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어(浸魚) -서시(西施) :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먹다
춘추 시대 말엽, 오(吳)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절세의 미인 서시(西施)를 바쳤다. 서시(西施)는 원래 월나라의 가난한 나무꾼의 딸이었는데 기가 막히게 빼어난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서시의 미모는 널리 소문에 퍼져 오나라 왕 부차에게 미녀를 바쳐 미인계를 쓰고자 했던 범려가 그녀를 한 번 보고 즉시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서시의 얼굴이 얼마나 예뻤던지 그녀를 한 번이라도 보고자 하는 구경꾼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기 때문에 서시를 태운 수레는 길이 막혀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후 서시의 얼굴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범여는 그녀를 구경하는 데 일 전씩 돈을 내도록 했는데 돈이 산처럼 쌓였다. 그 돈은 무기를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범여는 서시를 극진하게 대우해주었으며 3년 간에 걸쳐 문장을 가르치고 예절을 배우도록 하는 특수 훈련을 시켰다.
드디어 서시는 오나라 왕 부차에게 보내졌는데 부차는 첫눈에 서시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후 부차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하게 했고, 특히 그녀가 뱃놀이를 좋아 했기 때문에 대운하 공사를 벌였으며 이는 오나라 국력을 낭비시키고 높은 세금과 강제노역으로 백성들을 심하게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서시는 오나라 왕 부차의 넋을 빼앗아 부차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치와 환락의 세월을 보내고 되었고 이 틈에 월나라는 무섭게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시는 어릴 적부터 가슴앓이병이라는 지병이 있었는데 가슴이 아플 때마다 얼굴을 몹시 찡그렸다. 그러나 그 찡그리는 모습은 오히려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아름다운 자태로 나타났다. 부차도 그 찡그린 모습에 완전히 넋이 나갈 정도였다.
이 소문이 궁중 밖으로까지 퍼지자 어느 시골의 아주 못생긴 추녀(醜女)가 자기도 찡그리면 예쁨을 받을까 하여 항상 얼굴을 몹시 찡그리고 다녔다. 그러자 인근 동네 사람들이 그 추녀의 찡그린 모습에 모두 이사를 갔다 한다.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 : 기러기가 날개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에, 먼저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나 경성(京城)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오직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모연수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기고,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았으나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입궁한지 5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원제는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릿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과 못 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왕소군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 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소군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왕소군은 흉노에서 어진 마음으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漢)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 힘써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과의 접전은 없었다고 한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으며, 지금도 그 묘지는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남쪽 9km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청총(靑 )"이라 하였다고 한다.
폐월(閉月) -초선(貂蟬) :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다
초선은 삼국지 시대인 동한 말년 왕윤의 가기(요즘의 가수)였다. 삼국지 초반에 나오는 희대의 동한왕조 간신 동탁에게 발견되어 정쟁에 이용되는 운명에 처한다.
이른 바 달밤에 분향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다는 고사에 이용되었다. 그녀는 계략(이른 바 전형적인 미인계요 연환계)이 성공한 연후에 달밤의 후원에서 왕윤의 무사하기를 기원하고 달에게 절했다. 그때 구름이 달을 가렸기에 왕윤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초선의 미모에 달도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구나 (이른 바 폐월(閉月)".
왕윤은 동한왕조를 찬탈하려는 동탁을 죽일 결심으로 계략을 꾸며 초선을 동탁 눈에 뜨이게 하였다.
왕윤은 먼저 여포에게 결혼을 약속하고, 바로 동탁에게 초선을 바친다.여포는 물론 당대의 영웅이었으나 충분히 젊을 뿐이었다. 동탁 또한 노간신이요 교활하기 그지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호색하기로는 둘째가기 서러운 둘은 양부와 양자가 되어 어울렸다. 초선은 바로 이들이 서로 칼을 들이밀 반간계의 비수로 쓰여진 것이다. 먼저 여포가 초선의 추파에 경도되고, 동탁 또한 아름다운 초선의 눈썹에 혼을 빼앗겼다.여포가 어쩔 수 없이 초선을 동탁에게 빼앗기다시피 바칠 수밖에 없게 되자 마음속이 자연 불만으로 가득 찼다.
