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성을 마주하는 한강변에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B·C 4,000∼3,000년기에 걸친 유적이다.
20여 기의 집터와 딸린시설, 돌무지시설이 드러났다.
. 바닥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가 많이 나왔으며 돌도끼,
그물추, 불에
탄 도토리 등이 출토되었다.
한강유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이며,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중 최대의
마을단위
유적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당시 생활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신석기인의 문화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史跡
193호
동구릉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史跡 194호
헌릉·인릉
헌릉은 조선 3대 태종(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무덤이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웠다
인릉은 23대 순조대왕(재위 1800∼1834)과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무덤이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대신 정치를 돌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외척에 의한 정치가 극에 달하였으며, 사회가 혼란해졌다
史跡
209호
남양주시 사릉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史跡
132호
강화 산성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 그리고 관아 시설은 1234년에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 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史跡
133호
강화 고려궁지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史跡
136호
강화 참성단
마니산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한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강화도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고,
단군과 연관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상고시대에 무시못할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史跡
225호
강화 초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왜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史跡
227호
강화 광성보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史跡 226호
강화 덕진진(德津鎭)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로서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史跡
323호
파주 윤관장군묘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111)의 무덤이다.
그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史跡
358호
파주 소령원
조선 19대 숙종(재위 1674∼1720)의 후궁이며 21대 영조(재위 1724∼1776)의
어머니인 숙빈최씨의
무덤이다.
숙빈최씨는 최효원의 딸이며 숙종 44년(1718)에 49세로 죽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영조는 최씨의 무덤 근처에다 막을
짓고
무덤를 받들었으며, 친필 비(碑)와 비각을 4곳에 세웠다.
위패는 조선시대 역대왕이나 추존된 왕의 생모인 7명의 후궁을 모신
칠궁(七宮)중
육상궁에 모셨다.
史跡
299호
경기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3·1운동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과 매질을
가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
불탄 예배당터에는
순국기념탑을 세우고,
국·내외 관계자료를 모아 기념관에 전시해
국민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