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나서(讀書後)

좁쌀 한알

含閒 2009. 9. 15. 18:49
저자
최성현 지음
출판사
도솔
2004-05-20 출간 | ISBN 10-8972201502 , ISBN 13-9788972201502 | 판형 A5 | 페이지수 304
최저가
9,800  4,900(50%)
 

책소개

한국 생명운동의 대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서거 10주기 기념 일화/서화집. 장일순이라는 이름으로 동시대를 살다간 한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슴 뛰는 대답을 제공하는 책이다. '원주에 살다간 예수'라 불려질 정도로 파격적이었던 이웃 사랑, 해탈한 인간의 한국적이며 현대적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숱한 일화들과, 수많은 작품을 남긴 재야 서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주요 글씨,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소개

최성현 1956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1980년대 후반부터 번역서를 통해 꾸준히 자연농법의 세계를 국내에 소개해왔다.1988년부터 전기와 전화, 이웃집이 없는 산골 오지에서 만5년간 무위자원의 생활을 몸소 실험해 보기도 했다. 1993년부터 6년 간은 일본과 뉴질랜드에서 생활하며 외국문화를 경험했다.지금은 강원도 홍천에서 산과 강, 그리고 그 안의 생명붙이를 벗삼으며 소규모 농사와 일어 번역일을 하고 있다.옮긴 책으로는 <생명의 농업>(공역)<나무의 마음, 나무의 생명> <짚 한 오라기의 생명> <신비한 밭에 서서> 등이 있다.
 

목차

발문-김지하
사람들이 말하는 장일순
생애-활짝 열고 뭇생명들과 하나가 되어
제 1장 자네가 바로 하느님이여
제 2장 나라는 것은 찌꺼기일세
제 3장 어머니는 끝이 없네
제 4장 물 속을 천 리를 걸어라
제 5장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면 거기에 다 있데요
제 6장 풀 한 포기
제 7장 군고구마 팝니다
작품 해설-유홍준
후기-최성현

 

