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현들의 풍류기 술. 멋. 맛
지은이: 원융희 출판사: 기문사
책 머리에 동서고금을 통하여 술 예찬에 관한 글귀들은 수 없이 많다. 그 중에서 중국의 이백은 술을 다음과 같이 극찬한 바 있다. 하늘이 술을 사랑 않으면/하늘에 술별 없었으리라/땅이 술을 사랑 않으면 / 땅에 술샘 없었으리라/하늘과 땅이 술을 한결같이 사랑하니/애주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으리/청주는 성인에 비하고/탁주는 현인과 같다네/성인과 현인을 이미 마셨거늘/기필코 신선이 되길 원할쏘냐/선작이면 대도에 통하고/한말이면 자연에 합친다/오직 술꾼만이 취흥을 알 것이니/아예 맹숭에겐 전하지 말지어다. 이같이 이백은 술에 대하여 찬미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뒤질세라 우리의 선조들의 술에 관한 이야기나 글귀 또한 풍성하게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산재되어 있거나 구전에 그치고 있어 쉽게 접할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없다는 것은 아쉽기 한이 없었다. 이에 술의 이해편과 더불어 시대별로 옛 선조들의 술에 대한 지혜로움과 풍류기를 소개하여 오늘을 살아가는데 여유와 도움이 되고자 엮게 된 것이다. 옛부터 '술은 최고의 음식이며 최고의 상태로 유지시켜주는 정수이며, 인류문화 발전이래 정성스럽게 바쳐온 제천의 공물인 동시에 사람이면 누구든지 정다운 생활의 벗으로 여겨온 때문이다. 이 소책자가 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관심과 보탬의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술을 멋있게 마심으로써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어 가는 주도문화의 창조에 일익이 되엇으면 한다. 끝으로 예 주선들의 명문들을 후손에게 보일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모든 이에게 고마움을 책 머리 속에 함께 남겨두고자 한다. 용인 양지 골에서 인산 원융희 씀 술이 담긴 고전의 이해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똥 바슐라르는 물질의 4대 원소인 흙, 물, 불, 공기에 관한 이미지 연구로 대성을 이룬 인물이다. 그는 이 연구에서 '술'이란 놈을 놓고 처음엔 적잖이 당황했었다. 왜냐하면 술을 물인 동시에 불이기 때문이요, 물과 불은 정 반대의 성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술이 물의 성질과 심상을 지녔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불과 상극 관계인 물이 불에 탄다는 것은 화학도 들에게는 알코올의 산화 현상으로 간단히 설명될지 몰라도 심리학이나 미학 쪽에서 보면 신비일 수밖에 없다. '불타는 물' 그것은 차라리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술의 이러한 신비성은 술의 효용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다. 술의 효용을 심리적 표현에서 보면 소극적 기능과 적극적 기능으로 나눌 수 있다. 소극적 기능은 긴장의 이완과 억압의 해소이며, 적극적 기능은 의욕의 부양과 흥분의 증폭이라 하겠다. 괴로울 때 취하고 싶은 것은 전자에 해당하고,즐거울때 마시는 것을 후자에 해당한다. 이처럼 술은 그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언어의 예술이다.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이성의 산물이 아닌 감정의 결실이다. 신비의 액체, 술은 원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성을 부추기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술과 술, 문학과 술을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 없음이 숙명이다. 우리 나라의 문학 속에는 우리의 사상과 정서가 담겨져 있고 우리의 고전 속에는 우리의 생활과 역사가 숨쉬고 있다. 그렇다면 고전 속에서 술은 어떤 기능을 하고 있을까? 편의상 장르별로 더듬어 가며 술과 고전의 친교현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조에서 설화까지는 술과 고전이란 주제로 1989년 12월부터 1990년 6월까지는 이혜화 박사께서 기술한 내용이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고려말에 발생한 시조는 조선조에 와서 성하여 위로는 군왕으로부터 아래로는 무명의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두루 사랑을 받았거니와, 술좌석에서고 즉흥적으로 부르고 화답할 수 있는 양식적 특성 때문에 술을 소재로 하거나 취락을 주제로 한 시조의 작품은 유난히도 많다. 대추볼 붉은 밤은 어이 듯들으며/벼 벤 그루에게는 어이 나리는고/ 술 익자 체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황희- 가을이 무르익으니 대추, 밤이 먹음직스럽게 익어간다. 햇대추,햇밤 알을 안주 삼아 국화주를 마심도 운치 있는 일일 터이어니와 논바닥에 게가 몰려오니 이야말로 안주 감으로는 십상이다. 이 기분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체장사가 동네 들어와 "체 사시오!"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다닌다. 체는 술 거를 때 쓰는 도구다. 하기야 옛날 주당들은 가양주를 담가 놓고 체가 없으면 베두건으로도 걸러 먹었다 하니 체 없어 술을 못 먹으랴만 시기를 맞춘 체장사 출현이 한층 구미를 보태는 것이다. 정작 술꾼은 안주도 가리잖고 청탁도 불문이다. 그저 술이란 이름만 붙었으면 술술 잘 넘어간다. 주객이 청탁을 가리랴 다나 쓰나 마구 걸러/ 잡거니 권하거니 양대로 먹으리라. / 취하고 초당 밝은 달에 누웠은들 어떠리. -실명씨- 그러다 보니 술꾼이 술을 못 구해 안달하는 모습은 애연가가 버려진 꽁초 찾느라 쓰레기통 뒤지는 만큼이나 가긍하다. 시성 두보는 처자가 굶은 판국에 피난지에서 받은 구호미를 팔아 술을 사 먹었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뒷집에 술쌀을 꾸니 거친 보리 말 못 찬다./ 즈는 것 마구 찧어 쥐빌어 괴어내니/ 여러 날 주렸던 입이니 다나 쓰나 어이리. -김광욱- 이렇게 마셔대니 제 정신이 아니다. 시간 관념이 없으니 날짜 가는 걸 알 턱이 없고 어디서 먹었는지 공간 관념조차 없다. 날이 언제런지 어제런지 그제런지/ 월파정 밝은 달 아래 뉘 집 술에 취하였던지/ 진실로 먹음도 먹었을새 먹은 집을 몰라라. -실명씨- 그러나 술이라 하면 말 물켜듯(사설시조) 하는 이런 이들은 폭주가일지언정 애주가는 아닐 성싶다. 주흥을 제대로 즐기고자 하는 이들은 좀 까다로운 장식이 필요하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니/ 언제면 꽃 아래 벗데리고 완월장취하리오. -이정보- 꽃과 술, 달과 벗 이 넷을 사미라 했다. 꽃 그늘 아래서 달구경하며 마음 맞는 벗과 주거니 받거니 마시는 술, 그래서 밤 깊도록 마시고 마셔도 주흥은 더욱 도도해지는 것이다. 어떤 작품에서는 '거문고 가진 벗'이라고 했으니 풍악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이렇게 고루 조건을 갖추는 일이 흔치 않았던지라 이미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마냥 행복하겠단다. 술 얻으면 벗이 없고, 벗 얻으면 술이 없다. 오늘은 무슨 날고? 술 있고 벗 있다. 두어라 이난병이니 종일취하리라. -실명씨- '두어라' 는 더 이상 바라지 않겠다는 안분에서 나온 슬기로운 체념이다. 그러나 벗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은 주객들만의 예기가 아닐 것이다. 소월이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에서 좋아라/ ...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님과 벗' 하면서 벗과 술 외에 놓치지 않았던 '님'말이다. 금준에 술을 부어 옥수로 상권하니/ 술맛도 좋거니와 권하는 임 더욱 좋다./ 아마도 미주미행은/ 너뿐인가(하노라.). -실명씨- 강릉가면 흔히 듣는 말이 '경포대에는 달이 6개' 라는 것이다. 하늘에 하나, 바다에 하나, 호수에 하나, 그리고 술잔 속에 하나, 나머지들은 님의 두 눈동자에 각각 하나씩이란다. 님과 벗이 각기 상보적 매력과 가치를 가진다 해도 굳이 고르라면 주우쪽보다는 아무래도 주색쪽이 승할 듯 싶다. 다음과 같은 호색한의 시조 맛을 보라. 금준에 주적성과 옥녀의 해군성과/ 옥내의 해군성이/ 양성지중에 어느 소리 더 좋으냐?/ 아마도 월침삼경에 해군성이 더 좋아라. -실명씨- 금동이에 술 따르는 소리도 좋지만 더 좋은 건 미인이 치마 벗는 소리란다. 꽃으로 술을 빚어 무궁무진 먹사이다 세사에 이해 못할 일이 어디 한 두 가지랴마는 우리가 정말 이해못할일 가운데 하나가 등산인가 한다. 휴일에 하루 이틀 소풍 삼아 가족이나 남녀 벗과 더불어 가까운 산에 올라 손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자연의 고마움과 인정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돌아오는 정상인의 산행이야 누가 이해 못하랴만, 수주일 씩 직장도 팽개치고 떼돈 들여가며 히말라야니 알프스니 하는 험산에 도전하여 꽃같은 목숨을 건다는 것은 얼른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독립투사가 아니고, 종교의 자유와 포교를 위해 목숨을 건 순교자는 더구나 아니다. 통일을 외치며 고층에서 뛰어 내리는 운동권 학생이나 노동해방을 부르짖으며 휘발유 불꽃 속에 산화하는 노동자는 그대로 자기 죽음의 값을 톡톡히 받아 내겠다는 계산이나 있지만,설산의 빙벽이나 험산의 계곡에 몸을 내던지는 등산가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이다. 제 1차 세계대전후 유럽의 산사람들이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의 정상인 에베레스트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하여 30여년을 두고 숱하게 도전했으나 매번 참패였다. 그러나, 1953년 5월29일 정오, 영국등반대의 힐러리(Sir E.P.Hillary)란 사람은 드디어 이 일을 해냈다. 참으로 장한 일이었고, 그는 일약 영웅이 되었다. 그런데 기자가 그에게 당돌한 질문을 했다. "당신은 뭣하러 산에 올라가오?" 턱없이 흥분하여 우쭐거리던 이 친구가 뭐 할 말이 있나. 얼결에 한다는 소리가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 (우물쭈물)"이다. 술꾼이야말로 이해 못 할 사람들이다. 돈 버리고 몸 버리고 종종 명예조차 담보하고 가정파탄까지 불가하면서 왜 술을 먹느냐 이말이다. 그것도 식사 때 한두잔 하는 반주나 즐거운 자리에서 기분좋을 만큼 마시는 애주는 이해 못할 바 아니로되, 대취,만취,주야장취 이래서야 직성이 풀린다니 정말 이해 못할 일이다. 등산가 이야기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당신은 뭣 하러 술을 마시오?" 는 우문이고, "술이 거기 있기 때문에!" 는 현답이다. 술먹고 비틀걸음 칠제 술을 먹지 말자 맹세하였더니/ 술 보고 안주 보니 맹세도 허사로다./ 아이야, 술 가득 부어라 맹세풀이 하자. -실명씨- 술끊기, 담배끊기, 여자 끊기만큼은 맹세하지 말일이다. 외람 되나마 예수님 말씀 좀 인용하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마태5:33-34) 술을 내 아더냐 광약인 줄 알건마는/ 잔 잡아 웃음나니 일배 일배 부일배라./ 유영이 이러함으로 장취불성하니라. -신희문- 멀쩡한 사람을 미치게 하는 술이 정녕 광약일시 분명한데,"첫잔은 사람이 술을 마시고,둘째잔은 술이 술을 마시고,세째잔은 술이 사람을 마신다."고 부처님이 누누이 타이르셨건만 그걸 알면서도 한 잔, 한 잔 다시 한 잔, 그러다 보니 취생봉사라. 유영이란 이는 중국 진나라 죽림칠현의 하나로 주량기본이 열 말인데다 닷말을 마셔야 비로소 해장이 된다는 술꾼이다. 술꾼들이 매양"술이 거기 있기 때문에"식 답변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나름의 핑계가 있다. 그 핑계 중에 대표적인 것이"근심을 잊으려고"이다. 이러니 저러니 말고 술만 먹고 노세그려./ 먹다가 취하거든 먹은 채 잠이 들어/ 취하여 잠든 덧이나 시름잊자 하노라. -실명씨- 세상 시름이 백팔 번뇌인지 팔만사찬 번뇌인지 모르나 어찌 됐건 맨 정신으로는 괴로워서 못 살겠으니 술에 취해 잠든 동안이나 잊어보자는 것이다. 옳은 일 하자 하니 이제 뉘 옳다 하며/ 그른 일 하자 하니 후에 뉘 옳다 하리/ 취하여 시비를 모르면 긔 옳은가 하노라. -실명씨-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불의에 온 몸으로 부딪쳐 보니 그거야 달걀로 바위 치기지. 그렇다고 역사의 심판을 각오하고 낯두꺼운 속물이 되어 부정한 무리와 같은 배를 탈수는 없다. 그래서 빈허 현진건은'술 권하는 사화'라고 했다. "본 전신 가지고는 피를 토하고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하지, 하루라도 살 수가 없단 말이야.흉장이 막혀서 못 산단 말이야!"하고 울부짖는 남편 .몸생각 해서 술좀 작작 마시라는 아내. 술을 먹고 싶어 먹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술을 권해서 어쩔 수 없이 먹는다는 남편.'사회'가 어떤 술집이름 이거나 작부 이름쯤 되는 줄 아는 숙맥 같은 아내, 이래서 답답한 남편이 갈곳은 다시 술집밖에 없다는 거다. 술을 취케 먹고 두렷이 앉았으니/ 억만 시름이 가노라 하직한다./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시름 전송하리라. -정태화- 시름의 해소는 앞에서 말한 바 술의 효용 중 소극적 기능이라 하면, 적극적 기능이 또 있다. 말하자면, 기뻐할 일이 있거나 즐거운 자리가 마련됐을 때, 이 기쁨과 즐거움을 강화하고 심화하는 구실이다. 한잔을 벅사이다. 또 한잔 먹사이다./ 꽃으로 술을 빚어 무궁무진 먹사이다./ 동자야 잔 가득 부어라 취코 놀고하리라. -실명씨- 옛날 어떤 사내가 술만 먹으면 하도 주정을 해대서, 시달리던 아내가 한 번은 술 달라는 남편에게 맹물을 주었더란다. 아니나 다를까 맹물 몇 잔 따라 먹고 주정이 태심하니 아내는 견디다 못해 "여보, 그게 술이 아니라 맹물인데 당신을 맹물 먹고도 주정을 하오?"하고 쏘아 붙였단다. 그러자 머쓱해진 사내왈"어쩐지 좀 싱겁더라니!"이런 술꾼은 술이 가진 정서적 가치를 몰각한 저질이다. 이에 비하면 꽃으로 술을 빚는 사나이야말로 술멋을 아는 이다. 술 시조라면 송강 정철의 사설시조 '장진주사'를 빼놓을 수 없다. "한 잔 먹세그려... ."이렇게 시작되는 권주가, 이것은 저 이백의 '장진주'와 함께 ㅅ의 공허감을 달래주는 수작이다. 인생무상을 느낄 때 생에 대한 집착은 강화되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노, 병, 사, 의 검은 그림자를 보면서 '노세 노세 젊어 노세'의 창부타령과 함께 권주가 한 곡조 아낄 수 없으렸다.그러나 사람이 술을 마셔야지 술이 사람을 마시는 단계까지 간다면 이는 노, 병, 사를 재촉하는 어리석을 짓일 뿐이다. 과유불급은 주나 색이나 간에 금언이다. 다음과 같은 생각이라면 구제 불능이다. 주색이 패인지본인 줄 나도 잠깐 알건마는/ 먹던 술 잊으며 예던 길 아니 예랴/ 아마도 장무의 하올 일이 주색인가 하노라. -실명씨- 조그마한 술바가지 네 말이라 하리라 술의 역사와 가요의 역사 중 어느 쪽이 더 오랠 것인가 따지기로 하면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이들 두가지의 역사는 오래고, 또 오랜 만큼 이들의 상호 교섭도 빈번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으로 전승되는 바 한국의 가요 중 고려 이전 것 가운데 는 술과 가요의 유대가 그리 현저하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런 대로 몇 가지를 골라 고찰해 보겠다. 공후인 그리스 신화 속에 있는 주신 디오니소스(Dionysos)나 로마 신화의 주신 바커스(Bacchus)의 축제 때는 술과 가무가 어울리는 한바탕 흐드러진 굿판이 벌어졌다 한다. 우리나라의 고대 축제인 영고, 동맹, 부천 등에서도 사정은 흡사했다. 다만 우리 나라의 신화 속에는 디오니소스와 맞먹을 주신이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중국인의 옛 기록인 '삼국지 (동이전)'에 보면, 제천행사 때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해하고 춤추었다. "했으니 저 브라질의 삼바축제 같은 광란은 아닐지라도 어지간히 술을 즐긴 모양이다. 글세, '공후인'의 주인공은 이런 굿판에서 질타하게 먹고 마시고 노래하다 춤추다 황홀경에 빠져 든 노옹이 아닐까? '머리가 하얗게 센 미친 늙은이'가 발작을 일으켜 강가로 달려간다. 뒤에서는 놀란 아내가 달려오며 제발 가지 말라고 말리건만 이 늙은이는 들은 체도 않고 강심을 향해 뛰어든다. 넘실대는 물결 속에 휩쓸린 늙은이는 마침내 물에 빠져 죽고 만다.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속수무책 남편의 익사 현장을 지켜보던 아내는 '공후'라는 현악기를 당겨 슬픔을 노래하고 나서 남편의 뒤를 따라 죽는다. 그 노래 가사인즉, 여보, 물에 들어가지 말랬더니,/ 당신은 그예 물에 들어가셨구료./ 당신만 물에 빠져 죽어버리면/ 나는 장차 어찌 하란 말예요. 가요라기 보다는 졸지에 과부된 노파의 넋두리에 불과하지만, 이 비극적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나룻배 사공 곽리자고! 미처 손 쓸 새 없이 두 남녀의 죽음을 목격한 마음이 언짢아서 집으로 돌아온 이 친구, 제 처 여옥에게 사건의 전말을 전했다. 여옥이 슬퍼하여 역시 공후로 그 곡을 타고 이웃 친구 여용에게 노래를 전하니 이로써 이 노래가 당대 히트송이 됐더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미친 늙은이가 "머리를 풀러 헤치고 술병을 찾다"는 기록이다. 이로써 그가 발작은 일으키고 강물 속으로 뛰어든 원인이 술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술병차고 강물로 뛰어드는 남자와, 악기(공후)를 들고 뒤쫓아 달리는 여자, 이 별난 남녀를 각각 주신과 악신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그는 왜강물로 뛰어드는가? 당나라 이백은 채석강에서 술마시고 놀다가 물위에 비친 달을 보고 이걸 잡아오겠다고 투신했다가 익사했다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무얼 잡으러 불에 뛰어들었을까? 쌍화점 고려는 몽고군의 침공 이후 국세가 기울고 사회에 퇴폐풍조가 만연했으나 왕이나 백성이나 가릴 것이 없었다. 술과 색의 근친성은 옛날이라고 예외가 아니겠지만, 이 시대는 여자들이 한 술 더 떴던 모양이다. 술 파는 집에 술을 사러 갔더니/ 그 집 사내가 내 손목을 잡습니다./ 이 소문이 이 집밖에 들락날락/ 조그마한 술바가지 네 말이라 하리라. 요새 세사이 하도 막돼서 애꿎은 여자들이 인신매매단에 걸려들거나 성폭행을 당하는 일이 많아 심각한 사외문제로 부각되고 있지만, 그 실상을 알아보면 여자 쪽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쉽게 말해 피해자의 상당수가 본래 정숙과은 거리가 먼 '끼'있는 계집들이란 것이다. 여자가 술집에서 술을 사러 갔다. 보나마나 수염 난 사람만 보면 추파를 던지고 헤픈 웃음을 흘리는 끼 있는 여자가. 그런데 이 술집 남자인즉 여자라면 일찌감치 마스터한 도사라, 정조의 대문은 빗장을 딸 것도 없이 '개문만복래'로 활짝 열어놓고 '날 잡아 잡수'라는 마크를 문패처럼 이마빡에 달고 다니는 여자임을 첫눈에 알아 보았겄다. 다짜고짜 손목을 잡아끌고 들어가 술 몇 잔 대작하여 완전히 무장해제 시켜놓고 일을 벌였다. 아무도 몰래 치른 일인데 웬걸 뜻밖에도 이 일을 훔쳐 본 놈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바가지, 쬐그만 술바가지였다. '얼레껄레 난 봤다! 얼레껄레 난 봤다! 여자하구 남자하구... ' 고려인의 포르노가 농도 짙은 해학으로 채색돼 있다. 청산별곡 고려가요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노래일 것이나 난해어가 많아 그렇게 만만한 작품은 아니다. 그런 대로 이런 식 상상이 가능하다. 어떤 농촌 총각 녀석이 같은 동네 처녀한테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흔히 그렇듯 이 사랑도 언해피 앤드(Unhappy End)였는데, 그 이유가 아리송하다. 원래부터 올라가지 못할 나무였을까? 열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짝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갑돌이,갑순이 같은 순진파들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저 김중배 유혹에 넘어간 심순애의 배신 때문이었을까? 어찌 됐건 이 얼간이 총각은 세상 살 맛이 안 났다. 죽고 싶기만 하겠지만 모진게 목숨이라는데 어디 그게 쉽나 그는 여자를 잊으려고 마을을 떠난다. 인간 속세에 절망한 사람들이 돌아갈 곳이 자연, 그밖에 또 있겠는가. 그는 먼저 청산의 품을 찾아들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하고 중얼거리면서. 그러나 청산에 산다는 것, 말이야 좋지만 그것도 못할 일이었다. 산새는 아침 저녁으로 울어대는데 총각은 종일 울고 울어도 실연의 아픔이 가시지를 않기 때문이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로 저녁에 우는 새는 임이 그리워 운다지만, 그것은 차라리 사치스런 울음이었다. "우는구나 우는구나 새여, 자고 깨면 우는구나 새여,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깨면 늘 우노라."이렇게 독백해 보기도 하고, 한숨과 눈물로 하얗게 지새우는 밤이 잦아지자 밤이 오는 게 무서워 "이럭저럭해서 낮을랑은 지냈지만 올 이도 갈이도 없는 밤은 또 어찌 할까나." 하고 번민하다가는 끝내 청산을 포기하고 내려온다. 이번에는 바다를 찾아간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다에 살어리랏다." 하고 중얼대며, 그러나 바다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머루, 다래 대신 나문재 ,굴조개를 먹는 것만 다를 뿐 아픔과 시름을 달래주지 못하기는 새소리나 파도소리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서 구원을 받을 것인가. 가다가 보니 배부른 독에/ 독한 강술을 빚어 놓았구나/ 조롱박꽃 누룩이 매워/ 날 잡사오니 어찌하리꼬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은 술집이었다. '한림별곡'에서 문인들이 즐기는 술은 황금주,백자주(잣술),송주(송술),예주(단술),죽엽주,이화주,오가피주" 등 이었지만, 상사병 이 총각의 가슴이 부르는 술은 오직 독한 술, 더 더 좀더 독한 술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고려인의 퇴폐성의 한 단편이다. 몇 백년 살 것이라 저대도록 아끼는고 고려말 발생설과 조선조 발생설이 대립돼 있고 기원도 아리송하지만,4음보의 유장한 가락이 제한없이 연속되는 가사의 유용성은 대단히 크다. 시대적으로는 조선조, 개화기를 거쳐 현대에도 부르는 이들이 있고, 계층상으로 승려, 선비로부터 서민, 부녀자들까지 두루 사랑했다. 이는, 우선 1음보가 3,4음절로 된 것이랑 율격이 4 음보라는 것이 한국인의 심리적 율동의식과 잘 맞아 떨어졌다. 그 장르적 속성이 시조와는 달리 퍽 개방적이어서 서정, 서사, 교술은 물론 극적 내용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매력절 장르인 가사에 술이 제재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인생 칠순이 예부터 드물거든/ 몇 백년 살 것이라 저대도록 아끼는고/ 영욕이 병행하니 부귀도 불관터라/ 죽은 후 천자 이름 그 역시 허사여니/ 생전 일배주 이 아니 반가운가/ 청하거나 절로 오니 승우가붕 다 모였다/ 팽양포고 못하여도 개,돝이나 익게 삶고/ 백하홍로 없거니와 청탁주 관계할까 -실명씨(권주가)- 인생칠십고래희, 고작해야 칠십 사는 것이 인생일진대 뭐 몇 백년 살 것처럼 아낄 것이 있느냐고 한다. 부귀 영화에는 빈천치욕도 따라 붙게 마련이며, 임금이다 하는 고귀한 자리도 죽으면 말짱 헛것이다. 그러니 살아 생전 한 잔 술이 소중하다는 향락 논리다. 그래서 청해 오든 제 발로 찾아오든 좋은 벗 모여들면, 저 중국 술꾼들이 즐겼다는 삶은 양이나 염소구이 대신 우리식으로 개 잡고 돼지 삶아 안주 장만하고, 원래 애주가란 청탁불문이라 하니 술이야 청주가 됐건 막걸 리가 됐건 그거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40대 이후라면 6.25사변 후의 주당 풍속을 기억할 것이다. 싸구려 막소주 한 병에 마른 오징어 한 마리(그때는 오징어가 꽤나 흔했다)면 필요조건은 구비한 것이다. 여기에 여름철이라면 고추장에 풋고추 몇 개로 충분조건이 된다. 그리하여 쓴'쐬주'한 잔 홀짝 털러 넣고나서 찝찔한 오징어다리를 씹거나 약오른 풋고추에 매운 고추장 듬뿍 찍어 먹으면서, 안주 보다 열 배나 쓰고 짜고 매운 인생을 논하고 시국을 점쳤었다. 아무리 가난하던 시절에도 술인심처럼 후한 것은 없다든가, 한국인은 싫다는 사람에게라도 굳이 술을 먹이려고 애쓰는 버릇이 있다. 임지 부임길의 백호 임제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죽은 황진이의 무덤에까지 찾아가 술을 권하다가 정치문제로 비화되어 파직을 당했다고 하지만, 어찌 됐건 대작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 술꾼에게 있어서는 죽음 자체보다 더 외롭고 슬픈 모양이다. 일조에 죽어지면 어디 가 먹저 할꼬/ 물망산 깊은 골에 무덤 총총 못 보신가/ 풍소소 우낙락할 제 어느 벗이 찾아와서/ 제 노래 내 들으며 내 술을 뉘 권할꼬 -실명씨(권주가)- 이미 송강의 <장진주사>에서도 들은 이야기지만 즐비한 무덤 거기에 쓸쓸한 바람 불고 궂은 비나 흩뿌릴 때 그 절절한 고독과 비애를 상상이나 해 보시라. 내노라 하는 평양 기생의 갖은 유혹에도 끄떡없었다는 도학자 퇴계선생도 술한테만은 꼼짝을 못 하셨는가. 선생이 지으셨다믐 가사 한 대목을 보자. 태평성대에 굴레 벗은 이내 몸이/ 청풍명월 벗삼아 의지해서/ 오늘 취 내일 취 모래 취 글피 취/ 누우나 앉으나 취함이 일이로다. -이황<귀전가>- 시조에서 그렇듯이 가사에 보이는 술꾼들 역시 대개 술멋에 각별한 뜻이 있는 이들이다. 벗과 음악과 자연을 사랑함이 그것이다. 그러나 미식가들에겐 뭐니뭐니 해도 식도락 이상 가는 것이 없다. '계우사'에서는 고급주효로 '생복회 과하주'를 말하니, 생복오이란 전복을 생으로 굵게 썰어 초장에 찍어 먹는 회요, 과하주란 약주와 소주의 혼합주로서 여름에 즐기는 수이었다. 그러나 이는 주것의 운치와는 무관하니 대신 퇴계 선생과 노계 선생의 작품에서 그 진정한 풍미를 맛보라. 깊들어 가는 그물 여울에 주어두니/ 자린은순이 수없이 걸렸거늘/ 잔놈 굵은놈 다줏어 끌어내어/ 잔놈은 회치거나 굵은놈은 탕치거니/ 청대콩 드문 놓아 자채밥 점심 짓고/ 질병에 채운 술을 취토록 먹다가 -이황<귀전가>- 살진 고사리 향긋한 당귀초를/ 저포녹포 서로섞어/ 크나큰 버들고리 흡족히 담아두고/ 붕어회 초미에 눌어,생치 섞어 구워/ 빛빛이 들이거든 와준에 백주를/ 박잔에 가득 부어 한잔 또 한잔 -박인로<노계가>- 가을날 천렵을 가서 그물을 치니 붉은 비늘 가진 불거지며 은빛 주둥이 가진 붕어가 잔놈 굵은놈 다 걸려든다. 잔고기는 회로 먹고 굵은 고기론 매운탕을 만들어 풋콩을 드문드문 놓고 윤기 도는 자채쌀고 점심을 짓는다. 여기다 쿠박한 질병에서 따라 마시는 술맛은 무엇에 비기랴. 노계 선샌도 민물고기를 좋아한듯, 붕어는 회치고 눌치와 꿩고기를 섞어 생치구이를 만든다. 이를 일러 회자라 하니 "인구에 회자한다"는 숙어의 어원이다. 와준은 질동이요 백주는 막걸리다. 박잔은 바가지 잔이니 본래 '대포'란 것이 이것이다. 대포잔 가득히 막걸리를 부어 한 잔 또 한 잔 거듭하니 노계는 주량이 얼마였을까 궁금하다. 주량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 규모에 있어 단연 으뜸은 역시 송강 선생일 것이다. 잠깐만 가지 마오 이 술 한잔 먹어보아/ 북두성 기울려 창해수 부어내어/ 저 먹고 날 먹여늘 서너잔 기울이니/ 화풍이 산들산들 양액을 추켜드니/ 구만리 장공에 웬만하면 날리로다/ 이 술 가져다가 사해에 고루 나눠/ 억조창생을 다 취케 만든 후에/ 그제야 다시 만나 또 한잔 하자꾸나 -정철<관동별곡>- 북두칠성을 연결하면 자루 달린 거대한 바가지 모양이 된다. 이 바가지를 술바가지 삼고 저 푸른 바닷물을 술로 만들어 서너 잔 꿀꺽꿀꺽 마시고 나니 산들산들 부렁오는 바람결에 양쪽 겨드랑이가 간지럽다. 추켜드니 문득 창공을 나는 학이 되는 느낌이다.일컬어 취선! 이 좋은 기분을 혼자 만끽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리하여 그는 동서남북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한 대포씩 퍼 먹여 다 취하게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이 호방한 주호의 도도한 주흥을 누가 막으랴. 비단자리 깔아놓고 금술동이 차려두니 신화란 신성한 이야기란 뜻이다. 신 혹은 신성을 가진 초인들이 등장하여 였어가는 서사문학인데, 크게는 우주와인류,세계에서, 작게는 국가 ,민족 내지 씨족과 마을의 성립과 원인을 설명하고 자연현상이나 사외현사으이 기원과 질서를 해명하려는 보편적 지향성을 가진다. 한국의 신화는 제주도의 무속신화를 제외한다면 천지창조 신화가 거의 없고, 대개는 건국신화나 시조신화에 치중되어 있음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 전형으로서 주몽신화를 보자.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 주몽에 얽힌 이 신화는 단군신화와 더불어 가장 널리 안려진 이야기다. 단군신화가 환인,황웅,단군의 3대에 걸쳐 이루어지듯이 주몽신화역시 해모수, 주몽, 유리 3대에 걸쳐 있는 고구려 건국신화다. 이 중 주몽의 부모인 해모수와 유화의 결연에 매개적 필수물로 등장하는 것이 다름아니 술이다. 주몽신화는 '삼국사기' , '삼국유사' 혹은 '제왕운기' 등에 두루 나오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문학적 향기를 풍기는 것은 고려의 문호 이규보의 서사시 '동명왕편' 이다. 줄거리를 해설을 겸하여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는 부하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웅심산에 내려왔다 하낟. 웅심산이란 태백산으로도 물리는 성산이니 곧 백두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해모수는 어느날 사냥을 나왔다가 압로강변까지 왔는데 이때 거기서 유화와의 운명적인 상봉을 하게 된다. 유화(버들꽃)는 서하의 용왕인 하백의 딸인데 그는 동생인 훤화(원추리꽃)와 위화(갈대꽃)등과 수영을 하다가 잠시 물가에 나와 쉬던판에 호색한인 해모수에게 들켜 버린 것이다. 그때에 뭐 수영복이 있었겠나 팬티가 있었겠나, 멱감는다고 알몸으로 나왔다가 사내의 불꽃같은 시선을 만나자 기겁을 한 세 자매는 다투어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예나 이제나 아첨꾼 모사꾼은 있게 마련이어서, 해모수의 엉큼한 눈빛을 얼른 훔쳐 본 종자 하나가 권하여 말하되, "대왕님, 얼른 궁전을 마련하여 놓고 여자들이 방에 들거든 덮치시지요,헤헤!" 해모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 채찍으로 요술을 부려 순식산에 집 한채를 지었다. 그는 한 술 더떠 여기에 맛있는 술 한통을 갖다 놓았다. 얼찌감치 숨어 망을 보자니 드디어 그물에 걸려들기 시작한다. 유화와 자매들은 사내가 안 보이므로 안심하고 다시 물가로 나와 옷을 줏어 입고 정석대로 함정에 빠져들었다. 어머, 여기 언제 이런 좋은 집이 있었다냐. 한 번 들어가 볼까. 조심조심 문을 열어보니 인적이라곤없는데 웬 술통이 하나 놓여 있것다. 발효향이 코를 찌른다. 얘들아, 우리 이 술 조금 먹어 볼까. 글세 괜찮을까, 언니. 조금 아주 조금만 먹어보자 얘. 한잔 한잔 또 한잔. 웬 술이 이렇게 맛이 좋더냐. 섹이 어느새 술 한통을 거뜬히 요절내고 나니, 머리가 어질어질 다리가 후들후들.이때다 싶을 때 해모수가 회심의 미소를 띠고 드디러 등장한다. 단번에 술이 확 깬 훤화,위화는 탈출에 성공했으나, 큰언니 유화의 버들 같은 허리를 번개같이 나꿔채는 해모수, 이 상황을 백운거사 이규보선생은 이렇게 읊었다. 세 여자는 임금 보자/ 물곳으로 피하였다./ 궁전을 임시 짓고/ 노는 모습 망보리라/ 말채로 땅 그으니/ 동실이 우뚝 서네./ 비단 자리 깔아 놓고/ 금술동니 차려 두니/ 제발로 찾아들어/ 주고 받고 실컷 취해./ 이때 왕이 막아 서자/ 놀라 뛰다 넘어진다./ 맏딸 이름 유화인데/ 왕이 그를 붙잡았다. 이쯤 되니 하백이 노발대발 항의할 밖에 "호로자식! 남의 귀한 딸을 납치하여 농락하다니 이 무슨 방자한 짓거리냐?" 해모수는 이미 지칠만큼 재미를 보고 난 끝이라,유화한테 "네 아비 깩깩거리니 그만 가 봐라." 하고 튕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화쪽에서 찰거머리처럼 매달리며 가로되, "인제 자기 없인 못살아!"이다. 해모수는 마지 못해 오룡거에 유화를 태우고 용궁으로 하뱍을 찾아갔다. 하백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 해모수가 미덥지 않아 시험을 치르기로 한다. 그리하여 하백이 수중의 잉어가 되어 도망하면 해모수는 수달이 되어 쫓아가고,하백이 공중의 꿩이 되어 날아가면 해모수는 매가 되어 덤벼들고, 하백이 육상의 사슴이 되어 뛰면 해모수는 늑대가 되어 달겨든다. 이리하여 해모수는 하느님의 아들임이 증명되고 사윗감으로 합격이 되었으나,정작 하백의 심중은 불안했다. 저녀석이 내 딸년을 실컷논락하고 뺑소니치는 건 아닐까. 더구나 오룡거를 타고 하늘로 줄행랑을 놔버리면 속수무책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하백은 잔치를 열고 해모수에게 독주를 퍼먹였다. 그 술은 마셨다하면 일주일 후에나 깨는 술이란다. 하백은 마침내 곤드래가 된 해모수를 유화와 함께 가죽가마에 처넣고 꽁꽁 봉해거 오룡거에 실어 출발시켰다. 하늘나라 천궁까지만 간다면 설마 제가 어떻게 못 하겠지. 더구나 제 아버지 되는 하느님 체면을 보아서라도 버리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웬걸? 오룔거가 미처 해궁을 벗어나기도 전에 해모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취중에도 그의 상황판단은 정확했다. 그는 재빨리 유화의 황금비녀를 뽑아서 견고한 가죽가마를 찢고 몸을 빠져 나왔다. 해모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골이 비었냐? 외입질 좀 했다고 저 혹을 달고 하늘엘 가게." 그는 유화를 짐짝처럼 수레 밖으로 내동이치고 혼자만 승천해 버렸다.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 유화 ,"남자는 다 도둑놈야!" 하고 악을 쓰며 울어 보았지만 모두 부질없는 노릇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는 임신까지 하고 있었으니, 화가 난 하백은 딸을 용궁에서 추방해 버렸다. 해모수의 주계는 성공했고 하백의 주계는 실패했는데, 이 사이에 신세를 망친건 유화뿐이다. 제주도 무속신화인 '차사 본풀이'에도 주계가 나온다. 강임이라는 저승사자위 기원을 밝히는 이 신화에선 요절할 운명을 타고난 젊은이 3형제가 나그넷길에 어떤 여자의 집에 자리를 정하고 하룻밤을 쉬어가기로 한다. 마침 여자가 술상을 차려 가지고 들어왔다. 드사이다 드사이다/ 이 술 한잔 드사이다/ 한잔만 먹어도 천년을 살고/ 두잔을 먹으면 구만년을 삽니다/ 석잔을 먹으면 만년을 살고 이 얼간이 친구들, 오래 산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여자가 권하는 대로 널름널름 받아 마시고 셋이 모두 곯아떨어졌다. 여자는 참기름을 팔팔 끓여 젊은이들 귀에 들이부어 삼형제를 모조리 죽이고, 그들 짐속에 있던 귀중품을 다 훔쳤다. 이 역시 술을 이용한 흉계로 순진파가 희생당하는 사연이다. 결론은 이렇다. "세상,계집들아, 남자와 술을 조심할지어다. 세상 사내들아, 여자와 술을 조심할지어다. 안 그러면 신세 망치는 수가 있느니라." 술을 따르면 금빛 물결이 찰랑찰랑 우리 속담에 '빛 좋은 개살구'란 말이 있으니, 이는 외양은 좋은데 내용이 나쁘다는 것이요, '뚝배기보다 장맛'은 외양은 보잘 것 없는데 내용은 충실하다는 말이요, '겉볼안'이란 말은 외양을 보면 내용까지 짐작해 알 수 있다 함이니, 이는 겉과 속이 일치한다는 견해다. 겉과 속의 일치 여부에 관한 논란은 간단히 결론 날 문제가 아니겠지만, 상업의 발달과 함께 삼품 포장이 주목을 받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같은 내용의 물건이라도 디자인과 포장을 탐나게 해서 몇배의 고가품으로 팔 수 있다든가, 포장에 속고나서 과대 포장을 분개한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술과 용기의 관계을 보자. 두선 술을 담그는 양조용 그릇이 있고, 돤성된 술을 보관,운반하는 그릇이 있고, 술을 마실 때 담아 쓰는 그릇이 있다. 예컨대 술독,술병,술잔 같은 것이 그것이다. 본래 술이란 것이 안 먹으면 죽는 생존의 필수물이 아니라 기분에 민감한 기호품이기 때문에 식기 보다는 주기가 훨씬 미관을 중시하게 마련이다. 여기에서는 술잔을 소재로 삼은 옛 설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머저, 비록 술은 아니지만 음료와 그릇의 관계를 가장 절실하게 보여준 이야기 하나를 참고 삼아 하고자 한다. 신라 문무왕 원년, 원효와 의상 두 스님은 대망의 당나라 유학을 위해 서해안인 남양 부근에서 뱃길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오래 묵은 무덤가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원효는 몹시 목이 말랐다. 그는 더듬거리며 마실 물을 찾아 나섯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물이 담긴 바가지를 발견하고 그 물을 맛있게 마셨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그것이 바가지는 바가지로되 해골바가지 였다. 그는 창자까지뒤틀리는 격심한 구토 증세를 느꼈다. 그릇의 정체를 모르던 감밤에는 그토록 달게 마신 물이었는데 그릇의 실체를 보고 나니 이토록 역겨운 까닭이 무엇인가. 이 순간 그는 진리를 직관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마음 하나에 달렸음을 깨닫고 마침내 당나라 유학을 포기했다. 술그릇을 한갓 허상일 뿐이다. 그러나 술꾼들이 어찌 수도승 같을수 있으랴. 가난한 백성들이야 바가지도 좋고 흙그릇도 가릴바 아니나, 부귀가의 술그릇에는 금,은,옥 등 귀금속이 총동원 된다. 더구나 궁궐에서 쓰던 술잔은 역시 보배로울 수 밖에 없을 터이다. 조선조 초기부터 궁내에서 전해지던 수정배 한 쌍이 있었는데, 하나는 모가 난 것이고 또 하나는 둥근 것으로 크기는 반되 들이였다고 한다. 이 잔의 모습을 김안로는 이렇게 묘사했다. "슬을 따르면 금빛 물결이 가늘게 일어 찰랑찰랑 그 가운데 찬다. 떨어져서 보면 맑기가 티끌하나 섞이지 않은 듯하고 은은하기로는 물빛과 달빛이 서로 비춰 하늘에 닿은 듯하다. 그 부어지는 모습은, 하늘에 노을이 일 듯하고 깨끗한 얼음처럼 투명하며 붉고 흰빛이 서로 엉켜 안팎이 환히 통하니,... "<용천담적기> 성종은 술을 꽤 즐겼던 모양이다. 임금이 애용하는 큰 술잔이 하나 있느ㄴ 그것은 옥으로 된 것이었다. 입급은 술이 거나해지면 이 술잔을 좌중에 돌렸다. 어떤 종실이 이 술잔에 술을 받아 마시고 나서 잔을 소매안에 넣고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그는 짐짓 땅에 엎어져 잔을 깨뜨렀다. 임금은 아깝기 이를 대 없었지만 그를 꾸짖지는 않았다. 왕의 과음을 풍간하려는 종실의 충정을 성종은 알았을까? 과음 예기가 나왔으니, 성종은 정작 당신을 과음하면서 신하의 과음은 굳이 말렸던 모양이다. 찬성벼슬을 하던 손순효가 술을 너무 좋아하여, 보다못한 왕이,"경은 이제부터 석잔 넘게는 마시지 않기로 약속하시오." 하니 순효도 별 수 없이 왕에게 다짐을 두었다. 그러던 어느날 임금이 순효를 불러 보니 마침 술에 만취해 있었다. 임금이 노해서 위약을 추궁하니 순효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저는 틀림없이 석 잔만 마셨습니다. 다만 그 잔이 밥주발이었지만 말씀입니다. " 비슷한 이야기는 세종때에도 있었다. 윤회는 문장가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항상 술이 정도에 넘쳤다. 임금은 사랑하는 신하의 건강을 것정하여, "술을 마실 적에는 석잔을 넘지 말라." 엄명을 내렸다. 그러자 윤회는 술을 먹을 적마다 반드시 큰 그릇으로 석잔을 먹었고, 결국 그는 다른 이모다 갑절이나 더 먹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은 "내가 술을 조심시킨다는 것이 도리어 술을 많이 마시도록 권한 셈이로다."하고 탄식했다. 지엄한 왕명도 술꾼의 절주에는 별효과가 없었나 보다. 술잔의 크기를 가지고 말한다면야 단연 금매달 감이 있다. 옛날 한 재상이 남도에 안찰사로 갔는데 성격이 몹시 까다롭고 엄해서 관기들의 작은 실수도 용납지 않았다. 말하자면 모든 일에 원리원칙을 주장하여 예외라는 것이 없는 모범생이었던 모양이다. 마침 안동에 내노란 기녀가 있어 이 까탈스런 사또를 한 번 골탕먹이기로 작정하고 접근하였다. 우선 원앙금침에 무르녹는 사랑으로 영감태기를 헬렐레 하게 만들어 놓으니 남자는 갈증으로 술생각이 간절했다. "썩 맛 좋은 술이 한통 있긴 한데 마침 술잔이 없습니다. 밤이 깊어 그릇을 다 치워 놓았으니 정히 난감하오이다. 술잔을 꺼내오려면 아랫 것들을 다 깨워야 하니 번거롭고... "이쯤에서 뜸을 들인 뒤에, "그릇이라면 새로 사온 세숫대야가 탁자위에 있을 뿐이지... "하고 눈치를 모았다. 아니나 다를까 사또가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말을 받는다. "질그릇에 탁주라는 말도 있는데, 이런 시골에서 놋대야 라면 질그릇 탁주보다 사치하며 오히려 풍미를 돋구지 않겠느냐!" 이리하여 세숫대야에 술을 따라 두어 모금 마시고 나서, "좋도다. 금잔,옥배보다 이 잔이 더 좋구나!" 이렇게 하고 보니 은근히 켕기는 구석이 없지도 않았던지, "얘야, 행여 이런 사연 남한테 누설치는 말아라."하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뭇 기생들이 개미떼같이 달라붙어 숨을 죽인 채 이 광경을 역력히 보고 있다는 것을 그가 어찌 알았으랴. 술잔 크기와 주량이 비례한다고 까지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상관관계는 크다. 서거정의 '필원잡기'를 보면, 당시에 국빈을 대접하는 대객관은 각별한 주량을 필수요건으로 했던가 싶다. 유구국(현 오키나와) 사신이 조선을 다녀가서 한 말 중에, 그들이 조선에 돠서 경탄한 것 세가지를 지적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대객관의 주량이었다. "깊숙하고 커다란 술잔으로 셀 수 없이 주고 받아 가히 한섬 물을 마시겠더라." 요즈음 기업체에서 외국 바이어를 상대하는, 이른바 '술상무'라는 것이 이 전통의 계승일 터이다. 동서고금에 가장 희한한 술잔 이야기 하나 해보자. 문안공 이사철이 젊어서 여러벗들과 삼각산에서 소풍할 때, 술은 많으나 잔이 ㄴ어서 난처했다. 궁 하면 통 한다고, 마침 한 친구가 말가죽 신을 신고 있는 것을 보자 이서철의 며리에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그는 신 한짝을 벗겨 거기에 술을 담아 호기있게 쭉 들이켰다. 이를 시범삼아 나머지 친구들도 웃고 떠들며 가죽신 술잔으로 다투어 술을 마셨더란다. 원 세상에! 눈으로 마신 술의 편력 집안에 이렇다 할 술꾼이 없었던 까닭으로 나는 술이 펼치는 분뉘기나 속사정에 접해보지 못하고 자랐다. 이제 시댁에서조차 호주가를 별로 대하지 못하고 있으니 술에 대한 나의 상식을 거의 부지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는 책을 통해서 끊임없이 주인공과 잔을 나누었고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분위기에 곧잘 빠져들었으니, 결국 나는 입술오가 아닌 눈으로 맘껏 마시고 취했다고나 할까. 당나라의 시선 이백의 '월하독작'이란 시에 '삼배통대도 일두 합자연 단득주중취 물위성자전'즉, 석잔의 술을 마시면 노장의 이른바 무위자연의 대도를 깨우칠 수 있고, 한 말의 술을 마시면 자연의 섭리, 그 핵심과 합치가 된다. 다만 나는 취둥의 그 흥취를 즐길 뿐 술 못마시는 속물들에게 그 참맛을 아려주고픈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술 못하는 ㅇ은 사람들이 도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다. 또 이태백과 더불어 '음중입선'이라 불리우던 하지장은 '안화낙정수저안'즉, 취한 눈이 몽롱해서 깊은 우물에 빠진다고 해도 물속에서 그대로 계속 자겠다며 술을 만끽했다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술 한잔의 의미를 이백의 '독작'이란 시를 통해서 음미해 볼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동양적 예찬과 애정은 생활구조와 의식이 다른 서양에서도 다름 없는 것 같다. 영국의 희극작가 R.B.세리든의 <주덕송> 이라는 시의 일절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술병은 우리 식탁 위의 태양/ 그의 양광은 감홍색 술/ 그의 도움없이 부추김 없이는/ 우리만으로 빛나지 못하리/ 환락과 환희 끝도 없구나/ 그가 삐잉 한바퀴 돌면/ 우리는 그의 차광으로/ 따라 빛나리. 그러나 사람을 기쁠 때와 마찬가지로 비탄 속에서도 술을 찾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한창의 나이에 우연히 김용호의 시 <주막에서> 를 읽고, 인생의 구곡장단의 길을 때로 술로 풀어가는 인간의 삶을 쓸쓸히 들여다 본적이 있다.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벗긴 길은 /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는 그런 사발에 / 누가 또 닿으랴/ 이런 무렵에 지금도 가끔시의 이 후반부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일의 외로움에 취기를 흠뻑 느끼곤 한다. 이와 같이 시에서 느낀 술의 분위기는 공통적으로 한가로움과 유유자적함이 있는 듯 하다. 반면에 술에서 내가 대면한 술 냄새에는 현실에 밀착된 절실하고 긴박한 생활감이 있었다. 여고시절에 밤새워 읽던 명적들 중에 유난히 칼바도스,보드카라하는 술이름이 선병하게 기억되는 소설이 '개선문'과 '사랑할 때와 죽을때'이다. 둘다 레마르크의 작품이었는데 읽은 시기도 비슷하고 또 그 내용과 배경이 전황으로 일치함으로써 잊혀지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칼바도스나 보드카는 전시의 울적함과 절망적이 분위기에서 짧은 꿈 혹을 환상처럼 빛을 뿜던 술이었다. 숨막히는 나날 속에서 잠깐씩 주인공들을 사랑과 평화 곳으로 높이 날려보내던 풍선,구원의 약제로서의 술읠 효능을 기렸다. '개선문'은 나찌 독일의 반발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유럽 각국에서 파리로 도망쳐온 피난민들의 절망적인 몸부림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 라빅은 베를린 한 종합병원 외과 과정으로 강제수용소를 탈출하여 프랑스에 밀입국하고, 생계수단으로 무능한 의사들의 수술을 대신하거나 매춘부들의 성병을 검진한다. 내일이 없는 불안과 절망의 나날속에 떠돌이 가수 조앙 마두라는 여인을 만남으로써 그는 비로소 폐기된 삶을 회복하게 된다. 비를 품은 하늘로 어렴풋이 드러나는 개선문, 그 근처 파리의 거리 한 모퉁이 카페에서 칼바도스라는 술로 첫만남을 맺었고, 그술은 사랑과 이별의 매 순간마다 함께 하던 술이다. 유럽여행 중에 우연하게도 개선문을 눈 앞에 두고 조병화, 성춘복, 황금찬 성생님 등의 일행이 명성의 '칼바도스'에 취해 있을때도 나는 맛보다 그저 분위기만 따라가고 있었다. 강한 사과 냄새의 향기나 맡을 뿐이었다. 오히려 현실보다는 책에서 에도 했던 장면들을 추억하며 즐겼던 것 같다. 이를테면 라빅과 조앙이 칼바도스를 마시는 보습을 보고 "어떠한 표정의 바람에도 이내 변하는 얼굴이다. 그러므로 무슨 꿈이든 부어 넣을 수가 있다. 양탄자와 그림이 장식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빈 집과도 같다. 무엇이든 그것을 이루려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라고 생각하는 장면같은 것들이다. 어떻든 그 위기 속에서 이런 생각의 여유를 낳은 것은 술의 힘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저녁 바로 그 술을 앞에 두고도 우수의 멋진 표정을 연출해내지 못했던 스스로를 지금껏 아쉬워함을 고백해 둔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에서도 칼바도스나 모드카 같은 종류의 술을 마시면서 전시 속에서 잃어버린 삶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들의 애틋한 모습을 만나게 된다. 휴가중에 그레버가 엘리자베드와 마신 '요하니스 베르게르 카렌베르그'라는 마치 샘과 같다는 술은 나의 미래 어느 시간 솔에 예비해 두고 있다. 두 주일간의 생명을, 고리수가 빛을 포착해서 발산 하듯이 붙잡지 않으면 안된다던 그레버의 절규를,끝내 죽고 마는 그의 최후를 되짚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새 전투장인 생활현장에서 희망이 주는 헛된 약속과 어긋나는 좌절을 앓는다. 필사적으로 신앙이나 학문에, 또는 예술이나 노동에 매달려 나름대로의 길을 가고는 있지만, 그나마 삶에 쏟아붓는 우리의 뜨거운 피가 식을 때 우리는 심신을 북돋을 무언가를 필요로한다. 만약 주당들이 아껴 마지 않는 그 한잔의 빛과 향기에 동참해본다면 쉬어가는 저녁을, 그로 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법한 이 습관 붙이기도 그리 탓할 일은 아닌 듯 싶다 (자료 : 김현숙,1989.10). 동양의 술멋 김홍도의 그림을 보면 산속 개울가에서 양반들이 유녀를 데리고 흐드러지게 취흥에 젖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해반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눈 닿는 것이 모두 산천이요, 개울이었다. 서울만 해도 삼청동과 자하문밖 세검정, 남산과 성북동, 관악산과 인왕산 등 4대문 안에도 자연과 벗할 수 있는 곳이 많았으며 기방에서도 가야금소리와 장고소리에 맞춰 간살맞은 비음과 한마당 창이 슬러 나왔다. 금술잔의 맛있는 술은/ 수많은 사람의 피요/ 옥으로 만든 술상의 안주는/ 만백성의 살./ 술판의 촛불이 눈물흘릴 때/ 모든 백성의 눈에는 피눈물나고/ 소리 소리 드높은 곳에/ 원성 또한 높아라. -춘향전에서- 춘향전에 나오는 이런 풍자는 어느 곳,어느 사회에나 없으란 법이 없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술판은 소박하고 그런대로 멋이 있었다. 원래 술이란 인류의 시원부터 함께 온 것으로 수렵시대에 우연히 떨어져 썩어가는 과실이나, 벌꿀에서 발효된 자연의 일부였다.최초에는 원숭이가 술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여하튼 유목시대와 농경시대를 거치면서 청주, 탁주, 과실주,에서 증류주인 소주, 고량주, 위스키, 브랜디, 럼, 보드카, 진 등으로 발전했다. 서양에서는 16세기에 위스키가 나왔지만 BC3000년경에 이집트에서는 맥주가 생산되고 유적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맥주제조법이 상세히 설명될 정도로 술의 역사는 길다. 중국에서는 노주, 화주, 청주, 소주가 누룩을 사영하여 양조 되었는데 6세기경 저술된 제인요술이란 책에는 이미 양조법이 과학적으로 정리되었다. 