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감동이야기 - 입지전적인 두과부의 이야기

含閒 2015. 3. 19. 09:56
감동이야기 - 입지전적인 두과부의 이야기

 

 
♣ 제1화 - 평양의 아름다운 백과부(寡婦) 이야기♣

▲ 16살 청상과부 백선행 사진 ...

    옛날 평양에 열여섯살에 과부가된 여인이 있었어요 이 처자는 1848년 평양의 이름없는 촌부 백지용의 맏딸로 태어났지요 백지용은 아들을 기대했는데 딸을낳자 실망하여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어요 그런 소녀 백씨는 일곱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홀어머니손에 자라 열네살에 안씨 문중으로 시집을 갔어요 시집간지 2년만에 병약했던 남편이 죽자 “남편 잡아 먹은년”이라고 시집에서 쫏겨 났지요 친정으로 돌아온 16살소녀 백씨는 친정엄마와 함께 쌍과부가 되었어요 그로부터 먹을것 안먹고 입을것 안입고 열심히 돈을 모았는데 그가 26살 되던해 친정엄마 마져 세상을 떠나갔지요 “ 너는 똑똑한데 내가 가르치지 못한 것이 한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 그때 친정엄마가 물려준것은 현금 천여냥과 백오십냥 짜리 집한채가 전부 였지요 그러나 집안 어른들이 몰려와 부모 제사를 모실려면 아들이 없으니 양자를 들여야 한다해서 집안 어른들의 뜻대로 사촌오빠를 양자로 들였는데 이 오빠가 전재산을 빼앗아 가 버렸어요 그래서 스물여섯살에 빈털터리가 된 백과부는 다시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았지요 이때부터 환갑때 까지 "평양의 백과부"로 불렸지요 삯바느질에 길쌈은 물론이고 이십리나 떨어진 시장에가서 음식 찌꺼기를 모아와 돼지를 길렀으며 남들이 먹다버린 봉숭아씨를 모아 시장에 내다팔고 콩나물 장사도 했으며 돈벌이가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대로 했지요 이런 백과부를 두고 사람들은 “악바리 백과부,지독한 백과부”라 불렀어요 때로는 홀아비들이 찾아와 같이 살자고 우격다짐으로 데려 갈려고도 했고 또 아직 나이젊은데 첩실자리가 있으니 팔자 고치라는 회유도 많이 받았지요 그리고 시정잡배 들에게 끌려가 치도곤도 많이 당했어요 그러나 백과부는 꿋꿋하게 열심히 일하고 언제나 바르게 살았으며 남의 궃은일에는 제일먼저 달려가 일손을 거들었지요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들이 백과부를 좋아했고 백과부가 하는일는 모두 도와 주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백과부가 꽤나 재산을 모았다는 소문을 듣고 탐관오리 평양 부윤이 그를 불러 재산을 바칠것을 강요했지요 그러나 백과부는 죽으면 죽었지 이유없는 재산은 못 내놓는다고 버티자 그를 감옥에 가두었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와 생사람 잡지 말라고 상소를하며 동헌마당을 떠나지 않았지요 탐관오리 평양부윤은 어쩔수 없이 그를 풀어 주었어요 그렇게 번돈으로 백과부는 땅을 샀어요 그리고 그 땅을 소작농에게 싼값으로 대여해주고 소작료를 받아 다시 다른 땅을 사들이는 것을 반복하면서 재산을 크게 늘리게 되었지요 당시 돈있는 사람들은 고리대를 이용해서 쉽게 재산을 늘렸지만 백과부는 그렇지 않았어요 옛말에 덕을 베풀면 복이 온다 했던가요? 