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펼치기 · 접기 ]
|
여운형 관련 틀
|
[ 펼치기 · 접기 ]
|
|
|
|
|
출생
|
|
사망
|
|
묘소
|
|
본관
|
|
재임기간
|
초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
초대 조선인민공화국[5] 부주석
|
|
서명
|
|
[ 펼치기 · 접기 ]
|
1. 개요[편집]
혁명가는 침상에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7]
한반도의 독립유공자, 통일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체육인. 몽양(夢陽)이라는 아호와 '3.1 운동의 기획자'로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최순위권에 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 정치적 입지를 가진 혁명가이자 정치인이었다.
독립운동에 있어서는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 참여했고 언론 활동, 민족 문화 사업, 체육 활동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가까워지던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구성하여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계를 시도하였으며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동맹의 조직을 확대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혼란 정국을 예방하였으나 미군정이 건준을 인정하지 않자 여운형은 미군정기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에 미군정의 한반도 문제 개입을 반대하고 조선민족이 자력으로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 세력 모두가 공평하게 참여한 연대를 통해 통일 국가를 이룩하자고 주장하였다.
정치 성향은 중도좌파로 김규식, 안재홍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주장한 김구나 중도 세력에 비우호적이었던 박헌영[8],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의 세력과는 거리를 두었다. 연합군정기의 주요 정치인들 중에서는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서 가장 포용적인 입장이었던 동시에 일반 대중과 국론 통합을 우선시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오래 전부터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한 지식인이었기에 민중 사이에서 인기는 높았으나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에는 좌우 대립이 격해지면서 중도 세력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1947년 7월 19일 극우파로 추정되는 한지근(본명 이필형)에게 암살당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하게 된다.
2. 생애[편집]
3. 가족 관계와 가정 생활[편집]
가정 생활에 있어서 비판이 많다. 이하에서는 간략히 나오지만, 여운형의 사생아 문제는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는 떡밥덩어리며, 양파 껍질처럼 끝이 없다고 한다. 비판자들 입장에서는 도덕성 문제로 커지지만, 옹호자 측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고, 사생활보다는 공적인 기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하의 내용에 대한 판단은 개인이 알아서.
먼저 14살에 집안의 권고에 따라 결혼(조혼)하지만 17세 무렵 아내가 임신 6개월 만에 사망한다. 그 뒤로 일시적으로 어린 기생을 가까이 한 적 있었는데 재미있게 놀고 나니 기분이 찜찜하고 죄책감이 들어서 아버지한테 다 털어놓고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한편 위독한 병중이었던 어머니는 죽기 전에 며느리를 빨리 보고 싶다며 혼사를 정해버렸고 몽양은 19세에 자기보다 1살 많은, 학력이 없는 평범한 여인인 진상하 씨와 재혼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라, 삼천리 제7권 제11호(1935년 12월 1일)에 실린 인터뷰 기사[9]와 여운형 측근의 아들이고 실제 그를 알고 지냈던 이란 씨의 회고에 근거해 적어놓은 것이다.
조선 말기에는 여운형도 그렇고 거의 다 집 안에서 혼사를 정해서 멋모르고 구식 결혼을 했는데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잘 될 턱이 없었다. 인터뷰 내용을 볼 때 여운형은 아무리 당시 시대가 시대였다고 하지만 스스로 연애 결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과 앙금이 쌓였던 모양이다. 집을 다녀간 박헌영에게 돈으로 쓰라고 은수저 몰래 준 걸 알아채지 못하고 은수저 어디 갔나, 한참 찾아다니는 아내가 미련하다고 한 얘기에서도 그랬고 내조해주는 아내에게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아내가 순순한 곰같이 행동한 게 미련해보인다고 싫어한 듯하다.
결혼 2년차 21세의 나이에 홀연히 강원도 강릉으로 떠나서 초당 의숙의 교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고, 시국이 안 되니 소학교 교사 때려 치고 평양에 있는 예수회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한 뒤 중국 금릉 대학에 입학하고 해서 수년간 아내, 자식 간 사실상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시부모를 모시고 있었던 아내는 자식 부양 문제 때문에 더 이상 못 참겠어서 맏아들 봉구를 데리고 남편이 있는 상하이로 떠버렸다. 이렇게 해서 몽양이 중국으로 건너 간지 8년 만에 가족이 상봉하게 되었다.