우리나라도 다른 문화와 함께 중국을 통해 술의 문화가 들어 왔는데 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주몽의 신화만 하더라도, 앞에서 논했던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연못가에서 하백의 세자매를 술로 취하게 한후 큰딸 유화를 취하여 주몽을 낳았다고 할만큼 술의 역사는 길다. 자고로 우리나라 사람은 재주가 비상해서 술을 빚어내는 기술도 뛰어나 백제의 인번같은 이는 일본에다 한국의 양조술을 가르쳤다(일본 '고사기'증보리 형제는 일본 응신 천황때, 독특한 양조법을 전했다고 계림유사에는 적혀있다. ). 여하튼 우리가 오늘날 민간에서 흔하게 마셨던 막걸리, 약주, 소주는 수천년동안 우리 민족이 즐겨 찾고, 또 꾸준히 지속시킨 양조주였다. 이규보의 책에 나오는 이화주, 백주, 방문주, 춘주, 천일주, 화주, 녹파주,천금주,숙화주는 실상 양조술에 있어 전통적인 기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고, 다만 그 재료와 발효기간, 그리고 증류와 혼합 때의 향기, 맛을 어떻게 첨가시켰는가에 따라 차이가 생겼을 뿐이다. 물론 술은 취하기 위해서 마신다. 그것은 인생이 살기 위해서 시간을 잘라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단순한 동물적 생명력을 지속시키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삶의 내용, 삶의 색깔을 중시하는 것처럼, 술을 마신다는 것도 단순히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마시느냐가 중요하다. 예나 이제나, 그리고 서양이나 동양이나, 술이 마시는 과정은 생활의 멋과 깊은 관계가 있고, 곧이어 술을 마시는 행위가 곧 삶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인생철학의 표현이 된다고 하겠다. '멋'은 영어로는 elegance 인데 아치와 달리 단순한 풍치가 아니라 고아한 품격을 갖춘 기상이 겸비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점에선 서양사람들은 동양에 비해 술을 마시는 멋이 별로 없다. 기껏 '건배'를 하고 무희 나 가희 를 통해 간접적으로 취향을돋구는데 그치는가 하면, 서로 어울려 춤추고, 주정부리고, 격투하고,고성방가하기가 일쑤다. 물론 서양사람들도 고급사교계에서는 술한잔 마시며 고담준론이나, 전담을 나누는 수가 있으나, 우리 동양에서처럼 스스로 취향에 젖어 시를 노래하고 철학과 인생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멋을 규정하는가에 따라 주도의 규범이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술이 논리적인 형식을 배제한다고 본다면 -몇가지 금기를 제외한다면- 수많은 주법이 나옴직하다. 그 금기란 첫째, 남을 괴롭히지 않아야 할 것. 둘째, 사회적인 엔트로피를 낮춰야 할 것. 셋째, 재생산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델포이 신전의 에스타시나, 코카사스와 스페인과 헝가리, 남미의 축제에서 보여주는 광난은 사회적인 긴장이 해소되고 새로운 창조를 위해 에스프리가 축적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농사를 지으며 어쩐 긴장의 순간에 농주를 마시고, 농악을 즐기면서 긴장을 해소하는 과정은 낭비가 아니라 재생산투자이다. 우리의 서민적인 술은 대개가 곡주이며, 그 과정 역시 경건하였다. 깨끗이 씻은 밀을 띄워 누룩을 만든 후, 그 누룩의 중앙부분이 제대로 곰팡이가 슬면 곱게 말려 가루로 만든다. 굵은 체로 쳐서 함지에 담아 놓은 후 찹쌀로 고두밥을 찐다. 고두ㅏㅂ은 시루에 찌는데 너무 익어도 안되고 너누 설익어도 안된다. 다된 고두밥은 큰 돗자리에 널어 말린 후 항아리에 버무려 넣는다. 항아리에 넣기 전에 목욕재개하고, 항아리 안에 꿀로 불을 피워 말린후, 정안수로 버무린 고두밥과 누룩을 항아리에 넣는다. 옛날에는 멍석으로 항아리를 싸고, 땅 속에 파묻었는데 조기숙성하기 위해서 요즘은 인공적으로 항아리를 따뜻하게 한다. 술은 발효의 기간이 매우 중요한데 외국의 와인이나 위스키처럼 몇 십 년 몇 백 년은 못돼도 약주가 오랜 숙성기간을 거쳐 높은 향기와 입맛을 돋우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대나무로 엮은 용수를 술독에 넣고 첫술을 떠내는데 진국이라고 하는 이 술은 옛날에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 떠내었다. 아직 숙성하기 전의 술은 달고 술의 알코올도수가 낮은데, 대개 첫 번째 퍼낸후, 다시 물을 붓고 섞어서 재탕을 한다. 다 걸른 뒤 재강(술)은 가난했던 시절 요기로 이용했다. 어린 아이들이 술재강을 먹고 비틀거리고, 집안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술재강을 먹고 술에 취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해방 후에도 술재강을 얻어다 설탕을 넣고 집에서 많이 끓여 먹었다. 술은 술 마시는 사람들의 신분을 갈라 놓는데, 그것은 생활의 여유와도 관계가 깊다.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시는 서양사람들에 비해 동양, 특히 한국사람들의 술은 허기를 메꾸는 역할까지도 겸하도록한 텁텁한 막걸 리가 제격이었다. 서양사람들은 육식을 많이 하기 때문에 독한 술이 소화될 수 있고, 위장에 기름이 끼어 있어서 알코올이나 커피가 들어가도 견뎌낼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우리로서는 하다 못해 김치 조각이라도 안주로 먹어야 한다. 예부터 우리 서민들의 안주라야 두부찌개가 고작이고, 그 속에 들어가는 종류에 따라 술 마시는 멋도 달라지낟. 두부찌개에 돼지비게라도 띄우면 요즘도 훌륭한 안주가 되고, 좀 괜찮은 사람들은 해물이다. 쇠고기를 썰어 넣기도 한다. 배부른 사람들이야 정종에 생선회를 먹거나. 양주에 마른 안주 혹은 샐러드, 미트볼 등을 안주로 하겠지만 논두렁이나, 포장마차, 혹은 구멍가게 노점에서 바시는 사람들이야 쓰디 쓴 소주에 오징어, 쥐포 아니면 과자부스러기로 안주를 삼는다. 물론 술은 머리에서 꽝소리가 나도록 마셔야 마신 것 같지만, 요즘 세상이 약아져서 적당히 얼큰하면 그걸로 족한다. 얼큰한 취흥으로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웬만한 시름은 우습게 보이고, 그 엄청나게 위압하던 돈이나 권력의 위압도 별스럽게 느껴지지 않아 기고만장해 진다. 유머로 회자되는 쥐새끼의 술주정처럼, 간이 커져 고양이에게 대드는 만용까지는 몰라도, 허접스러기 세상사를 초개같이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다든가,단절된 자기세계에서 명상에 잠길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모른다. '정성르런 어짐과 깊고 깊은 심오함과 넓고 넓은 하늘같은 지혜'를 스스로 간직한 도인의 경지를 찾고자하여 이 땅의 어른들은 술의 왼팔에 매달렸다.(자료:이창학, 1989.10) 술 예찬론 : 고대편 하늘에서 귀향온 주선 이백 이백든 한때 한림학자로서 당나라 현종을 측근에서 받들다가 그들의 부패상에 비위가 뒤틀려 간악한 무리를 뒤로하고는 홀연히 한평생을 아름다운 산천과 달에 심취해 방란길에 오른 인물이다. 술을 사랑했던 그가 섬세한 필체로 창작해낸 싯구들은 지금도 동서고금의 만인에세 공감을 주고 있다. 분노한 바다나 폭포수같이 거칠고 억센 시를 쏟아내며 술에 만취한체 데카당스에 빠지기도 하고 잔잔한 호수를 백조가 거닐 듯 아늑한 면모와 아름답고 섬세한 시정을 함께 지닌 도가적 낭망주의 시선이었다. 그가 얼마나 술을 사랑했는지는 이백을 시선의 경지에 올려 놓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달아래 혼자 술든다 하늘이 술을 사랑 않았다면/ 하늘엔/ 술별 없었고 / 땅이 술을 사랑하지 안았다면 / 땅에 술샘은 있지 않았으리라/ 하늘에 부끄럽지 않아라/ 청주는 성인에 비유하고/ 탁주는 현인과 같다하네/ 성인과 현인이 이미 술을 마셨거늘/ 굳이 내가 신선이 되길 원하랴/ 선작이면 대도에 통하고/ 한말이면 자연에 합치되도다/ 이는 오직 술꾼만이 취흥을 알 지니/ 아예 술도 못하는 맹숭에겐 전하지 말지어다 독작 꽃사이에 앉아/ 혼자 마시자니/ 달이 찾아와/ 그림자까지 셋이 됐다./ 달도 그림자도/ 술이야 못 마셔도/ 그들 더불어/ 이 봄밤 즐기리./ 내가 노래하면/ 달도 하늘을 서성거리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춘다./ 이리 함께 놀다가/ 취하면 서로 헤어진다. 그러면 술을 마시다가 불에 비치는 달을 잡으려고 강소겡 들어갔다가 빠져 죽은 시인 이태밸의 주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하루에 300잔, 100세 까지 살면서 3만600일을 매일 그만큼 마실 마스터 플랜을 그는 '양양가'라는 시에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태백은 술을 1두 마시고 시를 백 편 썼다고 한다. 그때의 1두는 요즘의 한 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가 마신 술은 노주와 같은 독하니 않은 양조주 였다. 이웃 일본에서도 서민문화가 발달하면서 이태백을 주선으로 흠모하다 못해 17세기 이래 술 많이 마시는 경음대회를 열어 전국의 주당성들이 명예를 걸고 술실력을 겨루었다. 19세기초에도 도쿄에서 살고 있던 어느 돈 많은 상인의 장수를 축하하기 위해서 벌인 술 시합에서는, 석 잔에 나누어 청주7되 5홉을 단숨에 들이키고도 취태를 보이지 않은 사혜라는 사람이 우승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주왕시대의 고주 태평성대의 성군으로 요순임금을 친다면, 말세의 폭군으로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을 손꼽는다. '주지육림(술로 못과 숲을 만듦)'이란 말을 남김 바로 그 주왕인 것이다. 못을 파서 술을 담아 놓고 둘레에 여인들을 발가벗겨 숲을 이루어 놓고서, 그 사이를 누비며 술을 마셨다 한다. 그 주지의 위치가 황하변 위주현 서방23리에 있었던 것으로 고증되어 있으며,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의 큰 못이었다 하니 대단하다. 그 주지 인근 은나라 말기의 고분에서 3200년 전의 술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주왕이 배를 띄우고 퍼마셨던 그 주지가 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시대의 술이 그 인근에 묻혀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남아있는 세계 최고의 술을 독일 슈파이야의 포도주 박물관에 있는 고대 로마의 술이다. 그런데 그보다 1000여년 더 묵은 은나라 술이 출토된 것이다. 표주박 모양의 청동 술병에 약 1kg 정도의 술이 담겨 있었으며, 알코올 기운이 거의 증발하고 없어서, 그 원료가 곡물인지 과실인지 단정할 수 없었다 한다. 은나라 고분에서 술병이 출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나, 술이 담긴 채 발굴된 것은 처음이다. 무덤의 주인공이 무척 술을 좋아했음일까? 옛날의 왕이나 귀족들은 죽어서고 이승에서처럼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갖은 양식,세간,우마,돈을 비롯해 남녀 종까지 순장 시켰던 것으로 미루어 술을 묻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 나라에서도 술을 무척 좋아했던 조선조 성종 때 정승 손순효는 임종시 소주 한 병 더불어 묻어 달라고 유언하여 술을 묻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딸을 낳으면 여아주라 하여 술을 빚어 땅에 묻어두었다가 시집가는 날 잔치에 교합주로 쓰고, 명주라 하여 장가가는 날 신부가 입으로 씹어 빚은 술을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죽으면 더불어 갖고 저승길 떠나게 하는 습성이 있었다. 아내가 입으로 씹어 빚은 술과 영원히 해로하는 명주는 한 편의 시다. 이번에 출토된 술이 바로 그 명주가 아닌가도 싶다. 이처럼 고대의 술이 여자가 입으로 씹어 빚은 구작주 임은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이술 역시 여인의 침으로 발효시킨 그런 술이 아닌가도 싶다. 고구려에 물길국에서도 '곡물을 입으로 씹어서 술을 빚는다'고 했고 선조때 문헌 '지봉유설'에는 이같이 처녀들이 입으로 씹어 만든 술을 '미인주'라 했다. 근년 까지도 류큐역사에서는 처녀들이 모여 사탕수수로 이를 닦고 바닷물로 입을 가셔낸 다음, 쌀을 씹어 미인주을 빚었다 한다. 동서고금 할 것 없이 주색, 곧 술과 여자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술의 기원이 미인주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바른말 한다 해서 기자를 감금하고, 혹형으로 숱한 생명들을 볶아 죽였으며, 천하의 요녀 달기의 치마폭에서 망국으로 몰아갔던 주왕시대의 술, 술은 묵을수록 좋다고 하지만, 이 세계 최고의 술맛만은 쓰디쓸 것이다. (자료:백년이웃에서) 이원과 유관의 풍류 이원과 유관은 세종 임금 시절 정승을 지낸 사람으로 각기 '술대접 받은 얘기' 와 '술대접한 얘기' 중에 막걸리에 얽힌 일화가 있다. 이원이 일찍이 영남지방을 나가 살피는 안찰사가 되어 여러 고을을 순화하다가 동래에 이르렀을 적이었다. 이원이 어느날 공무를 마치고 나서 말을 타고 혼자 나섰다. 아전들이 감히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못하고 살며시 그 뒤를 밟아보니 어느덧 동백정에 이르었다. 그가 나무 밑에서 시를 읊고 휘파람을 불고 돌아갈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이름을 독차지 하다시피 한 동백정의 절경에 취한 것이었다. 이때 한 늙은이가 술두루미를 가지고 와서 꿇어앉았다. "이 늙은 것은 정자 옆에 살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옵건데, 정자 위에서 한 손님이 머뭇거리시는 모습이 대관인 듯 하옵기에 감히 촌 막걸리를 가지고 와서 올립니다." 마침내 '부어라' 하여 마시니, 참 맛있는 술이었다. 이원이 크게 기뻐하며 연달아 몇 잔을 들이켰다. 주위 몇 리에까지 모두 동백나무, 꽃향기에 어우러져 취흥이 도도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술에 얼큰해지고 또한 경치에 황홀하게 취해 있는데, 어부 두세 사람이 제각기 잡은 산 전복을 바쳐왔다. 필시 더 진한술의 청주를 곁들여 바쳤으리라. 정자 동남쪽에 큰 바다가 가로 놓여 뛰어난 절경은 비길 데가 없어 흥취를 더욱 돋우었다. 이윽고 한 백정이 노루 새끼를 안고 말을 타고 와서 인사를 했다. "다행이 생육을 얻었사온데 대인께서 여기에 계시옵기에 감히 드리나이다." 이리하여 그 고기를 회치고 굽고 삶아서 더 진한 소주를 기울여 술잔을 주고 받으니 이번에는 인정에 사뭇 취하고 말았다. 이때 연락하는 이가 "아사(부지사 격인 도사)께서 행차하십니다."소 하자 이원이 벌떡 일어나 맞이하며, "촌 늙은이의 대접에 시달리다 보니 이토록 취했구려" 했다. 아사가 "현감도 왔으나 감히 뵈러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하자 이원이 "어서 오라고 하시지, 이같은 들 자리에서 무슨 예절을 번거로이 차리시오" 했다. 현감이 들어서자 진수성찬으로 술상이 바뀌고, 풍악소리가 드높아졌다. 밤이 깊도록 즐겼는데, 사실 아까 늙은이들이 바친 술과 안주는 아사와 현감이 그렇게 시킨 것이었다. 이원이 처음에는 이 고을에서 대접받는 폐를 끼칠까봐 우정 몸을 마침내 술에 빠지고 말았다. 훗날 청백리가 된 청렴한 감사관을 이렇게 속여 대접한 것이었다. 유관은 정승을 지내고 나서도 손님이 와서 술대접을 할 적이면 늘 탁주 뿐이었다. 뜰에 막걸리 한 항아리를 갖다 놓고 늙은 여종을 시켜서 사발 하나로 술을 차리게 했다. 제각기 몇사발씩 마시고는 끝내 버렸다. 그는 벼슬이 정승인데도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학도가 매우 많았다. 제삿날에는 여러 생도에게 음복을 시켰는데, 소금에 저린 콩자반 한소반을 서로 돌려 안주를 삼게 하고는 막걸리를 질항아리에 담아 내왔다. 먼저 이원이 한사발 마시고는 차례로 한두순배 돌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도 잘 차린 안주에 좋은 술을 마시게 한 적이 있었으니, 함경도에서 북방을 지킬 적이었다. 함경도 감사격인 '길주도 안무절제사'가 되어 침입한 야인 과수를 죽이고 그 무리를 격퇴하자, 태종이 사신을 보내 술을 내리었다. 명령을 받들어 내린술이니까 향기로운 술에 좋은 안주를 곁들였음은 물론이겠다. 그가 우의정이 되었을 때 임금께 글을 올려 당나라 한유가 지은 태학생탄금시서를 인용하고 송태조가 대포하사하던 일을 아뢰었다. 곧 임금이 전 국민에게 주식을 나누어 주고 마음껏 놀게 한 것이 고사 '대포'가 되었다. 이런 옛일을 본따 삼짓날(음력 3월3일)과 중양절(음력 9월9일)을 명절로 삼아 대소 관료들에게 경치 좋은 곳을 골라 놀며 즐기게 하여, 태평성대의 기상을 나타내도록 청했다. 세종이 이를 옳게 여기어 받아들여 시행하게 했으니, 태학생의 사기를 복돋우고, 하급관료들도 자연을 벗삼아 경치를 즐기게 하여 기상을 높이려 들었다. 유관이 청렴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 어느 때 장마가 져서 집에 비가 줄줄 새는 바람에 그가 일산(감사나 수령이 행차때 쓰는 자루 긴 양산)을 들고 비를 받으며 부인을 바라보고 "이런 일산도 없는 집은 어떻게 하겠소"하니 부인이 "다른 준비가 있지 않겠습니까" 해서 서로 웃었다는 말은 익히 아는 일이다. 그는 정승이 되어서도 여느 사람과 다름이 없이 누가 찾아와도 맨발로 짚신을 끌고 나와 맞이했고, 때로는 호미를 들고 채소밭을 돌아다녔으나 괴롭게 여기지를 않았다. 그가 사는 집은 초가 두어 칸으로 밖에는 울타리도 담장도 없었다. 태종이 선공감을 시켜서 밤중에 바자 울타리를 쳐주면서 그가 알지 못하게 하리만큼 그는 청렴결백했다. 집안은 돌보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베풀기를 즐겨했으니, 유관은 항상 민생을 도탄에서 건질 것을 마음에 두고 지냈으므로, 다리를 놓거나 원우를 지으려는 이가 있으면 돈과 배를 선뜻 내주었다. 남에게 주기를 좋아했으나, 하찮은 물건이라도 남에게서 얻으려하지 않았다. "친구 사이에는 으레 재물을 나누어 쓰는 의리가 있다 하나, 아예 요구하지 않는 것이 옳다" 이원과 유관은 고려말에 태어나 급제했다. 이원은 14세에 진사가 되고 18세에 급제를 하리 만큼 성장했다. 유관은 약관 25세에 급제를 하기 전인 19세 적에 공조총랑이 되었으니 얼마나 이른 벼슬이었는가. 이원은 태어난지 넉달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자형 권근이 가르치기를 아들과 같이 했다. 천하의 명문장 권근은 처남의 학문이 나로 진보하고 그 성취가 눈부신 것을 보고, "우리 장인이 돌아가지 않으셨다"고 했다. 명나라 사은사로 갔을 적에 이원의 모습이 하도 헌결하고 웅위하며 뭇 닭 속의 한 학처럼 우뚝하였으므로 영락제가 기이하게 여기어 칭찬하며 "누런 수염 재상은 다음에도 다시 사신으로 오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듯 그는 드레(사람의 됨됨이로서의 점잖음과 무게)가 있었다. 유관은 세살에 고아가 되어 숙부 하정이 자기 자식처럼 길렀다. 글읽기에 힘쓰게 하고 애써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마침내 성취하여 급제하게 하고는 재물과 종을 나눌 적에는 마치 형을 대하듯 조카를 생각하고 수량을 더 많게 주었다. 유관도 나중에 녹(봉급)을 받아서는 일가와 이웃에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그는 따뜻하고 어질며 돈독하고 두터운 성품을 타고났다. 세종 임금 시절에는 막걸리를 즐기며, 위엄은 있으되 조를 빼지(짐짓 겸손한 체하거나 위선적인)않는 정승도 많았다. (자료:진로,1994.봄) 국선생전-동국이상국집에서- 이규보 호가 백운거사인 이규보(1168 부터 1241)는 문신이자 대 문장가로, 시와 술과 거문고를 즐기어 삼혹호선생이라고도 불렀다. 많은 글을 남겼으며 저서로 '동국이상국집','백운소설'등이 있다. 그는 11살 때 연구를 지어 기동으로 일컬어졌고 과거급제에 1 등을 거듭한 천재였드며, 몽고군의 침입을 진정표로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규보는 무인집권 당시의 정치, 사화적 혼란으로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했으나, 말년에는 높은 관직을 거쳤으며 문순의 시호를 받았다. 국성(맑은 술)의 자는 중지(곤드레)이고, 주천 고을 사람이다. 어려서 서막에게 사랑을 받아, 막이 이름과 자를 지어 주었다. 조상은 본시 온나라 사람으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더니 정나라가 주나라를 칠 때에 잡혀 갔으므로 그 자손이 정나라에 널려 있기도 하다. 증조부는 역사에 그 이름을 잃었고, 조부모가 주천으로 이사하여 거기서 눌러 살면서 주천 고을 사람이 되었다. 아비 차(흰술)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하여 평원독우가 되고, 사농경 곡씨의 딸과 결혼하여 성을 낳았다. 성이 어려서부터 이미 깊숙한 국량이 있어, 손님이 아비를 보러 왔다가 눈여겨보고 사랑스러워 말하기를, "이 애의 마음과 그릇이 출렁출렁 넘실넘실 만경의 물결과 같아 맑혀도 맑지 않고, 뒤흔들어도 흐리지 않으니 그대와 더불어 이야기함이 성과 즐겨함만 못하이."하였다. 성장하여 중산,유영,도잠과 더불어 벗이 되었다. 두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하루만 이 친구를 보지 못하면 비루함과 인색함이 싹돋는다."하여 서로 만날 때마다 며칠이 가도 기쁨을 잃지 않고 마듬에 취하고야 돌아갔다. 고을에서 조구연을 시켰으나 미처 나아가지 못하였고, 또 나라에서 청주종사로 불러 공경이 번갈아가며 천거하니, 위에서 명하여 조서를 공거에서 기다리라 하였다. 이윽고 불러보시고 목송하며 말하기를, "저 군이 주천의 국생인가. 짐이 향기로운 이름을 들은 지 오래였노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태사가 아뢰기를, 주기성이 크게 빛을 낸다 하더라도 얼마 안되어 성이 이른지라 임금이 또한 이로써 더욱 기특히 여기었다. 곧 주객 낭중 벼슬을 시키고, 이윽고 국자제주로 올리어 예의사를 겸하니, 무릇 조회의 잔치와 종조의 제사,천식,진작의 예에 임금의 뜻에 맞지 않음이 없는지라, 위에서 기국이 듬직하다 하여 올려서 후설의 직에 두고, 예로 대접하여 매양 들어와 뵐 적에 교자를 탄채로 전에 오르라 명하며, 국선생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임금의 마음이 불쾌함이 있어도 성이 들어와 뵈면 임금은 비로소 크게 웃으니, 무릇 사랑받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성질이 느긋하고 구수하여 날로 친근하며 임금과 더불어 조금도 거스름이 없으니, 이런 까닭으로 더욱 사랑을 받아 임금을 좇아 함부로 잔치에 놀아났다. 아들 혹과 폭과 역(쓴술)이 아비의 총애를 믿고 자못 방자하니 중서령 모영(붓)이 상소하여 탄핵하기를,"행신이 총애를 독차지 함은 천하가 다아는 바이온데, 이제 국성이 말되의 쓰임으로써 요행이 조정의 벼슬 등급에 올라 위가 3품(술에 3품이 있다)에 열하고, 깊은 도둑을 안에 끌어들이고 사람을 휘감아 상해하기를 좋아하는 고로, 만사람이 외치고 소리지르며 머리를 앓고 가슴이 아파하오니, 이는 나라의 병을 고치는 충신이 아니요, 실은 백성에게 독을 끼치는 적부로소이다. 성의 세 아들이 아비의 총애를 믿고, 횡행 방자하여 사람들이 다 괴로워하오니, 청컨대 페하께서, 아울러 사형을 내리시와 뭇 사람의 입을 막으시옵소서."하니, 아들 혹등이 그날로 독이든 술을 마시고 자살하였고, 성은 좌천하여 서인이 되고, 이자(가죽주머니)도 또한 일찍이 성과 친하였으므로 수레에서 떨어져 자살하였다. 처음 치이자가 골계로 임금의 사랑을 받아 국성과 서로 친한 벗이 되어 매양 임금이 출입할 때마다 속거에 몸을 의탁하더니, 치이자가 일찍이 피곤하여 누워 있는지라, 성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자네 배가 비록 크나 속은 텅 비었으니, 무엇이 있는고."하니 대답하기를,"자네들 따위 수백은 너글이 용납하네." 하였으니,서로 희학함이 이와 같았다. 성이 이미 벼슬을 면하자, 제고을과 격고을 사이에 뭇도둑이 떼지어 일어났다. 위에서 명하여 토벌하고자 하나 적당한 인물이 없어 다시 성을 일으켜 원수로 삼으니, 성이 군사를 통솔함이 엄하여 사졸과 더불어 고생을 같이하여 수성에 물을 대어 싸움에 함락시키고, 장락판을 쌓고 돌아오니, 임금이 공으로 상동후를 내리셨다. 2년 뒤에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빌어 아뢰기를,"신이 본시 독들창의 아들로 어려서 가난하여 남에게 이리 저리 팔려 다니다가, 우연히 성주를 만나 마음으로 저를 대우해 주시와, 실외에 빠진 것을 건져 주시고 넓은 마음으로 용납해 주셨사온데, 크게 만드심에 더함이 있고, 나라 체면에 윤기를 더함이 없었사오며, 앞서 삼가지 못한 탓으로 향리에 물러가 편안히 있을때에 비록 엷은 이슬이 거친다 하였사오나 요행 남은 이슬 방울이 같이 있어, 감히 해와 달의 밝음을 기뻐하고 다시 찌꺼기와 티가 덮인 것을 열어 젖히었나이다. 또한 그릇이 차면 엎어지는 것은 물의 상리이온데, 이제 신이 소갈의 병을 만나 목숨이 뜬 거품보다 급박하오니, 바라옵건대, 한 번 유음을 토하시와 물러가 여생을 보전하게 하옵소서."하니 임금께서 우소를 내려 불윤하시고, 중사를 보내어 송계,창포등 약물을 가지고 그 집에 가 병을 살피게 하였다. 성이 여러번 표를 올려 굳이 사양하니, 위에서 부득이 허락하고 마침내 고향에 귀로하여 천수로 세상을 마쳤다. 아우 현(탁주)은 벼슬이 2천석에 이르고, 아들 익(색주),두(중양주),앙(막걸리),람(과주)은 도화즙을 마셔 신선을 배웠고, 족자,주,이(골마지),엄(신술)은 다 호적이 평씨에 속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국씨는 대대로 본시 농가요, 성이 흐뭇한 덕과 맑은 재주로 임금의 심복이 되어 나라정사를 짐작하고, 임금의 마음을 이루었으니 장하도다. 그 총애가 극에 미쳐서는 거의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혀 비록 화가 아들에게 미쳤으나 유감이 없다 하겠다. 그러나 만절이 족함을 아록 스스로 무럴나 능히 천수로 세상을 마쳤다. 국순전-'동문선'에서- 임춘 국순(누룩술)의 자는 자후(흐뭇)이니, 그 조상은 농서 사람이다. 90대 조 모가 후직을 도와 뭇 백성들을 먹여 공이 있었으니, '시경'에 이른바, "내게 밀 보리를 주다."한 것이 그것이다. 모가 처음 숨어살며 벼슬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밭을 갈아야 먹으리라."하며 전묘에서 살았다. 위에서 그 자손이 있단 말을 듣고 조서를 내려 안거로 부르며, 군,현에 명하여 곳마다 후히 예물을 보내라 하고, 하신을 시켜 친히 그 집에 나아가, 드디어 방아와 절구 사이에서 교분을 정하고 빛에 화하며 티끌과 같이 하게 되니, 훈훈하게 찌는 기운이 점점 스며들어서 온자한 맛이 있으므로 기뻐서 말하기를, "나를 이루어 주는자는 벗이라 하더니, 과연 그 말이 옳구나." 하였다. 드디어 맑은 덕으로써 들리니, 위에서 그 집에 정문을 표하였다. 임금을 좇아 원구에 제사한 공으로 중산후에 봉하니, 식읍 일만호 식실봉 오천호요, 성을 국씨라 하였다. 5세손이 성왕을 도와 사직을 제 책임으로 삼아 태평성대를 이루었고, 강왕이 위에 오르자 점차로 소대를 받아 금고에 처하여 고령에 나타나게 되었다. 위나라 처기에 이르러 순의 아비 주(소주)가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서, 상서랑 서막과 더불어 서로 친하여 그를 조정에 끌어 들여 말할 때마다 주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위에 아뢰기를, "막이 주와 함께 사사로이 사귀어 점점 난리의 계단을 양성합니다." 하므로 위에서 노하여 막을 불러 힐책하며 물으니, 막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신이 주를 좇는 것은 그가 성인의 덕이 있삽기에 수시로 그 덕을 마시었습니다."하니 위에서 그를 책망하였고, 그후에 진이 선을 받게 되자, 세상이 어지러운 줄을 알고 다시 벼슬한 뜻이 없어 유영,완적의 무리와 더불어 대수풀에 놀며 그 일생을 마쳤다. 순의 기국과 도량이 크고 깊어, 출렁대고 넘실거림이 만경의 물결과 같아 맑혀도 맑지 않고 뒤흔들어도 흐리지 않으며, 자못 기운을 사람에게 더해 준다. 일찍이 섭법사에게 나아가 온종일 담론하였는데, 일좌가 모두 절도하게 되고, 드디어 유명하게 되어 호를 국처사라 하였는데, 공경, 대부, 신선, 방사들로부터 머슴꾼, 목동, 오랑캐, 외국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향기로운 이름을 맛보는 자는 모두 그를 흠모하며, 성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순이 오지 아니하면 모두 다 못살겠다하여 말하기를, "국처사가 없으면 즐겁지 않다."하니, 그가 송세에 애중됨이 이와 같았다. 대개 군신의 회의에는 반드시 순을 시켜 짐작하게 하나, 그 진퇴와 수작이 조용히 뜻에 맞는지라, 위에서 깊이 받아들이고 이르기를, "경이야말오, 이른바 곧음 그것이고, 오직 맑으므로 내 마음을 열어주고 내 마음을 질펀하게 하는 자로다."하였다. 순이 권세를 얻고 일을 맡게 되자,어진이과 사귀고 손님을 접함이며, 늙은이를 봉양하여 술, 고기를 줌이며, 귀신에게 고사하고 종묘에 제사함을 모두 순이 주장하였다. 위에서 일찍 밤에 잔치할 때도 오직 그와 궁인만이 모실 수 있었고, 아무리 근신이라도 참예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위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정사를 폐하고, 순은 이에 제 입을 자갈물려 말을 하지 못하므로 예법의 선비들은 그를 미워함이 원수 같았으나, 위에서 매양 그를 보호하였다. 순은 또 돈을 거둬들여 재산 모으기를 좋아하니, 시론이 그를 더럽다 하였다. 동문선에서-계주교서- 유의손 대개 들으니 옛적에 술을 만든 것은 그저 마시려고만이 아니라, 신명을 받들고, 빈객을 대접하고 늙은이를 봉양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사로 인해서 마실 때는 헌수를 절차로 삼고, 활을 쏨으로 인해서 마실 때는 읍하고 사양하는 것을 예로 삼았다. 향음의 예는 친목을 가르치는 것이요, 양로의 예는 치덕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건만 오히려 말하기를, "손과 주인이 백번 절하고 술은 세순배를 돌린다."하였고 또 말하기를,"종일토록 술을 마시어도 취하게 하지는 않는다." 하였으니, 선왕이 술의 예를 제정하여 술의 화를 방비한 것이 지극하였다. 후세로 내려오매 풍속과 습상이 옛날과 달라서 오직 황료하고 침혹을 주장하므로, 금주하는 법이 비록 엄하나 마침내 그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이냐. 대개 술이 화가 됨은 심히 크다. 어찌 특별히 곡식을 없애고 재물을 허비할 뿐일랴.안으로는 심지를 어지럽히고 밖으로는 위의를 잃어서 혹은 부모의 봉양을 폐하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며 크게는 나라를 잃고 집을 망치고, 작게는 성품을 해치고 생명을 잃어버리어 강상을 더럽히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다. 우선 경계가 될 만하고 법이 될만한 것을 한두 가지 지적하여 말하면, 은나라의 주와 주나라의 여왕이 이것으로 그 나라를 망쳤으며 정나라 대부 백유가 굴 속의 집에서 밤에 마시다가 마침내 자철이 불에 타서 죽었고, 전한의 교위 진준이 '마시기를 좋아하여' 매양 손님을 대접할 적에는 문득 문을 잠그고'손님의'수레바퀴의 비녀장을 우물에 던지곤 하였는데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취하여 해를 입었고, 후한의 사예교위 정충이 자주 여러 장수에게 들러서 술을 많이 마시다가 창자가 썩어서 죽었고, 진나라의 상서우복야 주의가 능히 한 섬 술을 마시는데, 우연히 옛날 상대자가 오자 흔연히 함께 마시고 많이 취했다가 술이 깨어서 살펴보니, 손님은 이미 옆구리가 썩어 죽어 있었다. 후위의 하후사는 성품이 술을 좋아하여 상중에 있으면서도 애통해하지 않고, 막걸리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으나 아우와 누이는 배고프고 한기를 면치 못하였다. 그도 나중엔 술에 취하여 죽었으니, 이것이 참으로 경계할 일이다. 주무왕이 주고란 글을 지어서 은나라 백성을 훈계하였고, 위무공이 빈연의 시를 지어서 스스로 경책하였으며, 진원제가 가끔 술 때문에 정사를 폐하므로 왕도가 간절히 말하였더니 원제가 술잔을 끌어 엎어버리고 드디어 술을 끊었다. 원태종이 날마다 대신들과 더불어 취하도록 마시매 야율초재가 술 거르는 틀에 달린 금구를 가지고 태종의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 쇠도 술에 상하여 이렇게 되었는에, 하물며 사람의 오장이야 손상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곧 신하에게 명령하여 하루에 술 세 종주만 드리라 하였고, 진나라 도간이 항상 술을 마실 때는 정한 한계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조금 더 마시라고 권하니, 도간은 한참동안 슬픈 빛을 띠고 있다가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술로 실수한 적이 있어서 돌아가신 부모님께 약속을 하였으므로 감히 한계를 넘지 못한다."하였고, 유곤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 항상 곤에게 술을 경계하였는데, 뒤에 매양 술에 취하면 곧 자책하기를,"내가 선인의 훈계를 폐하였으니 어떻게 남을 훈계할 수 있겠는가." 하고 아버지의 묘 앞에서 자수로 매 20대를 맞았다. 이것은 참으로 본받을 만한 일이다. 또 우리 나라의 일로 말하면 옛적에 신라가 포석정에서 무너졌고, 백제가 낙화암에서 망한 것이 모두 술 때문이었고, 고려의 말세에 위와 아래가 서로 본떠서 술에 빠져 스스로 방자하다가 마침내 망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것도 역시 은감이 멀지 않은 것이다. 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 태조께서 큰 기업을 이룩하시고 태종께서 계술하여 정교를 닦아 밝히어 법을 만세에 남기셨는데, 떼를 지어 술을 마시는 것은 법령으로 금하여 지난날의 물든 풍속을 고치고, 새로운 교화를 이루게 하였다. 부덕한 내가 외람되게 대통을 이러서 밤이나 낮이나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치안을 도모하여, 옛날의 엎어진 수레를 거울삼고, 조종의 법을 쫓아서 예로서 보이고 법으로써 규명하였으니, 내가 애를 쓰지 않은 것도 아니나, 너희 신민이 술로써 덕을 잃는 일이 가끔 있으니, 이것은 전조의 쇠망한 풍습이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은 까닭이라, 나는 심히 민망히 여기는 바다. 아, 술이 화를 빚어내는 것이 이렇게 비참한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니, 또한 무슨 심사인가. 비록 국가 염려는 못할망정 자기 한 몸의 성명조차 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조신 중에 유식한 사람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여항의 백성들이야 무슨 짓은 못하랴. 옥사나 송사도 대개는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시초에 삼가지 않으면 말류의 폐단이 참으로 두려운 것이니, 이런 점에서 나는 예와 이제를 들어 여러 번 되풀이하여 알려 주고 깨우쳐 주는 바이다. 너희 안팎 대소 신민들은 나의 지극한 생각을 체득하고 전 사람의 득실로 보아서 오늘날의 권계를 삼아 마시는 것으로써 일을 폐하지 말며, 지나치게 마시어 병이 되게 하지 말고, 각각 네 행동을 조심하여 무이의 훈계를 따르며, 강하게 술을 억제하여 거의 어변의 풍속을 이루게 하라. 너 예조는 이 지극한 뜻을 본받아서 안팎에 효유하라. 예문응교 유의손이 지은 글인데 세종임금은 교지를 내려 주자소에 명령, 인쇄하여 중앙과 지방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세종 (15년,14330 <장헌대왕실록> 제62권- 성호사설에서-주기보- 이익 '설문(한나라 허신이 지은 <설문해지> 의 약칭)' 에 "한되들이 잔은 작, 두되들이 잔은 고, 서되들이 잔은 치, 너되들이 잔은 각, 닷되들이 잔은 산이라 한다". 작이란 것은 한껏 넉넉하다는 뜻이고, 고란 것은 적다는 뜻인데, 분량을 조금 적게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이란 것은 닿는다는 뜻인데 양에 따라 알맞도록 마시지 않으면 죄가 닥쳐온다는 것이고, 산이란 것은 나무란다는 뜻인데 스스로 한정해 마시지 않으면 남에게 나무람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술잔에 대한 총칭은 모두 작이라 한다. 술을 가득 부은 잔은 상이라 하는데, 이 상이란 것은 여러 사람에게 먹인다는 뜻이고, 굉이란 것은 또 넓다는 뜻이며 밝은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군자는 허물이 있으면 거리낌없이 활짝 나타내게 된다. 그러므로 벌주를 굳이 먹이지 않았을 것이니, 술잔도 따로 이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옛날 한 되란 지금 우리나라에서 쓰는 되와 비교하면 두홉이 조금 넘는 것이고, 다섯 되란 지금의 한되 남짓한 것이었다. '주례'고공기에, "작은 한 되, 작은 두 되, 고는 서되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지 않으며, '시경'에 "나는 아직껏 저 시굉으로 술을 마시고있다." 하였으니, 이 또한 벌주로 먹는다는 것은 아니다. 대개 굉은 잔으로서는 큰 것인 까닭에 벌주를 마시게 할 적에는 굉을 쓰는 것이 마땅할 뿐이다. '아(한문)'는 음이 아인데 이는 술잔이다. 이 '덮을 아'란 글자는 옛날은 '어금니 아'자로서 '큰부리 까마귀 아'자와 통용했다. 삼아(세가지의 잔 이름. 옛날 중국 사천성 낭중현 어느 못속에서 발견한 세 개의 동기인데, 백아, 중아, 계아 라는 전자가 각각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이 동기에 새견진 그대로 술잔 이름을 했다 함.)라는 명칭도 아마 여기에서 유래되었으리라. 잔(옥 술잔)이란 글자의 뜻은 '해칠 잔','잔 잔' 두 글자와 같은데 작은 술잔이다. 하나라는 잔, 은나라는 가, 주나라는 작이라 했는데, 가한 작은 술이 여섯 되나 든다는 것이다. 두라는 잔은 술이 열 되나 드는데, '시경'에,"말처럼 큰 잔으로 술을 마신다."하였고, 포란 잔은 박 따위인데, '시경'에, "술마시는데 바가지를 잔으로 쓴다. "하였다. '예기'에는, 오헌은 "다섯번 드린다. 준은 문 밖에서 쓸 때는 부(동이)로하고, 문 안에서 쓸 때는 호로하며, 임금이 쓰는 술통은 와무로 한다." 하였으니, 이는 작은 것을 귀하게 여김이었다. 이에 대한 정씨의 주에는, "호란 것은 크기가 한 섬들이 만하고, 무란 것은 닷되들이이며, 부란 것은 큰지 작은지 모르겠다. 호라는 병은, 모가지 길이는 일곱 치, 복판 길이는 다섯 치, 지름 길이는 한 치 반인데, 한 말 닷되를 담을 수 있고, 무라는 병은 중간이 ㅇ고 아래가 좁으며 위는 뾰족하고 밑은 평평한데 작게 생겼다." 하였으며, '이야'에는, "부라는 것은 술 4곡이 든다."하였다. 병은 술을 담는 그릇이다. '시경' 에, "병이 술이 다하면 잔이 부끄러워한다."했는데, 뇌란 글자는 본래는 뇌였던 것이다. 귀목이란 것은 나무로 만든 술통인데, 겉에다 구름과 우뢰의 형상을 새겼으니, 이는 술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곽박은, "뇌라는 것은 병처럼 생겼는데, 큰 것은 술 한 섬을 담을 수 있고, 앵이란 병은 서되 일곱 홉이 든다."하였다. 온이란 것도 술그릇이고 치라는 것도 술그릇인데, 온달처럼 둥근 것도 있고, 반달처럼 굽은 것도 있다. 그리고 옹이란 질그릇으로서의 큰 것이고, 이라는 것은 종묘 제사에 울창과 술을 담는 그릇인데,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것이 일정하지 않으나, 이라는 것은 이 모두의 총칭이다. '주례' 소종백에는,"이란 따위가 여섯 가지나 있는데, 유라는 것이 준에서 중간이고, 준이란 것도 세 품들이 있는데, 상품이 이, 중품이 유, 하품이 뇌라."하였다. 곽박은, "유란 것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알맞게 만들어진 것이 이와 뇌에 비교하면 중간이다."하였고, '이아'의 소에는,"이란 것은 술 다섯말을 담을 수 있고, 유란 것은 술 서말을 담을 수 있으며, 뇌란 것은 술 한 말을 담을 수 있다. "하였다. 합이란 것도 역시 술그릇인데, '좌전'에 "행인(주나라 때 벼슬이름)이 합을 잡고 잇따라 마신다." 하였다. 치란 것도 역시 술그릇으로서 큰 것은 한섬, 작은 것은 다섯 말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인데, "서책을 남에게 빌려주는 자도 한 치이고, 빌어 온 서책을 되돌려 주는 자도 한 치이다." 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 외에도 대백, 상만, 강라, 목영, 호로, 치이, 어금, 점풍, 주반, 표창 따위의 여러 가지가 있으나 다 기록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것을 합하여 주기보를 만든다. 음주: 우리 당형(사촌형) 소은선생은 술잔을 드리면 반드시 오래도록 조금씩 마시는데, 마치 고기를 씹는 것처럼 하면서 이르기를'술'이란 맛으로 마시는 것이고 꼭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만약 장시간 앉아 큰 잔에 부어서 한숨에 들이키기를 마치 온낱 대추를 그냥 삼키는 것처럼 한다면, 이는 다만 배만 채우려는 것이니, 무슨 취미가 있겠는가? 대개 지금 술 마시는 자들은 모두 객기에 쏠려서 많이 마시는 것만으로써 쾌하게 여기니, 이는 취미로 마시는 것이 아니다. 비유해 말하면 지금 여기에 산적이 있는데, 온 점을 입에 넣고 한 번 씹고 삼킨다면, 흙이나 숯을 씹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고기에 좋은 맛이 있는 것은 오래 씹은 다음이라야 알게 되는 것이다. 속담에 "고기를 먹을 때는 씹을수록 더욱 맛이 난다" 하였으니, 술 마시는 법도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이 소은옹의 말은 오직 술에 대한 취미만을 의미한 것뿐 아니라 너무 지나치게 마시는 폐단의 막으려고 한 것이다. 주: 나는 이 술이라는 음식이 사람에게 단 한가지도 유익이 된다는 점을 알지 못하겠다. 대우는 이미 후세 사람들이 이 술로 인해 나라를 잃게 될것이라는 점까지 알고 좋은 술을 싫어하면서도, 다만 의적에게는 이 술을 자주 만들지 말라고 타이르기만을 했을 뿐이었다. 왜 그때에 일체 금해 버리지 않고 다만 자주 만들지 말라고만 했었는가? '주고(<서경>주서의 한 편명. 강숙이 은나라 고도에 봉해졌을 때 백성들이 술을 너무 좋아하므로 주고를 지어 경계하였음)'라는 글에서도 역시 엄금은 하지 않고 있다. "부모의 경사가 있으면 술을 마셔야 하고, 조상 제사에도 술을 써야 하며, 늙은이를 받드는 데는 술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하고서 그 법이 제대로 행해질 수 있겠는가? 착한 임금이 이미 백성들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법을 만든다면 여러 제후들까지도 감히 어길 수 없게 되는데, 늙은이니 어린이니 귀신이니 하면서 다 따질 겨를이 있겠는가? 우나라, 하나라 이전에는 술이 없었어도 나라가 제대로 잘 다스려졌었다. 백성도 오래 살 수 있었고 귀신도 얼마든지 흠향할 수 있었는데, 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나쁜 물건을 꼭 써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관중(춘추시대 제환공의 신하. 자는 이오)도 이르기를, "술이 입에 들어가면 혀가 빠지고 혀가 빠지면 몸조차 버리게 된다. 사람의 몸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술의 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대개 술에 상한 병을 흉주라고 하는 것은 병기를 흉기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이런 나쁜 물건을 없애려면 당장 바로 없애야 할 것인데, 임시 방편으로 우물쭈물하면서 온갖 폐단이 생기기까지 기다려야 옳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천지, 산천 제사에 술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갑자기 없애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천지의 산천은 기를 흠향할 뿐인 것인데, 어찌 꼭 술이라야만 시장기를 면하게 되겠는가? 반드시 이 술로써 예를 삼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업다. 종묘 제사에 있어서도 진실로 대의만 갖고 고한다면 선왕께서 백성 사랑한다는 뜻을 알고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할 이치가 없을 것이다. 이 술을 금하지 않는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꼭 금해야 한다면 반드시 유선주(촉한의 임금 유비를 가리킴)처럼 술 빚는 기구를 만든 자까지도 함께 죄를 주어야만 바로 유익이 있을 것이다. 성인도 이르기를, "술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으면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으랴?" (이 대문은 공자의 말인데,'논어'자 한편에 보임.)하였다. 성인도 오히려 이와 같이 말씀했는데, 우리 무리로서는 깊이 박힌 못과 뿌리를 싹 끊어 버리고 혹 미련이나 있지 않을까 늘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옛날 유을(오계때 사람, 자는 자진)이란 이는, 술로 잘못을 저지르고 화를 일으킨 옛 사실을 모아(백화경)이란 글을 만들고 죽을 때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한다. 이로 본다면 술이란 처음부터 마시지 말았어야 옳았을 것인데 왜 여러 번 뉘우치기까지 했을까? 나도 젊을 때에는 술을 많이 마셨는데, 나중에 와서 아주 끊어 버렸다. 남들이 마주 앉아서 술잔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옆에서 보아도 전에 많이 마시던 생각조차 들지 않으니, 이는 마음이 꽉 정해졌기 때문이다. 드디어 자식과 손자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제사에 예만 쓰고 술은 쓰지 말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정신을 어지럽히는 이 술이란 것이 걱정될 뿐 아니라, 재정에도 손해가 있기 때문이다. 나라에 큰 흉년이 있을 때 반드시 술을 금하게 되는 것은 식량을 축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가난한 선비로서 농사 짓는 전지도 없으니, 어느 해든지 흉년 아닐 때가 없다. 만약 마음속에 맹세를 엄하게 세우지 않는다면 얼마 안 가서 집이 엎어지고 못 살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우나라와 하나라 시대에는 제사에 술이 없어서 귀신이 흠향하지 않았겠는가? 울창도 변해서 청주로 되었으니, 이청주를 변해서 예주로 만들어 쓴다해도 불가하지는 않을 것이다."한다. 주금 : 국가가 가난하고 부유함은 백성이 먹고사는 재정에 달려 있고, 백성이 먹고사는 재정은 곧 곡식인데, 곡식의 생산에는 힘을 쓰면서 그 헛되이 소모되는 길을 막지 않는다면 곡식이 있어도 또한 허사인 것이다. 곡식을 헛되이 소모하는 것은 술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술은 반드시 금지해야 할 것이다. 순임금과 우임금 이전에는 술이 없어도 천하가 다스려졌으니, 이는 조금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일체 엄금하지 않으면 법은 마침내 시행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성인이 법을 마련할 때에 허술하게 다루고 엄밀하지 않았던 뜻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 임금이 이미 술로써 나라를 망칠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았다면(이 말을 '전국책' 위책에,'옛날에 의적이 처음 술을 만들었는데 맛이 좋으므로 우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맛보고는 맛이 좋으므로 의적을 멀리하고 술을 끊고는, <후세에 반드시 술로 하여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했다.' 한 것을 이름.)처음 제조했을 때에 어찌 엄형으로 다스려 온 세상에서 근절시키지 못하고 다만 물리쳤다고 만 했으니, 이 너무 관대한 처분이 아니겠는가? 후세에 주지, 조제 (주지, 조제 : 술로 만든 연못과 누룩으로 만든 언덕이니, 은나라 주왕이 요녀 달기에게 매혹되어 주지와 조제를 만들어 온갖 향락을 누리다가 마침내 멸망하였음.)가 생긴 것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고 에도, "부모가 기뻐하는 일이 있으면 마시고, 노인들에게 음식을 드리면서 마시며, 선조에 제사를 지내면서 마신다." 했으니, 이같이 한다면 어떻게 범람하는 데 이르지 않겠는가? '의례'소뢰궤서 편에 이르러서는 수없이 마시는 것을 허락했으니 그 문란함을 알 수 있다. 후세에는 비록 술을 금지한다고 했으니, 또한 양조장을 두어 주세를 받아 들였으니 참으로 절도할 일이다. 이제 서울과 큰 도시의 거리에는 그 수효가 한이 없고, 큰 마을에도 한 양조장에서 소모하는 쌀이 1년에 쌀 수백 석이니, 이는 가난한 집의 10년 양식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 시골의 시장가에도 주점이 3분의 1을 차지했으니, 그 소모되는 쌀이 과연 얼마나 많겠는가? 만약 술을 일체 엄금한다면 흉년이 들더라도 백성들이 굶주림을 면할 것이다. 금주령을 촉한의 선주 유현덕이 술 만드는 기구를 금지한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이같이 한 후라야 그 효과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금주는 반드시 상부로부터 실행하여하 할 것인즉, 비록 천지와 명산대천의 제사라 할지라도 술을 쓰지 말 것이며, 순 임금과 우 임금 이전에 술이 없을 때에도 천지와 명산 대천에 제사를 올렸던 일을 생각하여야 될 것이다. 참으로 백성을 위하여 법을 마련했다면 천지와 산천도 반드시 축복을 줄 것이니,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일반 가정의 경사는 족히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대동야승에서 선조 때는 흉년으로 인하여, 모여 술마시는 것을 금하였다. 때마침 늦은 봄이라 백화는 난만하고 달이 낮같이 밝았다. 임금이 후원에 산보가다가 문득 생각하기를,"이러한 좋은 밤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 반드시 모여서 술먹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자건(궁중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은 자색 두건을 쓰고 있었다) 두서너 사람을 시켜 "장안의 다섯 거리를 수색하여 아뢰라." 하였다. 마침 참판 송영의 집에서 큰 모임을 베풀고 있었는데 당대의 이름있는 사람들 중 모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자건 한 사람이 그 소리를 따라갔으나 모두들 '자건이' 온 줄은 모르고 있었다. 자건이 문밖에 서서 귀기울여 웃음소리를 들었는데, 채 빙군의 소리인 줄 알고 뒷걸음쳐 도망하였다. 이 자건은 본래 이조의 종인데 빙군이 이조낭관이 되었을 때 말을 몰던 사람이었다. 다음날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비로소 그 사실을 들었다. 권충민공이 빙군에게 편지로써 하례하여 말하기를,"덕성스럽다, 자네의 웃음이여, 복스럽다, 그대의 웃음이여. 