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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 4대 미인 2 - 왕소군(王昭君)

含閒 2008. 12. 30. 10:35

중국 4대 미인 1 - 서시(西施) 

이름

서시

(西施)

왕소군

(王昭君)

초선

(貂蟬)

양귀비

(楊貴妃)

별칭

침어(浸魚)

낙안(落雁)

폐월(閉月)

수화(羞花)

나라

월(越)

한(漢)

후한(後漢)

당(唐)

 

◆ 한나라의 왕소군 (王昭君)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 "기러기가 날개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다 "

한 (漢)나라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이다. 한나라 원제는 북쪽의 흉노과 화친을 위해 왕소군을 선발하여 선우와 결혼을 하게 하였다. 집을 떠나가는 도중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이나 금(琴)을 연주하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에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 한나라 초기 흉노의 선우들은 동호와 월지를 격파하여 고비사막 등 서역일대를 점거하고 그 세력을 모아 남하하며 한나라를 위협하였다. 이러한 흉노의 위협에 직면하여 한고조 유방은 흉노를 친히 정벌에 나섰으나 오히려 포위되었으며 식량부족으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고조는 곧 엄청난 물품을 바치고 선우의 처(흉노어로 연지라고 함)를 중개자로 매수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녀의 중재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풀려난 대가로 한과 흉노는 화친정책 곧 혼인동맹을 맺어야 만 했다. 혼인동맹은 한나라 황제의 종실 중에 여자를 선택하여 흉노 선우의 연지(곧 부인)로 보내고 해마다 비단, 식량 등 각종의 물품을 보내주는 일종의 국가간의 외교적 관계를 의미하였다. 화친정책이 한나라에 불리한 불평등조약이라는 것은 선우라는 칭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선우'는 흉노어 '장리호도선우掌犁狐塗禪于'의 줄임말인데, 장리掌犁는 천天, 호도狐塗는 자子로, 곧 천자天子의 의미이다. 사실상 한나라 황제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하늘 아래 두 명의 천자가 존재할 수 없었으나, 이제 군사적 열세에 있던 한나라가 화친정책을 통해 자기 외의 또 다른 오랑캐 천자를 인정해주어야 했던 것이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고대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왕소군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흉노에게 시잡가는 운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서』 흉노전에 따르면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에 도착하여 한의 여인과 결혼할 의사를 표시하였으며, 한의 원제는 왕소군을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선우는 그녀를 마음에 두었으며 그녀를 영호연지로 칭하였다. 그리고 훗날 한 명의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왕소군은 중국 전한 원제의 궁녀였다. 궁중에는 궁녀가 많았기 때문에 원제는 궁중의 화가 모연수에게 궁녀들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그중에서 미인만을 골라 총애하였다. 그렇게 되자 궁녀들은 모두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을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아 아름다운 미모에도 불구하고 항상 추녀로 그려져 황제의 시선을 한 번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기원전 33년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수도 장안으로 들어와 황제를 만났다. 원제는 흉노와의 화친을 유지하기 위해 늘 추녀로 올라오던 왕소군을 지명하여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하였다. 하지만, 하직 인사를 올릴 때의 왕소군의 모습은 그림 속의 추녀가 아니었다. 황제가 선우와의 약속을 깰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왕소군을 추하게 그린 모연수를 참형에 처하는 것으로 분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뜻밖에 절세미인을 맞게된 호한야선우는 어쩔 줄을 모르고, 왕소군은 눈물만을 흘리며 정든 궁궐을 떠나는 비련의 여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 무제 시기에도 강도왕의 딸 세군, 초왕의 딸 해우 등이 화친정책의 희생물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친정책의 효과는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흉노가 늘 화친을 파기하고 변경을 위협해왔기 때문이며, 이러한 화친정책의 한계로 한과 흉노의 혼인관계의 횟수는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화친정책은 한나라가 스스로 문명국이자 정통왕조로 자처하였지만, 늘 이민족의 새로운 천자를 인정하고 그들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으며, 이민족 지역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둘 수 없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 교양세계사, p.166~167, 동서역사문화연구회, 2007. 4, 우물이 있는 집 中에서

 

 

 

출처 : 세상을 다 담을 수는 없지만...
글쓴이 : 黎明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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