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탄생시킨 김영삼 전 대통령의 88년 인생 역정
입력 : 2015.11.22 01:58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에서 태어났다.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으며 졸업한 뒤, 장택상 국회부의장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어 만 25세에 최연소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이후 5,6,7,8,9,10,13,14대 등 역대 최다인 9선 의원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후인 1960년대부터 정치계의 거물로 성장한다. 1963년 군정 연장 반대 집회·가두시위로 서대문 형무소에 23일간 수감됐으며, 제5대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 당선을 위해 뛰며 민정당 대변인으로 재직했다. 1970년대부터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이철승 전 의원과 함께 야권의 ‘40대 기수론’ 주인공이 된다. 제7대 대선에서 그는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에 출마하기도 했다.
1972년 이후에는 반 유신 투쟁의 선봉에 섰고 1974년 만 45세의 나이에 야당 총재가 됐다. 1979년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 때 경찰에 강제연행됐던 그는 당시 법원 결정에 따라 총재 직무 집행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국회의원직 제명 조치도 겪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한 이후에도 야권을 이끌며 민주화 운동을 이어갔던 그는1983년 23일 간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 투쟁을 벌였다. 1984년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발족시키면서 공동의장에 추대됐다.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한 후 통일민주당을 창당한 그는 ‘6월 항쟁’을 주도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13대 대선 출마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 밀려 2위로 낙선했다. 이후 1990년 그는 3당 합당을 감행해 대표 최고위원이 된다. 1992년 12월 치러진 14대 대선에서 결국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돼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그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하며 국민들의 찬사를 받았다. 1996년에는 우리나라를 OECD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1년 뒤인 1997년 외환위기 속에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결국 정치적 맞수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는 퇴임식에서 그는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고 했다.
인물
[김영삼 서거] 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김영삼 어록은?
입력 : 2015.11.23 13:49
우리나라 민주화의 주역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그동안 활동하면서 여러 화제의 말을 남겼다. 주로 직선적인 화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YS는 1978년 7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으로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당시 국회 연설을 통해 "정부는 안보를 빙자해서 억압 정치를 할 명분이 없으며, 오히려 안보를 위해서 민주 회복을 해야 할 시점에 섰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YS의 유명한 발언은 그다음 해인 1979년 10월 나왔다. 그는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던 자신에게 해외 출국을 권유하던 전두환 정권을 향해서는 1983년 5월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고 했다.
1990년 1월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YS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민정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이를 놓고 비판도 있었지만, YS는 오히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고 했다. 1992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YS는 그다음 해 2월 취임사를 통해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청렴성을 강조한 그는 1993년 3월 기자회견 등에선 "정치 자금은 한 푼도 받지 않겠다. 임기 중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했다. 그해 8월 시·도지사 간담회에선 집단 이기주의를 비판하며 "정통성을 확립한 문민정부는 국민에게 요구할 것은 단호히 요구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YS는 "우째 이런 일이…"라는 말도 유행시켰다. 1993년 최형우 민자당 사무총장 아들의 대입 부정 의혹이 터졌을 때 반응이었다. 1994년 서울대 졸업식 치사에서 "분노와 저항의 시대는 갔다. 투쟁이 영웅시되던 시대도 갔다"고 말한 것도 화제가 됐다. 대북(對北) 문제에 대해선 1994년 1월과 4월에 각각 "임기 내 남북 연합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할 것" "김일성 주석과 언제든지 만나겠다. 북한에 줄 수 있는 쌀이 있다"고 했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치겠다"는 말은 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나왔다. 그 당시 에토 다카미 일본 총무청 장관의 "식민지 시절 일제가 한반도에 좋은 일도 했다"는 망언(妄言)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는 1997년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던 LA다저스의 박찬호 선수에게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갈 때도 생각해야 한다"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임기 말에 차남 현철씨를 둘러싼 의혹과 외환 위기 등을 겪었던 YS는 1998년 2월 퇴임사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는 말을 남겼다.