그대의 웃음이 아니였더라면,일이 위태할 뻔하였네."하여 선비들 사이에 전해가며 웃음거리가 되었다. -김안로, '용천담숙기'에서 - 세 유생이 모여 독서 하는데, 어떤 사람이 쌀을 보내왔다. 한 사람을 술을 좋아하고, 한 사람을 밥을 좋아하고, 나머지 한 사람을 떡을 좋아하였다. 떡을 좋아하는 사람이,'사온 술은 먹지 않고 때 아니면 먹지 않는다.' 하였고 밥을 좋아하는 사람은,'술은 위의를 손상시키고 떡은 배를 채울 수 없다.' 하였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어린애 떡 달라 울고, 굶주린 사람은 밥을 찾는다. 옛날 요임금은 천 사발의 술을 마셨고,순임금은 백 잔을 마ㅅ으며, 우임금은 마시고 달다 하였고, 고종은 단술을 만들도록 명령하였으며, 강숙(주공의 동생)은 덕이 커서 취하지 않았다. 공자는 유주무량이요, 진나라 평공은 술잔을 날렸으며,위나라 문제(조비)는 벌주를 마셨고 백륜(진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유영의 자)은 주덕송을 지었으며, 낙천(백거이)은 술의 공을 찬양하고, 초화는 주보를 지었으며, 서막은 성(성은 천주, 현은 탁주)을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는 주성이 있고 땅에는 주천(지명)이 있으며, 고을에 주향이 있고, 신선에 주선이 있으니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두 술을 찬양하였지, 떡과 밥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없다.' 하였다. 이래서 술을 사게 되어 좋아하니, 떡을 좋아하는 사람은 냄새만 맡고 취하였으며, 밥을 좋아하는 사람은 잔을 잡더니 쓰러지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가득찬 잔을 당겨 술기운이 오르도록 마시며 몹시 즐거워하였던 것이다. 한 관리가 삼사현에 도착하니 고을 원이 주연을 베풀며 묵은 술을 내어놓았다. 빛과 맛이 아주 나쁜데 심히 권하였다. 관리가 술잔을 멈추고 얼굴을 찌푸리며,"붉은 말이 잘 불어뜯으니 어찌 마실수 있소." 하니 원이,"무슨 말입니까?" 물었다. 답하기를,"술빛이 누르고 붉으니 마치 유마같고, 그 맛이 몹시 매웁고 시니 입과 입술이 아파 물어뜯는 것 같이 아프오."하여 모두 크게 웃고 술좌석을 끝냈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히롱하기를,"태수가 유마주를 은근하게 권하네." 하였다. -권고,'해동잡록'에서- 문안공 이사철은 체격이 크고, 음식도 많이 먹었다. 등에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어 고기와 독주를 금하니 "차라리 먹고 죽는 것이 낫다."하고, 큰 밥 한 그릇, 닭 두 마리와 술 한병을 먹고 마침내 병이 나으니, "부귀를 누리는 사람은 음식 먹는 것도 보통 사람과 다르다." 하였다. 공이 젊어서 여러 벗들과 삼각산 절에서 놀 때에 각각 술 한 병씩을 가져왔으나 술잔이 없었다. 그때 권지 선생이 새로 만든 말가죽신을 신었었는데, 문안공이 먼저 그 신에 술을 담아 마시니 공들도 차례로 마셨다. 서로 보며 크게 웃고 말하기를, "가죽신 술잔의 고사는 우리가 신어도 가하지 않을까."하였다. 뒤에 문안공이 권지에게 말하기를, "오늘금잔의 술맛이 산놀이 할 때의 가죽신 술잔보다 못하구려." 하였다. 문도공 윤회와 집현전학사 남수문은 모두 문장에 능하였는데, 술을 좋아하여 항상 정도에 지나쳤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마실 적에 석 잔을 넘지 못하도록 명하였더니, 그 뒤로부터 두 공은 반드시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시니, 이름은 비록 석 잔이라도 실은 다른 사람보다 곱을 마신 것이다. 세종께서 듣고 웃기를, "내가 술을 조심시킨 것이 도리어 술을 많이 먹도록 권한 것이다."하였다. -서거정, '필원잡기'에서- "지금 금주하게 하는 것은 비록 민간의 재물 낭비를 막기 위한 것이오나 천계를 삼가고 뜻이 더욱 큰데... " "지금 가뭄 징조가 있는데 민간에서 잔치를 하면 술 마시기를 도가 없이 하오니 금주 하소서." "이제 비가 내렸으니 금주령을 파하라." 위와 같이 조선 왕조실록에는 술을 금한 기록들이 여러 곳에보인다. 술의 근본을 근절시키는 일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국가는 교사와 종묘에 제사지내는 큰 예절이 있으니, 술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무릇 신민들의 제사에 있어서는 의례 단술이 있고 명수(깨끗한 물.현주라고 하여 술을 대신함)가 있어, 모두 술을 대신할 수 있으니, 술은 없앨 수 있습니다. 경사는 말할 것도 없고, 어리석은 백성들도 부질없이 술을 많이 마실 줄만 알아서 술에 취하기 때문에 1년의 곡식이 반이나 술에 소비됩니다. 그것은 이미 양식을 모자라게 하고 또 그것으로인해 병이 되며, 1주가 되기도 전인데 벌써 굶주림에 울면서 곡식을 팔아야만 된다고 하니, 지금 백성을 해치고 재물을 해치는 것은 술입니다. 무릇 술은 누룩이 아니면 빚을 수 없고, 누룩은 밀이 아니면 만들 수 없습니다. 신은 바라옵건대, 민간에 조서를 내려 밀을 심는 것을 금지시킨다면 몇 해 후에는 백성들이 술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국용에 쓰는 술은, 경기 지방에 땅을 가려 따로 밀을 심어서 일정한 조세로 바치게 하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의 말을 좇아 기녀를 없애고 술을 금하신다면 백성의 재물은 넉넉하게 할 뿐 아니라, 또한 백성들의 목숨을 연장시킬 터이니, 백성들의 행복이 모두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연산군일기 7년 7월(1501)- 세종 때에는 비록 열흘만 비가 안 오거나 가물더라도 반드시 재변이라 일컫고는 금주하라 했는데... "비록 한 병의 술이라도 한결같이 금하소서." 대간이 힘껏 청함으로써 마지못해 정하기는 술 금하는 법을 제정했으나 궁중의 음탕하게 즐기는 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9년 2월 11일(1503)- 금주령을 내린다 하더라도 빈궁한 자는 반드시 금령에 걸릴 것이요, 세력 있는 부유한 자들은 반드시 뇌물로 면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도리어 민원만 사게 될 것이다. 각 관사의 관원들은 마시는 자가 있더라도 어떻게 적발할 것인가? ... 지금의 봄 가뭄은 내가 어질지 못한 소치이나 세종께서도 동방의 요순이라 하는데도 역시 봄가뭄이 있었으며, 성종께서는 명철하신 임금이지만 여러 번 한재를 만났었다. -연산군 일기 10년 4월 9일 (1504)- 11일 지제교 이행이 주계를 지어 바쳤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아, 술의 유화는 빠지기 쉬워도 구제하기는 어려우니, 나라를 망치고 몸을 망치는 것이 항상 이 때문이다. 예로부터 술을 경계하여 금한 사람은 보존하였고 술에 빠진 사람은 멸망하였는데, 방책(사적)에서 상고해 보면 득실이 함께 기재되어 있으므로 내가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오히려 능히 알고 있을 것이다. 엣날의 의적이 술을 만들매 맛이 감미롭자 대우가 먼 장래를 염려하여 소원시켜 끊어 버렸으며, 또한 매방(주왕)이 도읍한 지명이 술에 탐닉하매 무왕이 걱정하여 주고를 지었으니, 성인이 세상을 근심하고 재화를 염려함이 깊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 대소 신민을 보건대 술을 경계하는 사람은 적고 마시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아서 차츰차츰 빠져들어 이것이 풍속을 이루었고 덕을 행하는 사람이 없으며, 술에 빠져 본성을 잃게 되어도 스스로 뉘우칠 줄을 모르니, 이를 경계하지 않는다면 끝에가서는 어찌 되겠는가? 나의 덕으로 능히 감화시키지 못하니 매우 슬퍼할 뿐이다. 이에 선왕의 일을 상고해 보니, 처음 주례를 만들 적에 한 번 술잔을 올리고는 백번 절하게 하였으므로 종일토록 마셔도 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술을 마시는 자는 반드시 난잡한 지경에 이르러, 사무를 폐지하고 위의를 잃어서 그것이 덕의를 그르치는데도 함부로 마시면서 그치니 않아 마침내 그 몸을 망친다. 자신의 몸도 스스로 아끼지 않는데 덕행과 예절을 돌볼 여가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세종께서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알아듣게 친절히 타이르셨으니, 술의 재화를 방지하는 뜻이 아주 깊고도 간절하였다." "너희들이 비록 내 말은 귀담지 않더라도 우리 조종의 유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겟는가?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죄를 받는 것은 볍령에 기록되어 있으니 금주의 법이 또한 세밀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비록 그렇지만은 사람을 법으로써 금지시키는 것이 마음을 금지시키는 것만 못하므로 내가 지금 명을 내리는 것은 너희의 마음을 금지하는 데 있다. 너희가 마음을 금지하지 않는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지위가 있고 직책이 있는 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 능히 경계하여 그치겠는가?" "이것을 일변시키는 기틀은 실로 조정에 있으니, 여러 관원들은 각각 제 마음을 제재하여 술에 빠지지 말고 위의를 잃지도 말며, 사무도 폐하지 말고 몸도 망치지 말아서 내 말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또한 사서인으로 하여금 보고 감동하여 경계할 줄을 알게하여, 구습을 고쳐 인수의 지경에 함께 이르게 함으로써 나의 명덕이 향기나는 정치를 이루게 하라." 하니 전교하기를, "이 글로써 중외에 효유하라." -중종실록 9년 9월11일 (1514)- 경세유표에서 -각주고- 정약용 주관에 평시는 술을 기찰하고 , 조심시키는 일을 관장하였다. 주석하기를, "기찰한다는 것은 술 매매가 지나치게 많은 것과 시기 아닌 것을 살피는 것이고, 조심시킨다는 것은 백성에게 씀씀이를 절약해서 항시 마시지 못하게 함이다." 하였다. 한무제 천한 3년(서기전 98)에 술 매매를 처음 독점하였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술 매매에 금령이 있었는데, 그 법은 세사람 이상이 까닭없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 벌금이 4냥이었고, 나라에 경하할 일이 있어 백성에게 음식을 크게 내릴 때에는 모여서 술을 마셔도 죄가 없었다. 송나라 때 여러 고을에 초방이 있었는데, 원우 초년에 신하들이 독점하는 것을 철폐하기를 청했다. 소성 2년(1095)에 책사가 여러 고을 초방의 이익 중에서 경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다 상평으로 돌리기를 청하였다. 초를 파는 것은 천하에 지극히 천한 짓이었다. 일찍이 만승임금이 초를 파는 자가 있었던가? 우리 나라가 비록 동쪽 변방에 있으나, 삼한 때부터 임금이 술과 초를 팔아서 이익을 취한 사람은 없었다. 명나라 제도는 주국무를 세우지 않고 오직 그 부과를 세무안에 배정했는데, 초에 대한 금령은 없었다. 구준은 말하기를, "누룩에 대한 금령으로 민가에서 제조하는 것이 1두를 넘지 않는 것은 백성이 스스로 하도록 허락하고, 다만 교역해서 재물과 바꾸는 것은 허가하지 말기를 청한다. 지금 천하에 누룩 만드는 곳은 오직 회안 일부이나 소맥을 허비하는 것이 많다. 그 1년 동안 허비하는 것을 석으로 계산하면 무려 1백만석이나 되니 엄하게 금함이 마땅하다. 무릇 민가에서 누룩을 제조하는 기구는 죄다 부수고, 죄를 짓는 자가 있으면 사염이나 위전의 죄가를 부과 하면, 1년 동안에 만도 소맥 1백여만 석이 남아서 백성이 먹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왕망이 한나라를 찬성하자, 비로소 법을 세워 관이 직접 술을 빚어 팔았다. 희화(당우 때에 희씨와 화씨가 역상에 대한 일을 맡았는데, 그후 역상을 관장하는 관원을 희화라 일컫게 되었다.) 어광이, "옛 법을 본받아 관에서 술을 만드는데, 2천 5백 석으로 1균을 만들어 죄다 하나의 지정된 판매처에서 팔기를 요청했다." 하였다. 이로부터 이후에는 술을 금단한 일은 있어도 술을 독점하는 영은 없었다. 소금, 술, 차 세가지는 백성이 먹는 것인데, 백성이 먹는 것을 독점하는 것은 포악한 처사이다. 산림경제에서 홍만선 누룩 디디는 법 : 누룩 디디기 좋은 날은, 신미, 을미, 경자일이다. <거가필용>, <고사촬요> 또 좋은 날은 제, 만, 개, 성일이다. 삼복 중에 누룩을 디디면 벌레가 안 꾄다. <동파집> 매달 누룩 디디는 길일은 '술 빚기'를 참고할 것 목일에 누룩을 디디면 술맛이 시다. 누룩 디디는 시기는 초복 후가 가장 좋고, 중복 후 말복 전은 그 다음이다. 술빚기 : 술빚기 좋은 날은, 정묘, 경오, 계미, 갑오, 기미일이다. <고사촬요> 봄에는 기, 여름에는 항, 가을에는 규, 겨울에는 위일이 좋다. <거가필용>, <고사촬요> 또 만, 성, 개일이 좋으나, 멸몰일은 꺼린다. <고사촬요> 무자일, 갑진일은 두강이 죽은 날이기 때문에 꺼린다. <거가필용> 매달 술 빚기 좋은 날은, 누룩 디디고 초빚기 좋은 날과 같다. <거가필용>, <신은지> 술에 대한 금기 : '삭감본초' 에 이렇게 쓰여 있다. '술의 독이 이에 있으니, 술 한잔 마실 적마다 물로 입안을 가셔내면 취하지 않는다. 정승 이양원이 소주 한 잔 마시고는 바로 냉수 한 잔을 마셨기 때문에 걸리지 않았다.' <지봉유설> '양생기요' 에 "날 저물어서는 많이 마시지 말라." 하였고 또, "거듭 밤에 취하지 말라." 하였으니, 대개 술의 독이 머물러 사람의 장부를 상할까 두려워서이다. <지봉유설> 그믐날 크게 취해서는 안 된다. <산거사요> 규합총서에서 빙허각 이씨 여러나라 술이름 오손국(지금의 신강성)에서는 청전해에 그 나무는 알지 못하되 꽃과 그 열매는 너덧 되 드는 박같으니, 속을 비우고 물을 담아 두면 술이 된다고 한다. 천축국에서는 수타락이라 하고, 북에 있는 중들은 반야탕이라 하더라. 진납국(지금의 크메르) 사람들은 술을 먹지 않고, 음란한데서 비기니,오직 그 아내와 함께 방 속에서만 먹고 어른 보는데서는 피하더라. '부남전' 에 이르되, 돈손국서 안석류 비슷한 나무가 있어, 그 꽃즙을 옹기에 담아 며칠두면 아름다운 술이 된다 하였다. 강릉국에서는 버들꽃과 씨로 술을 만들되 또한 취하더라. 섬라국(샴국) 술은 오랑캐들 가운데 신약이니 이제환 소주다. 보에 이상한 향을 넣어 한 항아리에 단향 수십 근을 넣어 그 안에 향을 풍겨 옻칠하듯이 된 후 술에 넣고, 밀로 부리를 봉하여 흙가운데 두어 해쯤 묻었다가 내어 쓴다. 그 술을 가지고 배 위에서 먹으면 서너 잔에 곧 취하니 그 값이 예사 술보다 스무 배나 더 되고, 병든 이가 두어 잔을 마시면 곧 낫고 또 고통을 덜어 준다 하였다. - 대완국에서는 포도주 빚는 이가 많아서, 많은 자는 천만 석이나 하여 비록 수십여 년이 지나도 맛이 변하지 않더라. - 중산천일주는 먹으면 취하여 일천날 만에 깨더라. - 구루국 선장주는 먹으면 취하여 십여 일만에 깨더라. - 서량 준순주는 만들면 곧 되더라. - 유리국 미인주는 미인이 입 가운데 머금어 하룻밤을 지내면 향기로운 술이 되더라 술마시는 이야기 꽃에 취하기는 낮이 마땅하고, 취하여 흥겹거든 곱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고, 취하여 장차 헤어질 때는 북을 울림이 마땅하고 또 발을 치니, 문인이 취함에는 마땅히 지나친 음악을 삼가고 장정(규칙)을 조심해야 한다. (절주는 예요, 장정은 법이다.) 준걸이 사람 취함에 있어서 마땅함은 잔을 더하고 기치를 더할 것이다. 대에 취함에는 여름이 마땅하며, 물에 취함에는 가을이 마땅하다. 소동파는 '계주편인'에 가로되, 술은 천록이라, 그 맛이 아름답고 사나움으로써 주인의 길흉을 안다하였으니, 요즘 풍속에는 술맛이 시고 나쁘면 주인집에 근심이 생긴다고 했다. 중국사람은 술 빚는 데 재를 많이 쓰는고로 무회주약에 많이 쓰이고, 육로망의 시에 이르되, "주적회향사거년"이라 하였다. '박물편'에 이르되, "백년 고총광중에 술이 일되, 준을 넣었다가 내면 그 기운이 콕 쏘아,비록 해포를 두어도 맛과 빛이 변치 않는다."고 하였다. 약주(구기자술) 정월 첫인일에 뿌리를 캐어 그늘에 말려, 한 근을 2월 첫묘일에 청주 한 말에 담가 이레가 되거든 찌꺼기 없이 하여 먹되, 식후에는 먹지 말라. 4월 첫사일에 잎을 따서 5월 첫오일에 술에 담그기를 먼저 법대로 하여 먹는다. 7월 첫신일에 꽃을 따서 8월 첫유일에 전법과 같이 하여 먹는다. 10월 첫해일에 열매를 따 11월 첫자일에 법대로 먹는 것인데, 하서 여자는 산인 백산보의 생질이라, 이 방문을 얻어 먹고 삼백구십 세 얼굴빛이 열대여섯 소년 같았다. 한적 사신을 만나 이 방문을 얻어 듣고, 그 법대로 먹은 지 백일만에 흰 머리가 도로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나서 해가 가도 늙지 아니하더란다. 술빚기 좋은 날 정묘, 경오, 계미, 갑오, 을미, 춘저, 하항, 추규, 동위 만성개일 술 못빚는 날 무자, 갑진, 멸몰일, 수혼일, 정유일, 정유일은 두강이 죽은 날이니(두강은 옛날 술 잘 빚던 사람)꺼리는 고로, 팽조 '백기일'에 유일에는 손님대접을 않는다 하였다. 무릇 술을 빚을 때는 물을 가려야 하니, 물맛이 사나우면 술이 또한 아름답지 않은 법이다. 청명일, 곡우일에 강물로 술을 빚으면 빛과 맛이 특별히 아름다우니 이는 때의 기운을 받기 때문이다. 가을에 이슬이 많이 내릴 적에 그릇에 받아 술을 빚으면 이름이 추로백이니, 특히 향기롭고 콕 쏘는 맛이 있다. 꽃향내를 술에 들이는 법 국화가 흐드러지게 필 때, 술이 한 말이거든 꽃 두 되를 주머니에 넣어 술독에 담아 두면 향내가 가득하니 매화, 연꽃 등 향내가 있고, 독이 없는 꽃은 이 방법으로 술을 담글 수 있고 꽃을 위에 뿌려도 좋되 유자는 술맛이 실 것이니 술 속에 넣지 말고, 유자 껍질을 주머니에 넣어 담고, 술독 위를 단단히 덮어 익히면 향내가 기이하다. 술이 더기 괴거든 술이 더디 괴거든 좋은 술을 가운데 조금 부으면 즉시 괸다. 술에 가지나무 재가 들면 변하여 물이 된다. 여름에 소주를 먹을 때는, 꿀을 타고 얼음 한 조각을 넣어 급히 저어 먹으면 맛이 좋을뿐더러 또한 독이 없다. 사람이 소주를 너무 먹으면 입과 코에서 불이 난다. 만일 찬 물을 먹이면 아니되니 더운 물을 먹이고, 배꼽을 황토로 에워싸고 더운 물을 부으면 술이 깬다. 늘 술의 독이 치아에 스며들기 때문에 상하기 쉬우니, 한 번 먹은 후에는 꼬 한 번씩 양치질 하면 이 앓이를 하지 않는다. 낙양사람 유궤가 이 법을 써서 취하여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일흔에도 이가 상하지 않았다 한다. 술마시고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 술꾼의 병은 계지탕을 먹지 못하는 법이니, 양기를 얻은즉 반드시 토한다. 그렇기 때문에 술꾼은 단 맛을 즐기지 않는다. 막걸리를 먹고 국수를 먹으면 기운의 구멍이 막히고, 취한 뒤 바람맞이에 누우면 끝이 그릇된다. 술 마신 뒤 몹시 목마르더라도 찬물을 먹지 말아야 하니, 찬 기운이 방광에 들어가면 수종, 치질, 소갈증이 생기고, 홍시, 황률, 살구, 벚(버찌), 조기 등의 음식은 상극이니 먹으면 안 된다. 술이 깨고 취하지 않는 법 곤드레 만드레 취하면 밀실 안에서 뜨거운 물로 세수하고 머리를 수십 번 빗질하면 깨고, 소금으로 이를 닦고 더운 물로 양치질하면 세 번만 헤도 통쾌하여진다. <동의보감> 술끊는 방법 술 일곱 되를 병에 넣고, 주사 곱게 간 것 다섯 돈을 한데 넣어 부리를 단단히 막아, 돼지 우리 속에 두어 돼지가 제멋대로 뭉개고 흔들게 두었다가 이레 뒤에 내어먹이면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게 된다. 또 한 방법은, 우물에 거꾸로 난 풀을 물에 달여 먹이면 신효하나, 다만 먹는 사람에게는 알리지 말아야 한다. 매 똥 태운 제 한 돈을 술에 타 먹여도 즉효하다. 남주북병(서울 남쪽 공덕 옹막에는 삼해주 독이 천백 개씩 상비되어 있고, 북녘에는 떡집이 많아 남주북병이란 말이 있었다. <동국세시기>)이란? 그전에 서울 남산 밑에서 술을 잘 빚고, 북촌에서는 떡을 잘 만든다 하여 시속에 남주북병이란 말이 퍼졌었는데, 이 사실에도 그 때의 사회적 사정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 북촌에는 부귀한 집이 많으니까 일반적으로 음식 사치가 대단하여 갖은 <편>이라고 하여 떡 만드는 솜씨가 발달하였는데, 남산 밑으로 말하면 구차한 샌님과 시세없는 호반들이 사는 곳이니까 손쉽게 빗는 술솜씨가 높았다고 볼 수 있을까 합니다. -최남선 <조선상식문답>에서- 조선 술 중 유명한 것? 가장 널리 퍼진 것은 평양의 감홍로로 소주에 단맛나는 재료를 넣고 홍곡으로서 발그레한 빛을 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전주의 이강고니 뱃물과 생강즙과 꿀을 섞어 빚은 소주입니다. 그 다음은 전라도의 죽력고니 청대를 숯불 위에 얹어 뽑아낸 즙을 섞어서 곤 소주입니다. 이 세가지가 전날에 전국적으로 유명하던 것입니다. 이밖에 김천의 두견주, 경성의 과하주처럼 부분적 또는 시기적으로 좋게 치는 종류도 여기저기 꽤 많으며 뉘집 무슨 술이라고 비전하는 법도, 서울, 시골 퍽 많았으나 근래 시세에 밀려 대개 없어지는 것이 퍽 안타깝습니다. -최남선 <조선상식문답>에서- 팔도 명주 김포 특주/ 안동 제비원 순곡소주/ 한산 소곡주/ 부산산성의 약주/ 경주 법주/ 마산,목포의 정종/ 개성 소주/ 해주 방문주/ 동래 동동주 와송주 : 비스듬히 누운 큰 소나무에 구멍을 파고 그안에 술을 빚어 넣는데, 역시 소나무를 깍아 마개를 하고, 진흙으로 그 위를 바른 다음 풀로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여 술을 익히면 향이 좋은 훌륭한 술이 된다. 송하주 : 대나무 마디마디 사이에 술을 담은 죽통주가 있고, 술독을 땅속 깊이 묻어두는 지주, 소나무 밑에 묻는 송하주라는 특이한 명칭의 술이 있었다. 나비술 : 누에고치에 쌍둥이가 간혹 끼여 있는데 그놈은 실이 두가닥 엉켜 있어 실을 뽑을 수가 없다. 그놈을 골라 아랫목에 묻어두면 나비가 되어 나온다. 그 나비를 나오는 족조 소주 항아리에 넣어 일년을 묵힌 것이 나비술이다. 나비가 고치에서 나오면 곧 교배를 하는데, 그 교배 이전의 것을 잡아서 넣어야 효과가 있다고 한다. '만병통치요, 보양에 좋다'고 고창 근방 줄포에서 맛본, 이 술이야기를 심연섭이 쓰고 있다. -<전라도 맛>에서- 소주의 방언 깡소주(강원 도계)/ 마어더기(춘천)/ 새주(경북 영주, 봉화, 전남 영광, 함평, 고흥, 진도)/ 세주(충북 당진, 전남 여수, 구례, 경남 양산, 하동)/ 소지(경남 부산, 마산, 밀양, 양산)/ 쇠주(진주, 사천, 보은)/ 쇠주래기(전북 임실, 전남 곡성)/ 쇄주(청주)/ 시주(김천)/ 쏘주(강원 옥계, 단양, 음성, 논산, 전북 이리)/ 쐐주(거제, 충무)/ 아랑주(경남 하동, 전남 강진, 목포, 광주, 순천, 제주 성산포 서귀포, 함남 갑산, 평북 강계)/ 아랑쥐(함남 풍산)/ 아래기(경북 영천, 김천, 안동, 경남 울산, 양산, 부산, 밀양, 전부 남원, 순창, 전남 여수, 보성)/ 아래이(정읍, 김제, 광주, 담양)/ 어르괴이(평북 자성)/ 효주(전남 순천, 담양) 막걸리의 방언 대포, 마껄리, 막걸리, 막껄레, 모주(옥천,음성)/ 왕대포, 젓내기술(논산)/ 탁바리(제주)/ 탁배기(경남, 호남)/ 탁빼기(경상)/ 탁주배기(부산)/ 탁쭈(경북) 이화주 : 옛날엔 배꽃이 필 무렵에 누룩을 만들었기 때문에 막걸리를 이화주라고도 했으나 아무때나 만들게 되면서 그런 이름이 사라졌다. 가주양조법 : 두견새의 날개를 술독에 넣거나 술독근처에 놓기만 해도 술맛이 좋아진다. 술맛이 변하면, 이 날개를 태워 재를 술에 넣는다. 등나무 꽃이 진 후 열린 열매를 술에 넣으면 술맛이 불변한다. 좋지 않은 누룩을 대두만하게 깨뜨려 다섯 개를 독 밑에 넣고 술을 빚어 넣으면 술맛이 좋다. 술독이나 통에 족제비가 잘못해 들어 갔을 경우, 족제비가 저절로 달아나게 기다려야 한다. 쫓아내거나 잡으려고 하면 족제비가 다급해져 방귀를 뀌게 되고 그러면 그 냄새가 가시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경우 절대로 술을 그 그릇에 담지 않았다. 술을 넣기 전에 술독을 잘 씻고 청솔가지를 독 속에 가득 넣고 끓는 물솥 위에 얹는다. 불을 오래 때서 더운 김으로 독을 소독한 다음 써야 술맛이 좋다. 김치 독이나 장독을 쓸 경우 지푸라기 덤불을 태워 연기가 독 안에 가득 들어가도록 엎어 놓았다가 식은 다음 마른 수건으로 닦고 쓴다. 술통을 두드려 그 소리로 술맛을 알 수 있다. 소리가 맑고 길면 좋은 술이고, 소리가 탁하고 담담하면 좋지 않다. 소리가 없으면 안 익을 술이다. 또 술의 익고 안 익고는 촛불과 성냥불을 독안에서 켜보면 알 수 있는데 잘 익었으면 불이 꺼진다. 술맛이 시어졌을 때 고치는 법 1. 납 한 근을 끓여 술에다 넣어 하룻밤을 재운다. 2. 감초 한냥 쭝, 계수 두 뿌리, 백지와 축사각 두 돈 쭝을 빻아 가루 내어 술에 타면 신맛이 바로 가신다. 3. 술 한말에 날달걀 2개를 넣고 석고 반냥 쭝을 가루로 내어 사인 일곱 장과 함께 넣어 3일간 밀봉한다. 4. 곰팡내나는 신맛을 없애려면 석결명(전복껍질)을 구워 가루로 하여 술에 탄다. 술이 시어지면 붉은 팥을 볶아서 자루에 담아 술독에 박아 넣으면 곧 신맛이 걷힌다. 또 석쇠가루를 떡처럼 뭉쳐서 불에 구워 붉은 빛이 날 때 술독에 넣거나, 두부 비지를 주머니에 담아 술독에 넣으면 술맛이 고쳐진다. 대주법 : 팥꽃과 그 잎을 그늘에 말려 백일이 지난 것을 분말로 해 매일 1숟갈씩 더운 물에 타 마시면 대주가가 된다. 술에 체했을 때에는 냉수는 금물. 따뜻한 목욕물에 들어가거나, 발가벗고 뒹굴면 토하는데, 그러면 낫는다. 무우, 오이를 강판에 갈아 그 물을 마시거나 칡이나 탕, 감초가루를 더운물에 타 먹으면 좋다. 술먹은 뒤에 홍시를 먹으면 가래천식이 도져 만성기침병에 걸린다. 술과 상극되는 것은 살구와 조기이다. 술을 깨게 하는 해장술로 어성초 술이 있어, 이는 물고기 비린내를 어성초 술에 넣은 것이다. 술에 취하지 않으려면 술 마시기 전에 소금 1숟갈을 미리 먹거나 붕사(방부제로 쓰임) 가루 또는 강즙을 마시면 효과가 있다. 술을 끊으려면 말의 땀을 걷어 술에 타 먹으면 술이 싫어진다. 호랑이 똥도 금주에 좋다고 한다. 무당이 오구굿을 할 때 노래 가운데 바리공주가 저승에서 지옥으로 가는 것을 구경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경창파 내다보니 수천 배가 이승에서 돌아온다. 저 배는 무슨 배인가" 하면 세상에서 못한 짓을 한 데에 따른 벌로 지옥행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그 네 번째 배는 술장수의 배로 "그 배는 이승서 술장사 할 때에 술에다가 물을 타서 멀겋게 판 죄로 술찌꺼기를 입에 물고 지옥으로 들어간다. " 하고 노래하는데, 술을 귀하게 여긴 한 장면이다. -서정범<사내의 씨>에서- 하멜에서부터 최근의 미국인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찾아온 많은 방문객들에게는 조선 사람들이 맥주에서부터 위스키에 이르기까지 온갖 독주를 모두 좋아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인상적으로 보였다. "조선 사람들은 바카스에 대한 경배에 몹시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반도의 국민들은 부여와 고구려 시대에는 술고래들이었다. -그리피스<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칵테일 : 미국 공사관에 있는 나의 선임자 한 사람에게 두 사람의 손님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중국 하인에게 간단히 "칵테일(cocktail)셋을 가져오라" 고 쓴 글을 보냈다. 말로 할 때면 이 술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섞을 줄도 알았다. 그러나 짧은 편지 쪽지에 띄엄띄엄 쓴 굵은 철자를 풀이하다가 드디어 사전을 찾아보았다. 하인은 뜰로 나가서 닭을 뒤쫓아 다니더니 꼬리털(cocktail)을 3개 뽑아왔다 -알렌<조선견문록>에서- 술 예찬론 근대편 지붕유셜에서 -주- 이수광 옛 사람의 말에, "한 고을의 정치는 술에서 보고, 한 집의 일은 양념 맛에서 본다"고 했다. 대개 이 두가지가 좋으면 그 밖의 일은 자연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아'에 보면,"술에는 범제,부의가 있다." 고 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술을 가리켜 춘의니 녹의니 한다. '주례'범제 주에 보면, "범이란 익어서 범범하고 찌꺼기가 뜨는 것이다" 라고 했다. 지금의 찹쌀로 술을 빚어 익혀서 말갛게 되기를 기다려 술지게미를 조금 띄운 것을 부의주라고 하는 것이다. 한나라에서 승상에게 ㅈ은 술을 하사했다고 하는 주에 보면, "술에는 찹쌀을 제일 상으로 치고, 피를 중으로 치며, 조를 제일 하로 친다"라고 했다. '동월'의 조선부에보면,"술을 빚는 데는 멥쌀을 가지고 하고 차조는 쓰지 않는다. 아무리 다른 좋은 술이 있더라도 이 술과 우열을 따질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본초'에는, "출미를 누른 쌀이라고 하는데 이것으로 술을 빚으면 가장맛이 좋다"고 했다. '오학편'에는 "조선에서는 멥쌀로 술을 빚는다" 라고 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멥쌀을 가지고 술을 만드는 것은 오직 우리나라 뿐인 듯하다. 봄술을 의방에서는 미주라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지금의 삼해주(음력 정월의 세 해일에 빚은 술) 따위인 듯 싶다. 상고하건대 '창려집' 주에 말하기를, "시에 이 봄술을 만든다라고 한 구절이 있다"라고 했다. 이것을 후세 사람들은 술 이름이라고 해서 국이춘,나부춘,연각춘,옥굴춘 등이라고 하니 이루 셀 수가 없다. 술에 취하면 천일만에 깨는 것이 있으니 중산주이다. 또 취한 지 열흘만에 깨는 것이 있으니 구루국의 선장주이다. 마시고 나서 천리 길을 가면 비로소 취하는 술은 계양 정향주이다. 또 여러 해가 되어도 상하지 않는 술은 서역의 포도주와 일본주이다.금시에 만들어지는 술은 준순주이다. 서역에는 포도주가 있고, 가릉에는 야자주가 있다. 오손에는 청전핵주가 있고, 파사에는 육즙주가 있다. 북로에는 마동주, 남만에는 빈랑주, 부남안에는 석류주,감자주가 있다. 또 진랍의 미인주는 아름다운 여인이 입으로 씹어서 만드는데, 하룻밤 동안에 만들어진다. '오학편'에 말하기를, "유구국의 부인이 쌀을 씹어서 술을 만든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또 '식감ㅂ초' 에 보면 "섬라의 소주는 한두 잔만 마시면 묵은 병이 모두 낫는다"라고 했다. 왕감주는 말하기를, "지금 사이의 술 중에서는 섬라의 술을 제일로 친다"라고 했다. '식감본초'에 말하기를, "술의 독은 이빨이 먼저 받는다. 술을 한 잔 마시고 곧 물을 머금어 씻으며 취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상국 양원이 한평생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양에 차면 곧 그쳤다. 그리고 소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곧 냉수 한 잔으로 씻어 념겼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술에 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동파의 '계주송인'에 보면, "술은 천록이다. 술이 잘되고 못되는 것이나, 맛이 좋고 나쁜 것으로써 그 집 주인의 길하고 흉한 것을 점칠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지금 풍속에, 술맛이 시고 나쁜 집에는 액운이 있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이런 말에서 근본한 것이다. 듣건대 백년 된 옛 무덤을 파고 보니 광중속에 술 한 항아리가 들어 있었다. 그 술은 기운이 몹시 독하고 또한 그릇에 가득하여 조금도 줄어든 흔적이 없었다. 일하던 사람들이 각각 한 잔씩 마시고 모두 취했다고 하니 괴상한 일이다. 소주는 원나라 때에 생긴 술인데, 오직 이것은 약으로만 쓸뿐이지 함부로 먹지는 않았다. 그런 때문에 풍속에 작은 잔을 가지고 소주잔이라고 했다. 근세에 와서는 사대부들이 호사스러워 마음대로 마시고, 여름이면 소주를 큰 잔으로 많이 마신다. 그리하여 잔뜩 취해야만 그만두니 그래서 갑자기 죽는 자들도 많다. 명묘조때 김치운은 교리로서 지나치게 마시어 그 자리에서 죽었으니, 소주의 해독은 참혹한 것이다. 술의 독이란 또한 심각한 것이다. 평시에 내섬사에는 술을 만드는 방이 있었다. 그 방 위에 덮은 기와는 쉽게 상해서 몇 해만에 한 번씩 바꿔야 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까마귀나 참새떼가 모여들지 않는다. 이것은 술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세상 사람으로서 함부로 술을 마시던 사람 치고 일찍 죽지 않은 자가 드물다. 또 죽지 않았다고 해도 역시 병으로 폐인이 된다. 또 그 밖에도 화를 불러 자기 몸을 망치는 자는 이루 셀 수가 없다. 혹은 말하기를, 술이 사람을 상하는 것이 여색보다도 서 심하다고 하니 그 말은 진실인 듯 싶다. '의방'에 보면, "모든 중독 중에도 술에 중독된 것은 고치기가 힘들다고 한다. 술기운이 모든 혈맥에 통하여 온몸에 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음식에 중독된 것은 고치기가 쉽다. 먹는 것이나 약은 다만 위에 들어가서 혹은 대변으로 나와서 그 독기를 없앨 수도 있고, 혈맥으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모든 독을 푸는 약즙은 모두 데워서 먹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하면 그 독기가 더욱 심해지기가 쉽다. 그러니 마땅히 차게 해서 먹어야만 효력이 있다"라고 했다. 이 말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소설'에 말하기를, "사람이 소주를 지나치게 많이 마시고 불 가까이 가면, 입 속에서 불이 나온다. 여기에 물을 마시면 그 불길이 더욱 타올라서 타버린 다음에야 그치게 된다. 그러니 여기에는 오직 오래 된 식초를 써야만 불기운이 꺼진다"라고 했다. '수양서' 에 말하기를, "소주를 마시고 취해서 깨어나지 못하는 자에게는 급히 녹두가루를 끓여서 젓가락으로 이빨을 벌리고 찬 것을 흘려 넣으면 곧 깨어난다" 라고 했다. '본초'에 보면, "말고기를 먹고 중독 되었을 때는 청주를 마시면 곧 독이 풀리지만, 탁주를 마시면 더해진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말의 간에는 독이 있어서 이것을 먹으면 사람이 상한다"라고 했다. 진나라 목공이 말하기를,"좋은 말고기를 먹었어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사람이 상한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그렇다면 '한서'에, 문성이 말의 간을 먹고 죽었다는 것도 역시 이것을 말한 것인 것 같다. '양생기요'에 보면, "날이 저물 무렵에 너무 취하지 말라"고 했다. 또 "두세번 연거푸 밤술에 취하지 말라"라고도 했다. 이것은 대개 술의 독이 한데 머물러 모여 있어서 사람의 창자를 해치는 것을 두려워해서 하는 말이다. 지금 사람들은 손님을 초대해서 낱치하고 마시는 것을 대개 늦은 밤으로 한다. 그런 때문에 속담에, "유시에 잔치에 나간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늦게 술을 마시면 사람을 상하게 한다. 또 '산거사요'에는 말하기를, "그믐날에는 크게 취하지 말라"라고 하였고, '연수서'에는 "그믐날에 노래를 부르면 흉한 일을 불러온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이 말도 잔치하고 놀지 말라는 뜻인 것 같다. 유일에는 객을 모으지 않는다. 상고하건대 '사문유취'에 보면, "두강은 술을 잘 만들더니 유일에 죽었다. 그런 까닭에 이 날에는 손님을 모아놓고 술을 마시지 않는다"라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말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주란 글자는 유변에 쓰는 것이니 이것은 아마 스스로 깊은 뜻이 있는 것일 것이다. 도연명의 '술주시'의 주에 말하기를, "의적은 술을 만들었고, 두강은 술에 빛깔을 냈다"라고 했다. 세본에는 또 소강이 술을 만들었다고 했고, 또 혹은 두강이 출주를 만들었다고 했다. '설문'에 말하기를, "소강의 이름을 혹은 두강이라고도 한다"라하기를, "소강의 이름을 혹은 두강이라고도 한다"라고 했다. 옛날에 우정국은 술을 몇 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정강성은 한 곡을 마시고, 여식, 주의, 유영은 모두 한 섬씩을 마셨다고 한다. 상고하건대 '주보'에 보면 수나라 때 새로 도량을 제정해서 말이나 섬의 분량이 배로 커졌다. 그런 까닭에 당나라 이후로는 술 마시는 양이 이와 같은 자가 없었다. '오행지'에 보면, "진나라 혜제 원강연중에 귀족의 자제들은 머리를 푸는 모임을 가지고 종과 첩들을 데리고 놀았다. 이것을 거역하는 자는 의리를 상하고, 이것을 하지 않는 자는 남에게 조롱을 받는다. 그러나 이 모임의 꼴이란 말이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상고하건데 유영,필탁은 발가벗고 앉아서 술을 마셨고, 주의는 술에 취해서 기첨의 종을 간통하려 하여 그 추태를 보였다고 하니 모두 술로 인한 수치를 담은 말들이다. 장적의 시에 말하기를, "술을 빚는 데는 마른 반죽으로 빚는 것이 좋다." 고 했다. 상고하건대 '주보'에 말하기를, "이것은 지금 사람들이 물을 붓지 않고 만드는 술이다. 병주와 분주, 땅에서는 이것을 맛좋은 술이라 하여 이름을 건작주라고 한다" 했다. 또 좋은 술로는 검남의 소춘,하동의 건화, 의성의 구온 등이 있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 나라에서는 삭주의 술이 가장 이름나 있다. 중국 사람은 술을 빚는데 재를 많이 넣는다. 그런 때문에 의방에선 무회주가 약에 들어간다. 육방옹이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은 적주회를 좋아한다"라고 했다. 송나라 진종이, "당나라 때는 술값이 어떠했느냐" 하고 묻자, 좌우 사람들이 이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정위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당나라 술은 한 말에 삼백 냥씩 했습니다. 두보의 시에 속히 와서 서로 나가 술 한 말을 마시니, 그 값 청동전 3백냥일세 라고 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진종이 크게 기뻐ㅎ다 한다. 나는 생각하기에, 왕유의 시에, "신풍의 좋은 숭, 한 말에 십천냥일세"라고 했고, 또 최국보의 시에, "흥치 있게 한 말 술에 취하니 흡족히 돈 십천 냥을 썼네" 라고 해서 모두 두보의 시와는 다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오직 두보의 시만을 말하고 이들의 시는 말하지 않았으니 무슨 까닭인가. 옛 사람들도 시를 넓게 아는 자가 역시 드물었던 것 같다. 생활세시기에서 -기생들의 등급- 이승만 서울 안에 요리집에 생겨나기는 제법 이른축에 들어 이미 동락관이니, 혜천관이니, 명월관이니 하는 요리집들이 문을 열고서 영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반 음식점으로는 상밥집과 장국밥집, 설렁탕집으로 나눌 정도로 아직 단순하고 소박한 역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는 형편이었다. 한편, 서울에는 진작부터 술집으로 좀 색다른 이름을 가진 내외주접이라는 것이 생겨나 있었다. 본래는 내외주점이 생겨날 때만 하더라도 외간남자와 내외를 착실히 가리던 술집이라고 해서 붙여준 이름이다. 그런데 어느결엔가 내외주점에는 으레껏 손님 술상 옆에 붙어 앉아 술을 따라주며 웃음과 노래와 심지어 몸까지 파는 3패(갈보)가 판을 치게 되었으니 흔히들 말하는 색주가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한창 이러한 내외주점이 성할 때에는 청진동 일대에 열집건너 한집 비율로 늘어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 처음으로 내외주점(속칭 팔뚝집)이 생겨난 그 근본 내력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사이 세상 물정과 인심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실감케된다. 이 무렵의 술손님들은 내외주점이라 부르지 않고 흔히들 팔뚝집이라 불렀다. 본래 내외주점이 생겨난 경위를 잠시 들은 대로 살펴보면 어느 과수댁이 일거리가 있다가 없다가 하는 바느질(내재봉)품 만으로는 도저히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어서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술장수였다. 그 무렵으로 보아서 기생 출신도 아닌 여염집 여인으로는 여간 큰 결단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염집 여인으로는 외간 남자와의 내외를 심히 가릴 때여서 실상 애로점은 이런 내외 가림을 어떻게 타개해 가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그러면 과수댁들이 차린 술집이 한집에서 두집으로 차츰차츰 늘어나던 이러한 초기의 광경에서 이 내외 가림을 어떻게 타개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생판 처음 술장사를 벌이는 내외술집의 과수댁이 미리부터 자기집 바깥 대문과 중문 사이의 문간방 앞에 딸린 그야말로 큰 책로만한 크기의 한칸 남짓되는 땅바닥에 짚방석을 서너개 깔아놓고 안에 들어가서 손님을 기다리면, 술꾼이 하나 둘 꼬이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집을 찾는 술손님들은 이집 과수댁의 주모의 사정을 미리부터 잘 알고 지나는 터라, 그 집 바깥 대문을 밀치고 들어서면서 헛기침으로 손님이 들었다는 기척을 낸다. 같이 온 일행이 있는 경우 그 집 안채에 대고 두 사람이면 "둘이요"하고 한마디 내뱉고는 깔아논 짚방석에 앉아 있노라면, 과수댁은 중문 안에서 개다리소반에다 손님 수에 맞추어 술잔과 젓가락을 놓는다. 손님측에서 안주에 대한 청이 없으면 여기에 짠 김치사발이나 올려서 개다리소반을 겨우 내보낼 정도로 중문을 열고서는 소반든 두 팔뚝만 뻗쳐 밖으로 내민다. 그러면 밖에 있던 손님은 그것을 받아서 내려놓고 저희들끼리 술잔에 술을 붓고 따라 마시다가 술상이 파하면, 술값을 그 소반위에 넌지시 올려놓고 들어올 때와 같이 "돌아가오"하는 말 대신에 또 한번 헛기침을 뱉으면서 나가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이것이 원래의 내외술집에 있던 풍속이었다. 기생들도 한때는 그 신분을 등급으로 나누어 1패, 2패, 3패라 해서 1패 기생이면 매음따위는 하지 않는 기생으로 외출시에는 홍양산을 쓰게 하고, 3패는 막 굴러먹던 갈보 따위인데 2패와같이 청양산을 쓰게 하였다. 1패 기생이야 일종의 자랑기반 의기반으로 양양해서 백주대로를 활보한다지만, 2,3패의 경우 나는 몸을 파는 갈보요 하며 외치고 다니게 된 꼴이 되었었다. 이때에 이를 어기면 버젓이 경무청령으로 벌을 주던 시절이니, 지금에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일이 요즘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무렵만 해도 병목정(지금의 묵정동)에는 갈보들이 들끓어 '종3'과 같은 사창굴이었는데, 이 근처를 배화하는 사나이들에게 은근히 추파를 건네며 손짓으로 유객행위를 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병목정 갈보들 간에는 저희들의 신세를 "대적같은 사내놈이 무엇이 좋아 오늘도 억지 웃음을 웃어가며 부둥켜안고 몸을 팔고 살아야 하나" 하는 무슨 삼류 대사의 1절만 같은 넋두리 푸념으로 긴 한숨을 담아 내 뿜던 그늘진 곳이기도 했다... 전에도 조촐한 술집이나 음식점들이 가난한 일반 서민을 상대로 문을 열어 손을 부르던 집들이 꽤 많았다. 특히 예전에 선술집 많기로는 장안 가운데서도 야주개 (당주동), 수진방골 (청진동), 무교다리께 (무교동), 이궁안 (관수동), 동관(단성사앞),대전벽문(을지로 2가)등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여느 술집이나 음식만 해도 당초에 무슨 '옥' 이니 하는 상호없이 술손님이나 밥손님을 맞아들이다가, 찾아드는 손님측에서 자연히 그 집의 느낌이나 혹은 주인의 별명을 붙여서 비로소 이름을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집앞에 회나무가있으면 회나무집이요, 오동나무가 근처에 있으면 그 술집은 오동나무집으로 불린다. 또한 우물에 잡아넣은 붕어를 보고 그 술집을 붕어 우물집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동리의 이름을 따서 이문안 설렁탕집이라든가 잠바위(설렁탕)집 혹은 술집 근처에 다리가 놓여 있으면 백목다리 장국밥집이요, 장교탕반 또한 같은 예가 된다. 한편 흔히 주인의 별명이 붙어서 양보 장국잡밥, 황보 어추탕집, 형제 추탕집에 된다. 이처럼 그 집에서 풍겨나는 느낌이나 생김, 주인의 별명에 따라 불려지는 이름들은 찾아드는 손님에게는 퍽 인상적이요 친근감이 있어 좋다. 그리고 예전의 선술집에서는 술 한사발에 공짜 안주 한점에 꼭 붙어다닌다. 그래서 흔히 이러한 공짜배기 안주에 눈독을 들이는 얌체족의 수작도 흔하게 눈에 띈다. 이들얌체족은 항상 불아궁이 앞이나 화로불에 붙어서서, 안주구이를 도맡고 있는 동저고리 바람에 옹구바지를 꿴 헙수룩한 더부살에에게까지 예사로 추파를 건네, 덧거리를 바라는 낯간지러운 술손님을 이른다. 이러한 궐자들은 슬금슬금 술구기를 쥔 주모의 눈치를 살펴 제깐에는 약은 체하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다. 한눈에 짚어보는 주모의 눈길도 녹녹치 않아서 이러한 밉상에게 안기는 술구기의 인심도 푸대접이기 마련이다. 십중팔구 이런 궐자일수록 마실 술값에까지 떼를 써서 외상을 하자고 덤비는 축이기 때문이다. 장사하는 데 외상없는 장사란 드물다. 고금을 통해 술장사에 외상 술값이 없다는 말 들어본 적이 없다. 전날에는 이러한 외상 술값을 기장이 있어서 꼬박꼬박 적어둔게 아니다. 순전히 주모의 '아이디어'에 의해서 처리되었다. 술구기 잡은 주모도 그러려니와 그녀의 시중꾼인 더부살이도 그 주제에 글씨 한자 익힌 적이 없으니 두 사람 다 청맹과부다. 이때 대개 주모는 그녀가 앉은 옆자리 벽면에다 작대기를 그어서 외상 술값을 치부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재미있는 것은 술값을 긋는 외상 손님의 코가 크면 코를 그려놓고, 얼굴에 사마귀가 있으면 점을 찍어서 손님 나름의 특징을 그림으로 그려놓되, 그 위에 작대기를 그어서 술값 셈을 기록해 놓았다. 색주가라 하면, 동정깃에 기름때가 꾀죄죄 흐르는 젊은 계집들이 저마다 화호화나씩을 지어서 화심,도화,홍도,산홍이로 불리며 손님 사이에 끼어 앉아 술청 안이 떠나가라고 목청을 돋군다. 대개 술자리에서는 권주가나 사랑가, 창부타령 등이 판을 친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창가도 한판을 이루어서 이것이 나중에는 유행가로 옮겨지는 한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때 주색가를 찾는 손님을 보면 값비싼 관자리 격조 높은 기생은 차마 엄두를 못내는 밑천 짧은 패들이지만, 그 대신 적은 돈으로 젊은 계집의 몸을 후릴 수 있는 이점을 보고 덤비는 축이었다. 몸살나던 '나라베 술집' 뭐니뭐니 해도 서러운 것은 굶주림이다. 일제 말기에 한창 식량 기근에 허덕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술의 기근 사정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곡물로 빚던 술을 금해서 밀주가 철저한 통제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천행으로 주당의 숨통까지는 막기가 무었했는지 일본은 조그만 선심을 하나 베푼 적이 있다. 즉 <나라베(줄서기)술집>의 출현이다. 오후 5시만 되면 문을 열던 나라베 술집은 천하의 음주당들을 몸살나게 만든다. 그나마 어물쩍 대다가는 한 잔 술도 차례가 가지 않을까봐 두려워 오후 서너시부터 술집 앞에는 이른 장사진을 치는 진풍경이 연출되곤 했었다. 주막 이서구 주막은 대중 식당이요, 서민의 '바아'이다. 시골길로 접어들면 큰 길목에는 반드시 주막이 있어서, 여행객의 허기를 해결해 주고 갈증을 풀어 주었다. 주막에 간판은 없다. 입구에 좌판을 제쳐놓고 소머리나 돼지발 삶은 걸 늘어놓고 초가 지붕 위로 바지랑대에 용수를 높이 달아 논 집이면 주막이 분명하였다. 주막에는 어디나 술구기를 들고 술항아리에서 술을 떠 주는 접객부가 있다. 명동 뒷골목에서 흔히 보는 바아 걸의 원조가 되는 셈이다. 중년 노부가 술구기를 잡으면 주파라 부르고, 젊은 여인이면 주모라 불렀다. 모라 일컬어서 대단한 것 같으나 실은 식모니, 침모니 부르는 바로 그 또래이다. 대처바닥 흥청대는 큰 주막쯤 되면 마담까지 등장한다. 소위 주막집 안주인이라는 것으로, 중창앞 부뚜막 위에 앉아서 술을 떠 객에게 내주는 것이 일이다. 단골 손님에게는 진국을 주고 뜨내기 길손에게는 물을 타 주는 것도, 안주인의 요량에 달렸다. 부뚜막이지만, 주막집 부뚜막은 좀 특이했다. 술그릇을 놓는 식탁 밑으로 불 때는 부엌이 있고, 그 위에 솥을 걸어 항상 물이 끓게 마련이다. 숱이 걸린 자리를 부뚜막이라지만, 주막술청 부뚜막에는 주모가 앉을 자리가 마련돼 있다. 그래서 주모는 부뚜막 위에 앉아서 술 양푼을 연신 끓는 물에다 잠그어 거냉을 해서 술잔에 부어 주는 게 소임이다. 그러니까 술손들은 주모의 인심이 좋아야 물타지 않은 술을 잔 가득 얻어 마시게 마련이다. 그래서 술꾼들은 술을 먹어보고 항상 술구기 잡은 안주인의 인심의 후박을 일컫게 된다. 술은 그렇거니와 술안주가 또 있어야 한다. 마른안주든, 구워 먹는 안주든 으레 술 한잔에 안주 한점은 주막이 생긴 이래의 철칙같이 돼 있지만, 왕왕 술보다도 안주에 눈독을 들이는 주객도 없지 않다. 한 잔 값을 내고 석 점, 넉 점 안주를 먹으면 주인은 적자이다. 그래서 이것을 감시하기 위해 '더부살이'하는 바텐더가 감시를 하게 된다. 더부살이란 주인집에서 숙식을 해가며, 용역에 종사하는 자를 일컫거니와 스탠드 바아의 바텐더같이 말쑥한게 아니라 동저고리 바람에 옹구바지를 입은 허수룩한 이다. 그냥 서서 지키기가 쑥스러워서인지 숯불이 이글이글한 화로 곁에 붙어 서서, 비웃이랑, 너비아니랑을 구워 주기도 한다. 붙임성 있는 주객쯤 되면 더부살이를 구워 삶아 안주 '덧거리'쯤 거뜬히 해치운다. 그 곁에서 명월이니, 산옥이니 흔해 빠진 화호를 지닌 젊은 계집이 창부타령, 권주가를 부르게 되면 술청 안이 흐뭇해지고, 무슨 대단한 오입쟁이랍시고 막걸리 잔을 들고 권주가가 끝나기를 기다려 의젓하게 들이켜는 초라한 주객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술소리까지 곁들인 주막이면 A급에 속하지만, 대개 술청 흙바닥에서 깨진 항아리같이 딩구는 명월이, 산옥이는 모두가 혼인길 막힌 놀아난 새댁이나, 도망치다 붙들린 청상 과부이고 보면, 당시의 풍조도 가히 짐작이 간다. 예나 지금이나 외상은 있다. 외상없는 장사는 장사가 안된다는 말도 있거니와, 지금 같으면 "마담, 내 앞으로 달아두어요. " 하면 으레껏 금액을 적은 쪽지를 준다. 그러나 지필묵이 귀중품 같던 시절에는 그렇지를 못했나 보다. 더욱이 주모도, 주객도 글씨조차 모르니 기장이니, 쪽지니하는 것은 엄두도 못냈던 모양이다. 그래서 주막집 술 외상은 긋는 것이 법으로 됐다. "주모, 나 오늘 그냥 가네. " 주객이 소리를 친다. "그럼 긋구 가셔요." 주모의 대답이다. 어는 주막에서든지 출입구 으슥한 벽에는 작대기 같이 그어 논 것이 수두룩하다. 술이 한 잔이면 하나를 긋고, 열 잔이면 열 개를 긋는다. 그러면 그것이 곧 외상값으로 계산되는 것이다. 외상값을 그을 때나, 외상을 갚고 지울 때는 영락없이 더부살이가 입회를 함으로써 정확을 기했다. 본시 우리 나라는 역, 원, 봉수, 그리고 주막, 네가지를 지방 행정의 기간을 삼았으니, 역은 곧 역마를 갈아타는 곳이요, 원은 호텔이며, 봉수는 통신 기관이다. 그중에 주막만은 민영으로 여행자가 쉬어 가는 곳이다. 그러니까 서울이나 평양, 대구 같은 대도시이면 주막이 주막 구실만 하지만, 좀 덜어진 시골에서는 여인숙까지 겸하는 수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역마를 타려면 마패가 있어야 하고, 원에 묵으려면 고관이나 공무여행자라야 되게 마련이니, 명색 없는 길손들은 감히 기웃거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만만하게 주막이라서 십리 고개 오르내리는 길목 같은 데는 해만 저물면 만원사례가 나붙을 지경이었나 보다. 어느 곳에 가든지 네거리 넓은 마당께는 으레 주막이 있어 '주막거리'라는 별칭까지 생겼거니와 '춘향전'에도 이도령이 어사가 되어 남대문으로 나서 남원까지 내려 가는 노정기에는 주막이 여러 곳 나온다. 