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나서(讀書後)

조용한 행복 - 세 평짜리 오두막 수행자가 보내는 산중편지 / 도현 스님

含閒 2010. 7. 19. 19:01
저자
도현 지음
출판사
2010-01-28 출간 | ISBN 10-8901105551 , ISBN 13-9788901105550 | 판형 A5 | 페이지수 331
최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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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다소곳이 홀로 자신을 돌아보라! 도현 스님의 편지글 모음집
승려 생활 45년 여 동안 선방과 산속을 오가며 수행해 온 도현 스님이 25년 동안 쓴 200여 편의 편지글을 가려 엮은 『조용한 행복』. 도현 스님은 16년째 지리산에서 세 평짜리 작은 오두막을 지어놓고 홀로 수행하면서 자신만의 소박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 책은 도현 스님을 지도법사로 한 선재회에서 스님이 선재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 중 일반인들이 읽고 수행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64편 글을 추려 만든 것이다. 한 편 한 편의 맑고 따스한 글들에는 오두막 수행자가 살아온 외길 인생을 정리한 수행일기이자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는 깨달음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저자소개

저자 도현 스님
“어느 봄날 걸망을 지고 시골 길을 가다가 힘이 들어 따뜻한 논두렁에 기대어 죽어진다 하더라도, 언제나 진실해지려고 하는 구도심 하나를 꼭 챙기고 죽는다면, 비록 남이 그대를 보고 객사를 했다 할지라도 중노릇은 참 잘한 것이네. 중은 그럴 각오가 되어야 하네.”
열다섯 살의 나이에 덕명 스님을 은사로 범어사로 출가했다. 쌍계사 금당선원의 선덕을 지낸 것 외에 승려 생활 45년여 동안 세상에 드러나는 삶 대신에 선방과 산속을 오가며 수행했고, 5년간 태국에서 위파사나 수행법을 공부했다. 수행자 시절의 붓다를 동경하여 부처님 초기 수행법대로 살고 있으며, 지금은 16년째 지리산에 세 평짜리 작은 오두막에서 홀로 수행하면서 자신만의 소박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목차

한생, 안 난 요량해라!
송광사에서
일상 속에서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조그만 행복
소박한 꿈
고요한 즐거움
여정에서
비 오는 날
행각을 다녀와서
바로 믿는 불교
양생과 소요
화리생련火裏生蓮
뜰을 바라보며
가랑잎에 부쳐
자신을 경책함
아란야 단상 1
아란야 단상 2
아란야 단상 3
아란야 단상 4
아란야 단상 5
삶의 향기
알 수 없어요
지금 이대로
물같이 바람같이
풍경 소리
봄이 오는 길목에서
조용한 귀가
삭발 목요일
하안거 해제
무상의 계절
침묵 속에서
겨울 가고 봄이
한가로운 날에
우중 안거雨中安居
여름 가고 가을이
스스로 만드는 행복 1
스스로 만드는 행복 2
스스로 만드는 행복 3
스스로 만드는 행복 4
겨울 산거
봄이 오네
산중 한거
사람이 귀한 곳
폭풍우 속에서
가을 반나절
첫 눈
목연안미소?然顔微笑
수성겁외류水聲劫外流
회두차안回頭此岸
상락아정常樂我淨
사고팔고四苦八苦
꿈이 잠든 계절
또 봄이 오네
이것 또한 변한다
선택의 여지
새에게서 배운다
달밤에 일어나 체조하다
부목행자負木行者
어울림 속에 나도 하나
긴 만남 짧은 이별
사색의 계절
현법낙주 現法樂住
산을 넘어 다시 산으로

 

출판사 서평

세 평짜리 오두막 수행자가 보내는 산중편지
아침 이슬, 낮의 태양, 소슬한 바람, 숲의 향기, 새들의 날갯짓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존재하는 삶을 배운다.

