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수근의 그림세계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려는 꿈을 갖았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상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18세 되던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후 鮮展에서 여러 차례 수채화와 유화로 입선하고,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집》이 특선으로 선정되었다. 1955년 제7회 대한미협전에서는 《두 여인》으로 국회문교위원장상을 받았다.
박수근은 어렵고 고달픈 시절을 힘겹게 살다간 대표적인 서민화가이다. 6.25 동란 중 월남한 그는 부두 노동자로 일하거나, 미8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의 예술철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어진 마음과 진실한 삶의 내면을 오롯이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시골집과 나무, 절구질하는 아낙네, 집을 지키는 노인, 아기 업은 소녀 등 서민적인 삶의 모습을 암벽에 음각하듯 화폭에 아로새겼다. 그의 작품은 초기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일관성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가난한 서민들의 생활상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법 면에서 보면 1950년대 초까지는 대상을 검은 윤곽선으로 그리고 윤곽선 안쪽은 일률적인 색채로 처리해 화면 자체가 극히 평면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두껍게 쌓아올려진 색층을 통해 깊은 색조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마티에르는 서로 응고되면서 구조화 되어갔다. 만년의 작품에서는 거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단계에 돌입하여 마멸된 화강암의 표면을 보는 것 같은 거친 질감만이 남게 되었다. 기름기를 걸러낸 거칠거칠한 표면층은 우리 자연의 건조한 풍토와 연결되며, 또한 한 시대의 감정을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박수근이 오늘날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서구의 화풍을 답습하던 당시의 한국 화단에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기법과 같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고, 그러한 독창성을 통해 한국인의 서민적 생활상과 정서를 집약적으로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유학파들처럼 모더니즘의 기표 위에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뿌리에서 그림의 소재를 불러냈으며, 삶의 지층을 다지듯 물감을 쌓고 굳히고 두텁게 하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창출해냈다.
“나의 그림은 유화이긴 하지만 동양화다”라는 박수근의 말처럼, 유화이지만 그의 작품 속에서는 화강암처럼 거친 듯 소박한 한국미의 전형이 느껴진다. 그는 1959년부터 1964년까지 국전 추천작가로 활동했으며, 1962년 제11회 국전에서는 서양화부 심사위원을 지냈다. 그는 1965년 간경화와 응혈증이 크게 악화되어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 간 그는 사후에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가장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 작가 가운데 가장 높은 경매가를 기록하고 있다. 2002년에는 그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군에 박수근미술관이 개관했다.
주요 작품에는 《창신동 집》(1950년대), 《복숭아》(1957), 《빨래터》(1950년대), 《시장의 사람들》(1961), 《나무와 두 여인》(1962), 《농악》(1962), 《굴비》(1962), 《노상》(1960년대), 《아기 업은 소녀》(1960년대), 《여인들》(196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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