그 후 몽양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기 이전까지 상하이에서 2년~3년 정도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여운형은 인터뷰에서 "부부간의 참사랑이란 것도 그때부터야 비로소 알게 되었구려. 또 그곳에서 지금 있는 아이들 넷을 또 낳았지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깨달음이 그렇게 깊지 못했던 모양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가장으로서는 형편없었다. 사방팔방 분주하게 돌아다녔고 적들에게 쫓기다보니 몇날 며칠 집을 안 들어오는 게 일상이었고 아내 진씨는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이하 인터뷰 중 진씨의 회상.
먼저 14살에 집안의 권고에 따라 결혼(조혼)하지만 17세 무렵 아내가 임신 6개월 만에 사망한다. 그 뒤로 일시적으로 어린 기생을 가까이 한 적 있었는데 재미있게 놀고 나니 기분이 찜찜하고 죄책감이 들어서 아버지한테 다 털어놓고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한편 위독한 병중이었던 어머니는 죽기 전에 며느리를 빨리 보고 싶다며 혼사를 정해버렸고 몽양은 19세에 자기보다 1살 많은, 학력이 없는 평범한 여인인 진상하 씨와 재혼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라, 삼천리 제7권 제11호(1935년 12월 1일)에 실린 인터뷰 기사[9]와 여운형 측근의 아들이고 실제 그를 알고 지냈던 이란 씨의 회고에 근거해 적어놓은 것이다.
조선 말기에는 여운형도 그렇고 거의 다 집 안에서 혼사를 정해서 멋모르고 구식 결혼을 했는데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잘 될 턱이 없었다. 인터뷰 내용을 볼 때 여운형은 아무리 당시 시대가 시대였다고 하지만 스스로 연애 결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과 앙금이 쌓였던 모양이다. 집을 다녀간 박헌영에게 돈으로 쓰라고 은수저 몰래 준 걸 알아채지 못하고 은수저 어디 갔나, 한참 찾아다니는 아내가 미련하다고 한 얘기에서도 그랬고 내조해주는 아내에게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아내가 순순한 곰같이 행동한 게 미련해보인다고 싫어한 듯하다.
결혼 2년차 21세의 나이에 홀연히 강원도 강릉으로 떠나서 초당 의숙의 교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고, 시국이 안 되니 소학교 교사 때려 치고 평양에 있는 예수회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한 뒤 중국 금릉 대학에 입학하고 해서 수년간 아내, 자식 간 사실상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시부모를 모시고 있었던 아내는 자식 부양 문제 때문에 더 이상 못 참겠어서 맏아들 봉구를 데리고 남편이 있는 상하이로 떠버렸다. 이렇게 해서 몽양이 중국으로 건너 간지 8년 만에 가족이 상봉하게 되었다.
그 후 몽양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기 이전까지 상하이에서 2년~3년 정도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여운형은 인터뷰에서 "부부간의 참사랑이란 것도 그때부터야 비로소 알게 되었구려. 또 그곳에서 지금 있는 아이들 넷을 또 낳았지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깨달음이 그렇게 깊지 못했던 모양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가장으로서는 형편없었다. 사방팔방 분주하게 돌아다녔고 적들에게 쫓기다보니 몇날 며칠 집을 안 들어오는 게 일상이었고 아내 진씨는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이하 인터뷰 중 진씨의 회상.
"...가슴이 타고 하로밤에 검은 머리 다 희여지는 듯 속을 썩인 적도 여러 번이지만 상해 있슬 적에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생각은 늘 잊혀 아니집데다. 「바깥어른」이 한창 몸을 피해서 다니시든 철인데 장개석을 반대하는 운동이라든지요. 그런 운동에 주야 불분하고 돌아다니실 때 일인데요. 그래서 며칠에 한 번씩 잠깐 잠깐씩 번개같이 집에 다녀오시고 가시고 하던 철인데 하루는 며칠을 어데 나가시어 집에라곤 소식조차 알 수 없더니 새벽녘에 들어오셨지요. 매우 초조하고 긴장한 얼굴빛을 지으시면서 "밥을 좀 달라"고 말씀하기에 얼른 진지 상을 차려드렸더니 황겁하게 마구 잡수실 적에 불시에 어디서 나왔는지 총과 칼을 한 무장한 중국 군대들이 휙-몰려와서 포위를 하려들지요. 그때 주인은 얼는 눈치채이고 밥 숟가락을 그냥 던지고선 그냥 날 새게 뒷 담장을 뛰어너머 어대로인지 종적을 감추셨는데 그 뒤 사오일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으셧구려. 내 마음이 얼마나 탓겠어요. 그럴 때면 나는 밤마다 이슬을 마저 가며 뒷문박에 서서 행여나 오시는 가고 긴긴밤을 서서 새엇지요."
