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자세히 읽는 '김수환 추기경의 삶'
뉴시스 | 기사입력 2009.02.17 17:03
마음씨 착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었던 아버지는 소년 수환이 아직 어린 나이인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종하셨다. 성품이 곧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밖에 나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며 더 엄하게 자식들을 키웠다.
3살 차이가 나는 형 김동한(金東漢) 신부와 어머니는 유년 시절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형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초등부 5, 6학년 과정)에 갈 때까지 서로 떨어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형제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두 형제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어머니는 "너희 둘은 이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는 말씀을 꺼냈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 서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감명을 깊이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형은 그 이듬해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로 옮겼고, 2년 후 나도 가게 되었는데 형은 기쁘게 갔으나 나는 그렇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명을 따라 갔을 뿐이다"(「샘이 깊은 물」1984).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5년제 소신학교(小神學敎)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했다.
동성학교 시절 민족혼을 일깨우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면 울분이 치솟았다. 그래서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크게 야단을 맞았다. 이 일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줄 알았는데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라는 대구대교구장의 명령을 받게 된다. 동성상업학교 졸업 후 1941년 4월 도쿄 조치(上智)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중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과연 한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결국 시편 51편에서 찾아낸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구절을 상본에 써넣었다.…
13살 나이에 어머니한테 등 떠밀려 소신학교에 들어가 30살에 사제가 되었다. 18년 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에 회의를 여러 번 느꼈고,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꾀병을 내어 한 학기 건너뛰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조금도 변함없이 나를 한 길로 이끄셨다. 그 큰 섭리와 은혜에 엎드려 감사드렸다. 특히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해 69세이셨던 어머니는 '자식이 신부가 되는 게 소원'이었던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가슴 벅찬 순간을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채 지켜보고 계셨다. 그날 막내아들이 신부가 된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기도와 눈물로 얼룩진 인고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평화방송 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사제 수품 후 곧바로 안동성당(지금의 안동교구 목성동 주교좌성당) 주임신부, 1953년 4월 대구대교구장 비서, 1955년 6월 김천성당(지금의 대구대교구 황금동성당)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일선 본당신부 생활은 안동성당과 김천성당을 합쳐 3년이 채 안되지만 김 추기경은 이때를 '꿈처럼 아름다웠던 시절'로 회상하곤 했다.
1956년에는 독일 뮌스터대학 유학길에 올라 은사이신 요셉 회프너 추기경을 만나게 된다. 김 추기경은 회프너 추기경에게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는데,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무렵 광부와 간호사로 일자리를 찾아 독일에 건너온 한국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도 했다.
한편 유학시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소식을 접하면서, 가톨릭교회가 문을 활짝 열어 새바람을 맞아들이고 쇄신을 통해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공의회를 통해 자성하고 변화하는 교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교회가 사회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체험은 그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귀국 후 1964년 6월 가톨릭시보사(지금의 가톨릭신문)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가 한창 무르익던 시기로, 그는 다른 어떤 사제보다 먼저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공의회 관련 외신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 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그는 사회적 사건과 흐름을 신앙적 눈으로 조망하는 주제의 사설(社說)을 지면에 자주 실었다. 이 무렵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근본정신인 '변화와 쇄신'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한국 교회는 어떻게 변해야 하고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창세기 12장 1-4절).
성무일도(聖務日禱)를 드리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부분을 묵상하던 1966년 3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김수환 신부는 부산교구에서 분리,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44세의 젊은 나이였다.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着座式)은 1966년 5월 31일 완월동 성지여중고 교정에 열렸다. 김수환 주교가 사목표어로 택한 말씀은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이 문구를 훗날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할 때도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고 해석을 조금 고쳐서 그대로 사용했다.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신앙인의 삶이란 게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을 하찮은 존재로 무시할 때 '저 사람은 우리 밥이야!'라는 표현을 쓴다. 주님은 그 정도로 당신을 낮추고 비우면서까지 우리 밥이 되어 주셨다. 나 역시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이에게 밥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정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표어대로 살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평화방송·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초대 마산교구장으로 교구의 기초를 닦으면서 한시도 떠나지 않은 생각은 '어떻게 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대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김수환 주교는 1968년 2월 9일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대 사회적 발언을 한다. 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나선 것이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Jeunesse Ouvrière Chrètienne)의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후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그들을 큰 품으로 끌어안았다.
김 추기경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1968년 4월 어느 날, 김수환 주교는 그의 표현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는다.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은퇴한 노기남 대주교에 이어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이다.