쌍계사 금당선원의 선덕禪德을 지내고, 선방 수좌사회에서 손꼽히는 차세대 선지식인 도현(道玄, 62) 스님이 25년 동안 쓴 200여 편의 편지글을 가려 엮은 <조용한 행복>을 뜰에서 출간하였다.
하늘 아래 첫 동네로 손꼽히는 화개계곡 의신마을에서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주인을 닮은 소박한 집과 잘 정돈된 마당이 나타난다. 이곳은 서산 대사의 스승인 부용영관 스님이 머문 터로, 도현 스님은 흙과 짚을 이용해 직접?지은 세 평짜리 오두막에서 16년째 홀로 수행하고 있다. 열다섯 살의 나이에 출가하여 승려 생활 45년 동안 세상에 드러나는 삶 대신에 선방과 산속을 오가며 수행했고, 5년간 태국에서 위빠사나 수행법을 공부한 도현 스님은 불교사 중에서, 부처님의 수행자 시절과 처음 이십 년 계율의 제정이 필요 없었던 때를 순수 불교 시대로 보고 그때의 붓다를 동경하여 지금껏 부처님 초기 수행법대로 살고 있다.
1986년 5월 도현 스님을 회주(지도법사)로 알음알음 만나던 이들이 선재회라는 이름으로 십시일반 정성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돕기 시작했다. <조용한 행복>은 25년 동안 도현 스님이 선재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 속에서 일반인들이 읽고 수행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64편 글을 추려 만들었다. 이 책은 한 오두막 수행자가 살아온 외길 인생을 정리한 수행일기이자 세상 사람들에게 보내는 깨달음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촛불과 호롱불이 전기를 대신하고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오두막 삶은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극히 불편한 삶이지만, “불편하고 고독해야 내면을 응시할 수 있다”고 말하는 스님은 나무하고 불 떼는 그 과정 자체도 수행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매사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삶은 스님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가장 잘사는, 가장 스님다운 삶으로 칭송받는다.
법정 스님이 칭찬했다는 그의 글 솜씨는 오랜 세월 일기처럼 써온 편지글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마치 그윽한 차 한 잔을 놓고 읽는 글처럼 한 편 한 편의 글들이?맑고 따스하다. 이 책을 통해?청정하면서도 청빈한 수행자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아, 저런 삶도 있구나’ 하는 동경심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마음 다스리는 법을 배운다.

고요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해야만 하고, 무엇인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다.
집착이 사라진 뒤에야, 나는 비로소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고요의 세계를 보기 시작했다.