여운형은 이걸 듣고 옆에서 "그런 일도 있었나?"하면서 허허허 웃었고 부인은 "그것뿐이겠어요?"라고 쏘아붙였다.
게다가 여운형은 밥돌이였다. 그가 야자 이만규 씨의 집에 오랫동안 기거한 적이 있었는데 만규 씨 집에서 그의 별명은 "밥 많이 먹는 손님"이었다고 한다. 어떤 책에서는 이만규가 소식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운형이 많이 먹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별명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고 썼으나... 먹성에 대해서는 본인도 인정하였다.
(중략)... 나는 실로 그때 내 건강이 남부럽잖게 상당했더니 만치, 그리고, 기운이 세여서 중국인 2인, 3인을 넘어뜨리고 남을 만했기 때문에 밥 잘 먹기로 또 유명했지요. 한 끼에 여섯 공기, 일곱 공기씩 밥을 먹고도 아무렇지 않았으며, 그 밥 분량이 중국 학생이 먹는 분량의 2배, 3배였으니 유명하지 않을 리가 있나요. - 敎授로 大學生으로 支那 諸大學 時代의 回想, 南京金陵大學 留學時代(呂運亨)
애초에 체격이 장대하고[10] 쉴 틈 없이 돌아다니는 게 습관인데다가 연설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독립 운동이고 뭐고 사실상 밥만 축내고 벌어오는 돈은 형편없는데 애는 계속 만드는 최악의 남편이었다...
몽양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고서는 상하이 유학 중인 장남 봉구를 빼고 온 가족이 거처를 조선의 계동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장남 봉구가 1933년에 상하이 복단 대학에 재학 중 장티푸스에 걸려 1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했을 당시 여운형은 가출옥된지 몇 달 안 되어 형기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로 갈 수도 없었고 아버지로서 아무 조처도 할 수 없었다. 차남 홍구는 1940년에 일본의 법정 대학 예과 2년에 유학중 파상풍으로 사망, 이렇게 해서 장남, 차남을 먼저 떠나보냈다. 먼저 떠난 장남과 차남까지 합하면 진씨 아래로 딸 다섯과 아들 셋이다. 딸 여순구가 1942년생 늦둥이로 가족 중 가장 막내고, 본처 외의 여자 사이에서 낳은 자식 둘까지 합하면 실제로 키운 자식만 총 10명이다.
그의 개방적인 성향 때문인지 당시 조선 평균 남자들과 비교해볼 때 여자들과 어울리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던 편이다. 그의 여성관이나 그가 여자를 후렸을 때 사용했을 법한 미사여구를 볼 수 있는 글은 당시 조선 내의 유명 인사들 글을 모은 학해(學海)라는 책에 기고한 《신춘(新春)을 맞이하는 젊은 여성들》이라보러가기(17쪽부터)인데, 이 글은 기본적으로 고등 보통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여 사회에 진출할 여학생들을 상대로 계몽적인 의도로 쓴 글이다. 하지만 아무리 당시 문어체의 수준을 고려한다고 해도 '나의 사랑하는 어린 새들', '귀여운 조선의 어린 새들', '학교의 나무 아래에서 높고 먼 이상에 가슴을 태우며 배회하던 젊은 여인의 맑은 눈동자' 같은 표현에서 그의 성향을 다분히 알 수 있다.
외간 여자와 바람난 적이 있는데, 일단 공식적으로 몽양이 데려온 아들만 따져서 2번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는 해방될 때까지 주변 사람들끼리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유부남의 몸으로 일본 여자[11]를 만나 1936년에 막내 아들(붕구)을 낳은 것이다. 그 때문에 해방 이후 좌우 갈등으로 여운형이 대차게 까일 때 저명한 독립 운동가가 처자식을 놔두고 일본 여자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다는 얘기가 거대 떡밥이 되어 반대편 진영에 두고두고 씹히게 되었다.