마산교구의 초대교구장으로 주교직에 오른 지 2년밖에 안 된, 주교단에서도 제일 막내였기에 그의 머릿속에 맴돈 말은 '왜 하필 내가?'라는 반문뿐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서울대교구는 해결해야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상황이었다.
1968년 5월 29일 명동대성당에서 엄숙히 거행된 교구장 착좌식에서 김수환 대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는 짐이 얼마나 무거우며 또한 그것이 우리 교회를 위해 어떤 뜻이 있는가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의 힘만으로는 이 자리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착좌할 수 있는 것은 저를 이 자리로 불러주신 하느님의 인도를 믿는 신앙심과 신자 여러분의 기도와 협력 때문입니다. … 또한 제가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때에 교회가 하느님의 장막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달라'는 우리사회의 요구를 명심합시다"(명동대성당, 교구장 착좌식 1968. 5. 29).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것이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렸다. 당시 김 추기경의 나이는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반증이었기에 한국 천주교회 2세기만의 큰 경사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한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점수를 매긴다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힘들고 지쳐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 사회 격동기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조차 압력과 비난이 쏟아질 때는 한 사제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어떠했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럴 때마다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의 기도와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벗어 던지지 않고 끌고라도 갈 수 있었던 힘은 많은 이들의 기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평화방송·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김수환 추기경이 교구장 생활을 한 30년 동안 교회는 발전을 거듭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할 당시인 1968년 말 서울대교구의 규모는 본당 48개, 공소 63개, 신자 14만 명이었다. 30년 후인 1998년 말에는 본당 203개, 공소 6개, 신자 125만 명으로 크게 성장했다.
아울러 김수환 추기경은 선교사 없이 신앙이 전파된 한국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이 세계 천주교회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을 처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모시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순교의 피로 전해져 내려온 한국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 번 더 방한해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를 주례했다. 세계 성체대회를 계기로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한몸운동'은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삶으로 실천하자는 운동으로 지금까지 많은 결실을 맺었다. 현재 국내외 원조사업과 백혈병 어린이돕기, 골수·제대혈기증, 장기기증, 국내입양운동 등의 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김 추기경은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미사 마침예식에서 주교는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는데 김 추기경은 언제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한다.
통일에 대비하고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게 된다. 같은 해 3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민족화해미사'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봉헌되고 있다.
"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그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그 믿음 때문에 추기경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시간을 베풀었다.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추기경이 우선순위를 둔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는 믿음에서였다. 서울대교구장의 바쁜 일정 가운데도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성탄 미사를 함께 드리기도 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기까지 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 등 김 추기경은 성탄․사순 메시지나 강연, 시국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70-80년대를 지나는 동안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자 잣대였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것은 인간을 위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삶이 유린되는 사회와 개인을 구원하여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랑하기 위한 싸움에서 미움만이 남아있는 경우가 없지 않은지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때문에 불의를 보고 분노하며 자신의 개인적 안락과 미래까지도 포기하면서 정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우는 이들도 이 민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이 민족 사회가 결코 미움과 대립의 사회가 되지 않고 사랑의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분들도 먼저 하느님과 화해해야 합니다"(정의와 평화를 구하는 9일 기도 메시지, 1986. 3. 9)
교회의 지도자이자, 사회의 큰 어른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고독한 일이였다.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쏟아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평화방송·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생을 두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각을 지배하는 큰 주제는 '인간'이었다. 인간을 위해 자신의 삶과 전 존재를 바치는 모범을 보여준 스승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짙은 안개 속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절대 중심을 잃지 않고, 바른 항해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그가 짊어져야 했던 십자가는 너무나 막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도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런 믿음 하나로 막았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김 추기경의 관심은 장애우․나환우․철거민․도시빈민․탈북주민․외국인 노동자․미혼모․성매매 여성․재소자 등 매우 다양한 소외 계층으로까지 확산됐다.
김 추기경은 종교인들이 우리 사회의 인간화와 도덕성 회복, 사랑나눔을 위해 힘을 모아한다고 강조했다. 김 추기경이 1997년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해 축사를 한 인연으로 명동대성당 특강 강사로 법정(法頂)스님을 초청하기도 했고, 2005년 길상사에서 열린 석탄일 음악회의 수익금은 '성가정 입양원'에 전달되기도 했다. 2006년 소천(召天)한 강원용 목사와는 나이와 종교를 떠나 같은 곳을 향해 걸어온 도반(道伴)과도 같았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김 추기경은 정겨운 벗이자 착한 목자, 인자한 '혜화동 할아버지'로 넉넉한 웃음을 지닌 채 세상을 향한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두었다. 그는 이제 지상에서의 아름다운 여행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향기는 여전히 커다른 빛과 소금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붉게 물들어 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고향 풍경과 어머니 품이 느껴진다. 어릴 때 저녁이 가까워 오면 신작로에서 서성거리며 행상 나간 어머니를 기다렸다. 내 나이도 이제 하느님 곁으로 한발짝 한발짝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하늘나라에 가면 보고싶은 어머니도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어 본다.