대통령 퇴임 뒤인 1999년 6월 김포공항에서 70대 남성이 던진 달걀(붉은색 페인트가 들었음)에 눈 부위를 맞았을 땐 "독재자는 눈을 노린다"고 했다. 2000년 10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에는 "독재자에게 노벨평화상은 어불성설,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말해 화제가 됐다. 2003년 12월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특검 수용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했을 때는 최 대표를 찾아가 "나도 단식을 해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 실하다"고 했다.
2008년 11월 우석대 초청 강연에선 재임 시절 업적이었던 '하나회 청산'에 대해 "만약 내가 하나회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YS는 2009년 8월 DJ 서거 땐 "우리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특수 관계였다"고 DJ와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김영삼 장남, 평생 은둔의 삶...가족사 '재조명'
[Updated : 2015.11.23]
김영삼 장남, 평생 은둔의 삶...가족사 '재조명'
김영삼 장남의 소식과 함께 가족사가 시선을 모았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격동의 시대를 헤쳐온 만큼 가족사도 순탄치 않았다.
어머니를 무장공비의 습격으로 잃었는가 하면, 장남 김은철 씨는 평생을 베일에 가려진 채 은둔의 삶을 살아야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선의원이던 1960년 5월 24일 4.19 이후 혼란스런 정국을 틈타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남단인 거제도에 침투한다.
이때 김 전 대통령의 모친인 박부연 여사가 이들의 총격에 의해 향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금도 생가 한 구석에는 공비들이 쏜 총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상주로 이름을 올린 채 아직 빈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장남 은철 씨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은철 씨가 결혼식을 올린 건 김 전 대통령이 신군부에 의해 가택 연금 중이던 1982년 신군부는 특별히 김 전 대통령에게 은철 씨의 결혼식 참석을 허용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나는 아버지 이전에 정치인"이라며 군부의 가택연금에 항의하는 뜻으로 결혼식 참석을 거절한 것이다.
결국 은철 씨는 아버지 없이 결혼식을 치뤄야했고, 이후 미국으로 떠나 평생을 해외에서 은둔의 삶을 살았다.
'가택 연금' vs '구속' 역사적 악연.. 전두환 前대통령 빈소 찾아
나흘째 빈소·국내외 분향소 표정 서울신문 입력 2015.11.26. 05:20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25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는 조문객 발길이 나흘째 이어졌다. 특히 김 전 대통령과는 질긴 악연이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본인이 직접 가거나 장남을 통해 영결식을 하루 앞두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정적’을 배웅했다.
전 전 대통령은 오후 4시쯤 굳은 표정으로 빈소에 들어섰다. 다소 야위었지만 몰려든 인파 속에서 혼자 거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정정한 모습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방명록에 ‘고인의 명복을 기원합니다’라고 눌러 적은 뒤 영정 앞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목례와 분향을 한 뒤에는 차남 현철씨를 비롯한 유족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가며 조의를 표했다.
●전 前대통령 유족들 위로 후 10분 뒤 떠나
김 전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의 ‘35년 악연’은 10·26 사태 직후인 1980년 전후부터 시작됐다. 김 전 대통령은 12·12 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상도동에 가택 연금을 당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23일간 단식투쟁으로 전두환 정권에 맞섰다. 취임 이후에는 하나회 척결을 통한 숙군을 단행했고, 1995년에는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을 군사반란 주도와 수뢰 혐의로 구속했다.
전 전 대통령은 헌화 뒤 접객실에서 현철씨와 유족들을 위로했다. 건강 상태를 묻는 현철씨에게 “나이가 있으니 왔다 갔다 하는 거다”라며 “이제 담배 안 피우고 술 안 먹고 그러니까 좀 나아졌다”고 답했다. 이어 “임의로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 자다가 싹 가버리면 나를 위해서도 그렇고 가족을 위해서도 그 이상 좋은 일은 없다”고 말했다. 10분간의 짧은 조문을 마치고 장례식장을 떠나던 전 전 대통령은 취재진을 향해 “수고들 하시라”라고 말했지만 ‘(조문을) YS와의 역사적 화해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고 떠났다.