2번째는 1940년대에 도쿄를 들락날락했을 적에 일본에서 조선 미인이라고 소문난 재일 여대생 진옥출과 연애를 한 사건. 차남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12] 그것도 너무 열애를 한 나머지 임신시켜버려서 옥출이 딸(효기)을 낳자 자신이 책임지고 맡아 키우겠다며 조선에 데리고 가서 애를 아내한테 맡겨버렸다. 그 증언으로 아버지가 여운형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이란 씨의 회고에 의하면, 여운형이 재일 유학생을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도쿄를 수시로 오갈 때 아는 학생들 학비가 필요하다고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께 수시로 돈을 부쳐달라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지가 광산이 잘 안되자 광산을 팔고 도쿄로 가려고 여권을 신청했더니 때마침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이란 씨의 누나가 편지로 밀고하길 선생님께 돈 드려봤자 연애 자금 드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고... 여운형 신봉자였던 아버지는 이 글을 읽고 "이것이 무슨 말이냐. 이 위대한 지도자가 연애를 하다니!"하면서 펄쩍 뛰었다고 한다.
여운형은 연애 한 번 못해보고 결혼한 것에 대해 아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성격이 체면 차리는 걸 싫어하는데다가 몸을 가만히 두는 걸 절대 못 견뎌 했다(못 움직이게 가둬놓으면 신경통에 걸렸다). 그리고 1940년대 초 도쿄를 오갔을 때는 여운형 인생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공무적으로 할 일이 없었던 기간이었다, 이는 일본 정치인, 특히 군부 쪽 생각은 대중국 전쟁으로 확고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여운형의 말을 듣지도 않았기 때문. 말하자면 일본에 체류했던 이 기간은 여운형 인생 처음으로 온,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고 동료가 광산업을 해서 돈까지 대줬다. 거기에 예쁜 여대생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놀라운 건 진옥출과 연애했을 때 여운형은 유부남에 50대 후반이었는데 진옥출은 미혼의 20대 초반 여대생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 사나이들에게 불었던 연애 열풍 탓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앞서 이란 씨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위대한 지도자가 연애를 한다.'는 사실은 후에 유학생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당시 재일 유학생들이 진옥출의 임신 소식을 듣자 그녀가 들락날락한 곳이 여경구(여운형의 오촌 조카)의 집이었으므로 여경구를 의심했는데 애 아빠가 여운형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노인한테 아까운 미인을 빼앗겼다며 내심 부러워하면서 투덜거렸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여운형의 이러한 행보는 한국 근대의 연애사와 일맥상통한다. 연애의 사건으로 돌아본 한국 근대사를 조명한 책#을 참고하면 구한 말 남성들은 대개 가정의 권유로 바라지 않는 조혼을 한 뒤 성욕에 눈 뜨면 보다 화끈한 연애 대상(좀 더 진전되면 첩으로 들이기도 했지만)으로 기생을 찾았으며, 사회가 근대화되면서 기생들은 매춘부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 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연애를 권장하는 풍조가 급격히 깔리자 너도 나도(남자라면 신분 고하, 연령을 막론하고 심지어 결혼 여부를 막론하고) 연애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당시 연애 대상은 연애에 개방적인 고보 졸, 대재, 대졸의 신여성(속칭 모던 걸)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도 청소년들을 계도하는 성격을 지닌 글에서 "히야까시(ひやかし: '놀리다'라는 뜻의 일본어로 여성에게 수작을 걸거나 하는 것으로 일종의 희롱이라고 볼 수 있다)" 행위를 유난히 불건전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건 지금 시대에도 맞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행보는 본처인 진씨 입장에서 놓고 본다면 천하에 둘도 없는 웬수이며 당시의 모던 걸 열풍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일반적인 성도덕과는 엇갈리는 것이었다. 그나마 진씨가 이른바 '구식 여인'으로서 자신은 무식쟁이니 잘난 남편의 활동에 대해 그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용히 내조하는 걸 미덕으로 삼아서 그나마 여운형이 무사했지, 그녀가 여운형 어머니같이 드센 여자였으면 집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화려한 편력 때문에 사생활이 비교적 깨끗한 이승만과 비교당하는 식으로 열심히 까이게 되었다.[13][14]
이렇게 해서 장남, 차남이 먼저 떠나버리고 자식 농사가 늦어졌는데 교육비를 댈 형편이 못 되었다. 게다가 후에는 지속적인 테러 위협에까지 시달리자, 자식들이 죽거나 납치당할까봐 몇몇 딸들과 막내 아들을 북한의 김일성한테 보냈다. 여운형이 북한에 건너가서 김일성과 대담을 나눌 때 김일성이 자식들을 자신에게 맡기면 다 해결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여운형 자식들을 잘 돌봐주었고 모스크바로 유학까지 보내줘서 그들은 고위급 정치인이 되었다. 김일성은 38선을 넘어온 여운형을 몇번 만나면서 회담한 적이 있었고 여운형을 통해 남한 지역 좌익의 세를 늘리려고 했기 때문에 여운형과 나름대로 관계가 괜찮았으며 여운형이 죽은 뒤에도 그를 계속 높게 평가했다. 어찌 보면 이것도 남한에서 여운형이 평가가 절하된 이유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운형 입장에서 자식을 살리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그런 위협은 이승만 정권 성립 및 6.25 이후의 일이라서, 당시만 해도 지지도 1위를 달리던 여운형이 그런 문제를 걱정할 리는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여운형이 직면했던 숱한 백색테러들을 상기해본다면 그가 느꼈을 위협감은 상당했을 것이라 추론 가능하다.
