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작품(書法·艸民朴龍卨)

초민(艸民) 박용설(朴龍卨),

含閒 2021. 12. 28. 09:42

위기지학(爲己之學) 실현의 ‘서이재도(書以載道)’적 서예창작정신

安綠山(雅心)

2021. 3. 25. 14:27  

초민(艸民) 박용설(朴龍卨),
위기지학(爲己之學) 실현의 ‘서이재도(書以載道)’적 서예창작정신


조민환(성균관대학교 교수, 동양예술학회 회장)


1.

“글씨는 가슴에 있는 것을 손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말은 초민(艸民) 박용설(朴龍卨, 1947~현재) - 이하부터는 초민으로 - 이 서예에 뜻을 둔 이후 평생 간직하고 있는 서예창작정신의 핵심이다.
초민은 평소에 자기 자신을 되돌아봤을 때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없는[무자기(無自欺)]’ 수양된 마음과 ‘자신의 몸과 행동거지를 단속하면서 타인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 까 경계하고 두려워[계신공구(戒愼恐懼)]’하는 ‘신독(愼獨)’의 자세로 살고자 하였고, 이 같은 경외(敬畏)적 삶은 그의 서예창작정신의 근간이 되었다.
그럼 초민이 ‘가슴에 있는 것을 손으로 표현’하고자 한 서예창작정신에 담긴 서예미학의 전모를 초민의 말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2.
초민은 서울의 경동(京東)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해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 문하에 들어가 서예 수업을 받는다. 대학 졸업 후 이화여고에서 15년간 교편을 잡다가 1990년 9월부터 지금까지 ‘예술의 전당 서예아카데미 지도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그간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대구예술대 서예과 겸임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서예의 기본에 해당하는 ‘문자학’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초민은 손과정(孫過庭)이 『서보(書譜)』에서 말한 바 있는 ‘오체를 두루두루 익힘[博涉]’과 ‘전문적으로 어느 분야에 특출한 재능[專工]’을 겸비할 것 및 ‘인문학에 바탕한 자연과 인간 세상에 대한 지적 능력[智]’과 ‘기교 운용의 적절성과 탁월함[巧]’에 아울러 뛰어날 것을 강조하는, ‘학예일치(學藝一致)’를 이룬 대표적인 서예가다.

“저에게는 글씨 쓰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었습니다.”

 


<구양수 학서>, 70x200cm,


초민이 자신의 70평생 서예역정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서예가에게 ‘당신은 왜 글씨를 쓰는가’라는 질문은 한다면 서예가마다 생각하는 다양한 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더 낫고,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더 낫다” 『論語』 「雍也」,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라는 공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초민의 위와 같은 말보다 더 ‘행복한’답변은 없을 것이다. “붓을 잡고 글씨를 쓰는 것이 즐겁다[學書爲樂]”라는 것을 말하는 구양수(歐陽脩)는 「시필(試筆)」에서 “소자미(蘇子美:蘇舜欽)가 ‘창이 밝고 안석이 깨끗하고, 붓과 벼루와 종이와 묵이 모두 극히 정치하고 우량하니, 또한 저절로 인생의 한 즐거움이구나. 그러나 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심히 드물고, 외물에 의해 그 좋아하는 것을 옮기지 않는 사람 또한 특히 드물다’라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나[=구양수]는 늦게나마 이 흥취를 깨달았는데, 글자체가 공교롭지 못하여 고인의 아름다운 곳에 이를 수 없는 것을 한하지만, 만약 이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면 스스로 넉넉한 것이 있다.” 구양수, 시필, “蘇子美曰, 明窓淨几, 筆硯紙墨, 皆極精良, 亦自是人生一樂. 然能得此樂者甚稀, 其不爲外物移其好者, 又特稀也. 余晩知此趣, 恨字體不工, 不能到古人佳處, 若以爲樂, 則自是有餘.”
라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사유는 송대에 일어난 ‘상의(尙意)서풍’과 밀접한 관련 있지만, 초민처럼 권력·명예·재물 등과 같은 외물(外物)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고 서예를 통해 즐거움을 얻겠다는 것은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삶의 즐거움을 서예창작행위에서 찾는 초민은 기교의 공졸(工拙)과 관련된 타인의 평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다만 자강불식(自彊不息)의 자세로서 글씨 쓰는 것 그 자체를 통해 자신의 ‘어떤 몸가짐과 마음’을 담아내느냐 하는 점에만 관심이 있다. 이 점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초민의 서예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다양한 서체를 통해 표현된 형상에는 초민의 서예창작 과정에서 얻어진 흥취와 즐거움이 담겨 있는데, 그 흥취와 즐거움은 담박하면서도 경망스러움이 전혀 없다. 전반적으로 온유(溫柔)하면서도 후중(厚重)한 맛이 있는 획이 허화(虛和)로운 붓놀림을 통해 운치 있고 기운생동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런 획은 이응백 교수가 ‘모나거나 튀지 않고 묵묵히 성실한 삶을 살라’고 하면서 지어준 초민(艸民)’이란 호와 매우 잘 어울린다.