서울과 영남을 가로지른 문경 새재는 천험지지라서 소리에도 나오는 곳이며 과거길에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그래서 새재 어귀에는 주막이 즐비했다. 천하 제일관이라 일컫는 주흘문은 지금도 남아 있거니와, 관문 셋을 지나야 겨우 충청도 괴사고을로 빠져나가게 되는지라, 해가 조금도 남았어도 대개는 주막에서 자게 마련이다. 상푸실주막은 언제나 새재를 넘는 길손으로 붐비었다. 상푸실, 중푸실, 하푸실 세 마을 중에서 상푸실 주막거리가 제일 번창하여, 인마가 그칠 때가 없었다고 한다. 주막에 들어 돈만 낸다고 특실에 들지는 못한다. 지위가 낮으면 천금을 내도 마루방으로 밀려난다. 양반이 판을 치고 양반 중에도 높은 양반이 거들먹거리는 것이 법이었다. 그래서 고관 대작의 먼 일가라도 거드름만 잘 피면 특실 손님으로 모시는 형편이었다. 이런 사품에 주막 주인은 까딱하면 골탕을 먹게 되니, 술값 밥값은 둘째요 손님 눈치보기에 넋이 빠졌다. "주막 주인 놈, 게 있느냐!" 호령이 내리면 아찔한다. "저... , 안방 아랫목에 거들먹거리는 자는 어디 사는 누구이기에 감히 내 앞에서 무례한지, 냉큼 알아 오너라." 시비가 나면, 주인들은 안간힘을 쓰지만, 따라온 하인끼리 육박전을 벌인다. "이놈아, 댁 샌님은 예판대감의 외사촌 되시는 분이시다." 큰소리를 친다고 수그러들 숙맥은 없다. "뭐라구, 예판대감의 외사촌이시라고? 나으리께서는 우찬성대감의 칠촌 조카이시고, 사돈댁이 바로 동부승지이시다." 그러나 모두가 시시한 양반 자랑이다. 이조 세종때의 일이다. 황희라는 자가 있었다. 고향이 온양이라서 틈만 있으면 근친을 갔다. 청렴 온공한 분이라서 언제나 촌부같이 차리고 넌지시 다니는 터이다. 부심히 보면 촌늙은이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말도 안 타고, 소를 타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어느날 상경길에 비를 만나 용인주막에 들었다. 상노만 데리고 행색이 초라한지라, 주인도 깔보고서 누마루 한 귀퉁이에 자리를 정해 주었다. 때마침 서울의 녹사취재차 서울로 가는 촌양반이 있어 돈냥이나 있었든지 상좌에 앉아 거드름이 대단했다. 그냥 그런대로 지냈더라면 황정승도 아무말 않고 있었으련만 촌양반이 하도 심심하니까 수작을 걸었다. 제가 잘난 척, 거드름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러나 황정승이 지그시 참고 촌늙은이로 자처했다. '공'자, '당'자를 놓고 문답을 해서 말이 막힌 편에서 술을 한턱 내자는 것이다. "무슨 일로 서울로 가는 공." 황정승이 먼저 물었다. "녹사취재하러 가는 당." "그럼 내가 주선해 줄 공." "실없는 소리 말랑 당." 촌양반은 황정성을 무척 아니꼽게 본 모양이다. 다음날 황정승이 궁중 빈청에 앉아 있으니 그 자가 문안을 드리러 왔다. "어떤 공." 황정승이 물으니 그는 움찔하더니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일국의 정승을 희롱한 죄는 죽어 마땅하다. 그 자리에 엎드려 한 대답이 걸작이다. "죽어지이 당." 그후, 황정승은 그 자를 벌주지 않고 벼슬을 주었다 하니 주막에서 있을 법한 한 토막 이야기다. 주막거리란 별별 사람이 다 모이는 곳이요,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목이라서, 날이 새면 불어나는 건 화제이다. 도망가던 과부가 장돌뱅이에게 붙들리는 곳도 주막거리다. 장가들고 돌아가는 신랑의 꽃같은 신부를 산적이 가로채는 곳도 주막거리 뒷골목이다. 상감께 바칠 봉물바리를 터는 엄청난 도둑도 주막거리에서 흔히 보는 일이요, 서울 소문을 제일 먼저 듣는 곳도 주막거리다. 지금으로 치면 역전 광장이나 버스 터미널과 같아, 사람들이 들끓는 것은 매일반이다. 깡패를 건달이라 불렀고, 도적을 보고도 후환이 두려워 못 본 척 눈을 감는 것도 지금과 흡사하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이 달라져도, 살아가는 형편이 별로 나아지지 않는 것은 누구의 탓일까. 밤중에는 투전판이 벌어지고 어수룩한 길손의 주머니를 터는 것은 거의 합법적이다. 포교가 기웃거릴 때 개평만 집어 주면 보호를 받았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본시 주막의 특색은 서서 마시는 것이다. 그래서 대처에서는 선술집이라 불렀거니와 일인들도 선술집 재미를 알아서 '다찌노미'라 불렀으니 '서서 마신다'는 뜻이다. 선술집 하면 야주개, 수진방골, 동관, 무교다리께, 대전벽문, 이궁안 등 시내 각처에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술집이 있어서, 온종일 법석을 떨던 때도 이었건만, 이제는 이미 그 자취조차 볼 수가 없다. 그 대신 안주나 술잔이나 술이나 모두가 옛날 그 식이지만, 오직 한 가지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서 마시는 대중 주점이 많아졌다. 그래도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술안주는 산해진미가 구비되고, 양념이 푸짐해서 지나가는 주객을 손짓해 부르는 듯 지날 때마다 옛날을 회상하게 한다. 영화의 주제까지 된 명동의 학사주점은 그게 바로 관운에서 벗어난 한사들이 찾던 한 옛날의 주막인 양 좀 궁금해서 몇 번 기웃거린 일도 있지만, 세상이 좋아진 까닭인지 명월이, 산옥이는 간 곳 없고, 묘령의 여학사님네가 대배를 기울이며 인생을 논하는 기세는 자못 장관이었다. 서울에서는, 비지 전골을 끓여 놓고 술 손을 부르는 풍습이 있었다. 네거리 길목 대갖비 행랑 들창 앞에 화덕을 피워 놓고 가마솥에 비지를 끓인다. 묵은 김치를 숭덩숭덩 썰어 놓고, 드문드문 돼지고기도 넣고 끓이면 우선 그 냄새부터 구수하다. 교군꾼, 등롱잡이, 무수한 날품팔이가 주모의 청을 받고 목청 좋게 외친다. "설설이 끓었소! 비지 전골이요!" 스피커는 없어도 10리 밖까지도 들림직한 탁성이다. 이 전방 저 행랑에서 시장끼 띤 궐자들이 군침을 삼키면서 비지찌개가 끓는 화덕 앞으로 다가선다. 때맞춰 막걸리 동이를 머리에 인 주모가 씨암탉 걸음으로 등장하면 주막은 개점을 한다. 목청 좋게 외친 자는 개평술이다. 지금으로 치면 확성기 사용료를 받는 셈이다. 그러나 일인이 판을 치면서부터 통로 사용이 금지되고, 교군꾼은 인력거꾼으로, 등롱잡이는 막벌이꾼으로 전업을 하고 말았다. 문물이 개화됨에 따라 선술집은 사라져가고, 색주가니, 내외술집이니 하는 것이 등장했다. 색주가는 실내에서 미녀가 술을 따르는 곳이요, 내외 술집은 행세하던 집 노과부가 생계에 쪼들려 건넌방이나 뒷방을 치우고 넌지시 파는 술집이다. 색주가의 출현으로 무수한 젊은이가 놀아났다. 모두가 중산 계급의 불초한 아들들이다. 기생은 격조가 높아 쳐다보지도 못하던 젊은이들이 값싸고 재미보는 색주가를 외면할 리 없다. 돈의동, 청진동, 순화동 같은 곳에는 집단을 이루어 해만 지면 주전자 뚜껑 두드리는 소리와 사발가, 창부타령으로 이웃이 못 견딜 지경이었다. 이것이 바로 주막의 후신이다. 매주에서 매색까지 하는 곳이 색주가였던 것이다. 그 대신 내외주점은 그대로 의젓했다. 물론 안주인은 얼굴을 내놓지 않는다. 노면을 하면 내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15,6세의 소년이나,회갑이 가까운 노파가 술심부름을 한다. 그 대신 술은 가양주요, 안주는 간단해도 진미다. 세월 좋던 때 주인 영감이 사랑 손님을 대접할 때 뽐내던 솜씨다. 그래서 그런지 낯모르는 손이 오면 아예 대문을 닫고 모른 척한다. 어느 동리, 어느 댁 손님인 것을 확인하지 않고는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안국동에 있던 윤과부집은 동아일보사 뒷골목이라서 고하 송진우 선생이 젊은 기자들을 이끌고 자주 다니시던 일이 생각난다. 떡볶이가 일미였다. 인사동 뒷골목에도 자주 갔다. 심천풍 형님이 단골로 정한 집이라서 가기만 하면 마님이 반겼다. 이혜구, 김억, 이계원, 김진섭 등 여러 동지가 정동방송국에서 일할 때 일이다. 지금 생각하니 윤보선씨의 99간 집이 바로 북쪽 골목이었으나 그저 그냥 이런 큰 집도 있구나 하며 지나쳤을 뿐이다. 내외 술집에는 독립투사들의 밀회가 잦았다.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울분을 풀기에는 알맞았던가 보다. 이제는 모두가 돌이켜 보면 아픈 과거가 되고 말았다. 불타는 망국한을 술로 달래던 그 분들은 다 어찌 되었는가. 물어볼 길은 끊기고 추억만 쓰라리다. 3.1독립운동이 터진 뒤부터 뜻을 이루지 못한 무수한 젊은이들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느라고 밤거리를 부랑했다. 화가 나도 술이요, 한을 풀려 해도 술이다. 갓쓴 행인이 줄어가고, 담벙거지 쓴 양복장이가 늘어가면서 본정, 황금정, 장곡천정, 명치정 언저리에 신장한 주막이 깃발을 날리니, 그것이 곧 카페라는 것이요, 바아라는 신형 주막이다. 계보없는 가족들 이봉구 '명동시장', '명동백작' 으로 불리며 명동과 함께 40여 년을 살다 간 작가 이봉구씨, 그는 지난 시절 술과 함께 했던 문인들과의 명동 풍경을 그의 저서에 남기고 있다. 명동 거리에서 30여년, 그러니까 이곳에서 청춘을 보내고 늙어가는 나에게 있어서 명동은 내 마음의 터전이요, 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오랜 세월에서 나는 그리운 수많은 사람들을 저 세상에 먼저 떠나 보내는 영결의 아픔에 몸부림쳤고, 만나 볼 수 없는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애타는 상심 때문에 고절을 달래는 독주로 나는 병 들었고, 그 그림자를 찾아 더듬는 사연이 바로 이 '명동'의 줄거리다. 다시 말하면 그리운 모습을 찾아 세월이 흘러간 골목에서 잃어버린 '고향' 찾는 나의 향수 서린 도정의 노래이기도 하다. -이봉구의 명동 자서에서-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1956년 이른봄 명동 한복판 동방살롱 맞은편 초라한 빈대떡집 깨어진 유리창 안에선 새로운 사랑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자, 다시 한 번,' 상고머리의 박인환이 작사를 하고 이진섭이 작곡을 하고 임만섭이 노래를 부르고, 첫 발표회나 다름없는 모임이 열리게 되었다. 박인환은 벌써부터 흥분이 되어 대폿술을 서너 잔 들이켜고, 이진섭도 술잔을 든 채 악보를 펼쳐 놓고 손가락을 튕기는가 하면, 그 몸집과 우렁찬 성량을 자랑하는 임만섭이 목청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문 앞으로 모여들거나 말거나, 곁의 손님들이 보던 말던 이들 세사람 입에선 샹송이 쉴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 노래 눈물 난다. 인환이 어쩌자고 그런 노래를 지었나?" 야무진 사투리로 빈대떡집 점은 마담이 사람의 속을 썩인다고 박인환이 어깨를 치기도 했다. "술 좀 더 가져와." "또 외상이야?" "갚으면 되잖아?" "그때가 언젠고" 눈을 흘겨 가며 주전자를 빼앗으면서도 마담은 술 한 주전자를 새로 부어 놓지 않을 수 없게끔 정이 든 모양이다. "꽃 핏기 전에 갚으면 되지." "꽃 피기 전에 죽으면 어떡하노."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말고 술이나 가져와." " 내, 참 못 살겠다." 또 이런 농조로 대들기도 했다. "명태좀 가져와." 박인환은 제집처럼 소리를 했다. " 돈이 없어 못 사 오겠다." 마담은 쏘아붙이고 담배를 손가락에 낀 채 창밖 동방살롱 문 앞을 내다보고 있다가도,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바/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세 사람의 입에서 애절한 노래가 흘러나오자, "인환아, 너 정말 속 좀 썩이지 마라." 마담은 손가락으로 눈을 씻는다. "얘, 명태 좋은 놈으로 두어 마리 사와라." 끝내 심부름을 하는 아이를 밖으로 내보낸 후, "어쩔라고 그런 노래를 지었노." 벽에 기대어 세 사람의 입을 쳐다보며 술잔에 술을 따라 주기도 했다. 새벽같이 뛰어 나와 바쁜 듯이 동방살롱을 드나들고 자리에 앉으면 한시도 조용히 있지 못할 만큼 흥분속에서 그는 하루하루를 지냈다. 부지런히 원고도 쓰고 부지런히 원고료를 받으러 돌아다니면서도 해질 무렵이면 오늘밤은 좀 유쾌히 놀아야겠다고 초조해 하는 박인환이었다. " 돈 좀 가지고 집에 들어가야겠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동방살롱 문 앞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쌀이 떨어졌어. 누가 돌려준다고 했는데. 쌀값 없이는 들어갈 수 없고, 에잇... " 하염없이 쓸쓸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는 박인환을 보고, "인환이, 왜 그리 쓸쓸해?" 술집 마담은 들어와 마실테면 마시라고 손짓을 하기도 하고 번개같이 거리로 뛰어가는 박인환을 보고, "인환이 어디 가?" "볼일이 있어." "무슨?" "중대한 문제로." "뭣이 중대람, 술이 아니고. 어딜 그렇게 급히 달려 가느냐"고 말을 걸어도 박인환은 바람처럼 거리에서 거리로 뛰어 가기도 했다. 그 싼 가락국수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고 굶주리면서도, 이진섭과 나란히 어디서 마셨는지 취한 얼굴로 다방에 들어와, "섬머타임을 봐야겠는데...." 단성사에서 상영중인 롯사노 브릿지와 캐더린 헵번 주연의 '여정'이 보고 싶다고 하다가도, "우리 진자 샹송을 들으러 갈까." 빨리 밖으로 나가자고 끄는 것이었다. 내 서늘한 가슴 속에 박인환은! "나는 오늘 이상 때문에 마신다. 그리고 우리들 청춘의 고독 때문에, 내가 지은 노래를 또 부를까. 명동 샹송 '세월이 가면'을."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이날 밤 그토록 흥분해 술을 마신 지 사흘 만인 3월 스무날, 아침도 못 먹고 뛰어나와 세탁소에 맡긴 봄외투도 돈이 없어 찾지 못해 무거운 겨울 외투를 그대로 입은 채, 김훈한테 짜장면 한 그릇 얻어 먹은 후 이날 밤 아홉시 넘어 술이 억병이 된 박인환은 집에 돌아와 쓰러지면서 서른 한 살을 일기로 갑자기 숨을 거두어 벼렸다. 박인환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뜨고 있었다. 달려 온 친구들 가운데 송지영이 박인환의 뜬 눈을 아래로 쓰다듬어 감겨 주었다. 생전에 좋아했지만 마음껏 사주지 못한 게 한이 된다고 김은성이 죠니워카 한 병을 들고와 박인환의 입에다 술을 부어 주고 대작이나 하는 듯이 마셨다. 마루에서 호상을 보고 있던 송지영도 방으로 뛰어 들어와 박인환의 입에다 술을 따르고 자기도 마시는가 하면, 김광주는 "네가 먼저 가다니 이게 웬일이냐"고 목메어 흐느끼고 있었다. 멋도 마음껏 못 부려 보고, 기분도 못 내보고, 친구들을 두고, ㅈ은 나이에 먼저 가는게 원통해 박인환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죽은 뒤 그의 관뒤엔 수많은 삶들이 공동묘지까지 따라갔고, 흙이 덮인 관 위에 정영교가 죠니워카 한 병을 뿌려 주었고, 담배도 수십 갑을 던져 주었다. 박인환이 그리운 명동을 버리고 영영 떠나는 날 영결식장에 가장 가까웠던 친구 유두연, 이봉래, 이진섭, 김광주, 원계홍, 조경희가 눈물에잠겨 있었고, 그 밖에 수많은 조객이 뜰과 골목을 메웠다. 모윤숙의 고인의 시 낭독이 있었고, 이어서 그의 친구 조병화는 고인의 영전에서 울음속에서 조시를 읽어갔다. 인환이 너는 가는구나./ 대답도 없이 가는구나.// 너는 누구보다도 멋있게 살았고/ 멋 있는 시를 쓰고/ 언제나 어린애와 같은 흥분 속에서/ 인생울 지내왔다.// 인환이/ 네가 없는 명동, 네가 없는 서울.// 서울의 밤거리. 네가 없는 술집/ 찻집. 영화관./ 참으로 너는 정들다 만 애인처럼/ 소리없이 가는구나./ 인환이 잘 가거라./ 너의 소원대로 너의 사랑하는 벗들은/ 지금 너의 관이 나가는 이 마당에/ 모두 모여 들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멀고 쓸슬한/ 것이라는데/ 편히 가거라. 쉬어서 가거라./ 편히 쉬어라.// "뭐라고? 박인환이 죽었다고? 뭐 정말? 아이고! 이게 웬일이고, 어제 낮에도 왔다 갔는데." 꽃 피기 전에 외상 술값을 갚는다고 할 때 꽃 핏기 전에 죽으면 어떡하냐고 말한 그것이 뉘우쳐져 빈대떡집 젊은 마담도 문앞에 나와서 훌쩍이고, 이럴 줄 알았으면 돌봐줄 것을, 그 싼 막걸리라도 마음껏 마시게 할 것을 , 빈대떡도 고기에 두툼하게 붙여 먹일 것을, 돈도 꾸어 줄 것을, 뉘우치고 뉘우치는 이 젊은 마담의 가슴에도 못을 박고 박인환은 꽃 피기 전에 사라져 간 것이다. 내 이름은 '신라의 달밤' 박인환이 '포엠' 다음으로 드나들던 '삼미정'술집은 동방살롱 어귀에 있었다. 바로 맞은편에는 '휘가로'다방이 있었고, 삼미정에서 마시다 앞집 휘가로에 들러 차도 마시곤 했다. 삼미정은 다다미방이 있어 단골들은 방에 들어가서 술을 마셨다. 주인이 한학에 유식한 점잖은 노인이었으나, 명동 거리의 기분을 알아주어 외상도 곧잘 주었다. 밤이면 삼미정 방안에서 남녀혼성의 기염과 노래가 흘러 나왔다. 이명온, 김광주, 오아학수, 천경자, 조경희, 임긍재, 박인환이 어울려 술잔이 오고 가고 노래도 합창이 보통이었다. 취기 오른 이명온은 소매를 걷어 붙이고 싸울 듯이 팔을 휘두르며 떠들었고, 임긍재는 그의 십팔번인 '신라의 달밤'노래를 눈을 감고 부르기 시작했다. 임긍재의 노래가 나오면 술자리는 클라이막스에 이르른 것이다. 6.25때 절름발이가 된 임긍재는 박인환에게 지지않는 기분파였다. 주머니에 돈만 있으면 명동 거리에 나타나 절름거리며 큰소리를 했고, 친구 만나 술 사는게 큰 즐거움이었다. "자식, 죽기는 왜 죽어." 박인환이 생각 나면 또 욕이 나왔다. 스스로 죽고 싶어 죽어 간것도 아닌데 임긍재는 화가 치밀고 울적해 견딜 수 없다고 성을 내고, 화풀이로 유행가를 뽑아대는 것이다. 문학 평론은 걷어치우고 정치에다 몸을 던진 듯 말끝마다 유석 조박사 이야기에다 정당이야기를 했고, 돈도 어디서 나오는지 곧잘 쓰는 편이었고, 이래서 다정다감한 그는 명동으로 나와 기분을 내고 절룩거리며 돌아가기도 하였다. 그의 주변에는 김종문, 김수영, 박연희, 김중희, 김광림, 임몽정이 어울려 즐겁고 흐뭇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 박인환이 다니던 바아를 가 볼까?" 어느날 삼미정에서 나와 임긍재는 바아 '바타비아'로 발을 옮겼다. "오늘은 돈이 넉넉하니까." 자신만만한 태세였다. 일행은 세 사람이었던가... . 쭉 들어 서자, "바아텐" 큰소리가 나왔다. "네, 이거 오랜만에 오십니다." 날아 갈듯한 바아텐의 깍듯한 인사였다. "나 알지?" "그럼요,임선생님을 몰라보다니요." "어떻게? 난 단골이 아닌데." "박인환씨와 여러 번... ." "맞았어. 박인환이 하고 왔었지." "참, 그분 안 됐어요. 멋진 분인데, 소식을 듣고 처음엔 거짓말인 줄 알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박인환이 외상이 있나?" "없습니다." "없다니, 이상한데." "그분한텐 우리집에서 서비스로 제공했습니다. 저의 의사가 주인과 통해서요." "술집치고는 멋진 집인데, 박인환이 어디가 좋아서 외상도 아니고 거저." "명목은 서로 외상이다 했지만 피차 포기해 버리는 거니까요. 참 아까운 분인데." "생각 나나?" "그럼요, 명동의 밤거리가 텅빈 것 같아요, 우리집도 쓸쓸해졌는걸요." "이 바타비아에 박인환이를 좋아하는 색시가 있었겠지." "네, 박인환씨 몰래 그를 따르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흥, 오늘밤에 나왔나?" "네," "당번을 바꾸어 우리 자리에 보내 줄 수 있지? 그리고 맥주 서너병." 맥주가 오고 거품이 넘쳐흐르고, 박인환을 위해서 한잔, 첫 잔이 오고 가고, 다시 두 번째, 그가 정든 집, 그를 따르던 여인을 위해 한잔. 거품이 또 넘쳐흘렀다. "바아텐", 박인환이의 친구들을 위해 달려온 바아텐에게 임긍재는 거품이 넘쳐 나도록 맥주를 따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여인은 요다음에 와서 보고, 오늘밤은 우리 박인환을 돌봐 준 당신이 보구 싶어 이 집에 와 본 거니까." 일어서면서 바아텐 주머니에다 지폐 열댓 장을 넌지시 넣어 주고 절룩거리며 바타비아를 나섰다. "선생님, 이건 너무 저를 후대하시는데요." "그 정도쯤은 오히려 내가 미안한데." "원 천만에요, 선생님 성함은?" 바아텐은 임긍재의 얼굴을 기억하면서도 이름은 모르고 있었다. "이름 모르면 그뿐이지, 꼭 알아야 하나?" "그래도... ." "나, 내 이름은 말야 신라의 달밤이야." '할머니집'의 곰보 소년 은빛 머리의 '바위고개'이흥열이 대폿잔을 기울이며 큰 소리가 나왔다. "우리는 매일 밤 '오페라'지, '메트로폴리탄'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김인수가 죽고 나선 내가 탈이거든 그저 365일 줄곧 오페라니까." 윤용하, 임만섭과 술잔을 나누면서 술 마시는게 하나의 오페라요 술집이 바로 메트로폴리탄이라고 기분 내며, 벌떡벌떡 마시다가도 누구와 시간 약속이 있어 먼저 가니 이따 또 만나자고 바쁘게 나가곤 했다. 윤용하는 아이 등록금 때문에 '시청각'의 이강염을 찾아가 사정을 해야겠다고 술에 젖은 입술을 닦은 후 고개를 숙인 채 충무로 쪽으로도 걸어가고 이들이 사라지자, 교대나 하는 것처럼 손응성이 와이셔츠 소매를 서너 번 걷어 올린 팔뚝을 휘저으며 나타나 미리 돈을 내놓고 두잔 아니면 석잔 마시고 담배를 피우다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무렵, 손응성도 그림이 잘 안팔려 아이들 학교도 못 보내고 형편이 말이 아니었으나 조금도 궁상을 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꼬장꼬장한 자세와 차돌같은 긍지는 서울 토박이의 면목을 그대로 살리고 있었다. 없으면 안 마시고 있는 한도 내에서 술잔을 들고 외상은 하지 않았던 손응성은, 이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한시도 화필을 놓은 적이 없는 순수하고도 진지한, 그리고 독특한 자기 세계를 가진 화가로 명동 거리에서 늘 살다시피 하는 멋진 주객이기도 했다. 할머니집은 대한중석회사 맞은편에 있는 술집으로, 주인의 어머니가 아침부터 앉아서 술값 회계를 맡아 보고 있기 때문에 술집 이름이 할머니집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헨리 장과 그의 친구 이남수, 그리고 통신사의 신부 친구들이 이집의 단골인가 하면 라디오 드라마를 쓰는 이경재가 한동안 이 집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경재가 왜 안올까?" "우리 경재가 마음이 변했나?" 손님들이 오면 할머니는 늘 이경재 소식을 물었다. "돈벌이가 좋아졌기에 얼씬도 안하지." "그럴수가 있나, 경재가." 발을 뚝 끊다시피 보이지 않는 이경재가 섭섭하다고 할머니는 수없이 이경재 안부를 되묻곤했다. 이집 주인도 어지간한 술꾼이라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취하면 주정도 심심찮아, 누가 손님이고 주인인지 분별할 수 없었다. 외상에 얼마나 속을 썩었는지 외상소리만 나도 질겁을 해 펄적 뛰는 사람이지만, 술에 취해 버리면 술독에서 마냥 술을 퍼내어 대접도 하는 기분파였다. "바위고개 선생님, 한 잔 드십쇼." 이흥열에게 주전자를 들고 가서 따르는가 하면, "임만섭이 하고 윤용하는 어디 가고 이남수, 김창섭이는 어딜 갔을까? 이런 때 오지않고, 사람들 참... ." 자기 기분이 한창 좋은 시간에 보이지 않는 게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투덜거린다. "이경재는 방송국 재미가 좋다고? 세월이 좋아진 것은 다행이지만, 그래 제가 우리집을 잊을 수가 있나? 돈벌이가 좋을수록 찾아와야지." 도 이경재 이야기였다. "얘, 곰보야." "곰보가 뭐예요." 이 집에서 술 주전자를 나르는 사동 아이가 얼굴이 곰보라서 이름은 있건만 그냥 곰보로 통해 버린 것이다. "곰보니까 곰보라 부르지." "문화인 선생들이 그럴 수가 있어요?" "뭐, 문화인이라고?" 곰보 소년도 이집에 온지 두달도 안 되었건만 벌써 명동 풍속에 동화되어 버렸는지 그럴 듯 하게 말대꾸를 한다. "누가 그러던데요, 문화인들이시라고." 틈만 있으면 만화 그리기에 열중하는 이 곰보 소년은 간혹 손응성을 보고, "손 선생님, 이 그림 좀 봐 주세요, 신문사에 보낼만한가." 만화 그린 것을 보이면서 열을 올리다가도 손님이 들이닥치면 "어서 오십쇼, 아주 한 되로 드세요." 주전자를 나르고 잔이 비기가 무섭게 딴 주전자를 들고 와서, "이건 제가 서비스 하는 거예요." 주인이 무색할 정도로 선심을 쓰는 것이었다. "뭐, 네가 한잔 낸단 말이야." "네, 문화인들을 위해서요. 저도 이담에 그림을 잘 그려서 문화인이 될 거예요." "야, 이놈 봐라." 주전자를 들고 서서 잔이 비기를 기다렸다가 손님이 마시고 나면 재빨리 잔에 넘치도록 따랐다. "어서 드세요. 서너잔 하십시오." 어서 잔을 비우라는 것이었다. "얘가 왜 이래?" 연거푸 술을 따라 주면 단골 손님도 얼떨떨해진다. 대개 이럴 때 주인은 친구들과 설렁탕 내기 화투를 치고 있어 정신이 없을 때였다. 주인이 설렁탕 내기 화투 노름에 정신이 팔린 시간을 이용해 곰보 소년은 문화인들을 위해 무제한 술대접이었다. 술을 다섯되나 마셔도, 또 주전자로 얼마를 퍼 왔는지 손님 자신마저 알 길이 없을 정도인데, "얘, 여기 계산이 얼마냐?" 물으면, "네, 한되 자셨으니까 한되 값하고 안주 한 접시 값하고요." 어느 때고 한되 값이요, 안주도 두 세번 거푸 가져왔는데도 한 접시 값으로 쓱싹 이었다. "저, 3호 손님 계산입니다. 여기 돈 받으세요." 설렁탕 내기 화투치기에 정신없는 주인은, "응, 한되냐, 알았다." 눈은 화투판에 그대로, 손만 내밀어 곰보 소년에게서 술값을 받아 나무로 만든 돈 궤짝에다 넣고선 이내, "이거, 분하다. 홍단이 깨졌으니, 어 이거 봐라, 사오동도 깨지고." 손님들의 동태엔 전연 무관심이요, 도외시였다. 설렁탕 한 그릇 먹으려다 스무 그릇 값을 토해 놓는 격이었다. "너, 이놈 왜 이래?" 손님이 얼떨떨해 손을 저어도, "문화인들은 대개 돈들이 별로 없다면서요. 저도 이집에서 언제 그만두고 나갈지 모르는데, 제가 있는 동안 문화인 여러 선생님을 위해 이렇게 대접하는 거예요." "허, 이놈이. 네가 주인이냐?" "주인은 아니지만요. 저렇게 화투 노름에 정신이 없는 동안에 제가 대신 주인 노릇좀 하는 거예요. 어서 드세요. 한 주전자 더 가져올께요." 이쯤 되면 큰일 날 아이가 분명하다. 기타를 월부로 사들여서 주인이 없을땐 기타를 치면서, "이러다가 음악가가 되면 만화는 그만둬야지요, 음악가도 문화인이니까." 하면서 싱긋 웃다가, "저도 저 동방살롱에 가서 차를 마셔야겠는데 괜찮을까요?" 문화인들의 소굴이라는 말을 들어 알고 있는 동방살롱이 무척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대한중석과 나란히 붙어 있는 동방살롱이니 한 발걸음이면 들어설 수 있는 집이다. "거 참, 이상한 일이다." 화투 노름에 이겨서 설렁탕을 공짜로 먹고 술까지 취해 돌아온 주인이 술둑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갸웃 거렸다. 술 한독이 다 나가고 없는데 곰보 소년에게서 받은 술값은 반독 값도 안되니 말이다. 외상도 안나가고 꼬박꼬박 현금이었고 손님도 많았는데, 계산은 반독 값이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설렁탕 내기에 귀신이 붙었나. 허 참, 알 수 없는 일인데."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다가 대포 한 잔을 들이켠다. "이 집주인은 대체 누구야? 어느 놈이 주인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얘, 곰보야, 네가 주인이냐, 내가 주인이냐?" 소리를 지르면, "아저씨가 주인이지 누구예요. 설렁탕에 취하셨나봐. 어찌 제가 주인일 수가 있어요?" "뭐, 설렁탕에 취했느냐고. 허, 이거 참, 정말 네 말대로 내가 설렁탕 내기에 머리가 돌았나 보다." 그러나 이 할머니집도 할머니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쓸쓸해졌고 이어서 집이 팔려 버렸다. "문화인 선생님들, 안녕히 계세요." 곰보 소년이 동방살롱으로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어디로 가니?" "고향에 내려 가서 좀 쉬었다 오겠어요." "좀 쉰다고?" "네, 피곤해서요. 술독을 끼고 살았으니까요." 곰보 소년은 만화책과 기타를 옆에 놓고 손님이 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왜 이리 쓰냐고 상을 찡그리는 것이었다. 폐허의 명동 벌판을 본격적인 시설과 분위기를 갖추고 한국 톱클라스의 바아로 군림했던 B.S 등 바아는 명동 재건의 본부 같기도 했다. 혹은 밥집 마담으로까지 하야했던 왕년의 '명동마담'들은 마치 고향이나 되찾은 듯 그들의 마지막 정열을 쏟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은성'은 지난날의 '명동잠','무궁원'의 뒤를 이은 듯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무교동으로도 가지 않고 옛 그대로 명동의 마지막 교두보인 양 오늘도 버티고 있다. 그저 소박한 대포 집에 소박한 인정미가 감돌아 다소나마 훈훈한 분위기가 서리어 있다는 데서, 지난날의 명동 친구와 오늘의 새로운 명동 젊은 친구들이 이 집에 들러 술을 마시고 취하면, 그 옛날 모나리자 다방 쪽을 바라보며 노래까지 나오는 것이다. 이 집은 센스와 총명을 겸비한 여대생들과 나영세, 김동훈, 최불암을 비롯한 젊은 연극인들이 새 손님, 새 단골이 되어 이채를 띠고 있는가 하면, 이들에 의해서 은성은 또하나 새로운 분위기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날의 명동, 그 정서와 꿈과 낭만 서린 훈훈한 분위기는 가는 세월과 함께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10년, 20년, 30년에 걸친 명동거리의 그리운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이 없어지고 떠나가고, 사라지고 늙어가고 있는가. '세월이 가면'을 부르던 목포색시 시자가 결혼을 하고, 이래서 은성에선 좀처럼 그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되었는데, 지난가을부터 검정 모자를 쓰고 노란 꽃을 들고 나타나기 시작해 모자라는 별명이 붙은 '가을에 온 여인'이 '세월이 가면'을 부르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가 하면 월남을 다녀왔다는 청년이 양손에 굵은 반지를 하나씩 끼고, 바삭바삭 소리 나는 새 지폐를 꺼내어 냄새를 피우고, 간혹 이 집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정인소박사가 기염을 토한다. 하나, 둘 색다른 새로운 얼굴들이 찾아와 술잔을 들고 이러한 속에 또 '세월이 가면'이 창밖 다방에서 또는 이 집 손님인 여대생들 입에서,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가 흘러나오는 속에 명동은 시간과 더불어 앞으로 또 달라져 가겠지만, 그러나 지난날의 명동은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의 이야기와도 같이 끝나가고 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또 그 누군가 지난날 명동의 따스한 분위기와 오늘의 삭막한 명동 분위기를 생각하고 서글픈 얼굴로 '세월이 가면'을 부른다 해도, 그러나 '명동은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난 것만 같다.' 마지막 끝나는 이 이야기와 더불어... . 그러면 잘 있거라 명동, 잘 가거라 명동이여... . 전혜린의 낙서 이봉구 늦가을 어느 일요일에 전혜린이 나에게 주고 간 그림엽서와, 다방이고 술집에서 즉흥시를 읊조리듯 써서 던져 준 낙서 몇 통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지나는 오늘에도 늘 나를 울린다. 어제 일 같은데 벌써 4년이 되다니, 이토록 매섭고도 엄숙한 세월 앞에선 무상이란 영탄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전혜린이 서독에서 돌아온 후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밤까지 자주 들른 것은, 내가 상다시피 하고 있었던 명동 거리의 대포집 '은성'이었다. 그는 나를 찾아와 대포장을 기울이며 인생과 문학에 대해 광열에 가까운 불꽃을 태우면서도 피로한 줄을 몰랐다. 술이 취해 오르기 시작하면 그 큰 눈을 더욱더 굴려 가며 독설에 배설과 아울러 원고지에다 말로 다 표현 못하는 것을 써서 읽어 주고선 주머니에다 넣어 주곤 했다. 이것은 그의 젊은 제자와 함께 나와 술을 마시다 연필로 써갈긴 낙서의 한 구절이다. 쎄거나 : 은성 그 주변! 므레멜스 : 의지와 삶과 돌의 심장, 냉혹을 가장한 실생활의 센티멘탈리스트 최후의 만찬 : 언제나 최후다. 우리에게는 그것도 무엇이 끝난 최후가 아니라 아무것도 생성하기 이전의 최후. 경건하게 취해지는 만찬 - 비어지는 세개의 주전자. 비약하는 판타지... 그리고 대상을 잃은 채 헤매는 ... 세사람이 한되씩 마시고 혜린이 취해 이런 낙서를 한 것이다.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더니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밤도 은성에 나와서 술을 마시고 돌아간 것이다. "저는 많이 취했지만 선생님은 너무 취하지 마세요." "왜?" "최후의 만찬은 늘 경건해야만 돼요." "그런 말을 하는 혜린은?" "비약하는 판타지 때문에 그만 도를 넘쳤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혜린은 늘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최후의 만찬이 아니고 그 이전의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면서 술을 마시었다. "주부가 술을 마시다니." "주부?" 혜린의 입에서 주부란 말이 나오기는 처음이었다. 어딘지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게만 들리었다. "왜 웃으세요?" "주부는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 ... ." 내말에 혜린은 웃어가며 쭉쭉 막걸리를 들이켰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해의 늦가을 어느날 오후 혜린은 검은 머플러로 얼굴만 내밀고 은성으로 나를 찾아왔다. 몇 잔 마시더니 바로 취한 얼굴로, "선생님, 멋진 시 한편 읽어드릴까요?" 혜린은 원고지를 꺼내더니 만년필로 써내려 갔다. "누구의 시인데?" "작자를 꼭 아셔야만 돼요? 시만 좋으면 됐지. 또 혜린의 작이라 해도 좋고요." "어디 한 번 읽어 봐!" 몹시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에 죽어버리자/ 그때 당신이 돌아온다 해도/ 나는 이미 살아 있지 않으리라/ 당신의 여인이여, 무서워할 것은 없다. / 다시는 당신을 볼 수가 없을지라도/ 나의 혼은 당신과 함께 있다. / 다시는 사랑하면서/ 촛불은 거세게 희망과도 같이/ 타오르고 있으리라/ 당신을 보기위해/ 나의 눈은 멍하니/ 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종이 쪽지는 태워버리자. 죽음과 슬픈 이미지를 불태워 잊기 위해서." 나도 취한 김에 성냥불로 몹시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에 죽어 버리자는 그 종이쪽지를 불살라 버렸다. 서울에서 사는 맛 이봉구 부산은 '선창가','통집'에서 대구는 '석류나무집' 이니하는 곳에 해질 무렵이면 주머니를 털어 파적의 술잔을 기울인다 하는데, 서울선 나홀로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시는 것이다. 매일 얼굴을 대하는지라 어느 사이 인사도 없이 가까워진 사람들 속에 끼어 앉아 혼자 술을 마신후, 멍하니 뭇 사람들의 떠드는 온갖 잡담과 주정을 보고 듣는 거ㅅ 파적의 도움이 되기도 하고 재미나는 풍경이다. 밤낮 술 이야기를 쓰고 하니까 세상엔 무슨 큰 술꾼으로 오해와 중상도 있는 모양이나, 서울에서 내가 마시는 술이란 사랑의 샘물같은 것으로 서너 잔에 파적겸 흥취를 돋구는데 지나지 않는다. 서울은 '술'까지도 이렇게 경건하다. 그러니 서울을 내가 어찌 떠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친구가 멀리 부산, 대구서 찾아오는 날은 사랑의 재화와도 같이 가슴이 설레도록 반갑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서울의 안내자가 되어 허물어진 폐허를 돌아보게도 하고, 해질 무렵이면 내가 사랑하는 '남성관' 술집에서 석양배를 기울인 후 서로 지나온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러나 이 반가운 친구가 다시 떠나는 날은 나는 또 고독에 잠겨 거리를 쏘다니고, 명동성당 뜰에 서 보기도 하고, '모나리자'다방에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나중엔 '남성관'에서 홀로 석양배를 기울이게 된다. 나는 또 이 맛에 서울서 살고 있다. 밤의 허행 이봉구 어느 밤이고 돌아오는 길은 이상스럽게도 마음이 허전해 진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만 가지고서 마음 한구석이 쓸쓸한 것 같다. 그래서 기어이 나는 무슨 큰 볼 일이나 있는 사람처럼 밤거리를 쏘다니다 늦게야 집에 가 쓰러지고 만다. 이러면서도 석양부터 나는 밤을 맞이하느라 가슴이 설레는 것이다. 아는 사람이 모두 모르는 사람 같도, 반갑게 인사를 해야 할 사람도 뜻밖에 정이 벗어나 외면을 해버리고 어디로 탈주하고만 싶고 ... . '아아, 큰일났다' 하면서도 나는 밤마다 밤거리를 산책하다 피곤하면 지쳐 비틀거린다. 그러나 밤은 역시 고독의 허행자에겐 즐거운 시간이요, 또한 공간이다. 되도록 혼자서 으슥한 뒷골묵 술집을 찾아 들어가 술을 마시며 멍하니 앉아 있는 버릇이 3년 전부터 생겼다. 아는 사람을 만나 잔을 나눈대도 신경 쓰기에 몸만 달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은 더욱더 허전해서 되도록 혼자 밤을 즐기기로 한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 속에 끼어앉아 몇잔 못하는 술이나 마시며, 취경에 이르면 거리로 나와 흥얼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밤거리의 맛이란 그것이 오랜 세월에 때묻어 그 정서가 하나의 음률을 지니면 지닐수록 무서운 마향을 풍기는 것이 된다. 이래서 고독에 지친 사람이나, 고독에 주린 사람에겐 밤거리나 밤의 술집이란 그지없이 허무와 적막의 거리를 허행시키고야 마는가 보다. 터져나갈 듯한 밤의 술집, 그것이 찬바람이 부는 밤이면 더 한층 따스한 체온을 갖게 하고, 다방 또한 그렇고, 온갖 소음 또한 정이 든다. 그것이 정든 집이 아니든, 아는 사람들이 아니든, 밤이어서 밤거리에서 실낱 같은 한 줄기 서민의 정취가 발을 멈추게한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홀로 밤 깊도록 이집 저집 드나들다 돌아가는 것이다. 허행의 비애에 잠겨 나도 모를 길을 걸어가는 습성에서, 대단치 않으나 자신을 자위하고야 만다. 그러나 서울의 종로나 명동은 뒷거리와 뒷골목이 없어져 버려 무슨 실연의 거리만 같다. 뒷거리와 뒷골목은 없어지고 전면에만 옹기종기 서 있는 건물들이 개척지의 가건물인 것 같아 정 대신 서글퍼지기만 한다. 역시 종로와 명동의 밤은 뒷거리와 뒷골목이 있어야만 그 정서가 서민의 뜨거운 입술과 더불어 꽃이 피고 추억이 마련되는 것인데, 텅빈 공지에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고 귀를 찢는 듯한 차의 소음이 무슨 비명인 것 같아 소스라쳐 달음질을 치게 한다. 오랜 세월을 뒷거리, 뒷골목에서 늙어온 노인들도 볼 수 없고, 가게와 술집도 없다. 자꾸 하나 둘씩 허행 속에 늙어 사라져 버리는 것이리라 생각할 제, 어느 으슥한 뒷골목을 찾아가 독한 술 속에 고독을 담그고 소리를 지르고만 싶어진다. 그러나 나는 그런 대로 종로와 명동의 밤을 즐기고 밤거리를 허행하는 것이다. 되도록 아는 사람을 멀리한 밤거리와 밤골목을, 외로움에 지치고 외로움에 주려서 나는 걸어가는 것이다. 아는 사람에 주렸던 내가 환도바람으로 아는 사람에 지치고, 이로 인해 살벌해진 주위와 분위기에서 탈출을 하려고 애를 쓰고, 공막한 지대에서 홀로 나 자신을 보살피려는데서 밤의 허행을 하고 있다. 이런 밤거리에 난데없이 서커스가 종로 한복판에 포장을 치고 애수 서린 나팔을 불어대기도 하는 밤이 있다. 이런 곳에 곡마단이란 무슨 동화나 꿈속 같아 눈을 비벼보기도 하나 역시 생시의 표현이다. 부서지고 허물어져 캄캄한 골목에서 아이들이 나팔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모두가 무섭도록 쓸쓸한 허행자들인 것만 같다. 발을 멈추고 문득 나는 온갖 재롱을 다 부리는 악사들을 바라보며 '도미에'의 그림을 생각한다. 이 허무와 고독의 밤거리에서 나는 어쩔 수 없도록 치미는 외로움에 못 견디어 아무데고 술집을 찾아 뛰어들다가 숱한 허행자의 입술과 침이 닿아 두터워진 술잔에 술을 따라 마시어 보는 것이다. 이래서 또 나는 밤과 서울의 밤거리가 무섭도록 외롭고 서러우면서도 정이 들어 잊을 수 없다. 이빠진 낡은 사발/ 그 수없이 닿은 입술에/ 나도 입술을 댄다./ 여기 대대의 슬픈 노정이 집산하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다정한 벗 김용호의 노래 한 구절이 내 입에서 절로 나오게 하는 밤도 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니 영원히 내가 종생하는 날까지 서울의 밤, 명동의 밤거리를 나는 허행만 하다가 쓰러질 것만 같다. 프랑시스 잠의 밤노래도, 니체의 밤 노래도 나에겐 마음의 부채만 되는 것 같아 밤거리를 쏘다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테킬라 심연섭 "그 강이름이 <리오 그란데> 이다. 그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하여 안도의 숨을 내쉰 무법자들은 우선 주막에 들러 술 한잔을 들이켠다. 대개의 경우 <데킬라>라는 <멕시코>토주다. 삼복더위 비지땀도 그<TNT> 한잔이면 말끔히 걷히는 기분인 것이다. 열사와 흑우의 선혈처럼 강렬한 태양이 작열하는 멕시코 투우장, <마타도르>가 묘기를 보일 때마다 '올래'를 연발하여 흥분의 도가니가 되는 그 분위기 ... " 우기에는 범람해서 애하를 이루지만 건조기가 되면 물이 바싹 줄어 기마로도 건널 수 있는 강. 미국 서부에서 악을 저지른 숱한 무법자들이 미국의 '법'을 피하여 이 강을 건너 '멕시코'로 피신하는 이야기는 서부영화에 흔하다. 그 강이름이 '리오 그란데' 이다. 그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하여 안도의 숨을 내쉰 무법자들은 우선 주막에 들러 술 한잔을 들이켠다. 대개의 경우 '테킬라' 라는 멕시코 토주다. 병째로 마시고난 그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소금 한 줌을 입속에 털어넣는 것은 그 술이 그만큼 역겨운 탓이겠다. 멕시코 수도의 뒷골목 '바'에서 목격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소금을 입에 털어넣는 데에도 묘한 습관이 있다. 우리 같으면 고금을 손가락으로 집어 목구멍으로 털어넣을 텐데 그들은 소금을 일단 오른손 손등에다 얹었다가 그것을 혀끝으로 핥는 것이다. 테킬라의 그 고약한 맛은 소금만 가지고는 해결하기 어려운지 레몬 한 개를 통재로 쥐고 한끝을 이빨로 물어 뜯어낸 다음 그 시디신 즙을 손으로 쥐어짜서 입안에 떨어뜨리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비위가 가라앉는다. 테킬라를 마시는 멕시코인은 누구나 그 짓을 뒤풀이하는 것이다. 테킬라(Tequila)의 맛이 고약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원료가 곡류 아닌 멕시코 사막에 자생하는 '카크투스 사보텐'때문인가 보다. 1년이면 6개월 이상 비 한방울 안 내리는 곳에 자생하는 이 다육식물의 즙을 발효시킨 막걸리 같은 공주가 '팔케(pulque)'이름. 멕시코 시티에 들렀을 때 경험 삼아 그것 한 글라스를 마셨다가 화장실로 급행한 일이 있었다. 고약한 냄새와 메스꺼운 맛 때문에 목구멍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내놓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팔케를 증류한 것이 테킬라라는 주정이 43도의 술이다. 원주인 팔케보다는 악취가 덜 하지만 그것 역시 소금이나 레몬 안주 없이는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독특한 냄새를 지녔다. 우리 막소주는 테킬라에 비하면 신사의 술에 속하는 편이다. 그 테킬라를 바탕으로 하는 '칵테일'에 보편적인 것이 두가지 있다. 첫째가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TNT'. 고성능 폭탄의 이름을 붙인 것은 테킬라의 'T'와 토닉 워터의 'T'를 따온 때문이다. 마시면 뱃속이 금시 파열될 것만 같이 들리지만 실은 '진 앤드 토닉'이나 별로 다를 게 없는 유순한 청량제다. 삼복 더위의 비지땀도 그 'TNT'한잔이면 말끔히 걷히는 기분일 것이다. 더위를 폭발분산시키는 술도 알아두면 무방할 것이다. 'TNT'같은 살벌한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칵테일이 '마르그리타'. '마아거리트'라는 영어식 발음의 술이다.(여성이름을 스페인 말로는 그렇게 부르는가 보다. ) 테킬라를 바탕으로 해서 '라임 쥬스'나 '레몬쥬스'를 섞어 셰이크한 술이다. 그 특색은 칵테일 글라스의 입에다 소금을 바르는 것. 글라스를 물기없이 닦은 다음 입술만 2, 3센티 정도 물에 적셨다가 소금 그릇에 도장 찍듯 하면 그물 묻은 부분에만 소금의 띠가 생기는 것이다. 글라스에다가 셰이크한 것을 살며시 따르면 '마르그리타'가 되는 것이다. 그 글라스를 입에 대면 우선 수금의 짜릿한 맛이 미각을 자극한다. 멕시코 시티에서 마르그리타를 나에게 소개해 준, ''세뇨리타'의 해설로는 그 짜릿한 맛이 키스할 때 신사의 콧수엽이 숙녀의 입술에 주는 감각과도 같다는 것이었다. 멕시코 신사들이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머스타쉬'를 기르고 있는 까닭을 터득한 것도 '마르그리타 칵테일'의 덕분이었다. 열사와 흑우의 선혈처럼 강렬한 태양이 작열하는 멕시코 투우장, '마타루드'가 묘기를 보일 때마다 '올래!'를 연발하여 흥분의 도가니가 되는 그 분위기는 역시 '테킬라'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술 멋 맛', 주유만방기에서 - 우원자 마티니 심연섭 '엑스트라 드라이'이건 '원자 마티니'이건 제대로 배합 셰이크된 것의 맛을 표현하는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크리스프(CRISP)'라는 형용사를 흔히 쓴다. 영어 사전을 뒤지면 이 표현은 꽤 다양한 뜻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황소의 이마 털같이 빳빳하면서도 대빗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곱슬거리는 두발을 표현하는 데이 형용사를 쓴다. 둘째로 바싹 구운 토스트 같이 아삭거리는 촉감, 또는 엄동설한의 빳빳하게 얼어붙은 눈을 밟을 때 발 밑에서 가슬가슬하게 부서지는 눈을 그렇게 말한다. 크리스프의 뜻은 또 일전해서 군대의 명령같이 간단명료하거나, 이백의 시나 버나드 쇼의 희곡 대사같이 생생하게 약동하는 문장을 칭찬하는 데에도 쓰이고, 우리가 맵다는 미각으로 표현하는 혹한이 '크리스프 웨더'요, 늦가을 이른 아침 송림 아래를 산책할 때 코를 쏘는 송진내 섞인 공기가 그 형용사 이외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제대로 된 '마티니'의 맛은 이 형용사가 뜻하는 모든 뜻의 총화가 아닐까 생각된다. 황소 이마털같이 빳빳하고, 바싹 구운 토스트같이 가슬거리며 이백의 시나 버나드 쇼의 대사같이 약동하고, 송진내 섞인 늦가을 공기같이 코 끝을 톡 쏘는 맛, 그게 바로 '마티니'의 맛이 아니겠는가. 그런 마티니는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마티니를 만들기 전에 '셰이커'와 '칵테일 글라스'에 성에가 앉도록 얼려 두어야 한다는 것은 바텐더로서 ABC에 속하는 초보지식이다. 셰이커를 얼려 놓음으로써 셰이커할 때 얼음이 되도록 덜 섞이도록 보장하자는 것이요, 글라스를 얼리는 것은 빳빳하게 만들어진 내용물의 냉기를 보존하려는 배려인 것이다. 미국의 바에서는 그 냉기 보존책으로서 셰이커하는 데 쓰는 얼음의 질이 문제가 된다. 어떤 얼음을 써야 '크리스프'한 마티니를 만들 수 있는가. 보통 냉장고에서 얼린 소위 '아이스 큐브'를 쓰면 엉망이 되고 만다. 빙질이 너무 연해서 금방 녹아 버리기 때문에 그걸로 셰이커했다가는 드라이는커녕 물에 젖은 '웨트 마티니'가 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쓰는 것이 제빙공장에서 급속 냉동 방식으로 만들어 낸 커다란 얼음장을 송곳으로 깬 '크래크드 아이스'를 쓰는 것이다. 하천의 오염이라는 것을 몰랐던 그 옛날 호시절에는 1미터 정도 두께로 얼어붙은 마포강 얼음을 겨울에 채빙해서, 빙고에 보관했다 ㅆ다지만 지금을 바랄 수 없는 일이다. 마티니용 얼음치고는 북극 근방의 빙하에서 따내온 것이 제일이라고 풍을 치는 술꾼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몇만년을 묵은 그 얼음, 땡그렁 하는 쇳소리가 날 정도로 물기가 없더라는 그 친구의 말을 어느 선가지 믿어야 할는지... ."그것보다는 ... ." 또 한 친구가 대꾸한다. "그것보다는 알래스카 공군 초소의 바에서 쓰는 얼음이 최고던데. 바의 지붕 처마밑에 달린 한 발도 넘는 수정고드름을 따다가 쓰는 거야. 그걸 깨 놓으면 프리즘의 분광작용인지, 오색이 영롱해서 그걸로 셰이크하면 무지개 마티니가 탄생하는 거야." 영겁에 얼어 붙은 빙하, 그 빙벽에서 따낸 얼음이나 알래스카 초소 막사에 달린 고드름으로 만든 마티니, 모두 그럴싸하게 들렸지만 아직 그 맛을 음미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뉴욕의 한 바에서의 화제는 다시 마티니의 '드라이니스(건성)'로 되돌아갔다. 네바다사막 원자폭탄 실험 때에 버무드 한 방울을 떨어뜨려 그 정을 대기중에 돌게 하고 그것을 받아 만든 '원자 마티니'보다도 더 드라이 한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친구가 나섰다. "방법은 간단해. 빈 셰이커를 버무드 병의 코ㄹ 마개로 살짝 가셔낸 다음 '진'만으로 셰이크해 내는 거야." "그건 약과지." 또 한 친구가 한술 더 떴다. "빈 셰이커에다가" "버무드! 하고 귓속말을 하는 녀석을 본 일이 있는 걸." 듣고 있던 바텐더가 셰이커를 들고 시범을 했다. "버무드! 이렇게요?" "쉿! 목소리가 너무 커. 이렇게 부드럽게 버무드!" 그 음성, 모기소리 같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원자 마티니 심연섭 국제 칵테일협회에 공인 등록된 칵테일만 해도 수천 종에 달한다고 들었다. 유명무명의 칵테일을 총망라한다면 그 숫자는 엄청난 것이 될 것이다. 주객을 자처하는 사람치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칵테일의 한두가지 비법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칵테일의 발상지는 미국이다.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찾아간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술은 고작해야 버본 위스키스정도였다. 술이라기보다 옥수수를 원료로 하는 알콜이었고, 목구멍을 넘기기가 하도 역겨워 궁리해 낸 것이 칵테일이었다고 한다. 출발은 이렇게 궁상맞은 것이었지만 기술도 세월에 여과, 세련되어져 이제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 칵테일의 종류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고 하지만 미국의 일반 주객들이 상용하는 것을 따지고 보면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그 중 베스트 텐의 톱(TOP)은 아닐망정 노상 그 상위를 차지하는 것이 마티니이다. 마티니는 알콜 함량 42도의 진에다가 포도주를 바탕으로 초근목피의 약미를 가한 20도 가량의 버무드 약간을 섞어 셰이크하여 올리므 열매 한 개나 레몬껍질 한 가닥을 투입한 것 말이다.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식사 전에 입맛을 돋구는 아페리티프로 이것 한 두 잔을 들지 않는 미국사람은 금주주의의 맹신자로 보아도 틀림없을 만큼 이 마티니는 보편화되어 있다. 이것을 주문할 때, 마시는 사람이 프로급인지 아마추어인지 곧 구별할 수 있다. 노련하고 가락이 있는 바텐더라면 그것을 주문한 손님에게 이렇게 반문하기 마련이다. "How do you like it?" 이 질문을 "왜 그걸 좋아하느냐?"는 것으로 알고 "I like it." 