남동생으로 여운홍이 있었다. 여운홍은 형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활동을 했으나, 일제 강점기 후반 독립 운동에 희망을 잃고 서서히 친일 활동으로 선회했다.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전쟁 협력자 72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동생도 2명이 있었다고 한다.
자식이 9명으로, 4남 5녀다. 다만 장남과 차남은 병으로 일찍 떠나보냈고, 여운형이 죽을 때까지 7명의 자식이 살아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의 자녀들의 이름은 다 九자 돌림인데, 앞 글자는 모두 새(鳥)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장남 봉구(鳳九 : 봉황), 차남 홍구(鴻九 : 기러기), 3남 영구(鸋九 : 부엉이), 4남 붕구(鵬九 : 붕), 장녀 난구(鸞九 : 난새 -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 차녀 연구(鷰九 : 제비), 3녀 원구(鴛九 : 원앙), 4녀 형구(鶑九 : 꾀꼬리), 5녀 순구(鶉九 : 메추라기)인데 여기에서도 어린이와 청년들을 어린 새들로 생각했던 그 분의 사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측근들이 진옥출과의 관계로 낳은 아이의 이름은 '효기'라고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출생년도로 볼 때 효기는 여순구인 듯하다.
장녀 난구와 차녀 연구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닌 걸 보면 공부를 잘 한 듯하다. 난구의 경우 심장병으로 다니던 이화여전을 중퇴했다고 한다. 월북한 난구, 연구는 북한 고위 정치인이 되었고 순구, 붕구도 나름대로 직위가 있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 차녀 연구는 <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출간)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으며, 차녀와 3녀는 남한을 방문하여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고 간 적 있다. 북한에는 약 30여 명의 유족이 있다고 추정된다.
4. 여담[편집]
4.1. 자유시 참변 관련 선동[편집]
여운형이 자유시 참변에서 왜 무죄인가[15]
2020년 이후부터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서 독립군을 몰살했다는 역사왜곡이 돌아다니다가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이라는 사태까지 일어났는데, 여운형도 자유시 참변으로 엮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몽양 여운형 선생기념사업회 황규식 부이사장은 이미 '정부의 다음 과녁이 여운형 선생이 될지 모른다'고 예측하며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대응해 나갈 것"을 대비하고 있는 중이다.#
여운형을 자유시 참변과 엮으려는 선동은 동아일보 기사의 최대 추천 덧글에서도 확인된다. 기사의 내용은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을 다뤘음에도 부자연스럽게도 전혀 다른 댓글이 최대 추천수를 받고 있다. 그에 의하면 "6천에 달했다는 독립군 중 주력인 3,500여명이 대한독립군단으로 합쳐 자유시에서 재정비하고 대일전쟁을 수행하려 했지만 고려공산당이 일으킨 자유시참변이 독립투쟁을 망쳤다.공산당이야 말로 친일반동들이다.자유시참변에서 여운형은 독립투사들을 인민재판한 배심원을 한 망나니였다[16]"# 펜앤드마이크의 최대추천 덧글에서도 "교과서에 안 나오는 자유시 참변시 여운형, 여운형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대표였고 참변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에 김규식 등과 함께 배심원으로 참석하여 재판에 정당성을 인정해 준 것으로 비판 받는다.[17]"#는 내용이 나오는 등 홍범도에게 누명을 씌우는 과정과 매우 유사한 양상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하지만 이런 미래를 내다보고 대비한 선구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정식 교수이다. 이 교수는 1961년 UC버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콜로라도대, 다트머스대를 거쳐 1963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과에 재직하면서 로버트 스칼라피노 UC버클리대 교수와 함께 쓴 ‘한국공산주의운동사’을 1973년 미국에서 출간해 이듬해 미국 정치학회가 주는 최고 저작상인 우드로 윌슨 재단상을 받은 후 세계학계에서 한국 현대사 연구자로 인정받으며,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권위자로 한국에선 국내에서는 위암 장지연상(1990년))과 경암상(2012), 인촌상(2018년)을 받은 '한국 공산주의사'1세대 연구의 권위자이다.# 이 교수가 집필해 '2008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학술도서'로 선정된 여운형 연구서엔 미리 자유시 참변에 무장해제된 '독립군'의 실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주목한다.
