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야기

[스크랩] 禧嬪 張氏

含閒 2012. 7. 11. 16:02

 

 

禧 嬪  張氏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701)는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여성의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명성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것은 소설·드라마·영화 같은 대중예술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삶은 극적(劇的)이었다.

희빈 장씨를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만 해도 <장희빈>(1971, MBC, 윤여정 분),

<여인열전 장희빈>(1982, MBC, 이미숙 분), <조선왕조 오백년-인현왕후>

(1988, MBC, 전인화 분), <장희빈>(1995, SBS, 정선경 분), <장희빈>

(2002, KBS 2, 김혜수 분), <동이>(2010, MBC, 이소연 분) 등 여러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 배역은 당시의 주요한 여배우들이 맡았다.

역사와 대중예술에서 그린 희빈 장씨의 이미지는 ‘권력을 지향한 요부(妖婦)’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미지가 그렇듯이, 거기에는 사실과

왜곡이 섞여 있다. 유사 이래 권력의 중심부에는 언제나 음모와 암투가 넘쳤다.

그것은 권력의 속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떤 일과 사람을 선악의 구도로 재단하는 것은 명쾌하지만, 그만큼 단순화와

왜곡의 위험이 뒤따른다. 이미 깊이 있는 연구가 여럿 나왔고, 이 짧은 글은

상당 부분 거기에 의존해 작성되었다. 그녀가 남다른 권력 의지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당쟁과 환국이라는 급박한 시대적 환경과

그것을 주도한 숙종의 처결과 맞물리면서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출생과 가계

희빈 장씨의 가문은 비빈(妃嬪)의 지위와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한미했다.

그녀는 1659년(효종 10) 장경(張烱. 본관 인동. 1623~1669)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장경은 처음에 고씨(1625~1645. 본관 제주. 고성립(高誠立)의 딸)와

혼인했지만 그녀가 일찍 사망하자 윤씨(1626~1698. 본관 파평. 사역원 첨정

윤성립(尹誠立)의 딸)와 재혼했다. 그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희빈 장씨는

막내였다. 그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장희재(張希載, 1651~1701)는

맏아들이자 희빈의 오빠다.

희빈의 가계에서 언급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張炫)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장현은 거부였고, 남인의 영수인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결탁했던 복평군(福平君) 등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희빈이 남인과

가까웠던 것은 이런 사정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아버지 장경은 희빈이 10세 때

세상을 떠났다(1669, 현종 10).앞서 말한 대로 이런 환경은 한미하며,

불우하기까지 하다. 안온한 환경이 여유와 평화를 준다면, 험난한 조건은

그것을 이겨낼 의지와 강단을 부여할 수 있다. 그 뒤 나타난 희빈의 행동과

품성은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된다.
 

입궁과 총애

이런 배경을 가진 희빈이 입궁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행운을

제공한 사람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 1660~1701)과 우의정 조사석(趙師錫.

본관 양주. 1632∼1693)이었다. 동평군은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의 아들인

숭선군 이징(李澂)의 아들인데, 그의 어머니가 조사석의 사촌누이였다.

조사석은 관직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대단한 명문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조계원(趙啓遠)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었으며, 아들은 영의정까지 오른 조태구(趙泰耉)였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조사석 처가의 종이었는데,

조사석과 사통(私通)한 사이였다. 조사석은 동평군에게 정부(情婦)의 딸을

입궁시켜 달라고 부탁했고, 그런 요청에 따라 희빈은 나인으로 입궁했다.

희빈은 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687년(숙종 13년) 6월 16일).

희빈의 일생에서 중요한 전기는 21세 때인 1680년(숙종 6)이었다. 그 해

10월 26일 숙종비 인경(仁敬)왕후(1661~1680. 본관 광주. 김만기

(金萬基)의 딸)가 승하했는데, 그 뒤에 처음 은총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바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대비 명성(明聖)왕후는 당파적

색채가 강했는데, 희빈과 연결되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판단해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681년 노론 핵심 가문 출신의 인현(仁顯)왕후(1667~1701.

본관 여흥. 민유중(閔維重)의 딸)가 계비로 책봉되었다. 나이는 희빈이 8세 위였다.
 

영광의 정점

기회는 1683년(숙종 9) 명성왕후가 붕어하면서 찾아왔다. 거리낄 것이 없어진

숙종은 희빈을 불러 총애했다. 희빈의 나이 25세였다.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다. 그녀는 숙원(淑媛. 종4품. 1686)을 거쳐 소의(昭儀. 정2품. 1688)

로 승급했다. 그동안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淑正)은 남인과 연합하라고

희빈에게 계속 충고했다. 희빈은 남인과 더욱 가까워졌다.

가장 중요한 일은 1688년(숙종 14) 10월 28일 왕자 윤(昀. 뒤의 경종)을

낳았다는 것이다. 희빈의 나이 29세에 찾아온 거대한 행운이었다.