역시나 김 전 대통령 집권 당시 구속되는 악연을 가진 노 전 대통령은 장남 재헌씨를 대신 보냈다. 재헌씨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셨고 한때 아버님과 국정도 같이 운영하셨고, 이어서 대통령도 되셨다”며 “정중히 조의를 드리는 것이 도의라고 생각하고 아버님도 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현철씨는 미소를 지으며 조문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YS 막내딸 “부친의 過 부각돼 안타깝다”
재헌씨는 아버지가 특별히 전한 메시지가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지금 거동하기 힘들기 때문에 가서 정중하게 조의를 표하라고 전하셨다”고 답했다. 노 전 대통령이 YS정부에서 겪은 ‘고초’에 대해서는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은 딱히 없었다”고 말했다. 83세인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연희동 자택에서 10년 넘게 투병하고 있다.
영결식을 하루 앞둔 빈소에는 김 전 대통령과 크고 작은 인연을 간직한 사회 각계 인사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권영진 대구시장은 “1987년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단일화 운동을 할 때 찾아뵙고 (단일화를) 요청드린 적이 있었다”며 “그 이후에 (김 전 대통령이) 그걸 못 해서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말했다.
15대 총선에서 김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른바 ‘YS키즈’ 정의화 국회의장도 독일 공식 일정을 일부 취소하고 급거 귀국해 빈소를 찾았다. 정 의장은 “외환위기에 대한 모든 책임을 고인에게 다 가하는 측면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오해를 할 수가 있다”며 “(김 전 대통령이) 안 계셨으면 우리는 유신독재로 다 망치는 거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막내딸인 혜숙씨도 기자들과 만나 “모든 지도자는 공과 과가 있다”며 “과가 부각된 것이 안타깝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결혼 후 미국 워싱턴 DC서 생활해 온 그는 “평소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다”며 “업어주시기도 하고, 막내딸이니만큼 정말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활약한 야구선수 박찬호씨는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다고 조언해 주면서, 늘 겸손한 마음을 갖고 국민에게 사랑 받는 선수로 성장하라는 뜻깊은 말씀을 하신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11월 LA 다저스에서 빼어난 성적을 거둔 박씨를 청와대로 초청해 “올해 우리나라는 빛낸 가장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고 칭찬했었다.
●신동빈·권오준·삼성 사장단 등 재계도 애도
서거 첫날부터 빈소를 지켰던 ‘상도동계’ 김수한 전 국회의장,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 김기수 전 대통령 수행실장은 이날도 아침 일찍부터 조문객을 맞이했다. 손학규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정병국 의원도 나흘째 빈소를 지켰다. 재계에서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권오준 포스코 회장, 최상순 한화그룹 부회장, 이관우 전 한일은행장 등이 빈소를 찾았다.
유족들은 하루 앞으로 다가온 영결식을 준비하기 위해 문상객을 맞이하는 틈틈이 회의를 했다. 유족들은 26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에서 발인 예배를 가진 뒤 영결식이 열리는 여의도 국회로 이동할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 집안이 3대째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있어 예배 형식으로 발인을 하는 것이다. 예배가 끝난 뒤 운구차는 서울대병원을 떠나 오후 2시쯤 국회에 도착할 예정이다.
전국에 설치된 220여개 분향소에는 지금까지 15만명이 넘는 추모객이 다녀갔다. 여의도 국회에 설치된 정부 대표 분향소에는 심상정 대표를 비롯한 정의당 의원들과 강신명 경찰청장, 박근희 삼성사회공헌위원회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 주요 사장단 50여명 등이 방문하며 추모 행렬을 이어갔다.
●정상회담한 日 무라야마 전 총리도 분향소 찾아
해외에서도 조문이 이어졌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는 도쿄의 주일본 한국대사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고인에 대한 예를 표했다. 김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인연이 있는 무라야마 전 총리는 지난 22일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그 시대 한국에 가장 잘 어울리는 대통령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26일 영결식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류전민(劉振民) 중국 외교부 부부장을 비롯한 중국 정부 조문단도 베이징 주중 한국대사관 1층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조문을 했다. 류 부부장은 방명록에 “침통한 심정으로 애도를 표시한다”(沈痛悼念)는 글을 남겼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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