 

3.

“고전에 빠지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고전에 깊이 천착하게 되면 무언가 내면의 것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전을 강조할 경우 자칫하면 법고(法古) 차원에만 그칠 수 있다. 그것은 고전을 ‘죽어 있는 옛것’그 자체로만 인식할 때 생기는 잘못된 정황이다.‘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듯이 알고 보면 현대에 필요한 지혜는 이미 고전 속에 다 담겨 있다. 다만 그것을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로움 체득만이 필요할 뿐이다. 조선시대 가장 진보적인 유학자인 조광조(趙光祖)와 정약용(丁若鏞)이 그 시대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지치(至治)시대로 ‘요순(堯舜)시대’를 거론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전에 대한 천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초민은 고전에 대한 깊은 천착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아울러 본질과 원형 회복을 통해 창신적으로‘자기화’하는 과정이 필요함을 말한 것이다.

“아직까지도 새로운 것을 시도 한다는 것이 크게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전통서예를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요즘 작가들을 보면 튀고자 하는 작가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오체(五體)’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고 그 누구보다도 문자학에 해박한 초민이 뭐가 부족하다고 전통서예를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새로운 것에는 구체적 형상으로 드러난 차원의 새로운 것이 있고,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새로운 기운이 온축되어 있는 차원의 새로운 것이 있다. 초민의 서예세계는 후자에 속한다. 드러난 것이냐 아니면 들어날 것인가 하는 것은 시간문제이지 창의성 여부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초민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겸사다.
물론 튀고자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튄다’는 것은 자기의 예술적 감성을 자유롭게 담아낸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예라는 예술이 튀고자 해도 그 ‘튀는 것’을 쉽사리 허락하는 않는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많은 서예가들이 ‘튐’을 시도했지만 그 ‘튐’이 저속한 튐으로 발현되는 것을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초민의 발언은 튀는 것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튐’이 ‘고전’과 ‘근본’에 바탕 한 ‘튐’이어야 ‘진정한 튐’이 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제일 먼저 그 근본에 접근하고 시작해야 하며, 가슴을 통하여 밖으로 배출해야 한다.”

『논어』「학이」에는 “군자는 근본을 힘쓰니, 근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 『論語』「學而」,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란 말이 나온다. 여기서 군자를 서예가로 바꿔 이해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이처럼 서예창작에서 ‘본립도생[本立道生]’을 강조하는 초민은 ‘서예는 성현들이 말한 교훈적이면서 삶의 지혜가 되는 말을 창작해야 한다[서이재도(書以載道)]’라는 차원에서 출발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추구한다. 초민이‘옛것을 잘 이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보자’라는 의미의‘고윤실(古胤室)’이란 당호를 취한 것은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요컨대 초민은 서예를 통해 바람직한 인생이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술가이면서 교육자인 초민의 ‘우의(寓意)’적 형상에 담긴 철리성(哲理性)과 창신성을 맛볼 때 초민의 서예창작정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된다.

 

4.

“주로 책을 많이 읽으면서 ‘가슴에 와 닿는’ 문장이나 시를 선택합니다.”