사회의 리더로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했던 사람도 나이가 들게 되면 자기 관리가 되지 않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럴까? 밖으로 남을 잘 관리하느라 안으로 자기 관리하는 노하우를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비로소 자기를 다스리는 공부를 하려 하지만, 목말라 샘 파는 격이다.
이렇듯 겉으로 화려하고 큰 것을 선망하고, 남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는 사람에게 도현 스님은 ‘다소곳이 홀로’ 자신을 돌아보는 수행을 통해 조용한 행복을 누릴 것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수행이란 엄격하고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만, 자연스러운 호흡만으로도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스님의 행복론이다. 명상할 시간이 충분히 없다고 생각될 때 숨 쉴 시간은 있는지 살펴보고,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수행하는 기회라는 점에 착안하여 무엇을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마음을 집중하라는 것이다.
스님의 글은 어렵지 않고, 현실의 삶과 동떨어져 있지도 않다. 오히려 생업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내면의 자신을 챙길 수 있는지 자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수행이라는 것이 어느 먼 산속이나 선방 안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업에 몰두하면서도 순간순간 자신을 챙길 수 있는 법임을 스님은 강조한다. 차근히 위빠사나 수행법과 선 수행법을 알려주는 스님의 글들을 읽다 보면, 분주한 마음도 어느 순간 놓을 수 있고, 의식 없이 호흡하던 순간을 돌이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 찰나찰나를 경험하게 만든다.
마치 낮에는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고 퇴근하면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일상에서 우리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그때그때 끝내고 나서는, 늘 호흡이 들어가고 나올 때 배가 나오고 들어가는 것을 관찰하면서 여기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으로 온 곳도 이곳이고, 또 이 세상을 떠나는 곳도 이곳이며, 모든 생존의 활동이 이 숨쉬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몸으로 수고해서 길道을 닦고 마음으로 즐기는 길道을 실시간을 사는 길道이라고 믿는 스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주인된 자세로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면서 스스로 즐기는 현법낙주現法樂住의 삶을 강조한다.
무엇인가 해야만 하고, 무엇인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여, 밖으로부터 행복을 찾았던 사람이라면,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으며, 진정한 행복은 조용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숨 쉬고 있는 지금을 알아차리고 즐기기만 한다면 말이다. 행복은 남과의 비교우위에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책속으로
건조한 날씨로 메마른 마당에 웅덩이 물을 흠씬 뿌려놓고 마당가 의자에 앉아 호흡을 고르다 보면, 뜰에 찾아드는 햇살이 풀 끝에 매달린 이슬을 영롱한 보석처럼 반짝이게 한다. 뜰 가득 보석을 뿌려놓고 부엌으로 내려서서 군불을 지펴놓고 바깥을 내다보니, 늘 짹짹거리며 돌아다니던 다람쥐가 저만치 다가와서 돌 위에 오도카니 서서는 알밤을 두 손으로 돌리면서 나를 쳐다본다. 연신 이리저리 몸놀림을 하다가 꼬리를 쳐 보이며 “스님! 알밤은 이렇게 까먹는 거예요” 하고는 밤 껍질을 벗겨서 퉤퉤 뱉고는 밤 살을 옴약옴약 갉아 먹는다. 속으로 ‘아이고, 조 귀여운 놈’하다 보면, 먹던 밤은 놓아버리고 쫄랑거리며 나무 위로 올라간다. <가을 반나절> 중에서 248-249쪽
나는 비록 회신에 지나지 않는 글이지만 오래전부터 글을 써왔고 말을 해왔다. 그러나 쓰고 말하면서도 늘 미진한 것이 있었다. 과연 내가 쓰고 말하는 대로 살고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칠십 퍼센트는 사는 것이고 삼십 퍼센트는 동경하는 것이라 실제 내 사는 것보다 글과 말이 늘 앞서 나간다. 이것이 항상 마음의 숙제였는데, 이번에 바다 내음 그리워 길을 나섰다가 참 좋은 스승을 만났다. 말없이 은근히 웃어주던 동백꽃 스승을…….
그래서 그동안 내가 배우고 익히고 말하고 행동한 모든 것을 한자루에 집어넣어 입을 꼭 묶어서 한쪽에 두고, 포도주를 담아서 어둡고 서늘한 굴속에서 숙성시키듯 해야겠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하니까 평소 지내듯 하지만, 마음속에 빗장을 걸어둔 창고를 하나 마련해두고 없는 듯이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 얼굴에도 속 깊은 곳에서 스며나오는 엔도르핀이 얼굴빛을 좀 부드럽게 해주지 않을까 싶다. <묵연안미소> 중에서, 257-258쪽
현재의 상황에서 즐겁게 머물 수 있는 사람만이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고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그 자체가 행복이라 생각한다. 진실을 마음의 중심에다 세우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생활을 꾸려나간다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모습에 무한한 애정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은거해 살면서 본분을 성실히 하는 것과 환경친화적인 삶을 살면서 요즈음 사람들에게 이게 얼마나 필요한지 느낌표 하나 주는 것으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다.
아침에 그칠 것 같은 비가 다시 내린다. 코펠에 올려놓은 누룽지가 끓으며 고소한 향기를 낸다. 다시 무엇을 바라랴.