2020년 이후부터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서 독립군을 몰살했다는 역사왜곡이 돌아다니다가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이라는 사태까지 일어났는데, 여운형도 자유시 참변으로 엮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몽양 여운형 선생기념사업회 황규식 부이사장은 이미 '정부의 다음 과녁이 여운형 선생이 될지 모른다'고 예측하며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대응해 나갈 것"을 대비하고 있는 중이다.#
여운형을 자유시 참변과 엮으려는 선동은 동아일보 기사의 최대 추천 덧글에서도 확인된다. 기사의 내용은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을 다뤘음에도 부자연스럽게도 전혀 다른 댓글이 최대 추천수를 받고 있다. 그에 의하면 "6천에 달했다는 독립군 중 주력인 3,500여명이 대한독립군단으로 합쳐 자유시에서 재정비하고 대일전쟁을 수행하려 했지만 고려공산당이 일으킨 자유시참변이 독립투쟁을 망쳤다.공산당이야 말로 친일반동들이다.자유시참변에서 여운형은 독립투사들을 인민재판한 배심원을 한 망나니였다[16]"# 펜앤드마이크의 최대추천 덧글에서도 "교과서에 안 나오는 자유시 참변시 여운형, 여운형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대표였고 참변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에 김규식 등과 함께 배심원으로 참석하여 재판에 정당성을 인정해 준 것으로 비판 받는다.[17]"#는 내용이 나오는 등 홍범도에게 누명을 씌우는 과정과 매우 유사한 양상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하지만 이런 미래를 내다보고 대비한 선구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정식 교수이다. 이 교수는 1961년 UC버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콜로라도대, 다트머스대를 거쳐 1963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과에 재직하면서 로버트 스칼라피노 UC버클리대 교수와 함께 쓴 ‘한국공산주의운동사’을 1973년 미국에서 출간해 이듬해 미국 정치학회가 주는 최고 저작상인 우드로 윌슨 재단상을 받은 후 세계학계에서 한국 현대사 연구자로 인정받으며,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권위자로 한국에선 국내에서는 위암 장지연상(1990년))과 경암상(2012), 인촌상(2018년)을 받은 '한국 공산주의사'1세대 연구의 권위자이다.# 이 교수가 집필해 '2008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학술도서'로 선정된 여운형 연구서엔 미리 자유시 참변에 무장해제된 '독립군'의 실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주목한다.
일본에게 있어서 한국독립군은 어느 곳에 있거나 말살되어야 할 존재였지만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을 특별히 증오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1920년 4-5월에 니콜라예브스크에서 일본인들을 학살한 부대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니항사건이라고 알려진 이 사건은 너무나 잔인무도한 것...니항이라고 알려진 니콜라예브스크는 흑룡강의 어귀, 즉 흑룡강이 오크츠해(바다)를 만나는 곳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을 점령한 야코부 트리아피친이 이끄는 공산 게릴라들은 반동파 숙청이라는 명목하에 약 6천 명의 주민을 참혹하게 학살하였는데 그중에는 약 700명의 일본거주민들이 있었고 일본영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23세의 트리아피친은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한국독립을 위해 도울 것이라는 약속뿐만 아니라 그런 뜻의 합의서까지 서명하여 수백명의 한국청년들을 동원했었는데 이들은 트리아피친의 명령을 충실히 시행함으로써 학살의 주역이 된 것이었다....[한국인 부대]부대장은 박이라는 교사였는데 그가 한국청년들의 애국심을 선동하여 부대를 확장했다고 한다. 그가 말한 박이라는 교사는 김홍일이 말한 박 일리아일 것이다.