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주객 실력자. 진과 버무드의 비율을 어떻게 해서 마시겠느냐는 이 질문에 "그냥 보통으로!"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주객이기는 하나 풋내기 초심자로서 바텐더의 존경을 받을 생각은 말아야 한다. '메이크 이트 드라이'라고 한마디 덧붙이면 바텐더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옛 써!"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도 프로가 왔다는 것을 그 주문 한마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보통 아마추어들의 미티니는 진과 버무드의 비율이 3대 1 정도다. 프로의 경지에 접근할수록 5대 1, 10대 1, 100대 1 정도가 되는 것이다. 대범, 칵테일 하면 술과 술을 ,술과 향료를 혼합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프로들의 개념은 전혀 다르다. 믹스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술을 약한 것으로 코팅(coating)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마티니의 경우 진의 알몸뚱이에다 버무드의 얄팍한 옷을 입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의상하면 여인들을 연상한다. 맥시보다는 미니가 더 매력적이다. 미니보다는 요새 해변의 비키니가 더 볼품이 있고 토플리스가 더 바람직하다. 마티니의 코팅에도 그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버무드를 한방울도 섞지 않고 진만을 알몸으로 마시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천망의 말씀이다. 신사 체면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벌거숭이 마티니(Naked Martini)'를 마실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독의 섬이라는 맨하턴의 어느 바에서 외국인 지자 몇 명과 어울렸을 때다. 어떻게 하면 가장 드라이한 마티니를 만들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화제에 올랐다. "옛날 만년필에 잉크를 넣는 스포이드 생각나나?" 한친구가 발언했다. "... 그 스포이드로 버무드를 한 방울 떨어뜨리니까 마티니 맛이 되더군." "그것보다는 주사기가 낫지, 가장 가느다란 바늘인 25호 정도의 바늘이면 버무드 방울을 훌씬 작게 만들 수 있지." 또 한 친구의 이 비방에 다른 친구가 이의를 제기했다. "마누라가 향수를 뿌리는 '애토마이저(분무기) 알지? 그걸 빌리는 거야." 이번에는 듣고만 있던 바텐더가 한마디 했다. 라스베가스의 어떤 바에 가면 원자 마티니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원자폭탄 과학자 중에 마티니 애호가가 있어 '네바다' 사막에서 폭발시험을 할때 그 폭탄 속에다가 버무드 한 방울을 주입해 두었다는 것이다. 그 한 방울이 원자탄이 폭발할 때, 같이 폭발해서 대기중에 퍼져 있을 때 마티니를 만들 때 사용하는 셰이커 뚜껑을 열고 창밖으로 일초동안 노출시키면 대기중에 떠돌아 다니는 버무드의 정이 내려 앉는다는 설명이었다. 위지왈, 원자 마티니라고 ... . 술은 인정이라 조지훈 제 돈 써 가면서 제 술 안 먹어준다고 화내는 것이 술뿐이요, 아무리 과장하고 거짓말해도 밉지 않은 것은 술 마시는 자랑뿐이다. 인정으로 주고 인정으로 받는 거살 주고 받는 사람이 함께 인정에 희생이 된다. 흥으로 얘기하고 흥으로 듣기 때문에 얘기하고 듣는 사람이 모두 흥 때문에 진위를 개의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흥에 취하는 것이 오도의 자랑이거니와 그 많은 인정속에 술로 해서 잊지 못하는 인정 가화 두가지를 지니고 있다. 17,8 년전 얘기다. 친구 한 사람이 관철동에 주거를 정하고 있어서 통행금지 시간이 없던 그 때에도 우리를 가끔 붙잡아 재워 주곤 했다. 그 해 겨울 어느 날, 몇 사람이 어울려 동아부인상회 맞은편 선술집으로부터 시작해서'백수' 니 '미도리' 니 하는 우미관 골목을 휩쓸고, 내쳐 '백마'니 '다이아몬드' 니 하는 카페로돌아다니며 밤 깊도록 마시고 나서 어찌된 셈인지 뿔뿔이 다 흩어지고 말았다. 대취한 나는 발걸음이 자연 관철동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친구집 대문을 흔들고 들어가 그 친구가 쓰는 문간방에서 방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그냥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 이건 어찌된 셈인가, 옆에 자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라 반백이 넘은 노인이었다. 방안을 살펴보니 내가 노상 자곤 하던 친구의 방이 아니었다. 나는 쑥스럽고 놀라와서 슬그머니 일어나 뺑소니를 치려던 참이었다. 늙은이라 나보다 먼저 잠이 깨어 있던 그는 완강히 나를 붙잡았다. "여보, 노형! 해장이나 하고 가야 피차 인사가 되지 않겠소?" 나는 그 때만 해도 아직 소심과 수줍음이 심할 때라 이 말 한마디에 그만 취했을 때의 야성은 간 곳 없고 망연자실하여, 한참을 서 있다가 그냥 주저앉았다. 그 노인은 내가 앉는 것을 보고는 일어나 주전자와 남비를 들고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조금 뒤에 따끈하게 덥힌 술과 뜨거운 해장국상을 앞에 놓고 이 노소 두 세대는 이내 담론이 풍발했다. 다시 술에 취한 뒤에야 알았거니와 내가 친구 집인 줄 알고 문을 흔들 때 열어 준 사람도 자기였다는 것이다. 밤은 깊고 날은 몹시 추운데 낯모를 젊은이지만 그냥 돌려 보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서슴지 않고 방문을 열고 들어와 앉혀 놓으니 잠이 드는 내 꼴이 재미있더라는 것이다. 백발의 위의에다가 무디지 않은 인품이 엿보이는 이 노인은 자기도 젊었을 땐 그런 경험이 있었다는 것을 따뜻한 표정으로 말해 주었다. 그가 장성한 아들을 꺽었다는 것도 알았다. 무척 애주가이기 때문에 젊은 술꾼인 나의 행상을 미소로써 들으며 흥겨워했다. 사실은 날 재운 것이 길가에 쓰러져 자다가 어떻게 될까 하는 어버이 같은 염려도 있었지만, 해장술을 한 번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나는 그분의 성함도 모른다. 그 노인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술을 아는 이만이 서로 알아주는 그것이 바로 따뜻한 정임을 이일로써 깨달았다. 또하나는 바로 1.4 후퇴 때 일이다. 1월 3일 8시에 마포를 건너 수원에서 자고 거기서 기차를 탄 것이 7일 아침에야 대구에 내렸다. 그 동안 사흘 밤을 우리는 기차 안에서 잤거니와, 이야기는 어느 작은 역을 이른 아침에 기차가 닿았을 때 일어난 이야기다. 지붕에까지 만원이 된 피난열차가 플랫폼에 멈추자 재빠른 사람들은 모두 내려와 불을 피우고 밥을 짓느라고 부산하였다. 비꼬인 몸과 답답한 가슴을 풀어보려고 비비면서 뛰어내린 나는 아주 희한한 반가운 일을 보았다. 어떤 여인이 플랫폼 한쪽 귀퉁이에 불을 피워 놓고 약주를 팔고 있지 않겠는가? 벌써 어떤 중년 신사가 한잔을 들이켜도 있었다. 나는 얼른 뛰어가서 그저 덮어놓고 한 사발 달래서 쭉 들이키고(그 술맛의 쾌적했음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리라) 안주로 찌개 두어 숟갈도 들었다. 아무래도 미진해서 한 사발만 더 달랬더니 어쩐 일인지 술파는 부인은 웃기만 하고 술도 대답도 주지를 않았다. 그때 둘째 잔을 마시고 있던 중년 신사는 술잔을 놓고 눈웃음을 지으며, "선생도 술을 무던히 좋아하시는구료 ... , 목 마르신 것 같아서 한 잔 권했지만 이 술은 파는 게 아니오. 부산까지 가는 동안에 이렇게 아침 저녁으로 한 두 잔씩 하려고 가져온 것입니다."하면서 술을 더 못주는 이유는 말하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어 입을 닦으면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글세, 자기 피난 짐은 아무 것도 꾸릴 필요가 없다면서 약주 여섯 병만 묶어 들고 나섰잖아요. 호호호."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는 그 여인, 돈 안 받고 술을 팔던 여인은 물론 그 신사의 부인이었다. 술로써 오달한 그 체관과 유유함이 혼란 중에 한층 의젓하고 멋이 있어서 부러웠다. 그는 기차가 이렇게 천천히 간다면 부산까지 가는 동안에 술이 모자랄 것이라고 걱정하여 둘이 마주 쳐다보고 함께 웃었다. 그렇게 아끼는 술을 말없이 주는 인정, 이것이 술을 아는 마음이요, 인생을 아는 마음이 아닌가. 파는 술인 줄 알고 당당히 손을 내민 내 행색은 지금도 고소를 불금하거니와 낯 모르는 사람에게 흔연히 한 잔 따라주던 그 부인도 인생의 진미를 체득한 것 같았다. 이것이 모두 술의 감화라고 생각하면 약간의 허물이 있다 해서 덮어놓고 술을 폄하는 폭력의지는 아직 술을 모르는 탓이라고 규정할 수 밖에 없다. 애주의 심도 변영로 모든 것에 아낌없는 나는 술에 대하여서만은 유난히도 인색하였다. 인색이란 말은 내가 마시고 남에게 권하는 데 인색하단 말이 아니다. 도리어 반대로 호붕만 상대하면 피차에 쾌음하기를 즐겼던 바, 문제는 상대방이 술 한 잔만 흘려도 술이 아까와서 술 흘리는 친구를 밉게 볼 지경으로 술 한방울에 인색하였다는 것이다. 참으로 일적 천금의 원리를 나 이상으로 체득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는 집에서나 술집에서 술을 마실 때 병이면 병, 주전자면 주전자, 주배가 오락가락 하는 사이 점점 줄어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안타까웠다. 과장 같지만 술이 조금씩 줄 때마다 생명의 한토막이 끊김을 느꼈다. 더욱이 돈이 넉넉치 못할 때는 그리하였다. 그다지도 안타까운 술이 연석 같은 곳에서 천대를 당할 때처럼 불쾌를 느끼는 적도 없었다. 흘리고 쏟고 엎지는 것은 술이 흔한 탓도 있겠지만 어차어피 남이 대는 술이니 아껴 무엇하랴는 태도로 술을 마시는 천장부들을 나는 심저로부터 증오하였다. 일적주의가치를 모르는 그 우맹들이 민연하여 모였다. 하여간 나는 술에 대해서 무저한 관심이 있어 애주 정도가 지나서 탐주, 익주 하였지만 내가 의식하고 기억하는 한에는 술 한방울이라도 허비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이토록 사랑스런 술을 나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소위 대동아 전쟁통에 참으로 굶주렸다. 말하자면 주란을 뼈저리게 치른 것이다. 한잔 술에는 원근이 없었다. 술만 있고, 술만 있을 듯한 곳이면 전후를 불계하고 찾아가는 것이었다. 또 '나라베' 술이야기가 생각나지마는 지금껏 기억에에제 일같이 새로운 것은 현 충무로 (당시 본저통) 에 있던 5시 정각이면 개문하는 술집 (주간은 다방)금강산에 3시 경만 되면 쏜살같이 가서 1,2,3착을 다투는 것이었다. 주는 것은 1인당 일본 브랜디 두컵(극히 적은)씩이었는데 눈치 있고 민첩하게만 움직인다면 역시 2,3회씩 차례가 돌아 온 것이었다. 가령 2회면 네컵, 3회면 여섯 컵으로 불주객과 작반이 될 때에는 물론 그 배였다. 참으로 악전 고투랄까, 나는 요갈 하게에 그와 같이 고초를 치르고 겪었다. 이와 같이 구차스럽고 군색스럽게라도 몇 잔을 얻어먹고 길거리로 나오면 잠시 기분은 도연하여지나, 그다지도 애를 써서 얻은 먹은술이 금시에 깨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바람이 무엇보다 싫었다. 바람이란 취기를 보유시키기는커녕 발산시키는 임무를 언제든지 하는 장난꾼인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술이 '설' 취하거나 반취쯤 되었을 때 전차를 타도 술기운이 가셔지는 것이 아까와서, 성염중이라도 차창가나 운전대 옆은 피하는 것이었다. 이만하면 애주의 정도에 대한 심도를 독자들은 추측할 것이다. 일점의 과장이 아님을 사족삼아 부언하여 둔다. 백주에 소를 타고 변영로 역시 혜화동 우거에서 지낼 때였다. 어느날 바카스의 후예들인지 유영의 직손들인지는 몰라도 주도의 명인들인 공초, 성재, 횡보 3주선이 내방하였다. 설사 주인이 불주객이란대도 이런 경우를 당하여서는 별 도리가 없었을 것은 거의 상식문제인데, 주인이랍시는 나 역시 술마시기로는 결코 그들에게 낙후되지 않는 처지로 그야말로 불가무일배주 였다. 허나 딱한 노릇은 네 사람의 주머니를 다 털어도 불과 수삼 원, 그때 수삼 원이면 보통 주객인 경우에는 3,4인 이 해갈은 함즉하였으나 우리들 무리 4인에 한하여서는 그런 금액쯤은 유불여무였다. 나는 아무리 하여도 별로 시원한 책략이 없어 궁하면 통한다는 원리와는 다르다 해도 하나의 악지혜(기실은 악은 없지만)를 안출하였다. 동네의 아무개 집 사동 하나를 불러다가 몇자 적어 화동 납작집에 있는 동아일보사로 보냈다. 당시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장은 고 고하였는데 편지 사연은 물을 것도 없이 술값 때문이었다. 좋은 기고를 하여 줄터이니 50만원만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이를 보내 놓고도 거절을 당하든지 하면 어쩌나 마음이 여간 조이지 않았다. 10분, 20분, 30분, 한 시간, 참으로 지리한 시간의 경과였다. 마침내 보냈던 아이가 손에 답장을 들고 오는데 무리 4인의 시선은 약속이나 한 것 같이 한군데로 집중되었다. 직각도 직각이지만 봉투 모양만 보아도 빈 것은 아니었다. 급하게 뜯어보니 바라던대로, 아니 소청대로의 50원, 우화중의 업오리 금알 낳 듯 하였다. 이제부터 이 50원을 어떻게 유효적절하게 쓰느냐는 공론이었다. 그때만 해도 50원이면 거금이라 아무리 우리 넷이 술을 잘 먹는대도 선술집에 가서는 도저히 비진시킬 수 없었던 반면에, 낮부터 요정에를 가서 서둘다가는 안심이 안될 정도였다. 끝끝내 지혜(선악간에)의 공급자는 나로서 나는 야유를 제의하였다. 일기도 좋고 하니술 말이나 사고 고기 근이나 사가지고 지척인 사발정 약수터(성균관 뒤)로 가자 하니 일동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명륜동에 있는 통신중학관(고 미상희군이 경영하던) 으로 가서 그곳 하인 어서방을 불러내어 이리저리하라. 만사를 유루없이 분부하였다. 우리는 참으로 하늘에나 오를 듯 유쾌하였다. 우아하게 경사진 잔디밭 위에 둘러앉았는데 어서방은 술심부름, 안주 장만에 혼자서 바빴다. 술은 소주였는데 우선 한 말을 올려다 놓고 안주는 별 것 없이 남비에 고기를 끓였다. 참으로 그날에 한하여서는 쾌음, 호음하였다. 객담, 고담, 농담, 치담, 문학담을 순서없이 지껄이며 ㄱ커니 잣커니 마셨다. 이야기도 길고 술도 길었다. 이러한 복스런 시간이 길이 계속되기를 빌며 마셨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고금 무류의 대기록을 우리 4인으로 하여 만들게 할 천의랄까, 하여간 국면이 일변되는 사태가 의외에 발생하였다. 그때까지는 쪽빛같이 푸르고 맑던 하늘에 난데없는 검은 구름 한 장이 떠돌더니, 그 구름장이 삽시간에 커지고 퍼져 온하늘을 덮으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유연작운, 체연하우 바로 그대로였다. 처음에 우리는 비를 피하여 볼 생각도 하였지만 인가 하나 없는 한데이고, 비는 호세있게 내리어 속수무책으로 살이 보일 지경으로 흠뻑 맞았다. 우리는 비록 쪼루루 비두루마기를 하였을망정 그때의 한중취우의 그 장경은 필설난기였다. 우리 4인은 불기이동으로 만세를 고참하였다. 그 끝에 공초 선지식이 공초식 발언을 하였다. 참으로 기상천외의 발언이었던 바, 다름 아니라 우리의 옷을 모조리 찢어 버리자는 것이었다. 옷이란 워낙 대자연과 인간 두 사이의 인간지물인 이상, 몸에 걸칠 필요가 없다는것이다. 그럴 듯도 한 말이었다. 공초는 주저주저하는 나머지 3인에게 시범을 보여주듯이 먼저 옷을 찢어 버렸다. 남은 사람들도 천질이 그다지 비겁치는 아니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대취한 4과한들이 광가난무하였다. 서양에 Bacch -analian orgy란 말이 있으나 아무리 광조한 주연이라 해도 이에 비하여서는 불급이 원의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덧 언덕 아래 소나무 그루에 소 몇필이 매여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번에는 누구의 발언이거나 제의였던지 이제 와서 기억이 미상하나 우리는 소를 잡아타자는데 일치하였다. 옛날에 영척이나 소를 탔다고 하지만 그까짓 영척이란 놈이 다 무었이냐. 그 따위 것도 소를 탔는데 우린들 못탈 바 어디 있느냐는 것이 곧 논리이자 동시에 성세였다. 하여간 우리는 몸에 일사불착한 상태로 그 소들을 잡아타고 유유히 비탈길을 내리고 똘몰(소나기로 해서 갑자기 생긴)을 건너고 공자 모신 성균관을 지나서 큰거리까지 진출하였다가 큰 봉변 끝에 장도(시중까지 오려던일)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의 음주변 변영로 나는 거의 이주오일생 하였다고 새삼스레 울고 불고 몸부림칠 까닭은 호말도 없고 사이지차한 바에 나의 여생이 얼마가 될지 변절을 구자돈손의 계명으로 아는 이상, 끝끝내 한결같이 마시고 마시고 꽃 꺾어 산 놓고 또 마시다가 마지막 날 도래할 때의 의부나 용사처럼 흔연취사 할 뿐이라는 것이다. -변영로의 '명정사십년' 서설에서 나의 음주변이라 하였지만 음주에 변이 새삼스레 있을 리 없다. 기호물이니 그저 마시는 것이다. 음주에 대하여 이유를 붙이는 것, 날이 푸르고 맑으니 한 잔, 날씨 궂으니 한 잔, 기분이 좋으니 또 한 잔 등 등의 구차스러운 변명이나 이유를 붙이는 것은 자고유지나, 엄밀히 말한다면 그네들은 정통주도나 순수주배는 아닐지 모른다. 하여간 나는 이유를 따지지 않고 술말 대하면 자연히 찌푸렸던 이마가 피어지는 것이다. 나는 주주야야 술만 있으면 마시는데, 책임상 내가 맡은 사무를 전폐하고, 마시키는커녕 보기만 하여도 마시기 전부터 열락하여지도록 나의 신경계통은 마비가 되었는지 이완된 모양이다. 다소 천박은 하지만 그 기경한 사구가 취할 점도 있어 영국의 희극작가 R.B. 세리든의 '주덕송'일절을 파적삼아 이에 번역이나 하여볼까 한다. 술병은 우리 식탁 위의 태양/그의 양광은 감홍색술/우리는 그의 위성들/그의 도움 없이는 부추김 없이는/우리만으로는 빛나지 못하리/이박과 환희는 끝도 없어라/그가 삐잉 일순회하면/우리는 그의 차광으로 따라 빛나리 여하간 객스런 소린지는 모르나 나는 우리의 태양인 술의 차광을 과거 30여년전 풍우일여하게 받았는데 때로는 술의 양이 지나치면 도리어 '마비의 태양'인 술에게 대광을 하게끔 되었다. 아는 이는 아다시피 나는 술을 좋아하는 것을 지나 술에 탐닉하였고 그간 금주 연한 몇 해를 해놓고는 무일불취하였으나 이롭지 않고 떳떳치 않은 술을 되도록 소비하였다. 어는 친구는 나더러 농세를 한다지만 천만부당의 선고이다. 나는 이 백의 시골은 타지 못하였으니 기경비상천이라든가 더 줄여 말하면 일시채석강 월희를 하는 '풍'의 생활은 모조부득이요, 따라서 19세기 데카당들의 어느 강렬한 자극(주로 마약류의)이 없이는 잠시도 붙이지 못하는 '식'생활도 나로서는 취할 바 아니니 위의 두 범주에 편입될 도리가 없음은 자변의 일이다. 그렇다고 그 양종 변화에서 탈락된 것을 나는 참으로 기쁘게 생각할 정도의 모럴리스트다. 모럴리즘은 남이야 나의 말을 믿든 말든 나의 생활신조이다. 이 신조가 없었더라면 그나마 나의 생활이 불의와 악수는커녕 타협하여 본 적이 없음을 오십이 지난 오늘날 자허삼아 말하여 두는 동시에 어느 권세나 금력앞에 저두평신하여 본 적조차 없다는 뜻이다. 잘났으나 못났으나 사람이란 독왕자지 할 길이 따로 있는 것이다. 갑작스레 딴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지만 인생 전체에 일률로 부과된 운동일지는 모르나 진부한 논리 그대로 인생이 모순과 상극속에서 부침시종 한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쉽사리 운명에 굴복되어서는 아니된다. 부단한 반발정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불연이면 침체요 위축이요 페퇴가 뒤따를 것이다. 영원한 과오, 영원한 수정!/영원한 태만, 영원한 초조!/영원한 기척, 영원의 갈구!/영원한 방산, 영원의 정리!/영원의 부채, 영원의 청산! 등등이 인생 전체 불가회피의 진로이다. 아니 진로가 아니라 일종의 장벽도 철회될 것이다. 필자 또한 이 반발 모순되는 두 원리 사이에서 방황 저주는 할망정 값싼 후퇴는 아니할 것임을 자서하여 둔다. 문, 주의 벗들 양주동 상섭은 참으로 좋은 술동무였고, 당시 근 1년 동안의 동거 생활은 나의 반생 중에도 한 즐거운 추억이다. 그때 우리들의 주량은 백중을 다투리만큼 거량이어서 날마다 필수량이 거창했으나, 둘의 포켓은 자못 소슬하였다. 그런데 혹시 돈이 생기면 술턱을 내는 품을 두사람이 각기 아주 달랐다. 나는 학비로 고료가 오면 그 중에서 먼저 방세를 치르고 그 나머지 액수를 그에게 고백하고 둘이 나가 마시는데, 상섭은 그렇지 않아 고료만 오면 시치미를 떼고 왔다는 말도, 액수도 일절 말하지 않는다. 내가 벌써 그 눈치를 알고, 내 돈 약간을 보이면서 값싼 술집으로 가자 한다. 그가 못 이기는 체하면서 나를 따라 나선다. 주밀한 그가 고료로 온 전액을 그의 조끼 안주머니 최심부에 감추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나의 값싼 술턱으로 둘이 다 우선 거나하게 취한다. 나는 그만 돈이 벌써 떨어졌음을 그에게 고하고, 일어서 돌아가자고 그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자, 예서부터가 나의 작전의 승리이다. "자, 상섭형, 가!" "못가! 다른 데 가서 더 먹어!" "돈이 없는데... ." "아따 없긴? 히히히, 예 있어, 이것봐, 일금 대매 30원 야라." 이리하여 최심부에 비장되었던 대매 30원은 대번에 일약 최전선으로 출동된다. 30원이면 그때 한달 숙식비가 넉넉한 돈이다. 그래 두사람은 이번에 고급 바아로, 카페로 발전하여 권커니 작커니 일양주를 거듭하여 드디어 그 대매 전액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시고 만다! 나는 먼저 야간한 턱을 내고 뒤에 인색함에 반하여 상섭은 처음엔 전주꼽재기 이상 굴다가도 몇 잔 술에 거나하기만 하면 뒷일은 삼수 갑산 아랑곳없이 있는 돈을 모조리 다 털어 끝장을 내고야 마는 성미다. 내가 그 성격을 익히 알고 꾸미는 작전에 그가 늘 속아서, 고료는 나보다 갑절을 벌건만 포켓은 언제나 텅 비었다. 언젠가는 나의 그 작전이 지대한 효과를 발휘하여 둘이 '본향바아'엔가에 가서 백주회를 열었다. 하룻밤에 정종, 다까라, 왜소주, 각종 맥주, 황주, 배갈, 오가피주, 벨무드, 리큐르 차츰 진, 위스키, 브랜디, 워카 등 등에 미쳐 백가지 술을 모조리 한잔씩 먹는 회다. 만취하여 돌아오는 길에는 또 예의 상섭의 지벽인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그가 그야말로 횡보-지자보 비틀걸음으로, 그러나 용하에 빠른 걸음으로-앞서 뛰어가 어느 길가 쓰레기통 뒤에 몸을 숨긴다. 내가 달려가 찾다가 알고도 짐짓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면, 통 위에서 그가 나와 "깨꼬! 요기 있는 걸 몰라? 히히히." 이런 일을 뒤풀ㅇ면서 둘은 마침내 다정한 동지로서 스크램을 걸고 반린취보, 안 맞는 발걸음을 굳이 맞추어 하숙 문을 두드린다. 아아, 어여쁜 치기, 우리들 주당의 난만했던 우정이여... . 취인감허 김진섭 주의 평가 술을 정당히 평가하기란 어렵다. 술을 싫어하는 자는 이를 나쁘다 하고, 술을 즐겨하는 이는 이를 좋다 한다. 나쁘다면 나쁘고 좋다면 좋을 뿐이지, 그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주자의 호악을 증명할 도리는 우리에게는 없다. 그러나 술이란 물건은 본래 그같이 나쁜 것도 아니며, 또 그같이 좋은 것도 아닐 것이다. 단지 문제는 생후 술을 술같이 마셔 본 일이 없는 까닭으로 불면식자의 눈에 심히 나쁜 것같이 보이는 것이며, 밤낮으로 술을 물같이 너무나 많이 마셨으므로 불면상음자에게는 지극히 좋은 것같이 보이는 것임에 불과하다. 실은 이러한 경험적 견지에 있어 술의 가치란 신비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술을 깊이 마셔보지 못한 자, 술을 능히 논할 자격이 없음과 같이, 또 술을 찬미하는 자, 반드시 술에 이미 취한 증거를 보임인지도 모르는 까닭이다. 상식은 말하되 소량의 술은 몸에 약이라고 한다. 그리고 술이 약이 됨은 결코 술의 명예가 아니다. 술이 술되는 진의는 주자가 사람으로 하여금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셔도 더욱 마시려는 부족증을 일으키게 하는 곳에 있는 까닭이다. 주도의 변 술이란 가히 빨 가치가 있는 물건이야 아니야 하고 우리는 이것의 고증을 여기 의도하고 싶지는 않다. 술이란 말할 수 없이 선량한 것이라고 우리는 간혹 말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찬을 널리 일반에 주장하지 않음이 우리의 자랑할 도덕이 됨은 물론이다. 취한다는 주후의 사실이 나쁜 까닭이 아니다. 술에 대한 우리의 절대한 찬미가 흔히 명정한 결과로써 해석됨을 불쾌히 생각함으로써이다. 그럴 뿐 아니라 우리의 술에 대한 관계는 그것의 가치를 향상시키기에 급급할 만큼 또 천박하지도 않다. 이제 황금의 가치 이상으로 오등 주도에 있어서 술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의 종교로써 계시되는 것이다. 물론 세인이 말하는 것 같이 술은 사람에게 유독할지도 모른다. 모든 종류의 종교 속에는 반드시 유독한 장기가 쌓여 있음을 우리는 긍정하여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신자와 같이 이 독을 한없이 사랑하는 자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실로 이러한 음식은 우리에게 남은 유일의 아름다운 운명인 것같이 보이는 까닭이다. 주중 진리 여하간 한 잔 들어가면 어쩐지 즐거웁다. 또한 한 잔 들여보내는데 많은 방도는 존재한다. 좋도다! 이리하여 우리는 항상 술잔을 드는 것이다. 슬펴 마시며, 기뻐 마시며, 분하다 하여 마시며, 봄날이 따습다하여 마신다. 세자는 이를 이름하여 주의 공덕이라 하나, 이 또한 '인 비노 베리타스!'가 아니냐, 되고자 하는 자기에 비로소 도달한 우리는 술가운데 처음 세계의 완전을 보는 것이다. 인생 웅루에 하등 죄과도 없고 모든 눈물이 신성하다. 모든 사람이 화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적어도 그것이 현실인 한에 있어서 속진의 순수 진리는 그 허석, 그 조잡, 그 엄흑으로 하여 평면경을 통해서는 대좌의 내구성을 지독히도 감쇄할 뿐임으로, 우리는 호호탕탕연히 술속에 제 진리를 함으로써 크게 홍소하는 힘을 얻는 것이다. 일배일배부일배에 이미 나는 내가 아니고, 너는 네가 아니다. 그럼으로써 참으로 그때에 내가 비로소 내가 되고 네가 비로소 네가 된다. 실로 피는 속이지 않는 까닭이다. 주중교우록 구구한 판단이 술의 부동의 가치에 대해서 과연 무슨 힘을가지랴! 우리들 주도가 한번 술장을 들매, 우리는 문득 번잡안 현실을 초월하고, 오묘한 정애의 세계에 유유하는 자이니, 그ㄸ 일체의 수착한 세간사는 벌써 내가 관심할 바 못 되기 때문이다. 마시는 자로부터 마시는 행동을 방해하지만 않으면 그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일찍이부터 바카스의 제단에 참가하게 된 한 사람임을, 술을 마시는 데서 필연히 유래하는 경제적,시간적 기타의 불소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인들 후회한 일은 없다. 결국은 술을 마시고 아니 마시는 것도 일종의 숙명이라 볼수 있으니, 우리는 그 좋은 예 중의 하나를 앞날에 마시던 사람이 무슨 이유로 해서 단주를 결행하려 할 때, 그의 굳은 결의가 흔히 오래 유지될 수 없는 사실 속에서 찾아 낼 수가 있다. 우리는 물론 술을 마시기 위해서 술을 마시지는 않는 것이요, 우리는 단순히 우정을 열정적으로 체험하고 그 완전을 기하기 위해서 술의 응수를 거듭하는 것이니, 이리하여 우리가 마시는 술은 결코 헛되지는 않는다. 술은 말하자면 우정에 대한 일종의 시멘트 공사요, 제방 공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두말 할 것 없이 술은 중간적 음식물로서 많은 것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물이거니와, 우정의 심화를 위해서 특히 불가결의 요소이니, 혼자서는 먹고 싶지 않은 술이 벗이 얼굴만 보면 생각이 나고, 또 혼자서 마시면 쓴 술의 우정에 대한 생리적 관련이란 사실을 가지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이리하여 추리는 친고를 만남에 으레히 만난을 배하고, 이해를 초월하여 서로 주머니를 털어 술잔을 높이 든다. 하루에 두 세 번을 만나도 우리는 어쩐지 서로 그립고 서로 떨어지기가 싫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래 무슨 연유가 있어서 상시 음주에 종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경제적으로 여유를 얻으면 우정이나 술과도 멀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가 급한 볼일도 제쳐놓고 돈이 없을 때는 외상 술을 마시며, 심하면 전당질을 해서까지 술을 나눌 때, 이것은 확실히 비장한 행동임에 틀림없으나, 보통 사람이 보면 이같은 주교는 적지않은 망동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한 열병적 정열에 몸을 바치는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서 그것은 한없이 큰 행복의 하나이니, 말하자면 우리는 술로써 우리네 상호의 육체를 마취시키고 모살함으로 인해서 우리의 정신에 아름다운 정의의 꽃을 피게 하려는 것이다. 이 세상의 행복에도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좋은 벗들과 같이 앉아 술잔을 드는 때 같이 행복된 시간을 달리 알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기보다 행복은 의외로 적은 것이요, 그러므로 나는 내가 술을 마실 줄 알고, 술을 마실 줄 앎으로 인해서 많은 좋은 벗들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분외의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미리 말해 두거니와, 우리들의 술은 소위 난봉과 한량의 호화로운 술이 아님은 물론이요, 또는 너무나 외교적인, 너무나 공리적인 술도 아니므로 돈을 흥청거리고 쓰는 맛으로 술을 마신다든가, 타산적으로 무슨 운동을 위해서 술을 먹는다든가 하는 그러한 세간의 음주방법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우리는 오직 우정을 위해서만 술로 만나 아무 사념이 없이 물과 같이 담담한 기분으로 술을 나누는지라, 세상에 가장 순결한 주도를 구한다면 우리 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흔히 주효의 유무가 문제가 아니요, 술의 청탁이 또한 개의될 바가 아니며, 주기의 존비가 또한 문제 밖이다. 친고가 서로 마음을 같이 하는 마당에 우리들이 서로 나눌수만 있으면 우리는 충분하다 하고 안주없는 쓴 술에도 곧 쉽사리 도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물론 술을 먹는 사람이라고 다 취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 우리는 많은 사람이 좋은 친고와 대좌한 경우에라도 안주 없는 술, 여자 없는 술을 염기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하자면 우정에 다감한 까닭으로 무조건 친고가 고맙고 사랑스럽고 미더운 까닭으로 서로 떨어지기가 싫어, 값싼 술일망정 한사 결단하고 취할 때까지 마시게 된다. 물론 그 외에 달리 이유는 없다. 오직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 신앙이라 간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술에 대한 순정은 극히 좁은 범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 주찬 김진섭 술이 만일에 사람으로부터 빼앗는 것이 벗는 동시에 또는 보태는 것도 없을진대, 즉 술을 마신 사람에게 취한 증거가 없을진대, 그때 벌써 술은 아니요, 물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래요 술속에는 용기가 들어 있어요. 용기가!' 프리드리히 헵벌은 그의희곡 '헤로데스와 마리암네' 속에서 헤로대스로 하여금 "그는 명정해 가지곤 술을 예찬한다. 그것은 실로 그가 이취한 한 개의 증거가 아니냐?" 고 말하게 한다. 과연 옳은 말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만일 옳은 말이라면 우리들 주도에 대하여 이 말보다 더 신랄한 비평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여기 주찬을 두어 자 적으려는 초두에 있어서 이 말이 맨처음 머리에 떠오르는 이유도 실로 거기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보면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고 변하게 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요, 술이 만일에 사람으로부터 빼앗는 것이 없는 동시에 또는 보태는 것도 없을진대, 즉 술을 마신 사람에게 취한 증거가 없다면, 그때는 벌써 술이 술이 아니요, 물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사실상 우리들 주도는 술잔을 들면 서로 주량의 큼을 자랑하는 것이나, 아무리 마셔도 맹숭맹숭한 사람 같이 재미없고 싱거운 주중풍경도 없을 것이며, 그러므로 술을 못하는 사함이 술의 일 이 배에 완전히 적화하는 것을 보는 것 같이 유쾌한 일도 없다. 보통 세상의 엄격한 신사 숙녀들은 술의 피치 못할 일작용으로써 사람에 따라서는 그르치게 나타날 수도 있는 취정이란 결과만을 보고 술의 전부를 평가하여, 술을 죄악시하고 해독시하는 것이지만, 우리들 주도의 눈으로 보건대, 이같이 천박한 견해는 그들이 전연히 술이 술되는 진리의 심오에 미도해 본일이 없는 필연의 결과에 불외하다. 결국 주도란 것도 모든 종류의 수양과 같이 신고와 간난에 찬 인간수도의 하나이니, 우리는 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술 한두 잔을 권함으로 인하여 주의 하자임을 단순히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헵벨은 또 그의 희곡 '유딧트' 속에서 홀로페르네스로 하여금 유딧트에게 "술을 마셔라, 유딧트여! 술 속에는 우리에게 없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하게 하고 유딧트의 입을 빌어서는 "그래요, 술 속에는 용기가 들어 있어요. 용기가!" 하고 대답하게 한다. 술 한두 잔이 우리에게 용기를 가져오고 온도를 가져오고 관용을 가져온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이요, 너무나 저명한 사실이라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들 주도에 있어서는 술이 서서히 우리의 심심에 가져오는 작용은 한없이 미묘한 것이요,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것이요, 비할 수 없이 영감적인 물건 이어서 음주의 권외에 선자에게는 영원히 봉쇄된 세계가 주배의 응수가 거듭됨에 따라 주도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말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와 같이 의미없는 말도 없다. 그러므로 술이 가히 마실 가치가 있는 물건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여기서 고증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주찬을 널리 일반에게 주장하지 않음이 우리의 자랑할 도덕이 됨은 물론이다. 취한다는 주후의 사실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술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 찬미가 흔히 명정의 결과로서 해석됨을 불쾌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의 술에 대한 관계는 그것의 가치를 향상시키기에 급급할 만큼 천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자를 박카스의 제단앞에 세우기는 어렵다. 오직 마시는 자로 하여금 그 쾌활한 행렬 속에 참가하게 하면 그만일 따름이니, 물은 우리를 현명하게 만들고, 술은 우리를 즐겁게 만든다. 주도는 오직 단순히 이 양자를 겸하기 위하여 물과 술을 병음하는 것이다. 물맛을 참으로 알 자 과연 뉘뇨. 그를 이해 할 만한 현명은 오인의 주갈 이외에는 다시없다. 우리는 술에 즐거웁게 취하고, 물로 너그러이 깨치는 것이니, 말하자면 만사를 감적에 부쳐 속기를 유수에 씻음이다. 여하간 술이 한잔 뱃속을 족이면 어인 까닭인지 우리는 즐거워진다. 주의 이명을 소수소라 함은 실로 지당한 명명이니, 독일어에도 '조르겜브레허'라 하여 그 뜻이 근심을 쓸어내는 빗자루에 완전히 부합된다. 한 잔을 마신 우리는 근심을 잊고 속취를 벗고 도연한 시경에 있게 되는 것이니, 그 작용은 흡사 포도나무가 억센 뿌리로써 수척한 땅을 극복하고 장래를 약속하는 무성한 넝쿨이 삭막한 황야를 푸르게 물들이는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이리하여 우리가 이 각박한 현실의 한없는 우고와 불여의 속에 살되, 항상 언제든지 모든 속박을 탈각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이것이 모두 술의 위대한 은택이거니와, 우울의 안개가 자욱한 이세상에서 술이 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우리의 가슴은 벌써 가벼워짐에 하 등의 불가사의는 없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저녁상의 반주, 그것이 가져올 위안을 생각하기 때문에 흔히 많은 사람의 하루의 긴 노동은 보다 쉽게 수행되는 것이 아닌가? 술의 공덕은 실로 지궁지대하여 우리는 이를 슬퍼 마시며, 기뻐 마시며, 분하다 하여 마시며, 봄날이 화창하다 하여 마시며, 여름날이 덥다 하여 마시며, 겨울날이 춥다 하여 마신다. 이것은 결국 술이 우리를 모든 경우에서 건져 주고, 북돋아 주고, 조절하여 주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요, 공연히 갈증도 없는데 물을 마시듯이 술을 마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만일 사람을 사람 자신으로부터 해방하는 저 고귀한 감흥과거대한 감정에 대하여 말하고, 배가하는 희열과 운산하는 고민, 시의 발화와 사상의 점화, 행복의 절정과 종교적 계시,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말하려 할 때, 적어도 술을 이곳에 가져오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다. 제군은 일찍이 아나크레온의 영원히 경쾌한 찬가를 읽은 일이 있으며, 유리피데스의유명한 '바카날리엔'을 읽은 일이 있는가? 파사(페르시아)의 오마 카이암의 '루바이얏' 일 편은 그 한자 한자가 실로 방순한 미주의 최선의결과 밑에 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희랍의서정시인 알케우스에 의하면 술은 사람의거울이라 한다. 그리하여 그의많은 시는 술잔 밑에는 진리의 여신이 살고 있다고 노래한다. 일찍이 미국에 금주법이 시행됐을 때, 미국의 모 시인은 알케우스의 시에 대를 맞추어 "물그릇 밑에는 기만의 여신이 숨어 있다." 고 시를 지은 일이 있다. 알케우스의 시까지 들추어 말 할 것도 없이 세상이 다 아는 '인 비노 베리타스'란 한마디로써 저간의 소식은 요연하거니와, 사실 술을 마신 사람에게 가면은 없고, 위선은 없다. 자기도 알 수 없는 자기, 그러나 더러는 만나보고자 하는 자기를 술의 힘을 빌어 비로소 만나보게 되는 우리는 술 가운데 처음 자기의 생활과 세계의 관전을 보는 것이다. 속세가 운전되는 모양은 그 허식, 그 조잡, 그 가혹으로 하여 감히 정시하기에 어려우니, 우리는 호호탕탕연히 술 속에 제 2의 진리를 구하여 호연의 기우를 기르는 것이다. 술의 다른 이름은 조시구라고도 하니, 영웅호걸과 시인묵객들이 자고로 술을 좋아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러므로 일생 술을 마신 알프레드 드 밋세는 자신이 쓰는 것 같이 글을 쓰지 않았던 것이며, F,T,A 호프만은 도연한 가운데서 비로소 예술을 휘한 자기의 참된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이들 시인들 뿐만 이리요, 모든 사람이 다 일배일부일배에 이미 나는 내가 아니요, 너는 네가 아닌 지묘한 상태에 복귀하는 것이다. 한 잔 마시면 우리의 얼굴이 장미로 화할 뿐 아니라 만천하가 이제 불그레한 화단이 된다. 문득 우리의 머리에 철학적 쾌활이 온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모든 성질, 모든 생활이 한 개의 가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용서치 못할 적까지를 우리의 정에 끓는 가슴에 굳이 안으려 한다. "만일 어느 때련가 한사람의, 참으로 철학적인 의사가 이 세상에 나타난다면" 하고 일찍이 시인 보들레르는 부르짖은 일이 있다. 그렇다면 그때 그는 술에 대한 위대한 저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술과 사람, 양자의 협동에서 빚어지는 일종의 이중심리에 대한 연구이다. 그래서 그는 이 음료가 무엇 때문에 사람의 사상과 인격을 이같이도 앙양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을 분석할 것이다. 술 예찬론 - 현대편 주탄인 이경찬/술제조가 술이 사람을 삼킨다 세상에서는 독작을 하는 사람을 모주꾼이나 변변치 않은 주객으로 비웃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작을 하는 사람 나름대로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 평생을 살아 오는 동안 슬플때나 괴로울 때면 으레 자작으로 시름을 달래는 버릇이 생겼다. 조용하고 아늑한 곳에서 자작을 하노라면 마음에 안개처럼 끼었던 불안이나 괴로운 심사가 서서히 누르러지며, 때로는 도연한 기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관용대도의 금도를 자득하기도 한다. 술기운이 몸에 스쳐 중추와 말초의 혈관을 도도히 누비고 순환하는 사이에 어느덧 취기에 의한 졸음이 와서 잠자리에 들면 스스로 수신이 찾아들어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간단히 자작을 하고 이튿날 아침에 눈을 뜨면 기분이 한결 상쾌해지고 밥맛도 제대로 난다. 그러나 울화가 치밀어 자작 과음을 한 이튿날에는 고역을 치르기도 한다. 또 어쩌다 오랜만에 친한 벗과 만나거나 무관한 주석에 어울려 권커니 잣거니 대작을 하다보면 거나하게 취기가 돌고, 서로의 기고가 만장해지면 말수가 늘고, 흥에 겨운 육자배기나 유행가라도 한가락 뽑을 정도에 이르면 벌써 취기는 그 문지방을 넘어 두보가 '음중팔선가' 중에서 이백을 두고 노래한 이른바 주중선, -이태백은 한말 술에 시 백편을 지으며 장안 거리 술집에서 취해 잔다. 임금이 불러도 배 탈 생각않고 스스로 자기는 술 취한 신선이라 자처한다-의 경지에 이르고, 여기서 더 지나치면 사람이 술을 마신게 아니라 술이 사람을 삼켜버린 상태의 주탄현상이 일어난다. 주탄이란 말은 법화경에 있는 말로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삼킨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명정,손수 상태에 빠져 버리는 수도 있다, 이렇게 곤드레 만드레 고주망태가 되어 곯아떨어진 이튿날에는 명치가 쓰리고 아플 정도의 숙취로 고생을 할 때도 있다, 그런 때는 과음한 것을 후회하고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 오히려 부럽기까지 하다. 성화를 하고 바가지를 긁는 아내에게 이제 술을 끊어야겠다는 맹세를 하건만 그것은 작심삼일이요, 허울좋은 넋두리에 불과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듯, 친구들 등쌀에 이틀이 멀다하고 다시 한 잔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근 20년전 언젠가는 술의 범절을 모르는 얼간이들을 비꼬아 주국헌장이란 너절한 만필을 지상에 발표하여 짓궂은 친구들로부터 주당 당수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들은 일이 있고 보면, 아마도 나는 그때가 가이 대가급(?)에 속하는 주객이었던 것 같다. 이제 나이와 근력은 어쩔수 없는 것인지, 요즘의 주량은 옛날에 비해 거의 반에도 못 미칠 정도로 줄어든 형편이다. 흔히 약간 돌거나 살짝 미친 노이로제 환자에게 당신은 미쳤다고 한다면, 제가 과연 광인이라고 긍정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게다. 마찬가지로 술에 취해서 횡설수설 수다를 떠는 취객에게 당신은 취했다면 과연 고개를 끄덕여 취했노라고 정직하게 대답할 사람은 거의 없을 성싶다. 또 술처럼 진실한 물건도 없다. 술에 취하면 평소의 사상이나 불만 등이 거울처럼 비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인 비노 베리타스(In vino veritas)' 라는 라틴어 속담이 있다. 곧 술속에 진리가 있다는 뜻이다. 술이나 마시며 흉금을 탁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고자 할 때 흔히 이 말을 쓴다. 이 말은 로마 시대의 과학자 프리뉴스가 쓴 '박물지: historia maturalis' 에서 유래된 말이다. 우리나라 속담의 취중진담에 방불한 말이다. 또 술을 마시는 법도를 보면 지역사회의 풍습이나 사회계층, 또는 주객 나름의 교양이나 취향에 따라 각기 특유의 타입이 형성되고 있음을 본다. 목로나 살롱 등에 홀로 앉아 독작을 즐기는 형이 있는가 하면, 어느 술이든 닥치는 대로 남작을 하는 사람도 있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덮어놓고 퍼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고주형, 은근히 즐기는 애주형, 마실 줄 알면서도 애써 안 마시려드는 금주형, 돈이 아까워 못 마시는 엄살형, 아예 소주병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중독형 등이 있다. 또 맥주만을 마시는 사람, 탁주만을 마시는 사람, 소주나 고량주 또는 양주 같은 독주가 아니면 아예 술로 치지 않는 부류의 사람도 있다. 대개 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간경변이나 동맥경화증 같은 만성질환에 잘 걸리는 듯하다. 주량과 주질에 대한 기호는 술에 대한 내성과 체력에 좌우된다지만 옛부터 주유별장이란 말이 있다. 즉, 대주객은 창자가 따로 있다는 뜻으로, 주량은 체구의 대소에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술과는 전혀 인연이 먼 부류의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밀밭에만 가도 취한다는 사람이다. 술에 대한 일종의 특이체질이다. 정확히 말해서 알코올에 대한 히스타민 체질인 것이다. 주기가 몸속에 조금만 들어가도 부작용이 일어나 두드러기가 일어나고 덜덜 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토하고 설사하는 과민형도 있다. 술버릇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음을 본다. 술을 마셨다면 몇 잔도 안 마시고 주정을 부리는 형, 주비형,고성방가형, 접시를 받쳐들라 하여 옥경을 꺼내 과시하려는 노출증, 술 따르는 여성을 괴롭히는 사디즘 등의 별의별 기형이 다 있다. '열하일기'를 보면 중국에 갔던 우리나라 사신이 술 마시는 범절에서 망신을 당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중국 상류사회의 신사들과 교환을 하는데 그들이 술을 조그만 잔으로 잔을 빨듯 홀짝홀짝 마시는 품새가 시답지 않은 지라 큰 주발을 가져오라 하여 거기에 가득 채워 쭈르륵 한숨에 들이켰겠다. 그런데 그들로부터 찬탄이나 칭송은커녕, 비웃음을 당하였는데 '그것은 술을 즐기며 마시는 게 아니라 논에 물을 데는 것이다' 라는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옛날 독서청공을 하는 문사나 선비들이 마시는 술은 청아한 분위기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백의 '장진주'를 보면 호탕하고 방일한 그의 개성이 잘 나타나 있다.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쏟아져 바다에 들지만 되돌아가지 않는다" 라는 대자연의 대범한 섭리를 내걸고 오직 술에 장취하여 만고의 시름을 잊자고 했다.(See the waters of the Yellow River leap down from Heaven, Roll away to the deep sea and never tern again ! ... Who only want to get drunk and never again be sober? The Saints and Sages of old times are all stock and still, only the mighty drinkers of wine have left a name behind. Are high-propped on a pillow of grey mist.) 도연명의 '만가시'를 보면 오직 살아 생전의 한은 마냥 술을 마시지 못한 것이라 했다. 송강 정철 선생의 '장진주', 가사를 보면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무인이나 장수들이 술을 마시는 것은 예나 이제나 호탕하게 마셨던 모양이다. 치주안족사란 말이 있다. 치주란 큰 잔에 가득 차도록 따른 술이란 뜻이다. '치주안족사'란 한잔 술은 사양하고 말 것조차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십팔사략에 나오는 말로 번괘가 항우에게 한 말이다. 요즘에는 술꾼들이 억지로 권하는 자을 받아 마실 때 혹은 권할 때 흔히 쓰는 문자다. 이 지구 위에는 술을 무르는 미개인의 족속도 있다지만, 심산에 원주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술을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있어왔다고 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그러나 술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감에 있어 필요선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필요악의 구실도 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 때문에 일을 그르치거나 망한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그래서 옛부터 불위주곤이니 주유병이란 말이 있어 왔다. '불위주곤'이란 술 때문에 곤경을 겪는 일을 하지 밀라는 뜻이요, '주유명' 이란 술은 무기와 같다는 뜻으로 경계하지 않으면 도리어 몸을 해친다는 충고의 말이다. 더욱이 현대에 와서는 술의 제조법과 종류가 다양해짐에 따라 가짜가 난무하고, 누룩으로 빚은 순수한 곡주는 거의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가짜로부터 받는 술의 공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만천하 주객들에게 정녕 수난기가 닥쳐온 셈이다. 주막 김주영/소설가 음력 토닷새나 스무닷새 무렵의 조각달이 산허리에 기우뚱 걸려있고, 겨우 대여섯 발자국 앞길만 분별할 수 잇는 좁은 산협길에는 인적이 휑하다. 길손은 선머리에서 걸어가는 나귀의 워낭소리가 계곡에서 흐르는 쪽빛 벽계수 위로 흘러가는 것을 들으며 상습적으로 나귀의 엉덩이에다 채찍을 내린다. 때마침 연도에는 들깨냄새가 희미하게 피어나는 것으로 보아 이제 뜸마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한다. 나귀에게 한 번 더 채찍을 내린다. 채찍을 받은 나귀는 두어 걸음을 힘주어 걸을 뿐 게으름을 피웁며 걷던 버릇을 고치려 들지 않는다. 