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에 정한경, 이원순, 이매리, 임병직 등을 만났다. 나는 전후(戰後) 대한민국의 선거 방법과 헌법 구상을 준비하기 위해 프린스턴대 슬라이 박사를 한국 행정부의 고문으로 임명하는 방안을 설명했다."
최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원장 류석춘)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중반 미국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영문 사료를 발굴해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태평양전쟁 기간 중 이미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독립 이후 세워질 한국 정부의 헌법제정과 선거 방법에 대해 구상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된다.
1944년 4월 21일, 이승만 일기 중
자료는 이 전 대통령이 1944년 4월 15일 프린스턴대에서 연설한 원고를 비롯해 그 무렵 쓴 일기문 등 이다. 이 전 대통령은 연설에서 "미국은 도덕적인 차원에서뿐 아니라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한국 독립을 도울) 조약 이행 의무를 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 주류 지식인 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부탁한 것이 아니라 독립 지원의 당위성을 설파했다는 것.
그는 연설을 통해 "한국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로 '동방의 악마' 일본으로부터 스스로 독립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나라"라고 소개한다. 이 전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인정하는 것이 독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또 "우리는 스스로 독립을 위해 싸워야만 하고, 싸울 준비가 돼 있다"며 한국이 스스로 싸울 수 있도록 미국에 비행기·총포 등 군수품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 연설 내용은 그 후 중경 임시정부(주석 김구)가 미국 OSS의 지원을 받아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는 기반이 됐다.
이 전 대통령은 그에 앞서 일본의 미국 침략도 예견했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여름, 이승만 전 대통령은 'Japan Inside Out(일본 내막기)'를 출간해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밝히고 일본이 곧 미국의 하와이나 알래스카 중 한 곳을 공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그해 12월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전쟁이 발발하자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류석춘 원장은 "일본의 미국 침략을 예견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태평양전쟁 중에 이미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독립 이후 어떤 국가를 세워야 할지에 대한 구상까지 했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료"라고 평가했다.
이번에 공개한 자료에는 그 밖에도 1910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프린스턴대 총장으로부터 '클리오소픽 소사이어티(Cliosophic Society of Princeton University)'의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문서도 포함돼 있다. 이 단체는 마크 트웨인, 스콧 피츠제럴드 등 당대 미국 주류 사회의 지식인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지난 3일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모교인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 그의 이름을 딴 강의실 '이승만 홀(Syngman Rhee 1910 Lecture Hall)' 개관식이 열린 바 있다.
이승만의 영어는 수준이 높았다. 그는 1941년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Japan Inside Out)'를 미국에서 출간했다. 이 책의 서평을 쓴 이는 '대지(大地)'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 벅 여사였다. 이승만은 책에서 군국주의 일본의 야심을 조목조목 진단하고 일본이 머지않아 미국도 공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펄 벅은 '이 책은 무서운 책이다. 너무 큰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며 '모든 미국인이 읽어봐야 한다'고 썼다.
책 출간 넉 달 후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이승만은 1904년 처음 미국에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하버드대·프린스턴대를 거치며 5년 만에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땄다. 탁월한 영어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았으면 '속성 졸업'이 어려웠을 것이다. 여섯 살에 천자문을 떼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들어가 영어와 만났다. 3년 뒤 아펜젤러 교장과 미국 공사 등 600여 귀빈이 모인 졸업식에서 '한국의 독립'이란 제목으로
영어 연설을 해 박수를 받았다.
이승만은 1904~1944년 미국·유럽·중국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그때그때 일을 영문 일기로 남겨놓았다. 지금껏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던 이 일기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이 3년 동안 완역, 곧 출간한다고 한다. '1904년 12월 6일. 오후 3시 샌프란시스코 하선(下船). 더블베드가 있는 방은 1박 50센트. 식사는 제일 싼 것이 10센트.' 그가 맨 처음 미국 본토를 밟은 날의 일기다.
일기는 이런저런 수식어나 개인적 감정을 드러냄 없이 그날그날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도 객지에서 풍찬노숙하던 독립운동가의고단한 일상이 여기저기 묻어난다. '덴버에서 자동차를 수리하느라 경비를 많이 써 휘발유 값도 없다. 덴버를 떠난 뒤로 하루 종일 굶었다. 나이 든 여인숙 주인과 방값을 놓고 흥정을 벌였다.'(1933년 9월 12일)
일기에는 임병직·양유찬 등 이승만의 미국 체류 시절 그를 도왔던 한국 젊은이들이 나온다. 이들은 나중에 대한민국 외교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승만이 만났던 외국의 정치 지도자도 많이 등장한다. 이승만이 이들을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파헤쳐보면 이승만의 해외 인맥에 대한 연구가 깊어질 것이다. 이승만은 동서양을 아우른
지식과 경륜을 토대로 대한민국을 세우고 안보의 기틀을 다졌다. 건국 대통령의 생각과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기념관이나 전집(全集) 하나 가지려 해도 국회 예산 심의에서 잘려버리는 게 대한민국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