 생활철학의 진수이다.
또한,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렇게 교육받은 후손들이 재산을 낭비할 리 없으므로
이 교훈이야말로 300년 동안이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비결이라고 하겠다.
최부자집의 부는
마지막 부자인 최준의 대에 와서
길고 긴 300년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나
그것은 부의 끝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공헌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 운동가였으며
오늘날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설립한 교육 사업가로서
우리의 근대사에 독특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거부이면서도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최준과 그의 둘째 동생인 최완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최완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 끝에
1921년 35세로 순국했다.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 .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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