출판사 서평

1. 좁쌀 한 알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은 한국 생명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무위당(혹은 조한알) 장일순 선생의 서거 10주기를 기념하여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에서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무위당 장일순의 일화집 겸 서화집이다.
교육자이자 서예가이며 당대의 큰 어른. 70년대엔 지학순 주교와 더불어 반독재투쟁을 한 재야운동가로, 김지하를 비롯한 민주화 투쟁에 앞장 선 수많은 인사들의 정신적 지주로 큰 족적을 남겼던 장일순 선생. 1994년 서거 당시 '내 이름으로 가급적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유언 때문에 공식적인 기념사업을 자제하다 올해로 10주기를 맞아 비로소 그 세세한 면모를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이미 80년대 초반부터 21세기적 삶의 방식이라 할 생태적 영성의 세계관을 꿰뚫고 각 분야의 인사들에게 사회 운동의 영감을 불어넣어 준 배후의 인물이자 숨은 어른. 해방 이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현대사의 험난한 역정 속에서 늘 시대 흐름의 중심에 있었지만 한번도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던 올곧은 정신. 첨예한 정치가이며 운동가였지만 이웃과 제자, 가족과 친인척 같은 일상의 관계에서도 모순 없이 인격의 조화를 이루며 한없이 존경 받았던, 마치 원효와 같은 해탈인. 태어나 중학교부터 대학까지의 서울 유학 시절을 제외하면 평생을 원주에서 지낸 생명지역주의(bioregion)란 관점에서의 진정한 지역인.
이 책은 그렇게 평생을 원주의 가난한 이웃부터, 정치적?사상적 지도자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있었던 숱한 일화들을 선생 생전의 숨결까지도 느낄 수 있게끔 펴낸 국내 최초의 책이다. 또한 수많은 작품을 남긴 재야 서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주요 글씨들과 그림을 수록한 서화집이기도 하다.
'원주에 살다간 예수'라고 불려질 정도로 보통사람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파격적인 이웃사랑. 해탈한 인간의 한국적?현대적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숱한 일화들. 장일순이라는 이름으로 동시대를 살다간 한 인간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너무 당연하면서도 외면하기 일쑤인 질문의 가슴 뛰는 답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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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한알 장일순은 어떤 사람인가?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고,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이 단 한 번을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이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 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 꼽는 사람. 일본의 사회평론가이자 기공 지도자인 쓰무라 다카시가 마치 '걷는 동학' 같다고 했던 사람. 그의 장례식에 조문객이 3천 명이나 모였다는 사람.
궁금하다. 장일순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장일순은 20대 초반에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계를 하나의 연립 정부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 '원 월드 운동'에 참여했다. 20대 중반에는 김재옥,김종호, 이종덕, 장윤, 한영희 등과 함께 원주에 대성중고등학교를 세웠고, 30대 초반에는 '참여해서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생각 아래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인 부정 선거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삼십 대 중반에는 미국이나 소련의 간섭을 받지 않고 통일을 해야 한다는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정치범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3년간의 옥살이는 장일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감옥은 장일순에게 더 이상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 가르침에 따라 장일순은 그 뒤로 '파워 게임과 야합이 판을 치는 정치판'보다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밑바탕에서 돕는 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 아래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숨은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출옥한 뒤로도 장일순은 오랫동안 사회안전법과 정치정화법에 묶여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활동에서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는데, 그 때 장일순은 서울로 유학을 가며 그만 둔 붓글씨를 다시 시작했다. 장일순에게 붓글씨는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한 방편이자 마음을 닦는, 말하자면 묵선墨禪이었다.
그처럼 운신이 편치 않은 속에서도 장일순은 1960년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립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적인 신용협동조합의 설립과 정착을 도왔고, 70년대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주교였던 지학순과 손을 잡고 원주가 앞장서서 비판정신을 갖고 부패한 정치권을 일깨우거나 때로는 저항하는 도시가 될 수 있도록 그 주춧돌 구실을 했다. 80년대에는 정치 투쟁이 아닌 생활운동을 통한 사회운동을 이끌었고,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걸쳐서는 천지만물을 한 생명으로 보는 한살림의 세계관, 곧 생명의 세계관을 이 땅에 태동시켰다. 또한 해월 최시형을 우리 겨레의, 아니 전 세계의 스승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도 장일순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장일순은 이런 일을 아무런 직함도 갖지 않고, 요컨대 평생 돈벌이 한 번 하지 않고 했는데도 부부간이나 가족이 대단히 화목했다는 사실이다. 장일순은 제가와 평천하를 어디 한 군데 모나지 않게, 힘든 사람이 없도록 잘 아울렀다.
거기에는 가문의 힘도 있었다. 장일순은 3대를 통해 핀 꽃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거지에게 적선을 할 때도 반드시 두 손으로 드리도록 엄하게 가르쳤고, 할아버지는 먼저 죽은 손자의 상여를 향해 절을 했던 흔히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원주초등학교와 원주농업고등학교 부지는 부유했던 그의 할아버지가 희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일순과 그의 할아버지를 '낙타를 타고 바늘 구멍을 빠져나간 사람'이라고 말한다.
말년의 장일순은 자신의 여성성을 활짝 꽃피운, 여자보다 더 여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한없이 부드러웠다. 부드럽되 한 마디, 한 행동은 만인의 스승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는 세상을 늘 바로 보았고, 앞서서 보았다. 그런 장일순을 통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힘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그의 집은 일년 내내 빌 틈이 없었다.
단 한 번을 보고 장일순에게 크게 반했다는 김종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땅의 풀뿌리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고, 사람 사는 도리를 가르쳤던 해월 최시형 선생이 지금 단순히 동학이나 천도교의 스승이 아니라 이 겨레, 이 나라 사람들 전체의 스승이듯이 장일순 선생의 자리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책속으로