그동안 많은 덕을 베푼 백과부에게도 복이 찾아 왔어요 지금까지 악착같이 벌어온 돈을 10배로 늘릴 기회가 찾아온 것이지요 백과부는 일본에서 건물을 지을때 시멘트로 짖는다는 것을 미리 알고 일본늠이 가지고 있던 대동강 근처에 있는 만달산을 싼값에 구입 했어요 만달산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산이지만 몽땅 석회석으로 이루어져 있었지요 이 일이 그녀에게 큰 행운이 되었어요 얼마후 시멘트가 대대적으로 필요하게 되면서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석이 가득한 만달산을 일본인 시멘트업자에게 10배가 넘는 가격으로 되팔았지요 그렇게 부자가 된 백과부는 1908년 환갑을 맞아 대동군 고평면 고향에 커다란 다리 하나를 놓았어요 이 동네는 마을 중앙으로 큰 냇가가 있어 평소에도 물이 많아 잘 건너지를 못했는데 이곳에 큰다리를 놓으니 마을에 큰 경사가 아닐수 없었지요 마을 사람들이 백과부를 크게 칭송하자 “돈이란 아무리 아까워도 써야 할곳엔 꼭 써야 하지요” 란 말만 했다 하지요 사람들은 이때부터 “백과부”를 “백선행”이라 불렀어요 그리고 그 "선행"은 이름도 없던 백과부의 이름이 되었지요 그 뒤에도 백선행은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많은 사재를 털어 교회를 짓고 또 배우지 못한 어머니의 한이면서 자신의 한이었던 학교를 세우고 또 장학 재단을 설립했어요 당시 평양에 있는 거의 모든 학교가 백선행의 기부금으로 운영될 정도였다고 하네요 또 독립운동가 고당 조만식 선생이 평양에 조선인을 위한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하자고 하자 현재 가치로 150억원 상당의 공사비와 운영자금을 제공했어요 그래서 이때 지어진 공회당이 지금의 <백선행 기념관>이 되었다 하네요 1933년 5월 여든여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날때 35만원(현재가치350억원)의 재산은 한푼도 남아 있지 않았지요 한국 여성으로서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진 백선행의 장례식에는 1만여명의 인파가 운집했으며 수백수천명이 상복을 입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어요 300개가 넘는 화한과 만장 등이 늘어선 장례행렬은 2km나 이어졌지요 당시 평양시민의 3분의 2인 1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평양 백과부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하네요 열여섯 앳된나이에 과부가 되어 수절한 그녀에게 자식은 없었지만 그녀를 어머니로 섬기는 청년은 수백수천을 헤아렸고 평양시 전체가 그를 애도했다 하지요 백선행은 돈이 얼마나 아름답게 쓰일수 있는지를 알려준 최초의 부자였어요 ★ 평양 백 과부 ...