이듬해 1월 11일 왕자는 원자로 정호(定號)되었고

그녀도 희빈(정1품)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숙종과 인현왕후는 아직 매우 젊었고(각 28세와 21세), 따라서 대군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국본(國本)을

확정했다는 사실은, 숙종의 총애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상당한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무리한 결정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번졌다. 그것은 기사환국이었다.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과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영돈녕 김수항(金壽恒) 등은

원자 책봉은 아직 이르다고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동안의 방식대로 이번에도 숙종의 대응은 성급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다. 우선 권대운(權大運)·목래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을 삼정승에

임명한 것을 시작으로 남인을 대거 기용했다.

서인은 대부분 파직되거나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된 뒤(3월 6일)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사사되었고(6월 8일) 김수항은 영암(靈巖)의 귀양지에서

같은 처분을 받았다(윤3월 28일). 이듬해에 김수흥도 유배지인 장기(長鬐)에서

사망했다(1690년 10월 12일).

환국이 원자 정호 때문에 촉발되었으므로 왕실의 교체도 당연히 뒤따랐다.

인현왕후는 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에 따라 서인(庶人)으로 폐출되었고

(5월 2일) 나흘 뒤 희빈은 드디어 왕비에 올랐다(5월 6일). 원자의 외가,

그러니까 희빈의 친정은 3대가 의정에 추증되어 아버지 장경은 영의정,

조부 장응인(張應仁)은 우의정, 증조부 장수(張壽)는 좌의정의 직함을 받았다.

이듬해(1690, 숙종 16) 6월 경종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희빈과 그 가문의 영광은 정점에 올랐다.
 

몰락과 사사

그러나 기사환국 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출한 것을 점차 후회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세 번째 환국으로 나타났다. 1694년(숙종 20) 숙종은 서인이

꾸미던 왕비 복위 사건을 조사하던 우의정 민암(閔巖)이 국왕을 속여

옥사를 확대하고 있다면서 대대적인 인사 교체를 단행했다. 그 결과 남인은

축출되고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 서인이 등용되었다.

기사환국의 본질이 원자 정호와 희빈의 중전 책봉이었듯이, 갑술환국의 핵심은

인현왕후의 복위였다. 숙종은 이전의 조처를 뉘우치면서 인현왕후를 환궁시켰다.

장씨는 별당으로 쫓겨가고 희빈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아버지 장경의 부원군

교지와 그 아내의 부부인(府夫人) 교지는 불태워졌고, 장씨의 왕후 옥보

(玉寶- 국새)도 파괴되었다(1694년(숙종 20) 4월 12일). 숙부 장현과

장찬(張燦)도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윤5월 13일). 희빈이 왕비가 된 지

5년 만의 일이었고,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이때 일어난 중요한 일은 숙의 최씨가 왕자(뒤의 영조)를 출산했다는

것이었다(9월 20일). 희빈의 입지는 점점 더 축소되고 있었다.

비극의 종막은 7년 뒤에 내려졌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했는데, 그 직후 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왕비가 죽기를 기도한 일이 발각된 것이다.

숙종은 대노했다. 장희재는 참형에 처해졌고, 희빈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

남구만·최석정 등 소론도 몰락했다. 정계는 노론이 더욱 확고하게 장악했다.

결국 희빈에게는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0월 8일). 죄목은 내전을

질투해 모해(謀害- 꾀를 써서 남을 해침)했다는 것이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입궁해 원자를 생산하고 중전까지 올랐지만 결국 사사된

42년의 파란 많은 생애였다.

사후의 예우가 부실한 것은 당연했다. 희빈은 1702년(숙종 28) 1월 경기도

양주(楊州) 인장리(茵匠里)에 묻혔다가 1718년(숙종 44)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으로 천장되었다. 앞으로 빈이 왕비가 될 수 없도록 하라는

왕명도 하달되었다(1701년 10월 7일).

그나마 일정한 추숭이 이뤄진 것은 아들 경종(景宗)이 즉위한 뒤였다. 경종은

모후의 사당을 건립하고(1722년(경종 2) 1월 10일) 옥산부(玉山府)

대빈(大嬪)으로 추존했다(10월 10일). 대빈궁은 국왕이나 추존된 국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칠궁(七宮. 지금 서울 종로구 궁정동 소재) 안에 있다.

묘소는 1970년 서오릉(西五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으로 옮겨졌다.

앞서 말했듯이 희빈이 남다른 정치적 야심과 감각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모략과 암투가 난무한 전근대의 궁중에서 그런 자세는

자연스러우며 필요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갈수록 어떤 사람에 대해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짧은 글에서 희빈과 관련해 어떤 의견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다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우리가 알만한 인물의 다수가

자연적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자  -  장희빈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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