즉, 자유시 참변에서 공격당한 부대는 수천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니콜라옙스크 학살에서 주역을 맡은 한국인 부대이며, 이것이 자유시 참변의 주요 원인이라 지목한 것이다.
이것으로 이르쿠츠크파와 일시적으로 관계가 있었던 여운형에 대한 공격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시킨 것이다.
이것으로 이르쿠츠크파와 일시적으로 관계가 있었던 여운형에 대한 공격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시킨 것이다.
4.2. 일제 가담 누명[편집]
결론부터 서술하자면 논란이 있었지만 여운형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지 않았다.
여운형이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총독부 및 일본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을 근거로 여운형을 친일파, 혹은 일제에 부역한 여타 자치론자들과 동일선상에 두자는 주장이 있다. 여운형이 일본인들에게 능숙한 처세술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나, 일제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일본 총독부의 숱한 노력에도 포섭되지 않았다는 주변인의 증언이 있다. #
2009년 후반부에 여운형이 학도병 지원을 권유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언론들끼리 물고 뜯고 싸운 적이 있다.(#1, #2). '여운형 친일반민족행위자설'이 객관적으로 처음 제기되었던 게 1980년대 친일파 연구 권위자인 임종국 선생이 처음이었다. 당시 임종국의 경우, '했다고 하면 지나친 지적이 아닐까?'라면서 '어쨌든 한건 한 거다'이런 식으로 제기한 정도다. 이에 대해 직접 '역사 문제 연구소'에서 해명에 나섰다.역사 비평 출판사, <바로 잡아야할 우리 역사 37 장면> 위의 기사에 나와 있다 이에 대해서 여운형은 명의 도용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친일 의혹설과 반론에 대해서는 《몽양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지음, 서울대 출판부 출간)책(p465 ~ p482)과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정병준 교수가 쓴 단행본(1995년), 위키 백과#,변은진의 《1932~1945년 여운형의 국내활동과 건국준비 = Activities in the Country and Preparation for Nation-building by Lyuh-Woonhyung, 1932~1945》(한국인물사연구, Vol.21 No.-, [2014])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러한 사설이 작성되고 의혹들이 제기된 것이 얼마 뒤 나올 친일인명사전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존재했고, 2009년 11월 초, 친일 인명 사전이 발간되자 뉴데일리를 비롯한 일부 극우파들은 목록 안에 박정희는 있고 여운형이 없다는 사실을 빌미로 친일인명사전과 그 편찬 위원회를 공격하고 있다. 기사가 나오자, 일부 보수 세력들은 '여운형은 친일파' → '여운형은 좌파' 이렇게 몰아가면서 '친일좌파'이라는 논리가 결여된 3단 논법을 세우며 일방적으로 몰아가면서 '골수 친일 좌빨 여운형은 건국 훈장을 치탈하라'라고 꾸준히 억지를 부리고 있다.
여운형은 1945년 안 팎으로, 당시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일부 미군들과 소련군들도 고평가하면서 여운형은 대중적으로도 인기 많은 지도자였다. 이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전적이 있던 극좌/극우[18] 세력들은 여운형의 입지를 줄이는 것에 혈안이었다. 이들은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뒤집어씌우고 자신들을 '애국자'라 주장했다. 그 외에 일부에서 '공산당 노획 문서'를 근거로 들고 있는데, 이 문서는 언제 작성되었는지도 시기 불명으로, 타당성이 부족한 글이다. 참고
일제 말기 국내에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직접 실천에 옮겨 비밀 지하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하면서 독립 운동한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
국내에 남았던 '우파' 세력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가장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던 인물은 안재홍 정도였다. 일제 말기 당시 좌파고 우파고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이 총독부로부터 저항하는 방법이 칩거 생활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만큼 일제 말기는 엄청 살벌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수구 진영에서는 '순정 우파' 노선을 지향한 안재홍 조차도 '빨갱이'로 몰고, 그를 여운형과 같이 친일 행위 벌였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인 안재홍 조차도 일제 말 지하 조직을 결성할 생각조차 하지도 못하고 칩거 생활 지내면서 역사서 저술하고 지낸 판국.