요즘 병세가 위독한 선후배 신부님들 병문안을 가면 귀에 바싹 대고 이런 말을 되풀이한다. "하느님한테 맡기세요. 하느님한테 모든 걸 다 맡기세요." 이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 (평화방송 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생각해보면 나는 죄인이다.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고개도 들 수 없는 대죄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오히려 이런 죄와 허물을 통해서-사도 바오로가 죄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리셨다(로마 5,20)고 하신대로-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비, 당신의 그 풍성한 용서의 은총을 깨닫게 하여 주셨다.
이제 나는 나를 이렇게까지 큰 은총으로 축복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또 감사를 드리고 또 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생이 얼마일지 알 수 없으나 이제는 진실로 하느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주교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대로 성체성사의 주님처럼 생명의 빵이 되는 삶, 모든 이의 '밥'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하느님 아버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나의 모든 걸 바쳐서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주님께 영광 있으소서. 아멘. (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마지막회)인생을 돌아보며" 마지막 부분)
<김 추기경 선종 순간에도 "고맙다">
시국 메시지 발표하는 김수환 추기경
(서울=연합뉴스)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께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ㆍ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했다. 향년 87세. 사진은 김수환 추기경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소개된 1972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는 추기경 .2009.2.16 |
마지막까지 스스로 호흡하고 큰 고통없이 영면
(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16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마지막까지도 큰 고통 없이 영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주치의였던 강남성모병원 정인식 교수는 "추기경께서는 노환에 따른 폐렴 합병증으로 폐기능이 떨어져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스스로 호흡했다"면서 "선종때까지 큰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또 "추기경께서는 평소 늘 하시던 말씀대로 임종을 지켜본 교구청 관계자들과 의료진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다"고 덧붙였다.
고 김 추기경은 지난해 7월 노환으로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한 뒤 한때 호흡 곤란으로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면서 위중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생명에 지장을 줄 만큼 크게 위중하지는 않았었다는 게 의료진의 설명이다.
특히 김 추기경은 선종 순간까지도 인공호흡기에 의존하지 않은 채 스스로 호흡하고, 말을 건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폐렴에 따른 합병증으로 폐기능이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고 의료진은 덧붙였다.
폐렴은 면역력이 강한 젊은 층에는 상대적으로 발병률이 낮으며, 설사 걸린다 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치유될 수 있다. 하지만 평소 활동량이 적은 노인이나 과거에 결핵이나 폐렴을 앓았던 사람, 또는 지병으로 면역력이 약해져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치명적이며 감염확률 또한 급격히 높아진다.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외국인들이 제법 있다.
그들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고 계신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다.
어느 날 궁금증이 일어,
추기경님께서 몇 개 국어를 하시는지
주교관 식당에서 여쭈어 본 적이 있다.
추기경님께서
'당신은 두개의 언어를 잘하는데,
그 말이 무엇인지 맞추어 보라' 고 하셨다.
같이 식사를 하고 있던 국장 신부들이
저마다 추론하여 대답을 했다.
어느 신부님은
'추기경님께서 독일에서 유학을 하셨으니
독일어를 잘하실 것이고, 일제 강점기를 사셨으니
일본어를 잘하실 것 같다.' 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추기경님께서는
'아니다.' 라고 대답하셨다.
다른 신부님이
'추기경님이 영어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자주 뵈었으니 영어와 독일어가 아니겠느냐' 고
추론하였지만 추기경님은 '아니다' 라고
대답을 하셨다.
스무고개를 하듯이
'영어와 일어', '독어와 우리 말',
심지어는 라틴어를 소신학교때부터 배우셨으니
'라틴어와 우리말' 이라고 까지 하였는데
'전부 틀렸다' 고 말씀하셨다.
더 이상의 조합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 같아서
'도대체 잘하시는 말이 무엇이냐' 고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추기경님은 웃으시면서
'나는 두 가지 말을 잘하는데 그게 뭐냐면
하나는 거짓말이고 다른 하나는 참말이야' 라고
대답하셨다.
