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旅行)

41. 스리랑카

含閒 2010. 11. 3. 18:05

(인도양의 눈물 스리랑카 위성 사진)

영국 BBC 방송이 선정한 죽기전에 가 보아야 할 50곳 입니다.
순위 41위 스리랑카.

위치 : 인도 남부 인도양 해상
면적 : 6만 5610㎢
국화 : 연꽃
정체 : 공화제
통화 : 루피 (Sri Lanka rupee)
수도 : 콜롬보
공용어 : 신할리어
테마 : 코끼리와 불교

면적은 6만 5610㎢, 인구는 1906만 5000명(2003)이다. 인구밀도는 290.6명/㎢(2003)이다. 정식명칭은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이다. 18세기 말부터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1948년 영국연방 내의 자치령으로 독립하였으며, 1972년에 국명을 실론(Ceylon)에서 스리랑카공화국으로 개칭하여 영국연방에서 완전 독립국이 되었다가 1978년에 현재의 국명으로 바꾸었다. 1985년 수도가 이전되어 콜롬보 외에 정치적 역할을 하는 수도로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가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해상의 요지를 차지하며, 인구는 섬의 남서부에 집중해 있다.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의 국회의사당)
(콜롬보의 박물관)

최근까지 스리랑카의 수도로서, 콜롬보는 매력적인 도시일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점으로서 그리고 현재와 과거가 융해되는 도시이다.

콜롬보는 아직까지도 경제적인 중심지이다. 국제공항에서 34 km 저점에 위치해 있고, 수세기동안 번성한 항구도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오늘날에는 항구의 분주함이 상업, 금융, 쇼핑 지구와 잘 융화되어 있다. 원래부터 식민지 무역을 주도해오던 포르투갈, 네들란드, 영국인들이 현재 스리랑카의 교회와 기념비, 이름과 종교, 관습, 심지어 식사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전통을 파괴하고 많은 영향을 끼쳤다.

콜롬보는 인구 50만 정도에 15개의 지구로 나뉘어져 있다. 볼거리로는 불교사원과 힌두사원, 이슬람사원, 기독교 교회당과 같은 사원부터 국회의사당 건물, 공원, 동물원, 박물관과 미술 갤러리 등이 있다.

보통 한나절 여행을 하면 40 km정도를 커버하고 불교사원과 힌두사원 그리고 동물관과 거주지역을 볼 수 있다.

Nuwara Eliya 누와라 엘리야

차 재배지인 이 섬의 고원지대의 중앙에 위치한 산악지로서 콜롬보로부터 169km, 캔디에서 77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누와라 엘리야는 해발 1,900미터높이에 위치해 있으며, 영국 식민지시대의 향수가 가장 잘 서려있는 해발 1989미터의 피서지로 유명하다. 이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 2,524미터인 피두루탈라갈라(Pidurutalagala)산이 있다.
모든 공공건물, 집, 거리, 길, 공원 등은 옛 영국식으로 되어 있어 이곳의 맑고 시원한 산 공기를 마시며 가끔씩 내리는 비를 맞다보면 마치 영국시골에 와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라 한다.

이곳의 차는 고지대의 기후에서ㅓ 경작되기 때문에 가장 좋은 맛을 낸다 하며 이 일대를 둘러보면 차 재배와 가공의 전 과정을 견학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이곳의 18홀 골프코스도 유명한데 여행객에게도 오픈되어 있고, 근처의 학갈라(Botanical Garden)는 누왈라 엘리야의 명소이다.


Sigiriya 시기리야
폴론나루와로부터 66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시기리야는 가파른 경사길을 따라 370미터의 화강암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사자 바위(Lion's Rock)"가 사방으로 둘러싸인 밀림지대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중엽, 스리랑카 남쪽지역인 시기리아는 인도남쪽의 침략자로부터의 지배하에 있었다. 기독교가 수립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서기 4세기말까지 스리랑카를 "람바카나(Lambakarna)"왕조가 이끌었다. 람바카나왕조는 관개시설에 대해 관심을 갖고 투자하기 시작했다. 람바카나왕조의 마하센(Mahasen 3세기때 왕)왕은 거대한 저수지의 축조를 시작하였고, 이후, 그의 아들 카사파 1세(Kassapa 1; 477-495)에 의해 죽음을 맞히했던 다투세나(Dhatusena)왕 또한 저수지 축조에 심혈을 기울렸다.
부왕(父王)을 살해한 패륜의 왕 카사파 1세(Kassapa 1; 477-495)는 사자바위위에 기원전 475년에 요새겸 성채를 건축하게 된다. 정상에는 카파샤왕의 연회장, 목욕장, 왕궁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Anuradhapura 아누라다푸라
인구 99,000명으로 스리랑카 최초의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는 B.C. 500년경 수립된 고대도시로써, "아누루따(Anurudda)"라고 일반적으로 불려진다. 스리랑카 불교유적지의 핵심으로 일컫어 지고 있는 이 도시는 기원전 5세기부터 약 1,500년간 스리랑카의 수도였던 고대도시로서, 2000년 이상된 불교 유적이 무수히 많다.
아누라다푸라는 판두카바야(Pandukabhaya)왕에 의해, B.,C.380년에 스리랑카의 수도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고, 1017년까지 1,500여년간 수도로서 화려한 문명을 피었다. 웨와스(Wewas)로 알려진 저수지를 만들고, 관개시설을 확충함으로서, 농업은 번창하였다. 그때 만들어진 저수지는 지금도 사용할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B.C. 3세기경에 불교가 유입되면서, 아누라다푸라의 문화에 강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수많은 사원, 거대한 탑과 조각상들이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전성기에는 둘레가 80킬로미터에 달하는 외벽이 도시 외곽에 건축되었고, 이는 런던보다 넓은 지역으로, 도시외벽밖으로 나있는 문을 통해, 도시근교로 통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스리랑카의 건축학적 면에 있어, 지금 남아 있는 유적들은 아누라다푸라의 찬란한 역사를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