산굽이 하나를 돌아나가자니,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저만치 아래로 멀러지는데, 길손의 귀에는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 듯하다. 그러나 길손이 개 짖는 소리를 들었을 땐 나귀도 이미 주막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터득해서 눈치 챈 것이다. 길손이 채찍을 내리지도 않았건만 나귀는 제출물로 등에 얹힌 복물버리를 가볍게 추스르면서 걸음이 빨라진다. 산자락을 돌아나가 보니 눈앞이 확트이는 개활지가 나서고, 개활지에는 길길이 자란 억새가 밤바람에 서걱이고 있다. 작은 여울이 개활지를 가로지르고 있고 여울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길손이 행전을 풀고, 길목버선을 벗고, 바지를 걷고, 미투리를 벗어 챙길 대까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금받게 다잡아 쥐자 나귀는 첨벙 돌이끼가 미끄러운 여울로 뛰어든다. 나귀와 걸음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여울을 건너오면 산자락 아래 뜸마을의 불빛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이제 길손은 고삐와 채찍을 나귀 잔등 위에다 얹어 버리고 나귀가 혼자 걷도록 버려둔다. 이제 주막 거리가 엎어지면 코 닿을 행보에 있으니 그대로 두어도 나귀는 단골 주막으로 찾아들 줄 알겠기 때문이다. 길손 역시 벗었던 길목버선과 행전을 다시 티고 꿸 번거로움을 겪을 까닭이 없다 생각하고 맨발에 짚신을 꿰고 벌써 열댓 간 앞에 걷고 있는 나귀를 종종 걸음으로 따른다. 나귀의 코에는 벌써 구수한 여물 냄새가 감돌고 길손도 한 주발의 탁배기 냄새에 벌써 목이 칼칼하다. 길손과 나귀가 들어선 주막거리는 대처로 나가는 황토길이 세갈래진 곳이었다. 시각은 많이 늦어 이경 해시를 넘겼으니 한 저녁을 시켜 먹기에도 겨운 때였다. 그러나 길손이 굳이 이 주막까지 행보를 재촉했던 것은 이곳에서 자야만 다음날 장이 서는 저자 거리에 닿기가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뜸마을 외진 주막 거리여서 기찰을하는 수라군도 없고 삽짝 밖으로 쫓아나오면서 짖던 개는 길손이 진작부터 드나들던 단골 길손임을 알아보고 짖던 주둥이로 길손의 바짓가랑이를 핥는다. 주막의 울바자 곁에는 긴 장대가 걸려 있고 장대 위에는 용수(술이나 장을 거르는데 쓰는, 대나 싸리로 만든 길쭉한 통)을 씌워 두거나 주등이나 주기를 달아서 주막임을 알린다. 길손이 삽짝을 밀고 들어서면 선잠에서 깬 주모가 토방으로 내려서면서 한저녁 지을 준비를 하고, 식주인이나 중노미 (주막에서 허드렛일을 거드는 사람)가 나와서 마방으로 나귀를 몰아넣고 여물을 먹인다. 복물을 봉놋방에다 내린 길손은 목침을 끌어당겨 저녁 동자할 때까지 쉬기로 하는 것이다. '숫막'이라고도 부르는 주막은, 이를테면 나그네가 하룻밤 쉬어가는 여인숙인 셈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새겨 둘 일은 주막인 경우 식대만을 받았지 숙박료는 받지 않는 다는 점이다. 주막 영업의 주종은 길손을 재우고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허기진 길손에게 장국밥 요기나 탁배기를 팔아서 푼전을 챙기는 것이었다. 옛적 엽전을 쓰던 때에는 술 한잔에 두푼이었고 안주를 먹지 않으면 한 푼을 건네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동전을 썼을 때는 5푼짜리 둘에 한 잔이고 술만 마시면 한 푼을 받았다. 화폐 개혁이 된 뒤로는 5전에 한 잔이었고 술만 마시면 3전을 받았다. 그러나 산협에 있었던 주막에서는 그나마 셈술에 어두운 주모와 길손 사이에 서로가 양해되는 선에서 적당히 물물 교환 등으로 거래가 성립되었다. 주막에는 성긴 나무 판자로 잇댄 목로가 놓여 있기 마련이었고, 목로가 없는 주막에서는 툇마루나 평상으로 길손을 모시고 거멀못이 듬성듬성 박힌 개다리소반에 술 한 방구리를 얹고, 끽해야 된장떡이나 군동내나는 짠지를 곁들여 내어올 뿐이니 옛날의 주막을 경영하던 사람들은 그 영업을 결코 치부의 수단으로 삼지는 않았다. 물론 대처의 목로 술집으로 나가면 진안주로 너비아니, 날돝고기, 삶은 돝고기, 편육, 빈대떡, 떡산적과 시절에 따라 구운 생선과 회와 젓갈이 있고, 마른안주로는 우포, 어포 등속을 탁배기와 곁들어 팔았다. 대개의 길손들은 주막에 들러 나귀에게 여물을 얻어 먹이거나 신들 메를 다시 한 번 고쳐 매는 등 채비들을 정돈하고 허기를 끄고 난 뒤 곧장 길을 뜨기 마련인데, 주막의 식주인이나 주모로부터 앞으로 남은 노정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해 듣기도 하였다. 나귀를 몰고 장삿길에 나선 선길 장수와, 지게에 돌솥과 소금 단지와 놋바리를 주렁주렁 매단 등짐 장수며, 투전판을 찾아나디는 설레꾼 건달들과, 저자로 드나드는 타관바치와, 해질녘 한 잔의 탁배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들른 천리 행보를 앞둔 과거꾼들과, 야반 도주하는 타관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드나들었고 식주인과 주모는 그들은 안면 박대로 낮가림하는 법이 없이 흔연 대접하였던 것이었다. 탁배기를 담은 질항아리 속에 술구기(술 푸는 데 쓰는 도구)를 담그고 있다가 한 두잔 술로 심에 차지 않아 하는 길손이 있으면 서슴없이 덧거리 한 잔을 건네주는 푸짐한 인정이 그 곳에 있었다. 주막에 기대어 연명하는 여자들도 없지 않았다. 잔술을 파는 들병이가 있었다. 들병이는 주막에서 동이술을 떼어다가 길손들의 내왕이 번다한 길목에 나가 앉아서 잔술을 팔며 추파를 던지다가 살꽃을 팔기도 하였다. 혹은 주막 그 자체에 막강이나 '통지기'로 불리는 조개 장수들이 기생하고 있으면서 객회가 스산한 숙객에게 아랫품을 팔고 해우채(화대)를 챙기는 수도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경영주인 주모 스스로가 길손에게 시침을 들기도 하였고, 눈이 맞고 배짱이 맞으면 지향없이 살아가는 정인을 따라 나이 많은 영감을 소박놓고 야반도주를 결행하는 수도 있었다. 식주인은 잠상꾼들의 접주 노릇을 하였고, 설레꾼들에게 봉노를 대여하고 노름돈 개평을 뜯는 와주 노릇도 하였지만, 요사이처럼 밀린 식채(외상값)를 받으러 사람을 찾아다니며 공갈에 으름장을 놓는 못된 버릇들은 없었다. 이번에 식채가 없으면 다음 파수에 지날 때 받게 될 것이고, 설령 길손이 식채를 떼먹고 도망을 간다 하여도 언제 한 번은 다시 주막에 들러 줄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골 주막집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비숍 여사의 여행기에서 빌어올 수 있다. "처마 밑에 말먹이통과 말뚝이 있음으로써 겨우 여관인가 하게된다. 장지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면 흙으로 된 바닥에 거적자리를 깐 것이 방이다. 각재를 5, 6치 정도 켜서 자를 베개 대여섯 개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이 베개가 암시하는 것처럼 이 방은 나그네 한 사람이 결코 독점 할 수가 없다. 빈부의 차별도 남녀의 구별도 없이 되는 대로 몰아넣는 것이 관례인 것이다. 청소라 해서 별다른 공력을 들이지 않았다. 거적자리를 털어서 먼지를 한쪽구석에 쓸어모을 뿐 그 동안 먼지가 뽀얗게 방에 쌓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먼지는 결국 청소하기 전에 비해서 추호도 감소되지 못할 따름. 이 먼지는 실로 무수한 이며 빈대의 소굴인 것이다. 따라서 조심 없이 누울 양이면 이들의 공격으로 한잠도 잘 수가 없다." 그러나 비숍 여사의 관찰이 좀더 진지했더라면 그녀는 주막집 사방의 토벽에 친 난초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그 난초 그림은 실은 수많은 빈대와 이가 길손들의 손가락에서 죽어간 핏자국인 것이다. 어찌 물것들이 그것뿐이었을까. 등에이미, 각다귀, 버마재비, 바퀴, 바구미, 그리마, 당비루, 쉬파리까지 등쌀을 피워서 잘못 걸리면 발을 동동 구르고 자야 하는데, 그러나 길손들은 개의치 않고 하룻밤 단잠을 빼앗기지 않았다. 주막이 서민 경영의 여인숙이라 하면, 보행각주라는 곳은 주로 지체 높은 길손들이 묵던 곳으로 주막보다는 한수 위였다. 그 외에도 원이나 역은 관영의 여숙이라 할 수 있었다. 즉 공문서의 체전과 관물 운송 또는 관리들이 공무를 띤 여행에는 관비로 설치한 원이나 역에서 묵어 갔다. 서울에는 주막에서 진보한, 이를테면 요사이로 봐서 방석집이라 할 수 있는 색주가도 있었다. 색주가는 홍제원과 남대문 밖 잰배와 파고다 공원 뒤쪽 탑골에 성행하였다. 이 색주가의 포주들은 거의가 왈패로서 포도청 포교들의 끄나풀들이었다. 색주가로 파려 온 여자들은 가벼운 범죄자의 소생들이거나 위협 당하거나 유인되어 온 산협의 어수룩한 여자들로, 이곳에서 잡가를 부르고 웃음을 팔아야 했다. 이렇듯 주막을 조선 팔도 전국 방방곡곡 삼육다섯 고을의 길목, 선착장이며 저자 거리에는 말할 것도 없고, 광산촌과 산간 벽촌일망정 으레 존재하였다. 가래톳이 서 하룻밤을 묵어가던 길손이건, 이곳은 그들의 좋은 휴식처였고, 세상사의 물리를 익히는 경험의 장소였고, 소박한 인정이 꽃 피는 장소였고, 타관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하는 장소여서 우리의 질퍽한 서민 문화가 용트림하고 만개하던 곳이었다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겠다. 이 세상에 술이 없으면 여자가 없는 것만큼 삭막하다. 이형기/시인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중년의 나이를 넘어선 사람들 가운데 이형기(동국대 국문과 교수)시인의 (낙화)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청년시절, 뜨거운 열정을 가다듬으며 애송했던 바로 그 시이기 때문이다. 세련된 감각과 단단한 정서를 지닌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시인 이형기.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그의 시는 아름답다. 또한, 그의 언어감각은 빼어나게 돋보인다. 그러나 그는 말초적 신경을 자극하는 언어감각에 탐닉하지 않는다. 그가 이와 같은 시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단단한 무게와 시적 패기로 난삽한 기교주의를 극복한 까닭에 있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시인이 문학과 깊은 인연을 맺은 것은 1950년, 당시 그가 중학생 때였다. 어린 나이로 문학지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데뷔했던 것이다. 그후 대학 재학 중에 언론계에 투신하여, 서울신문, 대한일보기자를 거쳐 국제일보 편집부장, 논설위원까지 역임했다. 80년 언론통폐합 사태로 언론계를 떠나서 대학강단에 선 이래로, 보다 정력적인 시작활동을 하며 중후한 시들과 예리한 시론을 발표해 왔다. 그 동안 여러 권의 작품집을 냈고, 문학적 성과를 인정받아 한국문학작가상, 윤동주문학상, 한국문학가협회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연전에 출간된 평론집에서 시인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사람이다." 그것이 상상력의 소치라는 사실은 구태여 덧붙일 나위가 없다. 이 상상력이 펼치는 언어의 공간, 그것이 곧 시인의 창조하는 세계인 것이다. 상상력의 공간인 이 세계는 일상적 질서의 테두리를 뛰어 넘는다. 그리고 그러한 초월을 통해 일상적 질서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우리의 그 좁은 시야를 확대시켜 준다. 따라서 시인의 세계 창조는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인식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의를 내오기까지 시인으로서 그의 뒤안길에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다. 때로는 한 편의 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수십번 펜을 놓아야만 하는 진통을 겪기도 한다. 그럴 때는 마음을 훌훌 털어 버리고 가까운 이와 소주라도 한 잔 기울이며 사상에 잠긴다고 한다. 시인과 술은 깊은 연관을 가진 것 같다. 문학이 인간을 이야기 한다면, 술은 또한 인간을 드러내서 알리는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술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렇다. "이 세상에 술이 없으면, 여자가 없는 것만큼 삭막하다. 술은 인생의 윤활유며, 여유고, 잘못을 덮어줄 수 있는 너그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갖게되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잔정들을 술을 매개로 풀어버리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즐거움은 술 먹는 사람만이 느끼는 인생의 행복이라고까지 긍정론을 펴는 그는, 정도를 지키는 음주라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경우 술에 대하여는 실패한 기억들이 않았다며, 전봇대를 받아 안경을 깨뜨렸던 기억을 떠올린다. 요즈음처럼 여자를 품고 비싼 양주를 마셔야 술맛이 것처럼 되어 있는 풍토는 일부 졸부들이 만들어 놓은 폐습이라고 성토하고 하루 빨리 제대로 된 문화로 자리잡혀야 한다고 말한다. 예전처럼 술을 자주 마시지 못하는 게 늙은 탓이라며 아직까지 술자체에서 굉장한 맛을 느낀 적은 없다고 한다. 그보다는 술이 가져다주는 외적인 요인을 좋아한다. 가끔 가의 중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상태로 뒷자리에 앉은 학생을 보기도 하는데, 가급적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한편으론 젊은이만이 가질 수 있는 작은 실수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이다. 어쩌다 학생들과 술자리를 같이할 때면, 교수라는 권의 이전에 격의 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기울이는 것에 인색치 않던 젊은 날의 그로 돌아간다. 술 못 먹는 사람은 재미가 없다며 추태지경에 이르지 않고 정도에 맞게 술을 마시는 즐거움을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술이 좋은 것은 월급쟁이들이 선술집에서 상사를 안주 삼아 기울이는 맛일 수도 있고, 친구나 마음 맞는 이들이 주고받는 불완전한 인간에게 삶의 잔잔한 즐거움과 여유를 줄 수 있는 것으로서 술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술에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 정도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면, 옛말의 뜻이라도 찬찬히 되새겨 볼 일이다. "대인은 절주를 하고, 소인은 단주를 한다." 멋과 분위기를 아는 술꾼이 되어야 합니다. 박석기/사업가 -(호모 비불루스)가 애주가들이나 일반독자 모두에게 인기가 높은데, 책을 쓰시게 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이 대체로 술을 좋아하고 가까이하고 있는데 반해 정적 술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모 비불루스)란 '술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오래 전부터 이것을 하나의 독립된 개념으로 체계화시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존 주류에 관한 책자들이 이렇게 많지 않았고, 더욱이 술꾼들이 읽고 즐길만한 것은 부족했다고 봅니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호모 비불루스)에서는 호모 비불루스 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술의 종류, 각종 술에 어울리는 안주, 음주예법, 술에 관한 일화, 술 건강 지식 등에 대한 여러 가지 상식을 독자들이 부담스럽지 않고 보기 편하도록 원색사진과 삽화를 곁들여 소개하였습니다. 10년 정도 여행을 하면서 모은 술에 대한 자료들을 한군데 묶어 책으로 엮어야 겠다는 생각은 85년부터 했지요. 자료를 정리하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는데, 책의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지 위해서는 그럴듯한 제목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좀 세련되고 의미 있는 제목을 생각해 낸 것이 호모 비불루스입니다. 처음 저희 동아출판사에서는 호모는 호모섹스 같고 비불루스는 비불리우스균 같다고 해서 제목을 바꾸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걱정의 소리가 높았어요. 하지만 인간의 존재 이유는 술을 먹음에 있다는 뜻을 가장 빨리,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제목이 없을 듯 합니다. 술은 저의 제 3 부 전공이나 마찬가지고, 주량도 세지 못한 제가 책을 출판하면서 너무 유명해진 것이 아닌가 해서, 진짜 술박사들에게 미안해요. 책이 잘 되었던 못 되었던 간에 이 작은 책자가 술이 있는 인생을 설계하고 운영해온 모든 이들에게 드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유쾌한 꾼들을 위한 가이드 포스트가 되고 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 주류 문화에 대한 긍정적 견해에 부정적 견해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우리 나라 음주문화에 대한 견해는 어떠하신지요? 물론 우리민족 고유의 음주문화에 대해서는 그리 부정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우리의 의식 수준이 선진국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는 개선되어야 할 점들이 많이 있겠지요. 하나 예를 들어 본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의례히 술잔을 돌리며 마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기이한 모습입니다. 가장 못산다는 남미나 아프리카에서는 술잔을 돌려가며 마신다고 하지만... . 가장 지성인들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러한 모습이 더욱 두드러지죠. 내 마름을 네가 알고, 네 마름을 내가 안다는 의미가 있는지는 몰라도 이것은 위생상 너무 좋지 않은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고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ㅡ그렇다면 왜 이런 음주풍토가 생겨나게 된 것 같습니까? 보통 술을 배우는 나이가 20대 초반이라고 봅니다. 남자들의 경우 군대에 가기 전에는 술을 잘 모르고 있다가도, 일단 군대생활이 시작되면 폭주로부터 급주, 폭탄주에 이르기까지 정말 희한한 방식으로 술을 마십니다. 한마디로 주도법이 퇴색되는 것이지요. 군사문화의 가장 나쁜 점이 술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대체로 술을 마실 때는 슬퍼서, 즐거워서, 친구끼리의 모임 등을 이유로 술을 마시지 서양과 같이 건강을 생각하며, 분위기에 취해서 술을 음미하듯이 아시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좋든, 나쁘든 우리 민족 나름대로 지켜나가야 할 음주문화가 있지 않겠습니까? 술을 너무 목표지향적으로 마시는 전통은 버려야 합니다. 왕창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술마시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렇게 묘한 자학적인 주법이 성행되기 때문에 술집이라는 곳을 가보면 정말 별의별 광경이 다 있는 겁니다. 술을 돌려 마시는 것이 어찌 보면 가장 좋은 미덕이 될지는 모르나 어느 정도는 스스로 통제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또 술을 다 마시지 않았는데도 술 권하는 풍토까지 있어요. 아직 맥주 잔에 술이 반이나 남아 있는데 술을 따른다는 것은 술을 마시는데 대한 예법이 너무 안되어 있는 겁니다. 지금 전국적으로 음주운전 단속을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는데도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가 여전히 많은 것을 보면, 생각 없이 술을 마신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미국에서도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긴 하지만 한 잔 외에는 절대로 마시지 않습니다. 기마민족의 특성 때문인지 우리는 술자리가 지나치게 크고 술을 너무 와일드하고 급하게 마시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니 자연히 불결하게까지 되고 유리잔이 더럽지 않으면 한국음식이 아니라는 소리가 있으니 문제지요. 일류호텔에 가지않는 이상은 깨끗한 유리잔 보기가 힘들어요. -술에 관한 책을 쓰신 데에는 주당들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일 텐데. 한국인은 문화민족이니까 술도 문화인답게 마셨으면 합니다. 호모 비불루스란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뜻도 되지만, 술을 제대로 마실 줄 아는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좀 자제력을 가지고 술에 대해 알고 마셔야 하지 않을까요. 술은 예로부터 신에게 바치는 것으로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우리 선조들도 쑥술, 마늘술 등을 빚어 신께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구요. 이렇게 신성시하던 것을 인간이 아시게 외었으므로 술을 소중히 여기는 의식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술을 너무 쉽게 알고 있는 듯 합니다. 물 가운데 가장 불붙는 생명을 부여한 것이 술이라는 의식에서 선조들은 주도를 엄격하게 지켰던 반면에,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주도라는 것을 제대로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술을 마실 때도 어떤 종류의 술인지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도 모르고요. 끝으로 꼭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건강에 대한 생각으로 해가며 마시자는 겁니다. 럼주나 보드카를 소주 마시듯이 마시면 어디 위가 제대로 성할 수 있겠습니까. 양도 좀 조절하고 안주도 신경을 써서 건강에 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만 좋아하는 술도 오래도록 마실 수 있겠지요. 술맛을 알고 술을 아시는 길을 찾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러한 길을 찾으려면 건강을 생각하고, 멋을 알아야 하고, 분위기에 어울릴 줄 알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술을 알아야 합니다. 술을 안다는 것이 곧 자기를 알고, 멋을 안다는 것이 아닐까요? 나의 술 멋 유 선/시인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두고 거의 날마다 해가 서산으로 설핏하게 기울 때면 예외 없이 내 단골 주점을 버릇처럼 들른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두서넛이 어울려 들르는 곳이지만 항상 이 주점만은 초만원을 이룬다. 값도 실비이긴 하지만 술마시기 안성맞춤의 자리에 위치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왜 이리 애주가가 되었는가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놈의 '주'자 때문인 것 같다. 원래 '주'라는 근자는 술마시는 때를 은연중 암시해주는 매력 있는 글자라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주'자의 구조를 내 나름대로 풀어보면 '수+유=주'와 같은 공식이 성립됨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수자는 물이니, 곧 술을 나타내고, 유자는 닭이니, 곧 유시를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유시간 퇴근 시간 즉, 해가 뉘엇뉘엇 넘어갈 저녁때이니, 곧 오후 5시부터 7시까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술이란 아무개도 해가 설핏할 무렵인 유시라야만 제 맛과 젓과 마실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러길래, 나도 그렇지만, 저리 많은 술꾼들이 몸에 해롭다는 매스컴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시만 되면 어김없이 주점으로 모여들어 물이 아닌 독을 퍼 마시다가도 도리어 술에 먹히는 꼬락서니가 되는 수가 많다. 그래도 날마다 퇴근 시간만 넘으면 으레 내 단골 주점에는 예외 없이 앉을 자리가 없다. 어떤 날은, 나도 그런 꼴이지만, 자리가 나기를 고대하고 기다리는 술꾼들이 있는가 하면, 한참동안 이리 저리 기웃거리다가는 그만 자리가 나지 않아 아쉬운 표정으로 이웃 다른 주점으로 발길을 옮기는 술꾼들이 많음을 본다. 어떻든, 일단 주점엘 들어서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기만 하면, 너나 없이 술과 안주를 시키게 마련이다. 술의 종류에 따라 안주 또한 다양하다. 가령, 텁텁한 막걸리에는 두부나 김치찌개가 좋고, 소주에는 삼겹살 아니면 돼지갈비가 일품이며, 따끈한 정종에는 생선회자 생선국이 괜찮고, 독한 배갈에는 어포나, 땅콩, 오징어 등 마른안주가 적당하고, 독한 양주에는 치즈나, 서양 요리 등이 제격이라고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이렇게 술과 안주는 아치 바늘과 실처럼 불가분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 단골 주점에는 막걸리와 소주, 맥주, 이세가지 종류밖에는 팔지 않는다. 물론 양주나 배갈을 주문하면 구해다 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주점을 애용하는 술꾼들은 대부분 막걸리파가 아니면 소주파, 그도 아니면 맥주 파들이지만, 이 중에서 소주파가 제일 많은 것이다. 나도 소주파이기 때문에 언제나 진로애다가 돼지갈비나 삼겹살을 시켜 먹기가 일쑤다. 술은 참으로 혼자서 마시면 멋대가리가 없다. 그저 술꾼들이 어울려서 권커니 받거니 하면 마셔야만 술맛과 술멋과 운치와 주흥이 일게 된다. 말하자면, 주흥이 일게 되면 얼큰해지고, 얼큰해지면 수다의 꽃이 만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흥이란 아무래도 좌석이 매우 중요하다. 마음에 드는 사람들끼리 어울릴수록 맛과 멋과 운치와 흥이 절로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좌석의 분위기가 걸맞지 않으면 술맛은 고사하고 씁쓸하다 못해 감옥같이 부자연스럽고 괴롭기까지 한 시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술은 실로 좋은 분위기 속에서 그 맛과 멋과 운치와 흥이 샘솟듯 하는 법이며, 정담이 물 흐르듯 왕래하여 더욱 친근해지는 법이다. 이렇게 몇순배 술잔이 오고 가다보면 어느덧 주흥은 무르익어 인생을 논하고 생활을 논하다가는 술을 논하고 술을 논하다가는 다시 인생을 논하기가 일쑤다. 엊그제는 내 단골 주점에서 술에 대한 격론을 벌이 적이 있다. 한쪽에서는 술의 장점을 주장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술의 단점을 들어 반박하는 격론이었다. 술의 장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술을 적당히 마신다는 전제하에, 술을 마심으로해서 불쾌한 기분을 상쾌하게 전환시킬 수 있으며, 상상력 또한 촉진되고, 고민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흥취를 돋굴 수 있으며, 사교에도 없어서는 아니되고, 혈액의 순환도 원만하게 해 주며, 쌓인 피로도 봄눈 녹이듯 풀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술이란 장점도 있다고는 하지만, 단점이 훨씬 더 많다고 반박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술은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자신의 단점을 은폐시키고 의지의 대항으로 악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왕성한 기억력을 감퇴시키며, 주벽이 생길 우려가 있고, 시간적 경제적 낭비가 많을뿐더러, 다음날 집무나 사업에 큰 지장을 초래사고, 그 또한 날마다 마신다면 마침내 중독 되어 신체상 정신상 해롭고 끝내는 질병을 일으켜, 가정불화는 물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독약이라고 반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술에 대한 장, 단점을 서로가 주장하면서 한동안 갑론을 박 하다가 어느덧 술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만다. 이쯤 되면 이제는 자리를 뜰 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나하게 술이 오른 주태백이들이 어찌 그리 빨리 일어설 수 있겠는가? 그래도 흥이 미진하여 또 '입가심'을 찾는다. 어느 때는 맥주이기도 하고, 어느 때는 커피가 될 수도 있다. 좋게 보아 이것은 아마도 그냥 헤어지기가 섭섭해서 돋아나는 심리현상인 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술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들은 술의 해독과는 아랑곳 없이 정든 사람들끼리 만나기만 하면, 예외 없이 "한 잔 합시다."하며 주점으로 끌로 가서 권커니 받거니 하는 것이다. 나도, 늘 술을 먹은 다음날 아침이면 그놈의 술을 끊어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의지가 약한 탓인지 그놈의 '유시'가 되면 아침에 단단히 결심한 약속을 망각한 듯, 내 단골 주점으로 발길이 옮겨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오늘은 내가 한잔 사지 허 유/시인 천상병 시인은 나에겐 두 갈래의 선배다. 한 갈래는 물론 문단의 선배요, 다른 한 갈래는 대학(서울 상대)선배다. 어느 쪽이든 간에 천시인은 투명하고, 선량하고, 가치로운 선배로서 나에게 남아 있다. 천시인이 본격적으로 나와 왕래하게 된 것은 60년대 중반으로 기억된다. 1960년이었을 게다. 서울 보문동에서 친구와 둘이 하숙생활을 하던 무렵이었다. 어느 날 밤중에 어떻게 찾아왔는지 잘 모르지만 대문을 두드리고 발로 차면서 "허아무게 하숙집이오?" 하는 고함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잠결에 뛰쳐자가 대문을 따니 입에서는 구린 소주냄새가 진동하고, 행색은 초라할대로 초라한 천선배가 거기 서 있었다. 밤도 늦고 하숙집 주인에게도 미안하여 얼른 방으로 안내하고 같이 있는 친구를 깨워 인사를 시켰다. 보아하니 당분간 이 허아무게 하숙집에서 기숙을 해야겠다는 눈치였다. 문제는 다음날에 일어났다. 같이 하숙하는 친구가 이불에서 웬 발구린내가 나니 아마 천선배가 그 원인이 아니겠는가고, 자보고 같이 며칠 지내는 것은 상관 없는데 천선배한테 발 좀 씻고 주무시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말 좀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 날은 물론 햇볕에 하루종일 이불을 말림으로써 문제를 해소하였다. 생각하기에 따라 쑥스러운 일이지만 할 수 없이 천선배에게 "외람된 말씀이긴 합니다마는 발 좀 씻으시고 주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하고 부탁을 드렸다. 그런데 그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했는지 두말없이 나가서 다시는 하숙집에 들르지 않았다. 그 뒤 5,6년이 지나서야 다시 나에게 나타난 것이다. 나는 지나간 하숙집일도 미안스럽고 적은 월급이지만 일정한 수입이 있는 처지라 천선배의 '500원' 술값은 착실히 공급하였다. 1980년 초로 기억된다. 하루는 술취한 천선배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동안 나한테 너무 신세를 져서 오늘은 자기가 술 한잔 사겠으니 저녁때 나오라는 거였다. "어디로 나갈까요?" 하니 종로 2가에 있는 낭만앞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이 양반이 갑자기 무슨 큰 돈이라도 생겼나, 낭만이면 둘이서 들어도 2,3만원은 족히 나올텐데 하면서 갔더니 낭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맞은편 골목 안에 있는 이른바 단골 포장마차로 가서는 "오늘은 내 돈 좀 있으니, 허형! 걱정 말고 많이 듭시다."하는 것이다. 그 단골집은 외상도 통하고, 또 막걸리 한 사발에 200원인데 자기에게는 특별히 150원으로 할인까지 해 준다는 것이었다. 막걸리 몇 순배로 그 날 술자리는 끝났다. 아마도 천시인에게 술 얻어먹는 기록은 좀체 있을 법한 것 같지 않고, 내가 그런 희귀한 사람 주의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한참 뒤 부인 목순옥 여사가 나에게 귀한 술이라 하면서 다래주 한 병을 가져왔다. 시골 어디 갔다가 가져온 술이라는데 아마도 십수년은 되었을 거라면서 이것으로라도 고마움을 표해야겠다는 것이다. 환갑 잔칫날 팔십까지 사는 것은 문제 없다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던 천시인이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나는 천선배와의 이런 저런 단편적인 일화들을 늘어놓았지만, 우리 문단이 보배로운 한 시인을 잃은 것은 큰 손실이라 생각한다. 망우물 조영자/시인, 수필가 '망우물'은 술의 별칭이다. 술은 근심 걱정을 잊게 한다하여 망우물이라 불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즐거운 때를 당하여 흥겹게 그리고 멋스럽게 노는 자리에 술은 필수불가결의 것이었다. 그러나 살아 가노라면 경사스러운 일이 생겨 술을 마실 때보다는 생활이 힘겹고 괴로워서 술을 찾을 때가 더욱 잦다. 그래서 술을 흥을 돋우는 '고흥물'이라 부르지 않고 망우물이라 했을 것이다. 술은 잠시나마 연륜의 무게를 잊게 하며, 사회적 지위나 권위의식의 갑옷을 벗게 한다. 그리하여 사회의 인정이나 명예욕에 얽매였던 지신으로부터 탈출하게 해주는 불가사의한 매체이다. 술은 옹졸하고 고집스러웠던 자신의 틀을 깨고 자유스러울 수 있게 해주는 신비로운 힘을 가졌다. 그래서 소동파는 얼큰히 위하는 감미로운 기문을 "홀가분히 속세를 잊고 신선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 같았다." 라고 읊었다. 뿐만 아니라 술은 사고의 폭을 넓혀 줌으로써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게 해준다. 즉 작은 기교나 기술에 구애되지 않고, 타성에 젖은 규칙들을 과감히 무시해 버릴 수 있어 창조 능력을 북돋워 준다. 예를 들면 중국 진대의 사성 왕희지가 회계산 비단에 휘갈겨 쓴 '난정서'는 왕희지가 술에서 깬 뒤에 지가 자신이 보고 놀랄 만큼의 훌륭한 글이었다고 한다. 후일에 왕희지가 다시 수백본을 썼으나 결코 미칠 수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생활의 멋과 격을 높여주는 놀이에는 알맞은 분위기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고 중국의 어느 작가는 말했다. "거북하고 딱딱한 공식 석상에서 마시는 술은 천천히 마음놓고 마셔야 하며,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은 점잖게 낭만적으로 마셔야 한다. 병자는 적게 마셔야 하며, 마음에 슬픔이 있는 사람은 모름지기 정신없이 취하도록 마셔야 한다. 봄철에는 집 뜨락에 나가 마시고, 여름 술은 들녘이나 누대에 올라가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마셔야 한다. 가을 술은 배 위에서 탁 트인 경치를 감상하며 마실 일이며, 겨울에는 집안에 들어앉아서 마실 것이다. 눈이 내릴 때는 하얀 설경을 바라보며 마시고, 밤 술은 달을 벗 삼아 마셔야 한다." 라고 피력했다. 술은 인간의 음식문화 중에서 가장 정교하고, 정제된 훌륭한 창작물이며, 그 지역의 특색과 민속문화의 고유성을 표출하는 특산물이다. 그러기에 술은 그 나라 국민의 식생활의 문화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국 고유의 전형적인 양조주는 약주였다. 약주를 증류하여 소주를 만들고, 약주를 희석한 것이 막걸리다. 옛날에 약주를 빚을 때 청명과 곡우날에 맑은 강물을 떠다 술을 빚는 습관이 있었다. 이 철의 물이 가장 무겁고 사납지 않기 때문이다. 또 누룩을 술 물에 풀 때는 악귀의 범접으로 막기 위하여 복숭아 나뭇가지고 풀어야 하는 민속이 있었다. 또 술맛으로 그 집안의 길흉을 점쳤을 정도였으니, 옛 부녀자들이 얼마나 술 빚기에 정성을 들였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지구촌은 1일 생활권 내로 거리가 좁혀졌다. 한 가정의 안방에서 도연명이가 귀거래사를 읊으며 자작했던 술과, 이백과 두보가 노군의 석문에서 석별의 정을 아쉬워 하며 함께 마셨던 소흥주도 쉽게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속삭이며 즐겼던 붉은 포도주, 저 만리장성의 주인공 진시황제가 갱유분서를 감행한 후 마셨을 쓰디쓴 참회의 술, 한때 유럽 전체를 정복했던 천하의 영웅 나폴레옹 황제가 유배지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 못이룰 때 마셨던 고독의 술! 인간사의 비밀과 흥망성쇠의 희비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미주들, 제각기 화려한 내력과 공덕을 가슴에 달고 옹기종기 이마를 마주 대고 찬장속에 진열되어 있다. 불후의 이름을 남긴 큰 선비들과 영웅호걸들, 그리고 성현들의 풍류생활을 함께 해온 술. 선인들이 몹시 사랑하며 즐기다가 간 망우물을 후세의 애주가들이 마음껏 즐기며, 삶의 고뇌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오로지 밝은 내일을 향해 힘껏 질주해 볼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두웠던 내일의 소망이라는 정신적 활력소로 재충전시켜야 한다. 이러한 과감한 결단과 용기에는 술의 마력이 필요하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나도 퍽 애주가가 된 기분이다. 그러나 나는 맥주 두잔 정도면 가슴이 벌렁거리고 다리에 힘이 없어진다. 비록 주량은 적어도 술에 위하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정취는 알고 있다. 마치 우리가 그림을 그릴 줄 몰라도 그림의 정취에 스며들고 감상할 수 있듯이. 하얀 눈이 내리고, 때를 알리는 종소리가 잿빛 하늘가로 흐를 때면, 한 해를 잃어버린 아쉬움에 우리는 어김없이 가슴앓이를 할 것이다. 명멸하는 거리의 불빛 아래 낯선 얼굴들이 물결치고, 송년과 티의 술렁임이 바다에 뜬 외딴 섬같이 더욱 우리를 고독하게 만든다. 나는 못 마시는 술이지만 붉은 포도주를 한 잔 들고 '장진주'를 읊으리라. 고독한 군중을 위해 가슴에 모닥불을 지피는... . 술익는 마을 문인수/시인 술이란 잘만 즐기면 신선(놀음)이 되지만 잘못 빠지면 개(귀신)꼴이 되기 십상이다. 내게 있어서 술과의 관계는 대체로 '악연'에 속한다. 그러니 술에 관해서는 개인적으로 내새워 자랑할 만한 이야기 거리가 없다. 그러나 술에서 연상되는 유토피아, 그 아름다운 마을이 내 기억의 편편들로 펼쳐져 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시인의 시 '나그네' 전문이다. 이 시에는 참 아름다운 마을이 나온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의 '술 익는 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그렇다면 이 '술 익는 마을'은 어디이며 어떤 세계일까. 그리고 이 마을 사람들이 빚어 마시는 그 '술'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마을의 정체는 곧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우리들 자신 모두의 고향일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한창 익고 있는 술은 동고동락의 의미, 즉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며, 술은 또한 밭 길고 논 가는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와 신명을 불어넣는 농경과 생활의 활력소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그네'이다. '구름에 달 가듯이....'는 흐르지 못했지만, 어쨌든 오래 전에 이미 그 '술 익는 마을'을 멀리 떠나왔다. 여기서 '멀다'라는 말의 의미는 '거리'가 아니라 지나가 버린 '세월'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렇다. 물리적 거리로서의 고향은, 그곳이 어디이든 간에 이제 전국의 모든 고장이 서로 한나절 생활권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고향, '술 익는 마을' 그 유토피아는 지금 어디에도 없다. 마을마다 술이 익고 그 진한 향기에 하늘도 취한 듯 붉게 타오르던 저녁놀. 그렇듯 지난날 우리 농가에서는 농주인 막걸리를 빚었다. 손님 맛이나 제례에 이런 저런 길흉사며 크고 작은 행사에 이 농주가 쓰이기도 했지만, 주로 들일 나간 남정네들의 새참으로 나갔다. 술을 담그는 집에서는 이웃이나 친구들을 물러 술맛을 보게 하면서 인정과 즐거움, 질편한 흙냄새의 냥만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절, 50, 60년대에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던 궁핍의 시대였다. 술을 거르고 남은 찌꺼기조차 주전부리감이 될 정도였으니... . 그렇지만 이러한 가난까지도 그립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가난했으니 오늘날처럼 각박하지 않았던 세월이었기에 이렇듯 애틋한 그리움이 샘솟는 것이다. 술지게미를 얻어먹고 취해서 한나절을 엉엉 울어댄 예닐곱살 적의 땟국눈물, 희희낙락하여 술에 밥말아 먹던 기억, 보리타작을 한 뒤 난생 처음 어른들로부터 막걸리 돌림잔을 받아 들이켰던 소년시절의 그 어느날, 그런 장면들이 다 그립다. 들에 새참 들고 나가던 일, 밭두렁에 터억 걸터앉던 일꾼들의 검붉은 몸피, 고수레! 하며 밭고랑에다가 휙 술을 뿌리던 그들의 흙에 대한 의식, 사발째 막걸리를 들이키고 날된장에 풋고추를 찍어 으적으적 씹던 턱수염, 그런 건강한 모습들이 모두 그립다. 흰 두루마기 입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리던 장날, 그 장터거리 국밥집도 그립다. 왁자지껄 나누던 수인사, 내 건너 재 너머의 그 근동 사람들이 다 그립다. 고등어 한 손 사들고 비틀비틀 고샅길 걷는 귀가, 그 파장의 불타는 저녁놀이 또한 몹시 그립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기쁨을, 슬픔을, 낭만을 더불어 마시는 것 같지 않다. 그저 강팍한 거래와 거친 폭력, 냄새나는 퇴폐의 술잔이나 다투어 들고 있다. '술 익는 마을' 그 아름다운 유토피아인 고향의 모습은 간 곳 없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이, 우리들의 그리움이 흰 뿌리처럼 아련히 가 닿는 곳, 저기 붉게 타오르는 저녁놀 아래 '술 익는 마을'이 있다. 유별난 술 사랑이 가져다 준 행운 김행/기자 "당신은 진짜 애주가야, 어쩌면 그렇게 술을 맛있게 먹냐. 더구나 술집도 아닌 집에서" 일요일 저녁 식탁에서술 못먹는 남편이 하는 말이다. 식구라야 시어머니, 딸 하나 그리고 우리 부부 모두 합해서 4식구뿐인데, 식구들마다 저마다 바빠 온식구가 함께 모여 저녁 먹는 날이라고는 겨우 일요일 저녁 정도이다. 그 때마다 나는 분위기를 한껏 돋구고, 술의 종류를 정하고, 술에 맞는 잔을 준비한다. 때로는 꽃도 꽂는다. 일요일 밤의 술 한잔은 내가 일상생활 중에서 누리는 '최고의 호사'인 샘이다. 그러니 술 안마시는 나머지 식구들은 황당할 수 밖에... 일요일 저녁은 술마시는 날 식구 하나를 애주가라는 죄목(?)으로 쫓아낼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귀엽게 봐줄 수 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때로 남편은 '낭만적 센티맨탈리스트'라며 나의 감성적 사치를 맹공격하기도 한다,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고, 노는 것 좋아하고, 당신 만약 옛날에 태어났으면 영락없는 한량인데, 요즈음 세상에서 태어나서 좀 안됐다. 그런데 한량들이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것 봤냐. 자기들 즐기기에만 바빴지, 기자면 기자답게 남의 문제에 치열하게 관심 좀 가져라."하며 아프게 꼬집는다. 그때마다 나는 혈압이 낮아, 약간의 알코올을 섭취하는 것이 건강에 좋단말야"라며 저혈압 체질을 무기삼아 공박한다. 나의 이런 '유별난 술사랑'은 저녁모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저녁메뉴를 정하고 술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실 술을 먼저 정한 후 그 술을 최상의 여건에서 즐길 수 있는 밥집을 정한다. 이런 나의 까탈스러운 취미를 '울며 겨자먹기'로 봐 주고 장단을 맞춰준 술 친구들에게 감사드린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니, 이제 주력 15년이 넘어 20년 가까이 되는 베테랑이 되었다. 유신시절 대학을 다녔던지라, 데모 끝나면 술먹고, 울분 터지면 술먹고, 친구 붙잡혀 가면 술 먹고...,신촌에 있는 대학을 다녔던 탓에 학교 특성에 맞게 주로 맥주를 많이 마셨던 것 같다. 학교 졸업후 몸담은 직장들 또한 '술'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울만한 곳들이었으니, 술집에 바친 돈만도 수월치 않은 액수이리라. 오죽하면 뒤늦게 마흔살을 바라보는 불혹의 가까운 나이에 하이트 맥주 광고 모델이 되었으랴. 이 끈질긴 술하고의 인연은 급기야 인생의 행로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사연이야 어찌됐건 광고 출연 이후부터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다. 동료나 모처럼 만난 사람들과 식사를 하러 가면 종업원들이 음식주문을 받은 후, 당연한 듯이 "술은 하이트로 하실거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와 밥먹는 상대방까지고 유명한 모델덕(?)에 술을 선택할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다. 좋은 사람과 맥주 한잔이면 그만 최근 들어서는 술먹는 습관이 많이 달라졌다. 젊었을 적인 대학시절의 음주습관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이제 힘들다. 이에 나름의 몇가지 기준을 정했다. 첫째, 어떤 술이든지 하루에 2,3잔 이상은 마시지 않는다. 둘째, 맥주로 시작했으면 맥주, 위스키로 시작했으면 위스키로 끝낸다. 셋째, 폭탄주는 마시지 않는다. 넷째, 술마시고 노래하지 않는다. 다섯째, 음주운전은 하지 않는다. 여섯째, 남에게 무리하게 술을 권하지 않는다. 일곱째, 양을 줄인 대신 맥주를 마실땐 최고의 맥주를, 위스키를 마실땐 최고의 위스키를 마시려고 한다 등이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상당히 절제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어찌 하루아침에 터득한 지혜일 수가 있으랴. 술 자체를 탐닉하는 욕심이 줄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좋은 사람과 나누는 맥주 한잔에 만족하며 감사한다. 술을 마시는 진정한 이유는 술 자체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며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정담에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봄날 따스한 햇빛 받으며 마시는 붉은 와인, 한 여름밤의 찬 맥주, 가을날에 즐기는 위스키 한잔, 겨울감기에 특효인 약간 데운 코냑들이 있어 나날의 피로를 씻고 새로운 날을 시작한다. 저녁 식사 전의 캄파리 오렌지, 술자리를 끝낼 때 마시는 브라드메리, 나보다 연배인 분들을 만날 때 즐기는 히게사키(태운 목꼬리를 넣고 데운 정종의 일종), 토론을 할때 주로 찾는 마티니도 나의 오랜 친구이다. 많이 마시지 않아도 기분이 유쾌하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인생의 낙인가. 맥주 주세울도 생각해 보시길 마지막으로 애주가로서 정부당국에 꼭 제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 '맥주 주세율을 현행 150퍼센트에서 50퍼센트 이하로 대폭 내려달라'는 것이다. 위스키의 주세도 작년 1월 150퍼센트에서 120퍼센트로 내린데 이어 내년 1월부터 다시 100퍼센트로 내리게 되어있다. 그런데 맥주의 세율이 위스키의 세율보다 더 높아서야 되겠는가. 특히 최근 물가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만약 맥주의 주세울을 50퍼센트로 인하하면 도매물가는 0.19퍼센트, 소비자물가는 1.12퍼센트의 인하효과가 있다고 한다. 보석 대형 승용차 골프채 등 고소득층이 즐기는 물품의 특별소비세 울이 20퍼센트인 반면 서민의 술로 자리잡은 맥주에 150퍼센트의 세율을 적용하는 것은 조세 형편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객은 술과 싸우지 않는다. 이영란/연극인 세계 어느나라건 특정종교를 제외한 종교제의나 축제현장에 술이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거국적인 행사건 마을단위, 또는 직장단위의 잔치건 또 개인의 일상 구석구석, 술은 항상 따라다닌다. 어쩌다 혼자있는 시간에도 술은 벗이 되어 곁에 있으니 술은 인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불만있는 직장동료와,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 또는 다정한 연인과, 아니면 비라도 추적추적 오는 날 울적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혼자 마시는 술, 한마디로 기분 좋아도 마시고 나빠도 마시고 기뻐도, 슬퍼도 마시는 것이 술이다. 모처럼 가진 제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왜 술을 마시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대답이 다양했다. "긴장감이 풀리고 자유로워진다. 일종의 건전한 유희수단이 아니다, 평정되는 기분을 느낀다. 사람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해주고 잘만 마시면 몸에도 좋아 약주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고 제법 정리된 대답을 하는 친구들이 있는 반면, "술마시면 용기가 생겨 평소에 못하던 사랑고백도 하고, 여자에게 키스도 할 수 있어 좋다"는 실속파들도 있었다. 