1945년 미군이 입성했을 때 미군정 고문으로 위촉된 9명의 한국 민주당 인사들이 '여운형은 친일 좌파'이라고 주장하면서 1945년 9월 12일, 미군이 한반도 입성하자마자 작성한 보고서에 '여운형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친일파이며 총독부로부터 2천만 엔 금전수수를 했다.'라는 내용의 보고서 내용이 있다. 그러나 1946년 8월 미군정 버치 중위 장교가 '일본에 건너가 前 조선 총독부 고관들을 심문해서 여운형의 친일 혐의를 수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사령관 존 하지에게 제안했었는데,
여운형이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총독부 및 일본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을 근거로 여운형을 친일파, 혹은 일제에 부역한 여타 자치론자들과 동일선상에 두자는 주장이 있다. 여운형이 일본인들에게 능숙한 처세술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나, 일제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일본 총독부의 숱한 노력에도 포섭되지 않았다는 주변인의 증언이 있다. #
2009년 후반부에 여운형이 학도병 지원을 권유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언론들끼리 물고 뜯고 싸운 적이 있다.(#1, #2). '여운형 친일반민족행위자설'이 객관적으로 처음 제기되었던 게 1980년대 친일파 연구 권위자인 임종국 선생이 처음이었다. 당시 임종국의 경우, '했다고 하면 지나친 지적이 아닐까?'라면서 '어쨌든 한건 한 거다'이런 식으로 제기한 정도다. 이에 대해 직접 '역사 문제 연구소'에서 해명에 나섰다.역사 비평 출판사, <바로 잡아야할 우리 역사 37 장면> 위의 기사에 나와 있다 이에 대해서 여운형은 명의 도용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친일 의혹설과 반론에 대해서는 《몽양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지음, 서울대 출판부 출간)책(p465 ~ p482)과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정병준 교수가 쓴 단행본(1995년), 위키 백과#,변은진의 《1932~1945년 여운형의 국내활동과 건국준비 = Activities in the Country and Preparation for Nation-building by Lyuh-Woonhyung, 1932~1945》(한국인물사연구, Vol.21 No.-, [2014])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러한 사설이 작성되고 의혹들이 제기된 것이 얼마 뒤 나올 친일인명사전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존재했고, 2009년 11월 초, 친일 인명 사전이 발간되자 뉴데일리를 비롯한 일부 극우파들은 목록 안에 박정희는 있고 여운형이 없다는 사실을 빌미로 친일인명사전과 그 편찬 위원회를 공격하고 있다. 기사가 나오자, 일부 보수 세력들은 '여운형은 친일파' → '여운형은 좌파' 이렇게 몰아가면서 '친일좌파'이라는 논리가 결여된 3단 논법을 세우며 일방적으로 몰아가면서 '골수 친일 좌빨 여운형은 건국 훈장을 치탈하라'라고 꾸준히 억지를 부리고 있다.
여운형은 1945년 안 팎으로, 당시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일부 미군들과 소련군들도 고평가하면서 여운형은 대중적으로도 인기 많은 지도자였다. 이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전적이 있던 극좌/극우[18] 세력들은 여운형의 입지를 줄이는 것에 혈안이었다. 이들은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뒤집어씌우고 자신들을 '애국자'라 주장했다. 그 외에 일부에서 '공산당 노획 문서'를 근거로 들고 있는데, 이 문서는 언제 작성되었는지도 시기 불명으로, 타당성이 부족한 글이다. 참고
일제 말기 국내에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직접 실천에 옮겨 비밀 지하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하면서 독립 운동한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
국내에 남았던 '우파' 세력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가장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던 인물은 안재홍 정도였다. 일제 말기 당시 좌파고 우파고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이 총독부로부터 저항하는 방법이 칩거 생활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만큼 일제 말기는 엄청 살벌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수구 진영에서는 '순정 우파' 노선을 지향한 안재홍 조차도 '빨갱이'로 몰고, 그를 여운형과 같이 친일 행위 벌였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인 안재홍 조차도 일제 말 지하 조직을 결성할 생각조차 하지도 못하고 칩거 생활 지내면서 역사서 저술하고 지낸 판국.
1945년 미군이 입성했을 때 미군정 고문으로 위촉된 9명의 한국 민주당 인사들이 '여운형은 친일 좌파'이라고 주장하면서 1945년 9월 12일, 미군이 한반도 입성하자마자 작성한 보고서에 '여운형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친일파이며 총독부로부터 2천만 엔 금전수수를 했다.'라는 내용의 보고서 내용이 있다. 그러나 1946년 8월 미군정 버치 중위 장교가 '일본에 건너가 前 조선 총독부 고관들을 심문해서 여운형의 친일 혐의를 수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사령관 존 하지에게 제안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