모두가 공감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명답이었다.
사람 누구나가 참말과 거짓말을 하고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 김수환 추기경의 유머와 지혜 -
김 추기경과 전·현직 대통령 '너무 다른' 인연
이명박, 김대중, 김영삼과는 '각별'…박정희·전두환과는 '악연'
◈ 이명박과 30년 인연
이명박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과의 30년이 넘는 인연이 화제다.
이 대통령은 지난 65년 군에 자원입대했다가 지병인 기관지확장증으로 입대를 거부당한 뒤 주변 사람들이 소개해준 천주교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병을 치료했다.
이 때 수녀들의 진심어린 간호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 대통령이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재직하던 75년에 근로자들을 위한 병원을 만들어 김 추기경에게 천주교에서 병원을 운영할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이를 시작으로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직 당시에도 김 추기경을 자주 찾아 문안 인사를 했고 2007년 대선 막바지에 김 추기경이 몸이 안좋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행사를 중단하고 병원으로 달려가 문병을 하기도 했다.
◈ DJ 구속 때 위로 방문…생활비도 챙겨줘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3년 8월 일본 동경에서 나중에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밝혀지는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해 바다에 수장될 위기에 처한다.
김 전 대통령은 이때 예수님을 보았는데 예수님 체험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환상을 본 것인지 알고 싶어했는데 이 얘기를 듣고난 김수환 추기경의 해석은 이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조문]
"만약 그때 기도하고 있었다면 환상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예수님을 본 것이라면 그 분이 실제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희호 여사 자서전 '동행' 중)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각별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일화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 때만이 아니라 김 전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976년 진주교도소에 구속수감 됐을 때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신군부에 의해 청주 교도소에 구속됐을 때도 직접 찾아와 용기를 주었다.
김 전 대통령이 감옥에 갇혀 생활이 궁핍했던 이희호 여사에게도 이따금씩 생활비를 챙겨주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17일 고인의 빈소를 찾은 김 전 대통령 내외의 표정은 무척 어두웠다.
◈ 김영삼 단식 때 "살아야 한다" 당부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세 시간여 늦은 오후 2시쯤 명동성당을 찾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내가 단식을 23일 할 때도 오셔서 강력히 우려하셨다. 나는 죽을 각오로 싸우는데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며 김 추기경과의 각별했던 관계를 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특히 "김 추기경이 '김 총재가 돌아가면 민주주의는 누가 하냐'고 말해 단식을 끝내게 됐고 청와대에 있을 때 큰 일이 아니라 노동자 한 명만 갇혀도 오셨는데 되도록 그 분 부탁을 들어드렸다"고 예사롭지 않은 인연을 강조했다.
◈ 노무현에겐 "말에 신뢰성 있어야" 쓴소리
노무현 전 대통령도 김 추기경의 선종에 대해 애도의 조문을 보내는 한편 "따뜻하고 평화로운 미소로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라는 추모 메시지를 발표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과 김 추기경의 사이는 좋지 않았는데 김 추기경은 참여정부를 향해 가끔씩 쓴소리를 했다.
"무엇보다도 노무현 대통령이 중심을 잡아 줘야 한다는 얘기는 하고 싶습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2003년 6월 20일 동아일보 인터뷰)
"국민이 있은 후에야 정치가 있습니다. 말로만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우리의 말을 듣고 새기는구나'라고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 할 것입니다"(2006년 6월 2일 가톨릭신문과의 인터뷰)
◈ 박정희·전두환과는 악연
김 추기경과 박정희,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과는 악연이었다.
김 추기경은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금됐을 때 박 전 대통령을 만나 지 주교의 석방과 사형선고를 받은 유인태·이철 전 의원 등의 감형을 주장했고 박 전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였다.
또 당시 박 대통령에게 긴급조치 철폐와 의회정치 회복, 사법독립 등을 촉구한 76년 '3.1 구국선언'(김대중 전 대통령, 문익환 전 목사 등 참여)도 김수환 추기경의 양해 하에 명동성당에서 이뤄졌다.
"자기 집권 욕망을 꺾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국민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국부가 됐을 것"이라는 김 추기경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회고는 역사의 평가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김 추기경과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은 12.12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한 직후인 1980년 1월 1일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김 추기경은 새해 인사차 방문한 당시 전두환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에게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꼬집은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겠다는 방침에 대해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저는 만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을 체포하려면 저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를 밟고 가십시오"라며 시위대들을 보호, 독재정권이 막을 내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김수환추기경님의비문에새길 유훈과성경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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