어느 날, 여포가 동탁부에 입부할시 초선을 찾았다. 둘은 봉의정(鳳儀亭)에서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초선은 동탁에게 받은 괴로움을 짐짓 토하였다. 여포는 당연히 분노하였기에 방천화극으로 동탁이 회부하기를 기다려 찔렀다. 여포는 바로 도주하였다. 당연히 두 사람은 서로 극히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왕윤은 여포에게 동탁을 제거하기를 역설하고 여포에게 양부를 죽이게 한다.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이림보가 조정의 실권을 한손에 쥐게 된 736년에 현종은 사랑하던 무혜비(武惠妃)를 잃었다. 무혜비를 잃은 현종은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후궁에는 아리따운 미녀가 3천명이나 있었으나 누구 하나 현종의 마음을 끄는 여인은 없었다. 이럴 즈음 현종의 귀를 속깃하게 하는 한 가지 소문이 현종의 관심을 끌었다. 수왕비(壽王妃)가 보기 드문 절세의 미녀라는 소문이었다. 현종은 은근히 마음이 끌려 환관에게 명하여 일단 수왕비를 자신의 술자리에 불러오도록 하였다. 현종은 수왕비를 보자 한눈에 마음이 끌렸다. 수왕비는 빼어난 미모일 뿐 아니라 매우 이지적인 여성으로 음악.무용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술자리에서 현종이 작곡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의 악보를 보자 그녀는 즉석에서 이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녀의 자태는 마치 선녀가 지상에 하강하여 춤을 추는 듯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수왕비야말로 다름 아닌 후의 양귀비(楊貴妃)로서 현종 황제와 양귀비의 로맨스는 이 만남을 계기로 그 막이 오르게 되었다. 양귀비의 본명은 옥환(玉環)으로 원래는 현종의 열여덟째 아들 수왕 이모(李瑁)의 아내였다.
수왕 이모는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니 양귀비는 바로 현종의 며느리인 것이다. 56세의 시아버지 현종이 22세의 며느리와 사랑을 불태운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다.
현종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선 양귀비 자신의 뜻이라 빙자하여 그녀를 여도사(女道士)로 삼아 우선 남궁에서 살게 하고 태진(太眞)이라는 호를 내려 남궁을 태진궁(太眞宮)이라 개칭하였다.
현종은 수와 이모에게 죄책감을 느껴서였는지 수왕에게 위씨의 딸을 보내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태진이 귀비로 책봉되어 양귀비로 불리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지만 남궁에 들어온 태진에 대한 현종의 열애는 대단한 것이었다. 남궁에 들어온지 1년도 채 못되어 태진에게서는 마치 황후가 된듯한 도도한 행동마저 보였다. 현종과 태진 이 두사람은 깊은 밤도 오히려 짧은 듯 해가 높이 떠올라도 잠자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렇게하여 일찌기 흥경궁에 근정전을 세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정무에 열중하던 현종 황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상실하여 마치 딴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남궁에 들어온지 6년 후 태진은 귀비로 책봉되었다. 명실 공히 양귀비가 된 셈이다. 궁중의 법도상 귀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이었으나 이때 황후는 없었으므로 사실상 양귀비가 황후의 행세를 하였다.
양귀비는 더욱 더 현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그녀의 일족들도 차례차례 고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양귀비는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갔기 때문에 혈연을 같이 하는 친척은 없었지만 현종은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양씨 일족에게도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양귀비의 6촌오빠 양소는 별로 품행이 좋지 않았는 데도 불구하고 민첩하고 요령있는 행동으로 점차 현종의 신임을 받아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후 재상 이림보와 대립하였고 이림보가 실각한 후에는 안록산과도 대립했던 양국충이 바로 양귀비의 6촌오빠이다.
개원 24년(736)부터 천보 연간에 걸쳐 조정에서는 간신이 제멋대로 정사를 농락하고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당왕조의 정치는 부패 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번영의 뒤에 숨겨져 있던 위기가 점점 심화되어 갔다.우선 농촌에서는 균전제가 무너져 국가의 세입원이 위협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조정의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으며 군사체제의 토대가 되었던 부병제가 무너져 군대를 모집해도 응모하는 자가 없어 군의 사기와 전투력이 급격히 저하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변경 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절도사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그의 손에 장악하고 있어 일단 유사시 당왕조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정세로 보아 당시 당의 현종 왕조의 위기는 폭발 일보 직전에까지 다다르고 있었으나 양귀비에 빠진 현종은 위기의식 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