책속으로

낙엽이 지는 가을 산을 바라보면서 언뜻언뜻 떠오르는 말, ‘한생生, 안 난 요량해라’ 하시던 말씀, 경봉 스님의 법담法談이 생각난다.
이십사오 년 전 통도사 극락암에서 동안거를 보낼 때, 어느 하루 볕이 따사롭던 오후에 스님께서 거처하시던 삼소굴三笑屈 방문을 두드렸다.
“누고!”
“선방 수좝니다.”
“들어온나.”
미닫이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서니, 마치 시장 바닥에 전을 벌려놓고 앉은 사람처럼 스님께서는 지필묵과 일용에 쓰시는 물건, 그리고 신도들이 공양한 수건, 양말, 내의 등등의 것들을 편한 대로 놓아두고 그렇게 앉아 계셨다.
가까스로 설 자리를 잡아 삼배를 올리고 앉으니,
“그래 무슨 일이고?”
“어떻게 하면 중노릇을 잘할 수 있는지, 스님 법문 좀 들으려고 왔습니다.”
스님께서는 그 말에는 대답을 안 하시고 대뜸,
“니 이름이 뭐꼬?”
“길 도道 자, 검을 현玄 자 도현입니다.”
“그 뜻이 뭐꼬?”
“이름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스님께서 물으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그래?”
스님께서는 잠깐 말이 없으시더니,
“중노릇 잘할라믄 한생, 안 난 요량해뿌라!”
달리 사족을 달아 설명도 안 해주시고 그뿐이었다.
앉아 있어봤자 더 말씀하실 것 같지도 않아 삼배를 하고 되돌아 문을 열고 나오는데,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지 이름도 모르는 기이……” 하시기에 스님을 되돌아보며 웃고 나왔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선명한 것은, 스님께서 일러주신 법문이 나의 정곡을, 마음의 핵심을 찔러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한생生, 안 난 요량해라.”
말인즉 쉽지만 정말 한 세상 안 난 셈치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해야만 하고, 무엇인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한생, 안 난 요량해라!> 중에서 13-14쪽
사실 사람들이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얼마나 많은 주변의 인연에 끌려 다니며 살고 있는가. 체면 때문에, 돈 때문에, 명예 때문에, 마누라 때문에, 남편 때문에, 자식 때문에, 친척 때문에, 집 때문에, 자가용 때문에…… 이 숱한 ‘때문에’ 때문에 자기답게 못사는 것이 아닌가. 이 ‘때문에’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우리는 주변의 눈치 볼 것 없이 저마다 진실한 자기에 의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중에서 42쪽
오래전에 내가 모시고 살던 노스님 한 분이 말씀하시기를, “중노릇은 나중에 나이가 많아 의지가지없는 처지가 되어서, 어느 봄날 걸망을 지고 시골 길을 가다가 힘이 들어 따뜻한 논두렁에 기대어 죽어진다 하더라도, 언제나 진실해지려고 하는 구도심 하나를 꼭 챙기고 죽는다면, 비록 남이 그대를 보고 객사를 했다 할지라도 중노릇은 참 잘한 것이네. 중은 그럴 각오가 되어야 하네”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번잡한 도시보다도 시골의 호젓한 정취를 즐기며 살아야겠다고 꿈꾼 것도, 이 노스님의 이야기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왕에 중이 될 팔자였다면, 훤칠한 인물에 만인의 우러름을 받으면서 법좌에 앉아 사자후를 해보는 것도 좋았으련만 하고 생각도 해보지만…… 역시 중은 바지저고리에 걸맞게 좀은 예스럽고 촌스럽게 사는 게 좋겠다. <소박한 꿈> 중에서 49쪽
일주일 전에는, 오래도록 불이 들지 않아 불을 지필 때마다 매캐한 연기에 눈물깨나 흘리던 방을 손수 고쳤다. 아궁이에 솥을 떼어내고 굴뚝을 해체해놓고, 대나무를 가져다가 구들 밑을 여기저기 쑤셔대며 그을음이 엉겨 붙은 것을 뚫어내었다. 흙을 퍼다가 진흙을 만들어 다시 굴뚝을 쌓고 솥을 걸어 말끔히 해놓고 불을 지피니, 불길이 구들 밑으로 빨려들고 굴뚝에는 검은 연기가 펑펑 솟아났다. 두어 시간 불을 때고 방바닥을 점검해보니 방이 고루 따시다.
토굴살이 안 해본 사람이 이 행복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면서, 혼자 신이 나서 부엌으로 굴뚝으로 들락거렸다. 살다 보니 내 날이야 하는 날도 있고 행복감에 겨운 순간들도 있어서, 있는 그대로 적어보고 맺는다. 지금 이 순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현재의 순간을 기쁘게 누릴 것이다.
<한가로운 날에> 중에서, 198-1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