(삼 년 동안 단 하루도)
칠그림을 하는 양유전의 20대 때의 일이다. 그 때 양유전은 장일순을 일주일에 한 번씩 무려 3년을 만났다. 여럿이 모이는 게 아니었다. 독대였다.
3년이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런데 그 3년 동안 장일순은 단 한 번도 무단히 빼먹거나 소홀히 한 일이 없었다 한다. 싫은 내색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한다. 일이 있어 집을 비울 때는 꼭 메모를 남겼고, 늦을 때는 언제쯤 돌아오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몸이 고달픈 날은 "오늘은 좀 힘들군."하면 양유전이 알아서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는 식이었다 한다.
그렇게 3년이 다 돼 갈 즈음에는 집에 앉아서도 장일순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훤히 보였다 한다. 그걸 아는 사람들은 양유전에게 전화를 걸어 장일순을 만나려고 하는데 가도 되겠냐고, 집에 있겠냐고 묻기까지 했다 한다.
장일순의 집은 지금은 집 옆으로 큰 길이 났지만, 그 때는 그를 감시하기 위해 세웠다는 파출소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야 했다. 울타리가 없었다. 노간주나무를 빙 둘러 심어 울타리 대신 쓰고 있었다. 장일순의 집은 본채 옆에 있는 창고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거기까지만 가면 양유전은 장일순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100퍼센트 알 수 있었다 한다. 거기서 방안이 들여다 보여서 그런 게 아니다. 순전히 감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안 계시구나 싶은 날은 "선생님"이 아니라 "사모님" 하고 부르며 들어갔다 한다.
일주일에 단 한 번뿐이었다 손치더라도 그것이 3년이나 된다면 그런 게 가능하리라. 택시 운전수 3년이면 한 눈에 저 사람이 택시를 탈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고, 5년이면 그 사람이 갈 행선지까지 알 수 있다 하지 않는가! 가는 사람은 가는 사람대로 맞는 사람은 맞는 사람대로 서로 좋은 경험을 했으리라. 그 3년이 두 사람을 키웠으리라!

(돈은 줬으면 그만)
장일순이 아홉 살 때 일이다. 장일순은 그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나눈 대화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무개가 돈을 꿔 가고는 안 가져옵니다. 제가 가서 독촉을 할까요?"
"가지 마라. 너도 자식을 키우잖니? 돈은 줬으면 그만이지 달라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갚을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 갚을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달래면 돈은 받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잃고, 또 갚을 마음은 있는데 돈이 없어 못 가리는 사람한테 가서 달래면 그 사람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워. 그러니 그런 슬기롭지 못한 짓은 하지 마라."

(조 한 알)
한겨레21에서 일하는 정재숙이 물었다.
"선생님은 어째서 조한알이라는 그런 가벼운 호를 쓰십니까?"
장일순이 그 말을 듣고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인간이라 누가 뭐라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 그럴 때 내 마음 지긋이 눌러 주는 화두 같은 거야. 세상에 제일 하잘 것 없는 게 좁쌀 아닌가. '내가 조 한 알이다' 하면서 내 마음을 추스르는 거지."
장일순은 호가 여러 개였다. 호암湖岩, 일초一草, 한도인閑道人, 청강靑江, 일충一?, 무위당無爲堂, 모월산인母月山人, 일속자一粟子 혹은 조 한 알.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썼던 것은 청강과 무위당과 일속자였다. 나머지는 잠깐 쓰다 말았다.

(손님을 하늘처럼)
최정환은 원주의 번화가에서 '천석'이라는 밥집을 하고 있다. 그 밥집을 시작할 때 장일순은 최정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니가 여기서 손님을 하늘처럼 섬기며 쟁반을 3년만 나르다 보면 나보다 훨씬 큰 사람이 될 것이다. 아주 큰 도인이 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느냐 보다는 그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리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하늘의 일로 여기고 늘 마음 챙기기에 거짓이 없으면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에서 큰 깨우침을 얻을 수 있으리라. 크게 자랄 수 있으리라.


(칼로 찔러도)
한원식은 농부다. 일찍 아버지를 잃는 바람에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한 몫 잡을 생각으로 빚은 내어 지었던 배추 농사가 장마로 거덜이 나며 큰 전환을 맞게 됐다. 그 때 한원식은 크게 깨닫고 방향을 돈벌이 농사에서 땅을 갈지 않고, 농약과 비료를 하지 않고, 풀을 두고 가꾸는 자연농으로 바꿨다. 그 뒤로 한원식은 가난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부자로 늘 신이 나 살고 있다. 나날을 축제처럼 살고 있다. ' 얼씨구 절씨구.'가 입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런 한원식이 처음 장일순을 만나 한 말은 이랬다.
"한국에 농부는 저 하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