또한 흠씬 취해서 집에 가는 길에 전봇대가 갑자기 살아서 내게 불쑥 다가오고, 아스팔트가 괴물처럼 벌떡 일어나 내 앞에 마주서고 하는 신비로운(?)경험을 한 친구들, 소위 '필름'이 끊겨 자신의 인생속에 잠적해 버린 몇 십분, 또는 몇 시간을 아쉬워하며 잃어버린 시간을 더듬어 보며 술자리에서의 술얘기는 그칠 줄울 몰랐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나는 술자리를 꽤 즐긴다. 솔직히 누굴 만나면 술마시며 얘기하는 일 외에 뭐가 더 있겠냐 싶게 술집을 자주 찾는 편이다. 연극이나 영화를 보고난 후에도 술 한잔하며 감상을 서로 나누고 그 작품에 대한 열띤 토론이 곁들인 뒤풀이없이 헤어지면 무척이나 서운하다. 주량은 그리 세지 못한 편이나 술을 즐기는 일이 잦다보니 아주 드물지만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고, 술이 나를 마셔버리는 경우가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때는 거의 관람료를 받아야 할 정도의 실감나는 공연현장을 펼치는데, 나의 주사 삼단계를 얘기해 보자면 열띤 어조로 격렬한 토론을 벌이는 1단계, 그 에너지가 가슴으로 내려가 오만 정이 다 발하여 주변사람들이 모두 다 이뻐 보이고 사랑스럽고, 형제 자매같고 그래서 모두를 용서할 수 있고 해서 아무나 껴안고 뽀뽀를 해대는 2단계 이후 3단계는, 누군가가 이름을 붙여준 대로 ''통곡의 벽' 단계인데, 가슴속에 고였던 정이 터져나오듯. 맺혔던 그 무엇들이 쏟아져 나오듯 끝없이 눈물을 흘려대는 말하기 약간 부끄러운 주접스런(?)단계로 발전된다. 꽤 지난 얘기자만 한 방송프로에 나가 예의 그 주사 삼단계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그후 어느 술집에서 대충 2단계쯤의 경지에 다다른 한 여자가 나에게 오더니 "어머머, 이영란씨죠. 정말 멋있었어요. 그 주사얘기하실때 말예요. 어쩜 저랑 그렇게 독같아요"하면서 우리 둘만이 이해하는 세계를 공유한 희열을 감추지 못하며 반가워하는 것이었다. 이후 다른 이들에게도 그 비슷한 얘기를 여러번 들었으니 내 주사 삼단계는 상당부분 공통된 요소가 있는 모양이라고 위로도 해 본다. 천상의 음식 '술' 하지만 주역 연구가인 초운 김승호선생의 말에 의하면 "술을 마시면 머리속의 신(생각)이 일으켜지는데 그것이 정(감정)으로 발한다." 한데 신을 드러내지 않고 정을 터뜨리지 않아야 몸에 좋다고 하니. 무조건 풀어내어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건강하다는 현대인의 상식과 상이한 이론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여러 동료들과 초운선생을 모시고 술자리를 함께 할 기회가 몇번 있었다. 그 때 들은 얘기를 여기 잠깐 옮겨볼까 한다. 술이란 천상의 음식으로 신선들 만이 마시던 것인데 다른 동물과 달리 신의 형상을 빌어 만들어진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귀히 여겨 하늘에서 술을 내려 인간들도 마시게 된 것이다. 죽, 술이란 곧 하늘의 뜻이라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술을 마실 때는 정중하고 소중하게 마셔야 한다. 술을 마심에 있어서 술은 천이요 잔은 지, 또한 술은 양이요, 잔은 음이라. 술을 따르는 사람은 두 손으로 정중하게 하늘의 뜻을 내리는 것이고, 받는 사람은 두 손으로 잔을 잡아 소중히 하늘의 뜻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술을 따르고 받는 것은 천지의 합일이요, 음영의 조화다, 술이 몸안에 들어와 생기는 발함은 하늘에서 비가 내려 대지를 적셔 만물이 생성하는 이치와 같다. 즉, 양이 움 아래로 스며 다시 양으로 결실을 맺는다는 이치이다. 위의 것이 아래로 내려와 다시 위로 향하는 방향성을 창출한다는 의미가 있으니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말을 듣고 이해해 주며 아랫사람은 그런 윗사람을 신뢰하고 공경하는 현장. 즉, 술자리는 메말랐던 상호간의 관계를 촉촉이 적셔 새로운 싹이 돋고 열매를 맺는 신성하고 풍요로운 자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행하는 술자리 풍속도를 살펴보면, 현실적인 위계질서를 그대로 반영하는 술자리의 규칙이나 간혹 스스로에 불안한 직장상사의 과도한 권위적인 행동 때문에 하늘의 뜻인 술을 마시는 자리가 아닌, 독을 마시는 자리가 아닌, 독을 마시는 자리인 경우도 종종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술잔을 부딪치거나 권하는 행위는 남녀불문하고 일생일대 자신의 큰뜻을 상대방과 진정으로 나누고 싶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술잔을 돌리는 행위는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 준다는 의미가 있으니 함부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후딱 비우고 으레 잔을 돌리다 보니 내 앞에 폭력처럼 밀어닥친 서너잔의 술이 반갑다기 보다는 부담스럽고, 안 비우면 분위기 깰 것 같아 무엇에 쫓기는 듯 들이키다 보면 위험수위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차라리 정이 넘쳐서 그런다고나 하자. 주변에 직장다니는 친구들(거의 남자)을 살살 달래서 다 털어놓게 해봤더니 별의별 주법이 있었다. 각양각색의 주법이 주는 묘미 주로 자동차회사의 경우 직진, 좌회전, 우회전, 좌00,우00 (모종의 내용이 있는 단어라 점잖은 지면인 관계로 00로 표시함), 명령대로 술잔이 도는데 마신 후 빈잔을 머리위에 얹어 다 마섰음을 증명하는 '잔털기(이때 재떨이는 절대로 씻어선 안된다,), 신발에 술담아 돌리기가 있는데 신발술의 경우 제일 윗사람이 자신의 신발에 담아 스스로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솔선수범한다는 점이 특이했다. 여기까지가 소주파라고 한다면 돈깨나 있어야 마셔보는 이름도 찬란한 '불꽃주'가 있다. 양주에 불을 붙여 파란 불꼿이 오르는 술을 단숨에 들이켜야 하는데 이때 재빨리 털어넣지 않으면 입술을 데고 만다니 스릴 만점이다. 또 잔을 입에 물고 손을 대지 않고 들이켜기, 이때 잔은 아주 얇은 와인용 글라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세게 물면 유리잔이 깨지므로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경우다. 그외, 큰컵 속에 양주잔을 넣어 그 속엔 양주를 채우고 큰컵 전체에는 맥주를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켠 후 반드시 잔을 흔들어 종소리를 내야 한다는 그 유명한 '폭탄주', 또 맥주잔, 양죽잔, 나무젓가락 둘, 마치 마술사가 공연을 하기 위해 구비해야 하는 도구들이 필요한 '묘기주'가 있는데, 이땐 취기와 함께 대단한 순발력이 요구된다, 이 묘기주에는 실패했을 경우 폭탄주를 연속 세 잔 마시고 성공할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집요함도 필수다. 그외 멀쩡한 맥주를 마구 흔들어 손으로 병입구를 막고 쏘아 대, 거품만을 내서 마시는 '거품주' 등 상상을 불허하는 행위들이 줄을 이으니, 주신을 맞아들이는 신성하고도 풍요로운 축제현장이어야 마땅할 술자리가 아이들도 아닌 어른들이 벌이는 잡기 오락실로 전락했다는 느낌이다. 여기에 비하면 나를 포함한 정을 못가누는 감성파들의 주사는 오히려, 신은 신인데 잡신에 들린 것쯤으로 생각되니 차라리 인간답지 않은가. 헌데 요즈음 3단계를 넘어 새로운 국면의 다소 폭력적인 4단계 조짐이 언뜻언뜻 드러나는 경우가 있어서 조심하는 터다. 눈물만 흘리던 자기연민의 소극적인 태도에서 외부의 부당함에 항거하는 물리적인 폭력으로의 변화라고 아무리 근사하게 표현을 해 보아도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말 앞에 반성할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연극보다, 영화보다, 책보다도 가까이 있는 술이기에 우리의 일상을 새롭게 하고 살찌워줄 건강한 술문화를 가꾸어 나가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볼때 초운선생의 술 책 '물고기는 물과 싸우지 않고 주객은 술과 사우지 않는다'가 나온것은 참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운문조로 쓰여진 내용의 각 문단이 반드시 '군자는... ,군자는'으로 시작하는데 꼭 '남자는... ,남자는... '하는 것만 같아 좀 불만스럽기는 하다. 술은 남자의 전유물만이 아닌 인간 모두에게 골고루 내리는 신의 뜻, 생성과 화합의 묘약이니까 말이다. 귀화인 눈에 비친 한국 술문화 김린/귀화인 사람이 살다보면 때로는 퍽 난감해지는 경우가 많다.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고, 어처구니 없어서 그렇기도 하겠고, 그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HITE칼럼 '술' 이야기의 원고 청탁을 받고 나는 몹시 당황했다. 주태백도, 주당도, 술꾼도 아닌 여자인 필자에게 술에 대한 철학이나 에피소드가 있기 만무하고 있다 하더라고 어디 소문내고 선전할 내용이겠는가. 그래도 지난 세월 한국에서 보고 들은 내용들을 조금이라도 언급함이 좋을 듯 하여 글을 써본다. 지난 20여년 한국에 살면서 술과 관련된 여러 상황을 보아 왔다. 그러면서 느낀 점 하나는 한국인은 왜 술을 마시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인이라 한다고 해서 필자가 옛날의 한국인을 알 리도 없고, 오늘날의 한국인이라 해고 모두를 의식적으로 관찰한 바도 없다. 정확히 말해 내가 경험하고 본 한국인에 한정된 상황일 것이고, 단지 이 한정된 조건하에서 개연성을 이야기 할 수 있을 뿐일 것이다. 그래 한국인은 왜 술을 마시는가? 이 질문을 필자에게 묻는다면 "취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대답이 한국인의 음주 이유에 대한 현답 일런지는 필자도 모른다. 단지 내게 그렇게 보여진다는 것이다. 결과중심적인 한국인 성격 내가 본 대부분의 한국인(주로 남성)은 술을 빨리 마신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고농도의 술도 단숨에 들이켠다. 이렇게 빨리 마시면 혈중 알콜농도가 갑자기 올라갈 것이고 곧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취한다는 목적달성이 쉽게 이루어 질 수 있나 보다. 흔히 한국인의 성격을 이야기 할 때 '한국인은 성격이 급하다'라고 표현하며 이 언급은 한국인 스스로도 인정하는 내용이다. 이 점은 결과를 빨리 얻기 위해 너무 서두르는, 결과 중심의 한국인적 사고를 약간 부정적으로 지적한 것 같다. 이런 한국인의 결과주의가 음주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래서 한국인은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것 같다. 그러므로 결과를 빨리 얻기 위해서는 과정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가 보다. 한국인이 술을 혼자서 마시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있으니 어울려 담소하면서 즐기는 과정이 더 즐거울 수도 있을 터인데 그 과정은 단축되고 목표달성을 위해 매진하는 한국인의 근면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리하여 마시고 또 마시고 이 밤이 다가도록 춤을 추면서 2차, 3차로 고성방가를 한다. 서양사람들도 술을 마신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술을 마신다. 그러나 천천히 은근히 마신다. 한국인이 음주를 취하는 결과 중심으로 한다면 서양인은 과정을 즐기기 위해 가능하면 천천히, 오랫동안, 서서히 취기가 오르게 마신다. 그러기에 자기가 좋아하는 몇 잔의 술이면 족하다. 그 몇 잔의 술의 음주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면서 과정을 음미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인은 '취하기 위해서'라는 결과를 얻고 나면 그 결과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비록 결과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결과를 얻은 양 술마신 티를 내야 한다. 평소에 얌전한 사람도 몇 잔 마시고 나면 전혀 딴 사람으로 변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만용인지 용기인지 주정과 고성방가도 서슴지 않는다. 대로에서 마주치는 꼴불견의 취객을 그래도 행인들은 너그럽게 봐준다. 서양에서라면 꼭 경찰서 유치장 가기 좋은 행동도 용인된다. 한국에선 '술김에', '취해서', '취중에' 한 언행은 법으로도 참작이 되는가 보다. 스스로가 만든 결과에 대한 책임을 관리할 수 없다면 한국인의 음주문화 어디엔가 고칠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취한 동료나 친구를 업기도 하고 매기도 하여 부축하면서 끝까지 도와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한국인의 아름다운 심성을 느끼기도 한다. 김린의 '술' 어드바이스 '취하기 위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독자를 위채 몇 가지 부탁을 하고 싶다. 특히 독자들이 사업상의 일로 혹은 사교상 서양인을 만난다면 다음을 유의해 주기 바란다. 첫째, 취한 듯이 보여서는 안된다. 만일 주정이라도 한다면 당신의 만남은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할 것이다. 한국인끼리의 주정은 응석으로 수용되자만 서양에서의 주정은 도덕적으로 죄악시된다. 누가 주정뱅이와 사업을 시작하거나 친교를 트겠는가? 둘째, 과정을 중시하기 바란다. 한국인은 빨리 취하게 마셔야 하지만 서양인은 혼자서 과정을 즐기면서 마신다. 파티에서도 건배는 하지만 마시기는 혼자서 마신다. 좋아하는 술도 따로 있다. 한국인처럼 내가 좋아하는 술이라고 마구 권해서는 안된다. 잔이라도 돌린다면 이건 보통 실례가 아니다. 그들에겐 그들의 잔으로 그들이 좋아하는 술을 그들의 공간에서 침입자의 방해 없이 즐기며 부담없이 마시게 해야 한다. 한국인이었다면 대단한 환대가 그들에겐 실례가 될 수 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대접하라. 그들은 Yes와 No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희망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탁하고 싶다. 노래를 권하지 말자. 한국인의 모임에는 노래가 있기 마련이다. 만일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참석자 누구나가 긴장하기 일쑤다. 술잔이 몇 번 돌면 상 언저리에 흠이 나도록 젓가락을 두드려야 하며, 음치라도 굳이 불러 세워 한 곡을 하게 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런 버릇을 서양인에게 요구해서는 안된다. 서양에는 오페라 가수도 많지만 대체적으로 합창에는 강하나 독창에는 어렵다. 한 번 권해서 사양하면 다신 권하지 않아야 한다. 굳이 상대방의 약점을 즐기려 하는 것은 악취미일 뿐이며 상대방과의 교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결국은 속담처럼 '사람이 술을 먹고 술이 사람을 먹는다'라는 지경에 이르지 않고 좋은 세상을 이루자는 바램일 뿐이다. '술' 풀이 진윤정/대학생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모두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다. 이 정도라는 것이 지켜지는 한은 모든 것이 순조롭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의 절도와 교양은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지켜야 하는 선을 넘지 않으면 얼굴 붉히는 일이 적을 것이요,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이롭게 될 수 있다. 술도 이와 같다. 탈무드에도 술에 대한 이런 내용이 설려 있는데 한 두 잔의 술이 주는 정서적인 변화는 경계심을 낮추고, 긴장을 이완시키는데 바람직할 수 있다. 특히 사교에 있어 술좌석이 꼭 마련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술의 정도는 잔이 비워지는 숫자에 비례해 깨어지기 쉬운데, 탈무드는 이래서 술을 악마의 선물이라 말한다. "인간이 포도밭에서 씨앗을 심을 때 악마가 거들기를 청했다. 악마는 사자, 돼지, 원숭이, 양을 끌고 와, 그 짐승들을 죽이고 피를 비료로 뿌려 주었다. 이후 포도주가 만들어졌는데,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때는 양처럼 온순하고 조금 더 마시면 사자처럼 강해지고, 그 이상 더 마시면 돼지처럼 더럽게 된다. 여기에서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춤추고 노래 부르게 된다." 술속의 알코올에 의한 뇌기능 저하는 긴장이완의 장점이 있는 반면 이완된 정신을 스스로 조절하기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정도를 넘어서는 음주 습관은 나쁜 것이다. 한 잔으로 시작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시는 우리의 잘못된 음주관은 지양되어야 한다. 사양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강요를 하고, 서로가 정도를 넘게 마시도록 부추기는 모양을 늘 접하게 된다. 질서를 지켜야 순조롭고 안전하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질서라는 정도를 술에서도 지켜야 . 나와 자리를 같이한 타인에 대한 배려의 기본은 정도를 지키는 것이다. 술이 없었다면 인간이 단명하지 않았을까? 특히, 정치나 경제 등 사회생활에 계속 부딪쳐야 할 사람들에게 술은 얼마나 큰 의미가 부여되는지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사교할 때 필요하고, 화날 때 풀게 하는 친구이며, 기쁠 때도 빠지지 않는다. 술의 이런 작용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다. 가전체 문학으로 술을 의인화한 작품인 '국수전' , '국선생전' 등은 술의 묘한 역할을 그려내고 있다. 주제는 한결같이 술에 대한 '정도'를 지켜야 함을 강조한다. '국수전'이 요사하고 아부하는 접객들을 꾸짖고 방탕한 군주를 풍자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면, '국선생전'은 미천한 몸으로 정실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등용되었고, 총애가 지나쳐서 잘못을 저질렀지만 물러난 후 반성하고 근신할줄아는 인간상을 그렸다. 즉, 국난을 당해서 백의종군까지 하는 위국충절의 대표적 인간상을 등장시켜 사회적 교훈을 강조하였다. 적당한 술은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 혈액 순환을 돕고, 스트레스 해소용으로의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알콜중독이 만연한다는 러시아, 독일 등의 도시 및 국가가 절세를 부르긴 해도 억제책은 쓰지 않는 이유, 아니 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도 끼치나 그 해를 눈감아 줄 수 있을만큼 사람들에게 이득을 주고 있는 한 술은 사람곁에 남아있게 될 것이다. 술은 향수와 같다. 은근히 유혹해서 사로잡는 매력을 지녔다. 다양한 종류로 유혹하고, 그때그때 분위기에 맞게 대접하는 지혜까지 있다. 단순한 음료일 수도 있으나 분명 어떤 묘한 의미를 지녔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술을 폭넓은 사교의 장에 핵으로 활용했다니 참으로 놀랍다. 월별로 특색을 부여하여, 행사를 열고, 행사 성격에 맞는 여러 가지 술을 만들었다. 서양에서도 이런 행사는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그들은 행사에 맞는 술이 아니라, 몇 가지 종류의 술과 모임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와 다르다. '풍류'라는 차이, 술을 즐겨 '유희'의 향료로 썼다는 특색이 우리에게는 있었으나 이어져 계승되지 못했음이 너무 아쉽다. 간혹 신문 방송매체 등을 통해 예전의 전통주들이 하나 둘씩 되살아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는 하나 너무 미약하다. 또 개인, 소규모 단체들의 움직임이 있는데, 이를 정책차원에서 반드시 육성시켜야 할 것이다. 지구촌 시대의 경제 전쟁에서는 '우리 고유의 것'만이 방패요, 무기가 될 수 있다. 술 낚시로 낚은 벼슬 혹 떼려다 혹 붙인 미국 금주법 자유, 풍요, 기회의 나라로 상징되는 미국이 금세기에 국법으로 술을 금한 적이 있었다. 1920년부터 13년간 지속된 금주법 시대를 미국인들은 '숭고한 실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물론 처음에는 진지하게 쓰여졌지만 뒤에는 허황된 발상이나 시대착오적인 일에 대한 풍자나 비꼬는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다. 금주법은 알콜중독남편에게 시달리는 한 주부의 탄원이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 미국을 움직여 1919년 10월 헌법수정안이 연방의회를 통과했고, 이듬해 1월부터 알코올 음료의 양조, 판매, 수출입이 전면 금지되었다. 이 숭고한 실험의 목표는 술을 없애 더욱 도덕적이며 밝고 건강한 사회를 구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엉뚱하게 나타났다. 마치 레지스탕스처럼 술없는 사회의 이면에는 비합법적 조직이 생겨났다. 연방경찰이 갱 두목인 알 카포테를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새로 조직화되니 마피아는 지금까지도 골칫거리다. 술을 금지하면서 범죄, 폭력, 매춘 등이 창궐하게 된 현상을 사회비평가들은 "영광의 열매에 도취된 자들이 금단의 열매를 만드는 오만"이라고 해석하였다. 금주법은 1933년 폐지됐지만 실제로 1929년 대공황으로 효력이 상실됐다. 전세계가 불황에 빠지면서 술을 마시고 못마시는건 무의미했다. 여관이름에서 유래된 화이트호스 화이트호스(White Horse)는 화이트호스라는 여관 이름에서 유래된 위스키다. 이 여관은 1742년 설립되어 에딘버러 시민의 사교장으로서 명소가 되었고, 에딘버러에서 영국으로 가는 마차도 이 여관 앞에서 출발하였다. 근처에 이름 있는 위스키 판매장에서 블랜디드 위스키를 처음으로 내놓으면서 이 여관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이 위스키는 이 여관 전용 위스키가 되었으며, 화이트호스는 순수함, 높은 이상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이 위스키의 인기에 큰 영향을 끼쳐서 급속히 성장하였다. 전통적으로 아일랜드 몰트를 사용하여 블렌딩하였으나, 요즈음은 아일랜드 몰트를 사용하여 부드러운 맛을 내고 있다. 한국 술 속담 1. 모주장사 열바가지 두르듯: 얼마 되지 않으나, 하나하나 겉으로만 많은체 하는 것 2. 술과 안주를 보면 맹세를 잊는다: 술 즐기는 사람은 늘 술이 몸에 해롭다 하여 끊으려고 하나 보기만 하면 안 먹고 못 견딘다는 뜻 3. 술덤벙 물덤벙:모든 일을 무턱대고 경거망동함을 이름 4. 술 냄새나는 주전자: 상식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허망한 일을 바랄 때 이르는 말 5. 술은 괼 때 걸러야 한다: 무슨 일을 함에 있어 최적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때 해야한다는 뜻 6. 술은 초물에 취하고 사람은 후물에 취한다: 술은 처음 마실 때부터 취하나, 사람은 한참 사귀고 나서야 그 사람의 장점도 발견할 수 있다는 뜻 7. 술익자 체장수 온다: 우연히 잘 맞아 감을 말한다. 술 낚시로 낚은 벼슬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술낚시를 해서 감투를 낚은 일화가 이채롭다. 연암은 가난에 쪼들려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그의 아내는 손님이나 와야 겨우 탁주 두잔을 내놓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연암은 그럴듯한 사람만 보면 으레 손님으로 꾸며 집으로 데려가 술을 마시는 미끼로 삼았다. 하루는 자기집 앞을 지나는 사인교를 보고 무작정 가로막고 "누추한 집이나마 저의 집이 바로 여기올시다." "나는 지금 입직하는 길이라 지체할 수 없고." "홍 임금을 모시는 분이라 도도하군.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가라는데 그렇게 마다할 것까지 없잖소." 연암은 사인교를 탄 승지에게 큰 목소리를 쳤다. 승지는 마지못해 연암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손님이 오셨으니 술상을 내오너라." 곧 탁주잔과 김치 안주가 나왔다. 연암은 목타는 듯 한 잔을 비우고 손님의 잔까지 마셔 버렸다. 승지는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영감, 오늘은 영감이 내 술낚시에 걸려 들었소 하하." "도대체 당신은 뉘시오. 그리고 술낚시는 뭣이요?" 연암은 그제서야 술낚시 내력을 밝혔다. 그날밤 이승지는 정조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다. 선비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말하는 승지에게 정조는 "그 사람은 분명 박지원이다. 제 재주를 믿고 방약무인이 지나쳐 벼슬을 안주었는데 그다지도 궁하다니 딱하군." 하며 초시를 시키고 1년내에 안의 현감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주도와 주례 소학에는 어른을 모시고 술을 마실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기가 놓인 곳에 가서 절하고 술을 받는다. 윗사람이 말리면 비로소 제자리에 돌아가 술을 마시게 되지만 윗사람이 술잔을 들어서 마시지 않으면 젊은이는 감히 먼저 마시지 못했다. 윗어른이 마시고 난 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랫사람의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윗사람을 모시고 술을 마실 때에는 특히 행동을 삼가하는데, 먼저 윗사람에게 술잔을 올리고 어른이 술잔을 주게 되면 반드시 두 손으로 받아서 어른이 마신 뒤에 돌아앉거나 상체를 뒤로 돌리고 마신다고 기록되었다. 술잔을 윗어른께 드리고 술을 따를 때 도포의 도련이 음식믈에 닿을까 보아서 왼손으로 옷을 쥐고 오른손으로 따르는 풍속이 있으니, 이 예법은 요즘 양복을 입고도 오른팔 아래대고 술을 따르는 풍습으로 남았다. 남에게 술을 따를 때는 술잔에 가득 부어야 하며 마지막 술이 술잔에 가득하 때는 술받는 사람이 아들을 낳게 된다고 하는 말을 낳기도 하였다. '술은 차야 맛이다'라고 할 때는 술잔에 가득 차야 한다는 뜻과 술의 온도가 차가워야 한다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규합총서'에 '술 먹기는 겨울같이 하라.' 한 것도 술은 찬 것이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세시풍속에도 정월대보름날 차가운 합주 한잔을 마시면 일년 내낸 기쁜 소식만 듣고 노인은 귀가 밝아진다 하여 '귀밝이술'을 마시는 풍속이 있다.(자료: 조선맥주,1995.3) 한국의 주선10걸 고금을 통틀어 각계 인사들이 추천한 주선은 모두 140명,두주불사의 주량과 풍류가 특출한 당대의 호걸들을 망라한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최고의 주선으로 황진이가 선정됐다. 낙주종생의 기라성 같은 대장부들을 젖히고 가장 많은 17명의 인사들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 3절이라 불리는 그녀는 여성으로서 일종의 당연직처럼 추천을 받은 셈이다(장덕순). "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란 시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뛰어난 시서음률과 술로 당대의 문인, 석유들에게 높이 샀다는 점에서 인정하였다(김정옥,김종길,이어영,주종 등), 말하자면 주선 중의 주선이자 '한국적 낭만파의 거장'(최순호)으로 떠올려진 셈이다. 2위는 술과 시와 자기 이상에 취해 살다간 수주 변영로(변영노)가 차지했다.(김용성, 신우식, 이규동 등). 두주불사의 기행을 담은 <주정(주정) 40연>을 보면 그는 이미 대여섯 살 때 술독에 기어올라가 술을 품쳐 마신 천부적인 모주꾼이다. 또 이 수필집에서 그는 성대 뒷산에서 오상순 이관구 염상섭 등과 함께 술에 취해 벌거벗고 소를 탄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런 그를 가리켜 '타이틀매치다운 타이틀매치를 위해 살다간 주성'으로 묘사하기도(유영종)한다. 시인 조지훈을 두고 '신출귀몰의 주선' 또는 '행동형 주걸'이라고 한다(김용권,김진).통금은 안중에도 없고 야밤에 주붕의 집을 습격, 대작하다가 새벽에 귀가하기가 예사였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생생히 기억한다 (백인호,이광동). 그는 밤새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통음을 해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떠돌며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노래한 시인 김삿갓은 풍류가 넘치는 주선이다. (김경, 허완구, 한만년 등) 장원급제까지 했으나 자신이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선천 방어사의 손자임을 뒤늦게 알고 일생을 방랑하며 술과 시로보냈다. 동가식 서가숙하며 시를 지어주고 술을 얻어마셨다는 '작시걸주' 등 많은 시를 남겼다. 김시습도 한 시대를 풍미한 주선이다(이규태). 그는 당대의 비리를 닥치는대로 조롱하며 중이 되어 산천을 누볐다. 당시의 영의정 정창손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쁜 놈, 영상이고 뭐고 집어치워라"하고 일갈했을 만큼 세상과 담을 쌓으며 한평생을 방랑으로 보냈다. 백호 임제는 우리나라의 주선 문장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황진이 묘 앞을 지나다가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의 시조는 그의 호방한 기질을 잘 설명해 준다. 일생을 술로 벗삼으며 봉건적인 권위에 저항하는 가운데 시문으로써 인간미가 돋보이는 '백호집'을 후세에 남겼다. 소설가 김동리도 10걸에 속했다. 네 살 때부터 술을 입에 댄 타고난 애주가로 알려진 그는 술이라면 청탁 불문의 주량 제일주의, 그러면서도 끝까지 주석을 이끄는 대주가로 명성을 얻었다(조경희 등). 신출귀몰의 의적으로 관가를 닥치는대로 부수고 재물을 털면서도 유유히 한양에 나다나 술을 마셔댄 임꺽정을 두고 '심장에 털난 주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백정 출신의 서민이던 그는 조선조 명종 10년(1555년)에 도둑의 우두머리가 되어, 12년간 황해도 일원에서 간담을 서늘하게 하면 의적으로 종횡무진 누볐다. 대원군은 왕권을 손아귀에 쥐기 전 막강한 세도가들을 의식, 철저히 파락호로 위장해 술로 야망을 불태운 술의 영웅이다(최일남 등). 세도가들의 잔칫집이나 시회에 나타나서 술을 얻어 먹고 대감의 품계를 가지고 여염집 상가를 버젓이 드나들었다. 때론 시정의 잡배들과 어울려 대작을 하는가 하면, 투전판에까지 끼어들기도 했다. 술값이 떨어지면 난초 그림을 팔아 충당하면서 그는 술독에 파묻혀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세도가들의 정보를 입수했다. 후일 야망을 달성한 뒤에는 파락호 시절의 주붕인 심복들을 중용해 술과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주선이다. 이 밖에도 원효대사, 연산군과 술의 신사로 일컬어지던 마해송, 술맛을 가장 잘 아는 언론인이라 자칭하던 심연섭, 동대문과 종로를 오가며 50사발의 막걸리를 마신 일화를 남긴 박종화는 각기 5명씩의 추천을 받아 나란히 10위에 오른 주선이다. 주선의 추천 기준은 풍류와 품위, 주량이 뛰어나고 낙주종생(역사적 인물의 경우)의 일생을 마친 인믈들로 국한하였다. 술의 이해 술과 문화 술은 지역이나 민족에 따라 각기 다른 기원을 갖고 있다. 주로 기후나 환경에 따른 자연발생적 기원을 갖거나 그 지방의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적 인물이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 역사에 따라 다양한 문화권의 특색과 역사, 정치, 경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렇듯 다른 역사와 기원을 갖는 술의 문화이지만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 그것은 술을 향유한 모든 민족에게 '술'이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끼리의 일체화를 위한 매개체의 역할을 하여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술은 대단히 조심스럽고 신성한 음식이었으며 술을 즐김에 있어서도 때와 장소를 가려왔던 것이다. 또 민족과 지역마다 술을 마시는 풍속과 절차, 예의 등이 다양하고 독창적이어서 조직의 결속과 원시종합예술의 주요한 터전이 되어 왔으므로 술의 문화는 문화전체에서 작지만 큰 단면으로 부각되곤 하였다. 우리나라가 지녀온 술의 문화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 보면 술의 문화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는 극히 적다. 또 실지 전통적 술의 문화와 우리가 현재 즐기고 있는 술의 양식을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국적 없이 흥청거리는 유흥가의 불빛과 퇴폐문화는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이 땅에서 범람하고 있다. 옛 풍류와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근자의 향락문화의 그 근본 원인으로 외세 침탈로 인한 문화의 혼용과 문화적 자존을 지키지 않은 채 수용된 많은 서구의 문명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주체인 문화 향유자의 의식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문제의식 없이 버려둔 우리 술 문화를 뒤돌아보고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함이 마땅하다. 우리 술 역사와 그 예의 등을 살펴보는 것이 바른 술문화를 위한 전제 조건이 될 것이며, 옳은 자세일 것이다. 그런 전제하에서 술은 진정한 풍류가 될 것이며, 건전한 주풍류 문화만이 휴식과 재창조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인, 인인 을 융합시키는 접점 예로부터 술의 기원이 제천의식에 있었던 것을 보면, 술은 하늘에 바치고 신과 조상에게 바치며 공동체의 가무에 쓰였던 음식이다. 때문에 술은 음식 중 유일하게 절을 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우리 신화에 얽힌 술 이야기는 단군신화에서 처음 볼 수 있다. 단군께서 농사법을 가르치고 가을에 햇곡식과 술 등으로 제를 올렸으며, 그 술을 신농주라 일컬었다 한다. 이것이 우리 막걸리와 관련이 있는 듯 한데 후한서 '동이전'을 보면 무천의 기록이 있고 마한과 변한의 가란가무음주의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술의 가장 원시적인 효용과 그 공통점을 알 수 있다. 제천의식에 있어 술을 신께 바치고 그 모인 사람이 함께 술을 나눈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술은 신과 인간의 융합, 인간과 인간의 융합을 기원하는 수직적, 수평적 결연의 주술매체이기 때문이다. 이런한 이유로 기독교에서는 신과 인간의 수직관계에서 빵과 포도주를 매개로 하였고, 다신교에서는 수호신께 재물과 제주를 드렸으며, 동양에서도 신과 조상께 술을 바치고 기복을 하여왔던 것이다. 신과 교통할 수 있고 신에 접할 수 있는 신인융합의 접합선으로 술을 이해한다면 종교에 있어 술이 필수 불가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한가지 술의 주요한 속성은 수평적인 관계로 사람과 사람의 융합이다. 교재나 일체감 형성을 위한 것으로 술만한 것이 있을까! 제사가 끝나고 또 결혼식이 끝나고 동네사람들이 함께 술을 나누고 집안의 친지끼리, 소중한 지우들과 술을 마시며 정을 나누는 것도 술만이 지닌 묘미일 것이다. 술의 일상성과 비일상성 고대의 술은 신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결합, 맹의 등 신성한 주력을 부리는 매체로서 그런 제례가 필요한 때에만 마시던 음식이다. 다시 말해 술은 본래 특정 의식이나 행사와 결합된 것으로 비일상의 범부에 속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술은 비일상의 특정한 날과 유명의 신과 인간이 만나는 종교적 의례, 조상과 만나는 의례, 사람과 사람이 부부로서 일체화하는 의례 등 예식이 있는 날에 마시는 신성한 음료였기 때문이다. 비일상적인 성스러운 날에만 마시던 술을 일상적인 날에도 마시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 한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출출한 기분으로 한잔하는 그런 일상적인 음주 풍토는 외부에서 유입된 문화가 혼합되어 발생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우리는 비일상성의 심리가 잔존되어 있는지 술을 마심에 있어 항상 핑계와 명분을 달고 있다. 친구 부모님 상을 당했다. 몇 년만에 친구를 만났다. 이사를 했다 등, 비가 오니까 한 잔, 달이 밝으니 한 잔, 좋은 사람과 한 잔, 혼자 있으니 한 잔이라는 핑계아닌 핑계도 많다. 그러므로 술마시는 풍속이 난해하여진 것은 비일상의 술이 일상화된 탓도 있을 것이다. 결국 핑계를 대다보니 날마다 마시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술과 여자와의 깊은 인연 고대로 소급해 보면 술이란 신령세계와 인간세계를 중개하는 사제, 무당이 만들고 마셔왔다. 특히 여사제가 그 일을 담당하여 왔는데 그 원류는 여사제가 쌀을 씹어 술을 빚었던 원시 술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여하튼 그런 유래로 우리 조상들도 술을 빚는 일은 그 가정 관리인인 주부에게 권한을 일임하여 왔다. 첫 술맛을 보는 것도 주부의 권한이며, 술독에서 제사 술을 퍼낼 때는 반드시 주부가 퍼내야 한다는 것이 그런 맥락이다. 옛 부녀자들은 술을 빚을때 제삿날을 맞추어 왔고, 매달마다 술 빚는 길흉의 날이 정해져 있어, 옛 부녀자들은 시집가기 전에 이 술 빚는 길흉간지를 외워야만 했으며 여러가지 금기를 지켜야 했다. 그래서 그 집의 술맛은 여주인의 솜씨와 그 집안의 분위기가 우러나는 것으로 술맛이 시거나 변해 있으면 불길한 징조로 알았다. 이러한 연유로 술과 여자는 일찍부터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져 왔는데 이 밀접한 관계가 와전된 것은 우리의 주류문화를 흐려놓은 일제의 침략에서 기인한다. 원래 우리 음주문화에서 여인은 술을 빚는 신성한 작업을 하는 담당자였으며, 술을 따르거나 술심부름은 남자가 하여 왔다. 또 음주문화란 고상하고 품격있는 풍류였기에 자연을 벗하고 기생을 가까이 하여도, 문예와 가무에 능한 기생의 연기를 관람하여 문예와 인생을 논하고 풍류를 즐겨왔던 것이다. 일반의 속된 관념으로 주색잡기는 한데 뭉뚱그려져 퇴락의 대명사로 불리우지만 역사를 더듬어 볼 때 우리 전통과는 거리가 먼일이다. TV에서 보여지는 기생이 술을 따르고 서로 희롱하는 장면은 사실이 전도된 여성관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기생은 연예인으로 합석하여 술을 따르는 작부가 아니다. 술을 따르되 정분이 난 특정인이 아니면 자리하지 않았고, 조선 후기 여자가 합석하는 색주가가 등장하기는 하였지만 그리 난잡한 술문화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옆에 앉아 술을 따르는 작부제도는 일본 침략의 여파로 볼 수 있다. 점령국에 대한 횡포에서 기인한 한심한 외래 유신이 아닐 수 없다. 이 오욕의 습속을 이어받아 누이가 될 수도 있는 같은 겨레의 여인을 술자리에 두고 희롱하는 현대인에 비하면 점령국에서 식민지의 아녀자를 옆에 두고 술을 마셨던 일본인들은 그래도 명분이 있다. 무성하게 늘어만 가는 요정, 룸싸롱등 많은 퇴폐업소들은 올바른 술의 문화를 위해 일소되어야 한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주도 예로부터 술을 즐긴 우리 민족 일본 '고사기'란 책을 보면 응신왕(AD.270 부터 312)때 백제의 인번이란 사람이 새로운 방법으로 좋은 술을 빚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그를 주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중국의 당나라 풍류객들 간에도 신라주가 유명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자랑할 만한 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술은 제각기 그 나라의 풍토와 민속을 담고 있다. 술은 종류가 다를지언정 어느 술이고 주성분은 주정이다. 주정의 '정'이 마음 정자인 것처럼 영어, 불어, 독어에서도 주정을 표현하는 말이 모두 정신이란 말로 쓰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술은 사람에게 신비로운 존재 였으므로 그렇게 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여진다. 술 만큼 계급이나 문화의 높고 낮음에 영향을 받지 않고 깊은 관계를 맺어 온 것도 없는데 그 매개체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주정이었던 것이다. 다정한 친구와 만나 화포를 푸는 데도 한 잔, 일이 성사돠었으니 한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한 잔, 언짢은 일이 있으니 한 잔, 기뻐서도 한 잔, 인생에 있어 어느 때라도 술을 마시는 이유를 이현령비현령식으로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인의 음주를 기록한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위지동이전이다. 부여에는 영고, 고구려에는 동맹, 예에는 무천등 부락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에는 밤낮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5월에 파종을 마치면서 신에게 제사하는데 군중이 모여 노래 부르고, 춤추고, 술마시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놀았다. 춤출땐 수십 인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면서 땅을 디디고 손말을 낮췄다 높였다 하여 서로 장단을 맞추되 탁무와 비슷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0월 농가사 끝나면 또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그루 농사를 짓는 도중에는 실제로 농사 짓는 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술을 대접하는 풍속이 보편화되었다. 이것을 호미씻이, 술멕이 놀이, 머슴날, 농부의 날이라 하여 농군들은 농악을 치면서 놀게 하고 술과 음식을 내어 흥겹게 대접하였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술을 삼가라고 팔도에 공포 차례 백종 추석 시제 등 각종 세시풍속에도 술은 꼭 끼는 음식이었다. 세시풍속 외에 술을 마시는 대표적인 경우는 회갑연과 관혼상제 때이다. 혼례에서는 기러기를 바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전안례라고도 하는데 신랑 신부의 상견례가 있고 합근혹은 합환의 술잔을 각각 마시게 함으로써 의식이 끝나게 되어 있었다. 조롱박을 돌로 쪼개어 만든 합근박에다 신랑 신부가 서로 입을 댐으로써 일심동체를 서약하였던 것이다. '고려도경'에 보면 고려에서는 주례를 매우 중하게 여겼다고 소개되고 있다. 온 고을의 유생이 모여 향약을 읽고 술을 마시면 잔치하는 예절로 향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술마시는데 정도가 없어서 많이 권하는 것을 예로 알았다고 한다. 술을 잘못 마시면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기게 마련이다. 우리의 역사에도 그러한 사례가 많은데 세종대왕은 술을 삼가라는 '계주문'을 팔도에 공포하였다. 그중에 보면 신라는 포석정에서 망하고 백제는 낙화암에서 말했다는 글귀가 있다. 과음에서 오는 폐단을 가져오게 한 음주법이 대포잔과 대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잔의 술을 나누어 마시는 대포는 우리 나라에서 일반화되었다. 관아에선 새 관원이 부임해오거나 회의가 끝나면 이질요소를 없애고 합심하는 뜻에서 대포잔으로 술을 나누어 마시는 관습이 있었다. 또 조직력과 결속력이 강했던 등집 봇짐장수인 보부상들이 같은 보부상을 말할때는 대포지교라고 했다. 대포로 술을 나누어 마신 사이는 이미 그러한 보부상 사이에 계승되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 나라 사람들이 술잔을 주고받는 소위 대작문화를 지니게 된 것도 이 한잔 술을 나누어 마시는 풍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 유럽에선 혼자 독작 중국이나 유럽 각국은 술을 혼자 마시는 독작이 원형으로 되어 갔다. 연회석에서 여러 사람이 대작을 한다 해도 건배 정도지 수를 바꾸는 일은 없다. 소량의 술은 수줍은 사람에게 입을 열어 주며 성적인 반응도 일으킨다. 음주는 친애감과 친우애를 확실히 해 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술을 마실때 자기의식적이 덜 되며, 보다 덜 심각해지고, 보다 내향적이 덜 되며, 심적 평형과 사교성을 주는 이른바 인간적 충동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술을 가리켜 백약지장이라고 하고, 패가망신지근원이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확실히 술은 사람에게 극과 극의 양면성을 갖게 한다. 술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다른 것이 아니라 술을 다루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술을 마셔서 자연과 인간을 보다 아름답게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술이 갖는 장점을 이용할 줄 하는 사람이다. 술의 양면성 술을 마셔서 남의 단점, 결점을 너그럽게 보아줄 수 있는 사람이나, 술을 마셔서 보다 더 정다운 마음, 보다 진실된 마음이 될 수 있는 사람이면 술을 마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다. 술을 마셔서 마음이 호탕해지고 기지의 샘이 넘쳐 흐르게 되고, 인간적인 훈훈함을 풍기게 될 수 있는 사람이면 술을 마실 수 있는 자격이 있으며 백약지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술의 힘을 빌어 못할 소리를 하던가, 대성통곡을 하던가, 남의 욕을 하던가, 이웃과 시비를 벌이던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던가, 폭주를 해서 건강을 해치기도 하므로 백독지원으로 혹평을 받게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취객이 많으며 추잡한 언동을 하는 사람이 흔한데, 구한말 이후 망국의 설움을 달래고 항일의 울분을 술로 풀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잘못된 풍습이다. 달 밝은 저녁, 꽃피는 저녁, 비오는 밤, 눈 내리는 밤, 친구와 더불어 한 잔 술을 통해 정회를 나눈다고 할 때 술이야말로 가장 값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술은 기쁨을 더욱 기쁘게 함으로써 삶의 충실함을 북돋우기도 하고, 슬픔을 확대한 다음 그 슬픔을 객관화하게 함으로써 위안을 주기도 한다. 기쁨과 즐거움, 위안을 얻기 위해 마시는 술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술을 모독하는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술이 인간을 보다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술이야말로 은총이며 하늘이 내린 선물인 것이다. 모름지기 술을 백약지장으로 하는 길을 찾아서 마시는 것이 올바른 주도가 될 것이다.(자료 : 유태종, '월간 식생활' 1988.2) 술도 신이 만들었다 술과 종교, 우리나라와 같이 한 나라에 여러 개의 종교가 있는 국가는 각기 금기 사항이 달라 문제점이 많을 수가 있지만 다행이도 우리나라는 유교라는 전통아래 종교들이 발달하여 종교간의 분쟁으로 일어난 사건은 거의 없다. 세계 3대 종교(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중의 하나인 기독교는 세계 어느 곳이든 전파되어 있고 많은 신자들이 있다. 종교개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는 루터와 칼빈으로 인하여 중세의 기존질서에 붕괴를 가져왔다. 즉, 중세에 하나였던 카톨릭이 종교개혁으로 분열되고 프로테스탄티즘 내에서도 끊임없는 분파운동이 전개되었다. 1세기를 걸친 종교전쟁을 통해 사람들은 종교적 관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중세와는 달리 정치문제나 경제문제가 앞서게 되어 종교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라 불리는 루터파, 캘비니즘, 영국 성공회는 각기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들 셋은 새로운 윤리관에 입각한 인간의 양심과 자유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지도 100년이 넘었다. 개신교는 진보와 보수 두파로 분파현상을 보이는데 우리나라 전통 때문인지 보수파 개신교가 종교 발전을 주도해 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종교와 술, 술과 예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우리나라 개신교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엄격히 술을 금하고 있다. 성경의 해석 차이는 있겠으나 이 점에서만은 천주교와 상이한 점이라 하겠다. 개신교의 보수파 학자들은 술을 금하는 이유를 다음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는 공의가 파괴되고(잠언 31장 5절), 둘째는 도덕이 파괴되고(잠언 23장 23절), 셋째는 심령이 파괴되고(고린도 전서 6장 10절), 넷째는 경제적 손실이 오며(잠언 21장 17절), 다섯째는가정불화의 원인이 되며(창세기 9장 20절), 결국 이같은 사태가 벌어지면 국가가 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개신교의 금주론의 주가 되는 내용은 술이 여러모로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금한다는 것이다. 