Kandy 캔디
콜롬보의 북동쪽116k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캔디는 14세기 스리랑카의 수도로서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해발 600미터의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스리랑카 제2의 도시로, 캔디 자치회가 1865년 지방자치제 법령에 의거 1866년 수립되었다. 최초 1939년 시장이 선출된 이후, 캔디의 정치은 지방자치장이 맡고 있으며, 1979년 법령이 개정되었다.
역사 자료에 의하면, 센카다가라푸라(Senkadagalapura;캔디의 옛이름)가 위크라마바후 3세(King Wickramabahu III)의 통치가 이뤄지는 1357 ~ 1374년에 만들어졌다. 일부 학자들은 지금의 와타푸루와(Watapuluwa)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칸투부루 누와라(Katubulu Nuwara)가 캔디의 옛 이름이었다고 주장을 펼치고 있는가 하면은, 일부 민속학자들은 위크라마바후(King Wickramabahu)왕의 왕비이름인 센칸다(Senkanda)를 따라 센카다가라(Senkadagala)라는 지명이 캔디의 옛명칭이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의 지명인 캔디(Kandy)는 단지 식민지시대에 "캔다 우다 라타(Kanda Uda Rata; 산악지역이라는 뜻)"의 영국식 발음에 불과하다.

최초 이곳에 도시를 수립한 위크라마바후 3세(King Wickramabahu III)이후, 뒤를 이어 15세기 1473~1511년동안 통치했던 세나삼마타 위크레마부후(Senasammata Wickremabahu)가 캔디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발전시켰다. 캔디는 역사와 도시풍경이 1818년에 일어난 반란으로 영국통치가 강화되기 시작된 이후, 급격히 변화를 맞게 되었다. 로리(Sir Lawrie)의 기사에 의하면, "1818년의 반란때, 캔디지역에서의 영국법은 수치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된 가문들은 거의 죽음을 맞히했다. 총과 칼에 살아남은 이들중 콜레라와 천연두, 영양결핍으로 수백명이 죽어갔다. 사람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냉담해져 갔다. 그 뒤, 많은 해를 거듭해가는 동안 정부의 노력은 시작과 포기만이 계속되었다."라고 당시 반란의 여파를 서술하고 있다.
14세기 수립된 도시인 캔디는 많은 변화를 겪는 동안, 황조의 최후 성채로 남아 있다. 비록 콜롬보가 교역, 행정의 중심으로 스리랑카 제1의 도시인 반면, 캔디는 풍부한 역사 유물을 가진 스리랑카의 제 1의 문화 중심지이다.

Polonnaruwa 폴론나루와

콜롬보에서 216킬로미터, 시기리아에서 66킬로미터, 아누라다푸라에서 10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폴론나루와는 화려했던 중세시대(11세기 ~ 12세기) 스리랑카의 수도였다. 11세기초 남인도 타밀족의 침입으로 타격을 받은 아누라다푸라에서 포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오늘날 이 옛도읍에 남아있는 유적은주로 위자야 바후 1세와 프라크라마 바후 1세 등 두왕때의 것으로, 사원과 수도원, 그외 많은 건축물 등의 12세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스리랑카 중세시대의 찬란한 문화를 잘 보여준다.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고, 공원과 정원이 많이 있으며 많은 유적들은 녹음속에 우뚝 서 있다. 근처에는 1000곳이상의 관개용 저수지가 있는데,

그 중에 "프라크라마의 바다"라는 뜻을 가진 "프라크라마 사무드"라는 바다와 같이 크다.

포론나루와의 유적들은 남북으로 일렬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관광하는데 무척 편리하다. 제일 남쪽에는 방형의 정원을 둘러 싼 건물군과 프라크라마 마후의 궁전, 파비리온, 왕실의 목욕탕 들이 있다. 궁전은 1층의 대홀이 200여평 정도되며 처음에는 7층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2층만 남아 있다. 북쪽 약 1.5킬로미터정도를 가면, 탕카디파카위하라야가 있는데, 300여평의 거대한 법당은 프라크라마 바후가 건립한 것이며, 현존하고 있는 높이 16.8미터의 벽(지붕은 무너져 없어 졌음)만이 과거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다시 북쪽으로 45킬로미터가면 가장 귀중하고, 소작한 기념비인 갈위하라가 있다.

(결혼식 장면)
('토토'라 불리우는 삼륜 택시)
(스리랑카 투어의 하일라이트 야생 코끼리 투어)

'여행(旅行)' 카테고리의 다른 글

43. 서인도제도 바베이도스  (0) 2010.11.03
42. 태국 방콕  (0) 2010.11.03
40. 세이셀공화국 라디게 섬  (0) 2010.11.03
39. 싱가포르  (0) 2010.11.03
38.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  (0) 2010.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