     

     

    ▲ 지금 평양에 있는 백선행의 동상 공산당들은 원래 자본가들을 인민의 적으로 간주하지만 백선행에게만은 관대하여 지금도 우상으로 받들고 있다 하네요 ...

     

     

    ▲ 평양 대동강가에 위치한 3층 건물 백선행 기념관 ...

     

     

     

    ▲ 백선행 장례식 당시 신문기사 ...

     

     

    ▲ 백선행 기념비 ...

     

    ★ 제2화 - 충남예산의 임 과부이야기 ...★

     

    또 충남 예산에도 꽃다운 처녀가 있었지요 이 꽃다운 처녀가 열일곱살에 연지곤지 찍고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지 2년만에 서방이 갑자기 죽어 채 피지도 못한 열아홉살 나이에 과부가 되었어요 마을 사람들이 그를 볼때마다 " 불쌍해서 어쩌노 ~ 나이가 아깝네!! " 하면서 위로해 주었지만 열아홉살 과부는 죽은 서방이 너무도 원망스럽고 서러워 울기도 많이 울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마음을 다잡아 먹고 거울 앞에 앉아 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잘라 버렸어요 그러면서 젊은 과부가 마을 어르신들로 부터 듣는 동정의 말들이 너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헤처나갈 방도를 곰곰히 생각했지요 서방도 없고 자식도 없는 시댁에 더 이상 머므를수도 없었지만 무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어요 친정으로 돌아간들 뾰족한 수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래서 무조건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지요 낯설고 물설은 서울 생활이 그리 녹녹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치만 이를 악물고 닥치는대로 일을 했지요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남의 집 빨래도 하며 차츰 차츰 서을 물정에 눈을 떴을때 지인의 소개로 어느 부잣집 가정부로 들어가게 되었지요 그녀는 그 집에서 밤낮으로 죽기살기로 일을 했어요 그러자 맘씨 좋은 주인 어르신께 인정을 받았지요 어느날 주인 어르신께서 나이도 젊은데 무언가 하고싶은 일이 있으면 말하라 해서 어렵사리 조심스럽게 두가지를 말씀 드렸어요 하나는 "야간 학교에라도 가서 늦었지만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고 또 하나는 "주일날이면 꼭 교회에 갈수 있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러자 맘씨 좋은 주인 어르신께서 정말 기특한 생각을 했다며 젊은 과부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 주었지요 그래서 숙명여학교 야간부에 입학을 했는데 주인어른의 후광도 있었지만 일하고 잠자는 시간에 틈틈히 보아온 신학문이 큰 도움이 되었지요 또 주일날에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갈수 있었어요 그녀는 주인 어른의 큰 은혜에 감흡하여 낮에는 집에서 가정부일을 두배로 더 열심히 일했고 밤에는 학교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보니 최우수 학생이 되었고 장학생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그의 실력과 성품을 인정받아 그때는 일제 강점기때라 학교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주었지요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가게된 젊은과부는 너무도 기뻤고 감사했어요 주인 어른께도 감사했고 학교에도 감사했어요 도쿄여자 사범대에 들어가 밤낮없이 공부에 전념하여 영광된 졸업장을 들고 귀국 했으며 그때 젊은과부 나이가 30세 였지요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포구에 내린 젊은과부는 몰라보게 달라 졌어요 예산땅 젊은 과부가 영화배우 윤심덕처럼 멋쟁이가 되어 돌아 왔지요 그는 서울에 돌아와 모교인 숙명여고 선생님이 되었어요 그치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열심히 공부하며 후배들을 가르첬어요 그러자 1939년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지요 교수로 임용된지 6년만에 그는 교장이 되었어요 전공은 우리나라 한복과 양장을 가르치는 의상 재봉이었지요 해방과 함께 숙명여자 전문학교가 대학교로 바뀌면서 열아홉살 젊은 과부가 초대 총장이 되었어요 그가 바로 숙명여자대학 임숙제 초대총장 이지요 그분은 숙명여대를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19세 젊은 과부가 총장이 되기까지 불굴의 의지로 운명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사람이었지요 그분은 제자들에게 "성공하기를 원하나요? 그럼 자신의 환경을 다스리세요!!"라고 늘 가르쳤다 하네요 임숙재(任淑宰 1891년7월 22일~1961년6월 8일)는 숙명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냈으며 본관은 풍천이지요 충청남도 예산군 출신으로 1913년 숙명고등여학교를 졸업했으며 1917년에는 일본으로 유학,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귀국했어요 이후 모교인 숙명여고 교사, 대구 경북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1939년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지요 감리교 신자인 그는 숙명여전 교수를 지내며 기독교 조선감리교회의 부인연합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지요 광복후 1945년 11월 숙명여전 교장이 되었고 1955년 이 학교가 숙명여자대학교로 종합대학 인가를 받자 그해 초대총장에 취임했어요 그뒤 1958년 숙명여대 명예 총장이 되었다가 1961년 6월 8일에 향년 71세를 일기로 작고 하였지요 어때요? 두 과부의 인생역전이 드라마틱 하지 않나요? 평양의 백과부는 많은 돈을 벌어 사회에 환원 했으며 예산에 김과부는 열심히 공부하여 후학을 양성 했어요 그래서 이들 과부를 보고 "아름다운 과부"라 한다 하네요 -* 언제나 변함없는 산적:조동렬(일송) *-

     

    ▲ 충남 예산 시골마을 ...

     

     

    ▲ 17세 소녀가 시집을 갔어요 ...

     

     

    ▲ 수 많은 역경을 딛고 일어 섰지요 ...

     

     

     

    ▲ 임숙재 총장 사진...

     

     

    ▲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숙대초대총장 임숙재(任淑宰) 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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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창기 숙명여자 대학교 (제1캠퍼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여성고등교육을 위한 숙명전문학교를 설립하면서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교사를 옮기면서 조성한 캠퍼스 ...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靑波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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