‘가슴에 와 닿는다’는 것은 초민이 선택한 문장과 시는 결국 초민이 지향하는 삶을 상징적으로 반영함을 의미한다. 초민이 선택한 문장과 시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신독’, ‘무자기’ 등과 관련된 ‘경외(敬畏)’적 삶에 대한 것이다. 경외적 삶에 관한 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북송대 유학자 정이(程頤)가 지은 ‘사물잠(四勿箴)’은 이런 점을 대표한다. 초민이 쓴 정이의 ‘사물잠’은 『논어』「안연」의 ‘극기복례장(克己復禮章)’에서 말하는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 『論語』「顔淵」,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는 이른바‘사물(四勿)’을 근간으로 하여 지은 것이다. 이런 사유는 후대 유학자들이 지향하는 예술창작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초민이 그은 획을 보면 어느 획 하나도 방일(放逸)하게 그은 것이 없다. ‘초서를 쓸 때에는 해서를 쓰듯, 해서를 쓸 때는 초서를 쓰듯 하라’는 말이 있는데, 초민의 초서에는 해서 맛이 담겨 있다. 초서를 써도 광기가 있는 연면체(連綿體)가 아닌 매우 절제된 획 및 방(方)과 원(圓)이 겸비된 자형을 통해 온유돈후(溫柔敦厚)한 중화(中和)미를 담아내고 있다. 초민이 이처럼 ‘서이재도’차원에서 출발하여 중화미학을 추구하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예(禮)에 맞지 않으면 예술은 하지 말라[비례물예(非禮勿藝)]’는 예술정신이 깔려 있다. 경외적 삶에 바탕한 예술정신은 초민 서예창작정신의 핵심에 해당하지만 초민은 경외적 삶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초민이 추구하는 또 다른 하나 삶은 『논어』「선진」에서 증점(曾點)이 말한 “기수에서 욕(浴)하고 무대에서 바람 쐬고 노래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 『論語』「先進」,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라는 이른바 ‘욕기영귀(浴沂詠歸)’와 관련된‘쇄락(灑落)’적 삶이다. 초민이 선택한 쇄락과 관련된 것에는 도연명을 비롯한 주로 은일적 삶을 지향한 인물들의 문장과 시가 많다. 도연명이 ‘심원(心遠)’을 말한 「음주(飮酒)」5수(首)를 비롯하여 중장통(仲長統)의 「낙지론(樂志論)」 등이 그것이다. 도연명과 소식을 특히 좋아하는 초민은 인위적 기교를 부려 억지로 예쁘게 쓰고자 하지 않는다.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하듯 무심코 그은 획에는 글을 읽다가 잠시 뒷짐지고 뒷산을 한가롭게 소요자재(逍遙自在)하는 표일(飄逸)한 맛이 담겨 있다. 소식(蘇軾)의 ‘구름 소식[望雲樓]’ 이란 작품을 보자.

<소식, 망운루>,

陰晴朝暮幾回新 흐리고 개이고 아침저녁 몇 번 바뀌는가?
己向虛空付此身 나도 허공에 몸 맡기고 살아간다네.
出本無心歸亦好 무심코 생긴 터에 돌아가도 그만인걸,
白雲還似望雲人 흰 구름 너는 어찌 나를 그리 닮았느냐!
(蘇軾, 「和文與可洋川園池三十首·望雲樓」)

 

 

 

<소식, 망운루>

 

초민은 무엇보다도 서예창작과 관련해 ‘가슴’을 강조하는데, 졸박(拙樸)하면서도 표일한 맛이 담긴 글자들 가운데 빵긋 웃는 듯한 ‘심(心)’자는 초민의 인생관과 추구하는 서예창작정신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고전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초민은 이처럼 한자가 갖는 상형성에 음악적 리듬과 흥취어린 마음을 가미하여 허화(虛和)롭게 획을 긋고 있는데, 이런 획에는 예술과 인생 및 몸가짐을 별개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초민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가슴과 손이 하나가 되었을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에서 가슴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예술은 그 가슴을 표현하는 기교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서예가에게 ‘심수합일’은 결국 ‘심수필합일(心手筆合一)’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있다고 해도 그 마음을 작가가 의도하는 바와 같이 창작하려면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손의 기교 부림[수예(手藝)]’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서예에서 특히 이런 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외적 삶과 쇄락적 삶의 묘합을 추구하는 초민은 궁극적으로 서예를 통해 ‘어떤 가슴을 가진 어떤 나’를 표현할 것인가 라는 점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같은 서예를 통한 ‘위기지학’ 실현은 ‘심수필합일’을 지향하는 서예창작정신을 통해 구체화하고 있다.

 

5.

“새로운 젊은 작가들도 가슴속에 온축이 된 것을 꺼내야만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가슴속에 무엇인가를 온축 한다’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말하면, 좋은 작품을 창작하려면 ‘독만권서(讀萬卷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초민은 서예를 통해 서권기(書卷氣)를 담아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것은 알고 보면 초민 자신에게도 하는 말로서, 초민은 70세가 된 이 시점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가슴속에 온축된 예술정신’을 끄집어내고자 하며 아울러 ‘가슴과 손이 하나’가 되는 작품을 하고자 치열하게 ‘고민’ 한다. 그 ‘고민’의 하나가 “보여줄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개인전을 할까?” 하면서 평생을 겸하(謙下)하는 자세로 살다가 70세가 된 이제야 처음으로 ‘소박’하게 개인전을 여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여줄 것이 별다른 것이 없는 상태에서 개인전을 여는 여타 서예가들과 비교할 때 차별화된 경외적 삶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이재도’와 ‘비례물예(非禮勿藝)’를 강조하면서 서예창작에 임하고 있는 초민의 ‘고민’에는 서예를 통해 ‘위기지학’을 실현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는데, 그것은 결국 서예와 하나가 되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인서구로(人書俱老)’의 경지를 추구하는 삶이기도 하다. 초민이 한국서단에서 귀감이 되는 대목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은 월간 서예문화 2017년 12월호에 실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