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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跡
巡禮 (4)
史跡139호
김포 문수산성 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조선시대의 성이다.
조선 숙종 20년(1694)에 돌을 이용해 쌓은
석축산성으로
순조 12년(1812)에 고쳐 쌓았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史跡
147호
문경 관문 (제1,제2,제3관문 및 부속성벽)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이다.
이곳은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로
자리잡았다.
조선 선조 2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시의 군사와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조령에서 왜군을 막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왜병을 맞서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다.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개의 관문을 완성했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동문 혹은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한다.
현재의 시설은 페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史跡
155호
아산 이충무공 유허
충무공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현충사이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32년(1706)에 사당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뒤 200년간 사당을 잘
운영해 오다가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하였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사업을 마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史跡
170호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史跡
172호
신라 오릉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史跡 182호
신라 선덕여왕릉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을 세웠으며,
史跡
191호
고려 공양왕릉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재위 1389∼1392)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이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에 의해서 즉위한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원주로 추방 되었다가 태조 3년(1394)에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태종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史跡
229호
매헌윤봉길의사 사적지
윤봉길의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사적지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따로 있는데,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라 하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집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저韓堂)이라 한다.
史跡
231호
홍성 홍주성(조양문,아문,산성)
충남 홍성군에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다.
史跡 232호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노량해전으로 더 잘 알려진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선조
31년(1598)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이 도망가는
왜적들을 무찌르다
관음포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 이 때 이순신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 최후를 마쳤다.
이에 관음포 앞바다는 이순신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부르며, 마주보는 해안에는 이락사가 있다
그 후 순조 32년(1832)에 왕명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단과 비, 비각을 세웠다
1965년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라는 뜻인
‘대성운해(大星殞海)’와
‘이락사’라는 액자를 경내에 걸었다.
史跡
244호
연천 신라 경순왕릉
신라 56대 마지막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史跡 264호
단양 온달산성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 성산성이란 이름으로 있었던 기록이 있다.
史跡 293호
전봉준선생 고택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조선 고종 27년(1890)인
30세 때 동학에 몸을 담아,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리들의 횡포에 맞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조직해 동학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史跡 302호
순천시 낙안읍성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낙안 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 중 하나이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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