술에 대한 신자의 취할 태도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취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말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자 같은 것이며 돛대 위에 누운자 같은 것이며 제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아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상하게 하여도 네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이 외에도 잠언 23장의 '보지도 말라' 다니엘 1장의 '마시지도 말라', 에베소서 5장의 '취하지 말라'는 술에 대한 신자의 도리를 말해 주고 있다. 종교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성경 구절의 말씀은 어떠한 법률보다도 강한 구속력을 나타낸다. 신과 나와의 사랑이 확인만 되면 어떠한 것에도 순종이 가능한 것이 종교라는 점이다. 술에 관한 성경구절을 찾아보면,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도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타락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는 술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렇게 성경상으로는 술을 절대 금하고 있지만 자유스런 진보주의 교파들은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보이고 있다. 술을 마시던 담배를 피우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마음이지 겉 형식이 아니라는 진보파의 견해이다. 진보파의 융통성 있는 금주가 합당한지는 확실히 명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 각 교파의 신자와 목회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기독교에서 유일하게 아무 말이 없는 술이 있다면 포도주라 하겠다. 포도주는 술 자체 보다 나타내는 상징성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흘린 예수의 피가 포도주와 비교되어 최후의 만찬시 포도주를 들고 축수를 하고부터는 그 상징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큰 행사마다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이때 최후의 만찬 당시를 재현하면서 포도주를 나눠 마시게 된다. 구약과 신약 성서에 나타나는 포도주의 원어는 수십 종이나 되는데 대부분 번역하면 새술, 술, 새포도주, 포도주 등의 뜻이다. 성서에 최초로 나타난 포도즙이 와인이라는 것이다. 노아는 포도밭을 경작하여 포도주를 만들었다. 그것을 마시고는 아담과 같이 나체가 되었으나 그것조차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술은 사람의 정기를 마비시켜서 경건한 노인 노아까지도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 되게 했다. 그래서 인류에게 술에 대한 금명을 내렸는데 취주의 폐해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노아 때의 최초의 술인 와인은 포도의 즙으로 제조되었는데, 술틀 가운데서 포도를 밟아 즙을 낸 것을 말하며 이것을 미숙포도주라 했다. 미숙포도주는 저장 중에 발효되고 이것을 많이 마시면 취기가 돌았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포도주는 성찬식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될 필수품이 되었다. 술은 때때로 물로 약하게 하여 사용되었는데 성찬식의 포도주에 물을 타는 것은 초대교회의 습관이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인 물과 그리스도 사이의 일치를 추구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가슴 위로 흐르는 피가 물로도 암시되고 있다. 각 교파의 교리 해석 차이와 교회의 조직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근본적인 입장은 유일신과 그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믿고 따른다는 점이다. 믿음에 따라 각 교파는 교회의 특색있는 규례를 지키고 사회활동에 참여해 왔다. 기독교에서 가능한 금하고 있는 음주도 따지고 보면 교파간의 견해와 신도들의 의지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다. 교리상 술을 금하고 있는 것도 술을 무조건 못마시게 하는 강제성이라기 보다는 인류에게 미치는 술의 폐해를 느끼라는 경고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원래의 본뜻과 상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술의 음주 찬반 여부가 나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잘못된 음주 행태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선교사들이 복음 전파를 위해 처음 이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우리 국토 자체는 술에 찌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한 방법이 금주였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 옛날과 같이 무조건적으로 술을 금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자체를 거부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현상만을 보고 판단해 버리는 것은 큰 잘못이다.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이 술이 지나쳐 발생한 일들이었기 때문에, 직접 폐해를 주는 것이 술이였기 때문에 술을 금한 것이지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종교와 술, 밀접한 필요 불가결한 관계는 아닐지라도 동떨어져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성서에 따르자면 최초로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인간도 만들었으며 더불어 술도 만들어지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신과 가까운 음식 술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많이 마시면 독이 되고 적당하게 마시면 약이 된다. 물이 잘 흐르는 모습을 '술술' 흐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겐 술은 '술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물'과 '알코올' 사이에는 서로 상극인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음양오행으로는 수극화라하여 '물은 불을 제압한다'고 한다. 물은 정적이므로 고여 있고 단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불은 동적으로 위로 올라가며 타고 발산되는 것이다.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그리고 내려가는 기운과 위로 올라가는 기운 등이 함유된 것이 술이다. 알코올은 곧바로 휘발되는 기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람 몸에 들어가 몸을 따뜻하게 하고 신진대사를 왕성하게 한다. 이러한 극적인 성질이 합해져서 술이 되는 것이다. '수'라는 것은 정적이고 '술'이라는 것은 동적이다. 그래서 '정적인 물'에 '동적인 것'을 더하면 '술'이 되는 것이다. 술은 모든 제사양식과 의식에 오르는 것이다. 지상에서 나는 가장 고양된 음식을 술이라고 하고 신에게 바치는, 가장 신과 가까운 음식을 술이라고 한다. 술을 마시면 신바람이 생긴다. 신바람을 따라서 신은 찾아온다. 그래서 종교양식과 제사양식은 신에게 술을 바치는 인간의 의식이다.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운다. 향은 공기중에 펴져서 신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향은 또한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장례식에는 반드시 향이 켜져 있다. 한의서에 술의 성질에 대해 논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술은 혈맥을 잘 통하게 하는 속성이 있다. 적게 마시면 정신을 건강하게 하고 과음하면 명을 재촉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자주 마시는 소주는 원나라 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대열대독한 것이라서 충을 죽이고 장역을 물리치고 눈이 붉게 충혈된 적종에 씻는 약으로 쓴다고 하였다. '흥부전'에 나오는 술찌꺼기(술지게미)는 풀독이나 채독을 없애 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타박상을 입었을 때 민간요법으로 예전에는 많이 쓰였다. 술지게미를 다친 환부에 붙이는 것으로 해결하였던 것이다. 술은 한약재에 쓰일 때는 활동력을 강하게 하고 위로 상승하게할 필요가 있을 때 술에 적셔서 약재로 쓰기도 하고 술로 초를 하는 경우도 있다. 술의 활동력과 열을 이용한 본초의 응용이다. 술은 잘 쓰면 약, 잘못 쓰면 독이 되는 대표적인 예이다. 술과 신화 그리이스의 술의 신 바카스 바카스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그리이스의 술의 신이다. 이 신의 별명이 디오니소스인데 전지 전능의 태양신 제우스, 일명 쥬피터의 외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미인으로 유명한 세메레라고 한다. 제우스는 태양이므로 언제나 불꽃을 내고 있어 사람이 닿게 되면 타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통력을 가진 신이므로 어엿한 청년으로 변신한 제우스는 세메레공주와 교제를 하게 되고 제우스의 본처 하라는 질투심으로 세메레공주를 죽이는 일을 꾸민다. 하라는 공주의 유모로 둔갑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찾아오는 저 청년은 누구인가요?" "그 유명한 태양신이군요" "그래요. 바로 쥬피터에요" "공주님은 속임수에 빠진거예요" "왜요?" "그처럼 장엄한 태양신이 저렇게 우아한 청년일 수가 있나요?" "분명히 그렇다고 말을 했는데" "그러면 오늘밤 확인해 보세요. 참모습을 한번만 보여 달라고 해요" 그래서 세메레는 그날 저녁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찾아온 제우스에게 참모습을 보여 달라고 졸라댔다. 하는 수없이 제우스는 제 모습인 태양으로 돌아가고 그 순간 공주는 불꽃에 휩싸여 몸은 다타고 자궁만 남았다고 한다. 제우스는 애틋한 마음으로 그것을 자신의 허벅지에 매달고 다녔는데 10개월 후에 아이가 태어났고 태어난 아이가 바카스라는 것이다. 이 바카스가 자라서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주 양조법을 발명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술의 신이 되었다는 신화이다. 술과 관련한 이집트의 건국신화 전지 전능의 신인 태양신 '라'가 어느날 하늘에서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니 게으름뱅이만 눈에 띄었다고 한다. 게으름뱅이를 불러 야단을 쳤으나 하나도 나아지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라'가 딸 하톨에게 게으름뱅이들을 싹쓸어버리라고 명령을 하였다. 하톨이 검은 구름을 일으켜 폭우를 쏟아 부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게으름뱅이가 떠내려갔는데 몇 명이 겨우 산 위에 기어올라 목숨을 부지했다. 이들 중에 연금술사, 즉 화학자와 양조기술자가 있어 밀로 술을 빚어 하톨에게 진상을 했다. 술맛을 본 하톨이 그 맛에 반해 비를 그치게 하여 그들은 살게 되었고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가 탄생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집트 고분에서 출토된 술그릇을 보면 모두 밑이 뾰족하게 생겼다. 지중해 크레타 섬에서 3천7백년전의 것으로 추측되는 토기 술병이나, 고대 그리이스의 아테네 우승배 암포라 빠나티카, 또는 로마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리 술병도 다 밑이 둥글지 않고 뾰족하다. 밑이 뾰족한 이유는 정확히 알기가 어려우나 식탁이 없었던 당시로는 흙 위에 꽂아 두기 위한 이유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투명하지 않던 당시의 술을 그 술병에 담으면 앙금이 밑에 가라앉아 술 따를 때 탁해지는 것을 막기위한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 술병 암포라가 지금 쓰이고 있는 주사요 앰풀의 어원인 것이다. 한문의 술 주자의 원형인 닭 유자는 술항아리의 모양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동양에서도 옛날의 술항아리가 밑이 뾰족한 암포라상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술잔은 모두 암포라형인 것이다. 하의 걸왕 술로 나라망쳐 술과 관련된 말로 주지 육림이 있다. 이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4천 년 전 중극의 국호는 하였다. 단시의 걸왕은 힘이 매우 강해서 쇠로 새끼를 꼴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이니 정력 또한 대단해서 왕비외에 가까이 하는 궁녀가 많았을 것은 당연하다. 많은 궁녀 중에서 걸왕의 사랑을 받은 것이 말희라는 미녀이었다. 이른바 왕은 호색가이면서 술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술에서 깨어나면 다시 마시다 보니 정치는 돌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궁녀 말희의 말은 무엇이든 다들어 주었다. 술찌꺼기인 주박으로 제방 10리를 쌓아 주지 즉, 술연못을 만들었고 동산의 나무에는 고기를 주렁주렁 매달기도 했다. 연못에는 배를 띄워 미남 미녀 3천 명을 나체로 놀게 하였고 북을 치면 얼굴을 연못에 박아 술을 마시게 하고 그것을 두 사람이 보고 즐겼다고 한다. 걸왕은 자신에게 충고의 간을 하는 신하는 지체없이 죽이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종내에는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은나라의 탕왕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 걸왕의 선조 하나라의 초대왕 우왕은 대단한 성인으로 황하의 치수를 잘 해서 농업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 우왕에게는 사랑스런 딸 의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술빚는 법을 처음으로 알아내었다는 것이다. 맛이 특이하므로 우왕에게 진상하였고 이 맛을 본 왕이 맛이 좋다며 몇 잔 마시더니 취해서 곧 잠이 들었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난 우왕은 곰곰히 생각해 보니 맛이 좋은데다 정신을 잃게 만든 것이 술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술을 후세에 탐닉하여 나라를 망칠 자가 생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널리 퍼지기 전에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여 사랑하는 딸이지만 먼 섬으로 귀향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당연히 이 세상에서 사라졌어야 할 술이 전해지고 우왕이 예고한대로 자기 후손인 걸왕이 주지육림으로 멸망하고 만 것이다. 술은 꼭 곡류나 과실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양젖, 말젖, 우유 등을 많이 마시는 민족들 즉, 몽골, 코카서스에선 젖술을 만들어 왔다. 우유를 오래 두어 두면 유산균이 작용해서 유당이 유산으로 바뀌어 신맛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요구르트와 같은 발효유이다. 이 발효유를 오래 방치하면 효모균이 작용해서 소량의 알코올이 생성된다. 우유에 벌꿀을 조금 섞으면 알코올 도수가 맥주 정도 되는 약한 젖술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젖술을 그대로 마시기도 하고 증류해서 소주로 만들기도 한다. 곡류로 만든 소주와는 달리 젖냄새가 나서 우리의 구미에는 맞지가 않는다. 성서에도 포도주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귀절이 있다. 이 당시의 술부대는 되지나 양가죽을 꿰매어 만든 것이었다. 이들 동물의 뒷다리 부분을 재료로 많이 사용하는데 큰 것은 전체를 다 써서 만들었다. 원래는 음료수 운반용 부대로 중앙아시아, 신강의 위글 지역, 몽골 등지에서 여행자나 카라반 들이 주로 사용한 것이었다. 말등에 걸쳐 놓으면 떨어지지도 않고 운반하느데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등산가들에게 가죽 물주머니는 인기가 높은 것이다. 강을 건널 때에는 이 주머니에 바람을 채워 띄우기도 하였고, 그 사이에 나무를 연결해 뗏목으로 썼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주례 우리 나라는 전통적을 술의 문화가 대단히 고상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어 왔다. 단군이래 신라시대의 음주기록을 보면 술의 역사가 이와 같이 장구한 까닭에 술에 대한 인식이나 술을 먹는 자세가 잘 가다듬어졌던 것을 볼 수 있다. 술을 적당히 마시면 기분을 돋구어 힘을 내게 하지만 지나치면 이성을 마비시켜 자제력을 잃게 한다. 따라서 주요한 제례 때나 술을 마셨고 이성과 체력이 강건한 자에게만 마실 자격을 부여했다. 옛 사람들은 하늘, 땅, 조상의 신령에게 제사할 때 술을 바쳤지만 도깨비나 마귀에게는 술을 준 일이 없으며, 20세가 되어 관례를 치른 성인에게 술을 권하였지만 미성년자에게는 허용치 않았다. 그러므로 남으로부터 술을 대접받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성숙한 인격자임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술을 마시되 인심과 풍속을 상치않게 하기 위한 조상의 슬기가 내포되어 있다. 특히 서양은 음주가 손수 따라 마시는 독작 문화권이지만 권커니, 자커니 하는 대작과 수작 문화권인 동양에서는 술을 마시는 예의가 대인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예절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조상의 음주 예절은 대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향음주례라 하는 의례적 음주문화이며, 다른 하나는 여럿이 어울려 마시는 군음문화이다. 향음주례는 어른들을 공양하고 음식에 예의와 절차를 밟아 마시는 것이다. 향음주례를 통해 본다면 우리의 술문화는 손님을 정중히 청하여 예의를 지켜 깍듯이 절을 하며 함께 풍류를 즐기는 것이다. 이와 배치되는 군음은 조금 자유스런 자리로 한량이나 기층민중들이 자연과 더불어 한자리에 모여 먹고 마시는 교제의 마당이다. 향음주례가 윗사람 혹은 귀한 손을 대접하는 격식관례라면, 군음은 교우끼리 우정을 즐기는 비격식 관례로서 귀족, 평민의 계급 문화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격식, 비격식의 차이로 구분되는 아름다운 우리의 음주문화이다. 향음주례는 세종대왕이 주나라 예법을 바탕으로 절도를 가다듬어각 향교나 서원에서 학생들에게 교과목으로 가르치게 했던 6례 가운데 하나로 자신의 인격이 술자리에서 드러나므로 실수가 없도록 받은 교육이다. 향음주례의 일관된 정신은 첫째, 의복을 단정하게 입고 끝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 것 둘째, 음식을 정결하게 요리하고 그릇을 깨끗이 할 것 셋째, 행동이 분명하고 활발하게 걷고 의젓하게 서고 분명하게 말하고 조용히 침묵하는 절도가 있을 것 넷째, 존경하거나 사양하거나 감사할 때마다 즉시 행동으로 표현하여 절을 하거나 말을 할 것 등이다. 향음주례는 13단계로 나뉘어 손님을 청함부터 손님이 돌아갈 때까지 예의를 다해 대접하고 한 잔 권할 때마다 수십 번 절을 한다. 13단계로 나뉜 향음주례의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주인이 손님을 미리 청하여 허락을 받는다. 2. 당일 아침 예를 거행함을 예고하고서 손님을 모셔온다. 3. 대문 밖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4. 주인이 손님에게 주찬을 대접한다. 5. 손님이 주인에게 술을 권한다. 6.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한다. 7. 주인이 여러 손님에게 술을 대접하며 음악을 연주한다. 8. 사회를 세운다. 9. 서로 차례차례 술을 권한다. 10. 두 사람이 여러 사람에게 술을 권한다. 11. 음식을 모두 거둔다. 12. 연회를 한다. 13. 손님은 아무 말없이 돌아간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와서 사례한다. 이상이 향음주례의 간추린 절차이다. 그 가운데 한 부분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의관을 갖춘 주인이 청하고 싶은 손님의 집을 찾아가 재배하면서 "장차 술마시는 예를 거행코자 하오니 청컨대 선생께서 손님이 되어 주십시오"하고 제의한다. 손님도 재배하면서 "나도 덕도 학식도 부족하니 청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거듭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허락한다. 이를테면 향음주례에서는 겸양과 미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절이 주례진행의 처음이자 끝이다. 이같은 향음주례는 처음엔 중국에서 전해온 것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구한말까지 전국의 360개 향교에서 1년에 한 차례씩 치뤄졌고 일반 선비의 가정에서도 동료 선비를 청해 술을 대접할 때에는 항상 이에 따라 행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엄격한 가운데서도 악공으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케하여 흥을 돋우고 술을 마시기 전에는 '시경' 소아편에 나오는 녹명장을 읊어 풍류의 멋을 잃지 않았다. 또한 주인은 반드시 술잔 하나로 술을 돌려가며 손님에게 권하고 잔이 바뀔 때마다 잔을 물에 씻는다. 이는 술자리의 총화를 이루고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주인이 술을 마시지 않고 손님에게만 술을 권하는 것은 큰 실례로 여긴다. 왜냐하면 대작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손님에게만 술을 권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형식의 예법이 있는 반면에 일정한 형식과 절차가 없이 거리낌없이 즐기는 군음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호탕한 자리이다. 제례나 동제가 끝난 후 격의없이 어울려 마시는 한마당의 분방한 놀이마당이 바로 군음이다. 포석정이나 부여의 낙화암같은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군음은 군신의 계급을 초월하여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긴밀하고 고아한 역사였던 것이다. 향음주례의 전통으로 오늘날까지 남아있고, 우리가 이을만한 음주 예절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술과 음식은 너무 질펀하게 하지 말며 안주는 접시에 덜어다 먹고 술잔을 돌리되 반드시 깨끗한 물에 잔을 씻어서 술을 채웠다가 권한다. 2. 술좌석에서 잔이 한 바퀴 도는 것을 한 순배라고 하는데, 술은 대개 석 잔은 훈훈하고 다섯 잔은 기분좋고 일곱 잔은 흡족하고 아홉 잔은 지나치므로 일곱 잔 이상은 절대 권하여 돌리지 않는다. 3. 예절이란 주고 받는 것이므로 술을 대접받았을 때 답례는 반드시 뒷날 시간적 여유를 두고 한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주고 받고 2차 3차를 가는 것은 경박한 풍조라 할 수 있다. 4. 술자리는 반드시 공개할 뿐 아니라 그 아들이다 제자들을 동행하여 술 심부름을 들게 하고 술먹는 법도를 익히게 하였다. 5. 음식은 귀천이 없이 골고루 나누어 먹고 기생으로 하여금 음악과 춤과 시조로 흥취를 돋구되 반드시 자리를 따로 하여 난잡함이 없게 한다. 6. 술자리에서 대접을 받는 손님은 즐겁고 흡족하게 마시어 주인의 자리를 빛내는 것이 도리이고, 주인은 흥에 취해 약간의 실언이나 실수를 하여도 너그럽게 거두어 준다. 우리나라의 절기주 우리 조상은 계절과 열두 달을 중심으로 여기에 해당하는 의미를 부여한 가운데 이웃과 함께 여흥을 즐기면서 생활해 온 민족이다. 즉, 세시풍속이라 하여 절기마다 술을 담가 계절의 풍요로움을 구가하였던 것이다. 이 세시풍속 중 음주와 관련되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월주(정조다례, 세배, 이명주) 1. 정조다례 : 설날아침 세찬과 세주를 사당에 진설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정조다례라고 한다. 2. 세배 : 세배를 받는 측에서는, 어른에게는 주식을 마련했다가 대접하며 정담을 나눈다. 3. 이명주 : 정월 대보름 이른 아침에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해서 술을 한잔씩 마시는 것으로 귀밝이술이라고 한다. 이명주는 뜨겁게 하지 않고 냉주로 마시면, 1년동안 좋은 소식을 듣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부녀자도 즐겨 마셨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월주(노비일) 머슴날이라고 하여 농가에서는 2월 1일 농사준비를 앞두고 머슴이 하루를 즐겁게 지내도록 하기 위하여, 주인은 주식을 내어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지내게 하였다. 3월주(봄놀이 술, 시식) 1. 시식 : 삼월 삼짇날을 기해 각 가정에서는 솜씨를 발휘하여 술을 빚어 마셨다. 이때 술의 재료는 쌀 뿐만이 아니라 봄에 피는 꽃, 초근목피 등을 써서 특이한 술을 만들었다. 2. 청명주 : 음력 3월의 청명일에 마시는 술이라서 청명주라 부른 것이다. 청명주는 20여 일 동안 발효시켜 빚어내는 청주로서 엿기름을 사용하여 단맛이 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마셨다 한다. 청명주는 한식일의 제주용으로도 많이 쓰였다. 이러한 술로는 두견주, 도화주, 과하주, 이강주 들을 들 수 있다. 4월주(등석,월내시식) 1. 등석 : 석가모니의 탄신일로 저녁에 연등하여 경축행사를 벌인다. 중국의 연등회는 정월보름이지만 우리 나라는 고려시대부터 4월로 옮겨졌다. 경축행사 때 손님에게 간단한 식사를 제공한 데서 시작되었다. 2. 월내시식 : 초하에 술을 발효시켜 방울처럼 하여 짜낸 증병을 만들어 시식한데서 유래하였다. 5월주(농주, 창포주) 1. 농주 : 농사일이 한창일 때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만든 두레 또는 품앗이라는 것으로 호남지방에서 협업체제의 일환으로 성행하였다. 이때 식사와 강원도는 옥수수, 제주도는 좁쌀을 원료로 한 오메기술, 기타 지역에서는 누룩과 쌀로 빚어 술을 제공하였다. 2. 창포주 : 음력 5월 5일 단오날의 술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단오는 설, 추석과 함께 3대 명절로 여겨져 왔다. 그 이유는 만물의 생기가 가장 왕성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창포주는 단오날의 행사용 술로 창포의 향기가 모든 나쁜병을 쫓는 것으로 믿어왔다. 6월주(유두음) 6월 15일 문사들이 주효를 장만하여 계곡이나 수정을 찾아 풍월을 읊으며 하루를 즐겼는데 이것을 유두연이라 한다. 7월주(백종일=백중놀이, 호미씻기) 1. 백종일 : 7월 15일 백종일로서 조상의 사당에 천신을 드리며 맛있는 주효를 갖추어 가무로 하루를 즐긴다. 이때 농촌의 머슴들은 하루를 쉬면서 백종장이 들어선장터에 나가 물건을 사기도 하고 취흥을 갖는다. 2. 호미씻기 : 초연 또는 머슴날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7월 15일을 전후하여 마을 형편에 따라 택일한다. 각 가정에서는 제각기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산이나 계곡에 모여 가무로 하루를 즐긴다. 이때 마을 중에서 곡식이 가장 잘된 집의 머슴을 뽑아 일을 잘했다고 칭찬을 하고 술을 권하며 위로하고 삿갓을 씌워 소에 태워 마을을 돌아다니게 한다. 그러면 그집의 주인은 마을사람들에게 술대접을 한다. 8월주(추석 한가위) 햇곡식으로 떡도 하고 술도 빚어 차례를 지내고 이웃과 서로 나누어 먹으며 성묘를 하는 날이다. 이때 빚었던 술은 찹쌀과 누룩을 원료로 한 동동주로서 쌀알의 흔적이 동동 뜨고 감미가 있어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으므로 많은 사람에게 친숙한 술이었다. 9월주(구일=중양절의 국화놀이) 9월 9일은 중양이다. 이때 사람들은 떼를 지어 산이나 계곡을 찾아가서 국화전 같은 시식을 먹고 술에 취하며 하루를 즐겼다. 10월주(시제) 10월 15일을 전후하여 5대조까지 제사를 한꺼번에 지낸다. 제물은 후손 중에서 만들거나 산지기가 제실에서 장만하는데 반병과 주찬을 마련하여 집단으로 지낸다. 이상의 세시풍속 외에 술을 마시는 대표적인 경우는 회갑연과 관혼상제이다. 그 외 함경도 지방에서는 10월 중 좋은 날을 택하여 새로 경작한 농산물로 술을 만들어 농공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11월주(동지, 월내시식) 동지라고 하여 팥죽을 쑤어먹거나 겨울철의 월내시식으로서 지방마다 그해의 새로난 곡물과 특산물로 음식을 장만하여 먹은데서 유래하였다. 12월주(납일, 제석) 납일은 동지에서 3번째 미에 해당하는 날로서, 이 날은 종묘사직에 대제를 올리기도 하고, 왕에 진상하며 관청에서 음식을 만들어 상호 교환하고 즐겨 마셨던 데서 유래하였다. 제석은 다음 해에 정초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하여 갖가지 음식을 장만하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이와같이 술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의 의미를 부여하며 마셨는데, 우리 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볼 수 있었다. 이들 여러 가지 음식은 바로 우리 나라 식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규태 코너-음복론 마음이란 빛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형체도 없으며, 따라서 보이지도 않고 잡혀지지도 않는다. 분명히 없으면서도 엄연하게 있는 마음과 마음을 같이하거나 주고받거나 약속하거나 할 때 어떤 형태로든지 그 '무'를 '유'로 구상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한솥밥 더불어 먹고 한 잔 술을 더불어 미시는 공식 공음이다. 신라시대에는 군신일체를 다지는 의식으로 포석정에 나가 한 잔 술을 물에 띄워 돌려가며 공음하는 것으로 한마음을 다졌던 것이다. 근세까지도 각 관아에서는 한 말들이 큰 술잔에 술을 담아 상하 가림없이 돌려 마시는 동심례를 베풀었고, 마을의 약속인 향약집회가 있을때도 향음례라 하여 공음절차가 꼭 따라 일심동체를 다졌던 것이다. 법도 있는 집안에서는 손님이 왔을 때 한솥밥을 내는냐 딴솥밥을 내느냐의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가문에 따라 다르나 한솥밥을 공식하는 범위는 친계로 8촌, 외계로 4촌, 처계로 2촌이 상식이었다. 그 범위를 넘는 손님, 이를테면 처삼촌이 와도 딴솥밥에다 밥을 지어냈을만큼 한솥밥 공식에 의미를 크게 부여했던 것이다. 일심동체를 다지는 공식, 공음은 살아있는 사람 사이뿐 아니라 신명이나 죽고 없는 조상과의 사이에도 이루어졌다. 동제나 기제와 차례를 지내고 나면 제상에 올랐던 제주와 제수를 나누어 먹는 음복 절차가 바로 신인 조손을 잇는 결속수단인 것이다. '복'에는 제사 때 바치는 술과 음식이란 뜻도 있다. 마을의 안태를 비는 동제를 지내면 대추 단 한쪽이라도 온 마을사람이 나누어 먹음으로써 그 신우의 혜택을 분배하는 게 관례였는데 그 음복용 음식을 나누어주던 현장이 복덕방이다. 이렇게 사람이 모이다보니 각종 중개 역할까지 하게 되었음직하다. 불사의 의례를 적은 '백장청규'에 보면 불교에 있어 부처님과 중생, 스님과 스님 사이의 마음을 결속시키는 의례절차가 차례이고, 카톨릭에 있어 신과 인간을 결속시키는 의례가 성체 배령이다. 우리나라 전통주의 형성과 흐름 오늘날 술의 기원이 인류사회에서 민족의 형성과 더불어 원시시대이래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하였던 음료의 일종이라는 견해가 오늘날 지배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삼국사기'에서 밝혀지고 있는 바와 같이 고구려를 세운 주몽 또는 동명성왕의 건국신화 가운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웅심연가에서 하백의 딸 세 자매를 취하려 할 때, 미리 술을 마련해 놓고 이것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수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세 처녀 중에서 큰딸 유화와 인연을 맺어 주몽을 낳게 하였다는 설이 있고 보면, 우리 나라의 술의 기원 또한 신화 속에서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삼국 형성기에 이미 전래곡주가 그 바탕을 이루어 예, 부여, 진한, 마한 사회를 비롯하여 고구려에서 제천, 영고, 제귀신, 동맹 등 제행사에서 주야음주가무한 바 있다. 특히 고구려에서는 건국 초기(28년)에 지주를 만들어 한나라의 요동태수를 물리치는 등 주조기술이 뛰어나 중국인들 사이에 자청선장양하는 나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때에 이미 우리나라는 주국과 맥아로 술빚는 방법을 익히고 있었고, 이 주국을 이용한 곡주 빚는 기술을 일본 응신 천황 때 백제의 인번 등을 통해 일본에 전수하여, 후세에 주신으로 추앙을 받은 사례가 일본의 고사기에서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후기에는 백제의 주조기술이 중국과 대등할 정도로 발전하여 '주서'에는 주 예문화(감주문화)가 중국과 대등하였다고 전하며, 주국을 이용하여 청주, 탁주가 빚어지고 또 맥아 또는 주국을 이용한 감주가 빚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시기에는 신라 청주를 비롯하여 고구려 청주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의 곡하주를 낳았고, 당대의 문사들 사이에서 애상되었다.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 곡주류의 여러 주품들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상류사회에서는 청주류가 성행되었으며 술은 장(간장), 시(된장), 해(젓갈) 등과 함께 기본 폐백음식으로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밖에 고등발효식품들과 함께 양념으로도 사용되었다.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전래의 곡주류 양조법은 그 정착차원을 넘어서 전기에 청주유, 탁주류, 중양주류, 재주류(막걸리), 감주류 등의 전통적인 양조기술을 더욱 심화되었다. 또 과실류 등을 혼양하는 혼양주조법이 새로 개발됨과 동시에 약재를 혼양한 약용혼양주조법도 아울러 자리를 잡고 있었고, 재제주류에 속하는 자주류 양조기술 또한 정착을 보고 있다. 주국의 종류도 다양화되고 전래의 소맥국 위주에서 미국을 이용한 특별한 술로 이화주가 정착되고 있었다. 곡주 양조법을 바탕으로 하는 양조기술이 고급화됨에 따라 주조 역사상 주목할 일은 조선조까지 전해지고 있었던 유명주품의 명칭이 고려조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고급 청주류로 황금주, 벽향주, 삼해주, 유화주, 춘주, 녹파주, 구하주 등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청주의 대표로 알려져 왔던 방문주(일명 백하주)가 이때에 이미 자리잡았고, 조정에서 특급 청주류인 청법주와 선온주가 보편화되었다. 또한 삼중양조법을 바탕으로 한 삼해주, 춘주 등의 개방은 양조기술의 고도화에 따른 소산물이었다. 탁주류 가운데서도 혼탁주류에 속하는 부의주, 녹의주 또한 고려조에서부터 그 맥이 이어진 것이었다. 약용혼양주로 이름난 계주, 두주, 초주, 초백주, 창포주, 애주 등이 또한 이때에 자리잡은 술들이고 과실 및 화엽입주법을 바탕으로 한 혼양주로는 국화주, 죽엽주, 백자주, 송주, 오가피주를 비롯하여 포도주가 있었다. 그 밖에도 중탕법을 새로 도입하여 재제주류인 자주류 또한 고려조에서 비롯된 것 중의 하나이다. 고려시대가 마침 곡주양주문화의 성숙기를 맞이하였던 것은 국내적으론 양조기술의 축적의 결과라 할 두 있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은 국내적으로 안정세가 유지되고 있었던 반면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대외적인 교섭이 활발해진 것도 그 원인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고려시대 전기중에 유입된 외래주만 보더라도 북방계 민족으로부터는 중산주를 비롯한 행인자법주, 계향어주 등 유명 청주 및 약용자주가 유입되었고, 멀리 남만사회로부터는 화주란 과실주문화가 흘러오고 있었다. 이와 같이 대외주의 접촉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고려조 후기로 접어들면 이와 같은 움직임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몽고와의 접촉을 통하여 마유주문화를 접수하였고, 중국 원나라를 거쳐 멀리 서역사회의 포도주문화를 수용하기에 이르렀으며, 중국으로부터는 계속 특급 청주류인 상존주, 백주 등이 유입되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 우리 나라 주류 사상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증류주문화가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려말엽에 유입된 증류주문화의 유입경로를 보면 아라길주문화가 몽고 또는 대식상인을 통하여 충렬왕 초기중에 유입되었고, 뒤이어 원나라와의 교섭이 활발해지는 동안 중국에서 창시된 소주문화가 흘러들어 왔다. 이들 증류주문화가 유입되자마자 곧바로 이 땅에 증류주문화가 개화되었고, 증류주문화는 정착과 동시에 급속도로 발전하여 증류법을 바탕으로 한 노주가 탄생, 이 증류법을 바탕으로 한 재제주류 또한 속속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개발된 것 중 일차증류주로는 노주와 함께 홍로가 있었고 고차증류주로는 감홍로 등이 있었다. 마침내 고려사회에서는 전래의 양조곡주문화에 증류주문화를 추가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고려사회는 양대주류문화권을 완성함으로써 우리나라 전래 주품들의 틀이 이때에 이루어져 그 틀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내려와서도 전기중에는 양조기술면에서 점차 고급화하는 경향이 뚜렷하여, 상류사회에서는 중양주법을 존중하는 한편 양조원료에 있어서도 갱미위주에서 점미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우량주로 손꼽던 주품으로는 삼해주를 비롯하여 백하주, 이화주, 백자주, 호도주, 하향주, 청감주, 자주, 국화주 등이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 말엽에 와서 정착되었던 증류주는 조선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파급되기 시작한다. 세종대를 중심으로 일본, 중국 등으로 소주의 수출과 함께 기술이전이 이루어져 노주문화는 점차 국제화 단계로 발전하였다. 조선조 후기로 접어들면서는 지방주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비전되고 있었던 지방주품들이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이때의 유명주 대열에 등록되어 있었던 주품 중에는 호산춘, 약산춘(서울), 노산춘(충청), 벽향주(평안) 등을 손꼽을 수 있다. 특히 증류주는 고급양조주의 술덧까지 소주로 전용되는 기현상을 빚어, 서울 공덕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삼해주 술도가에서는 이들 삼해주를 모조리 소주로 고아 내는 술덧으로 이용하였다 하니 증류주에 대한 기호적 변화를 짐작할 만하다. 이와같이 조선조 후기에 증류법을 이용한 주류 개발의 전성기를 맞이함에 따라 우리나라 주류의 구성도 크게 변화되었고, 이때의 주품들을 종류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순일차증류소주 : 점미로주, 갱미로주, 소맥소주, 대맥소주, 교맥소주, 감자소주, 면말소주 등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환소주류라 하여 고차증류한 술로 감홍로(평양), 계당주(평양)가 유명하다. 1. 각색소주류 : 착색물료를 곁들여 고아닌 소주류인데 홍로(홍소주), 황로, 갈로류들이 또한 유명주 대열에 끼어 있었다. 2. 자주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곡주양조류에 채소 등을 넣고 중탕하던 방법이 이때에 이르러 그 바탕이 소주로 전환되었고, 이름난 것만 추려도 죽력고, 이강고(전라,황해) 등이 있었다. 3. 재제주류 :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곡주양조에 혼용하였던 사례가 이때에 와서는 노주로 뒤바뀌었다. 그 가운데 알려졌던 주품으로는 장미로, 매화로, 감귤로, 이로, 박하로, 감국로, 생강로, 산사로, 인삼로 등이 있었으며 각색 각향이 어우러진 주품들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선조에는 우리나라 유명 풍미물료가 총동원되는, 이를테면 서구사회의 재제주류를 무색케 하는 지혜를 우리 선조들은 간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합주 또는 혼용주류라 하여 양조용수 대신 소주를 이용하였던 주품 가운데는 과하주와 송순주가 유명하였으며, 특히 과하주의 고장으로 서울이 알려져 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조 후기까지 발전을 보았던 증류주를 바탕으로한 주품들이 오늘날에는 어찌되었는지 궁금하거니와 증류주의 음용이 성행되었던 조선조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듯 색다른 일화도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고춧가루를 타서 마시는 버릇 때문에 죽거나 병을 앓게 된 사람도 상당히 있었다는 사실도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대응방법으로 본초학 분야에서는 소주독을 다루는 처방과 함께 취하지 않는 방법, 또한 술을 빨리 깨게 하는 처방들이 나타났음은 물론이거니와 음용법이 등장하게 되었다.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냉수를 한 잔 마시는 방법, 또 소주에 얼음을 넣거나 꿀을 타서 마시는 등 오늘날의 서구사회의 칵테일 방식을 무색케 하는 처방이 가사서에서 속출하였다. 그뿐 아니라 정다산같은 사람은 전국의 소주고리를 모조리 거두어 들이기를 조정에 청하였고, 이익 같은 분은 큰 소주도가에서 소비하는 양곡만도 이 년의 비용이 수천 두에 달하는에 이것은 가난한 집 10년의 양식에 해당한다 하여 한탄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황해의 이강고와 같은 자주류는 고종 19년 2월에 있었던 한미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대표한 전권대사(슈펠트)와 청국사신이 합석한 만찬의 자리에 우리나라 쪽에서 내놓은 음식이다. 전복, 백자, 구기자차, 약반, 조악, 정과, 원소병, 다식 등과 함께 내놓았는데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 음식물에 매혹당했던 일들은 이강고와 같은 전통주가 있었고, 또한 자랑할 줄 아는 주체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한다. 이와 같이 증류주류가 성행되는 가운데서도 한말까지 증류주류와 함께 양조곡주류의 뿌리는 계속 이어졌고 서민사회에서는 상대이래 전승을 거듭하였던 속성 재주(막걸리)가 보편화되고 있었지만, 한말에 이르러 개항과 함께 강대국과의 통상협정이 체결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운 외래주의 물결이 물밀 듯이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유입된 외래주를 간추려 보아도 중국계로는 홍여주를 비롯하여 재제주류에 속하는 매혼로, 사국공, 오가피, 이화백, 죽엽청, 포도춘 등이 있었고, 독일계로는 적포도주, 앵주, 서반아계의 셰리, 프랑스계로는 샴페인 등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한말에는 다국적주가 공존하기 시작하는 때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화 변화 속에서도 전래주는 그 맥을 이어왔지만, 주조기술의 국제화를 예견하였던지 조선조 말기 서유구, 이유경, 최한기 등은 유명주를 집중적으로 분석, 주국의 개선, 양조기술의 개량 등 우리나라 전통주의 나아갈 바를 암시적으로 제시하는 등 끊임없는 노력이 한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주점 고려 성종 때 최초의 주점 등장 농경이 시작되기 이전 원시인들은 수렵, 채취가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차츰 지혜가 발달하게 되어 불을 이용하기도 하고 야생 동물을 가축화 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농경생활이 도래하게 된다. 본격적인 농경생활에 접어들면서부터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집단화하고 거기에서 공동체 의식도 싹트게 된다. 사람이 모일수록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것들을 해결할 중재자를 필요로 하게 되고 나름대로의 규율이 정해지면서 차츰 사회가 규모 있게 형성되어 갔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모이면 술을 즐겼다. 축제 때는 물론, 부족의 의장급들이 모여 정사를 논할 때도 술을 빠지지 않았다. 차츰 술을 마시다보니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것이 주점을 탄생시킨 동기가 아니었나 추측해 볼 수 있다. 기록으로 나타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술집은 고려 성종 2년(983년)에 개점한 개성의 술집이었다. 성종은 술을 전문으로 파는 술집을 개성에 여러 곳 두었는데 그 이름들이 특이하다. 성례, 악빈, 연령, 옥장, 희빈 등의 아취 있는 이름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문인이나 선비들이 드나들던 고급주점으로 기녀를 두고 술을 마셨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주점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름이 화려한 것으로 보아 북송의 고급주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는데 고려와 많은 접촉이 있었던 북송의 '동경몽화록'에서는 주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급주점은 대개 기루를 겸하고 있다. 기녀는 매춘부가 아니라 예능자로서 술 마시는 가운데 접대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삼는다. 고급주점에는 조화나 색실로써 입구를 치레하고 밤이면 등불이 찬란하여 그 사이를 기녀가 오가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선경과 같다. 이런 고급주점이 개봉에는 72군데나 있고 하급인 각점이란 것이 수없이 많다. 또 주점에는 다전사, 주전사 등이 있어서 다주를 데운다. 또 객에게 주문도 하지 않은 과일이나 무를 내놓고 나중에 먹은만큼 돈을 거두는 사나이가 있는가 하면, 시골손님에게 기녀를 주선하는 시파란 것도 있다. 하급의 기녀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객에게 와서는 노래를 부르고 팁을 달라고 졸라댄다." 숙종 7년에는 개성의 좌우 두 곳에 서민들을 위한 술집을 내어 이용하게 했으며 9년에는 각 고을에 주점을 열게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상거래를 하도록 하여 화폐 통용의 유익을 깨닫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랜 습관으로 여전히 곡물로 상거래를 하고 화폐를 이용하지 않게 되자 돈의 유통은 불과 몇 해 가지 못하고, 인종초에는 돈의 사용이 중지되어 나라의 창고에 넣어두게 되었다. 물자교류의 불편으로 화폐를 사용토록 하고 유통을 꾀하기 위해 주점도 내었으나 애초 계획은 허사로 돌아가고, 서민들은 여전히 자기 집에서 술을 빚어 마셨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 집에서 술을 빚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서 볼 수 있듯이 "술 파는 집에 술사러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내 손목을 쥐더라" 하는 대목은 당시 서민을 위한 술집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사원도 한때는 주점 화폐의 유통이 중지된 후로 양반층은 여전히 집에서 술을 빚어 마셨고 일반대중은 절에서 빚은 술을 사먹게 되었다. 본래 사원에서는 음주는 물론 술, 누룩의 제조, 판매 등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의 판매는 물론이고 사채놀이까지 하여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당시 고려의 사원은 왕실귀족과 밀착되어 있어 전답과 노비를 가지고 있었고 면세, 면역의 특혜까지 입고 있었다. 그들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어서 스님들의 행동을 금지 시켜 달라는 상소까지 있었다고 한다. '고려사지'에 의하면 "현종 원년에 중과 여승이 술을 빚는 것을 금하였다." 고 하니 이로 미루어 보아 사원에서의 주조업이 얼마만큼 성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스님들은 절을 여관과 같이 여겨 실제로 숙박업을 겸하고, 이것을 계기로 술도 만들어 팔게 되었던 것이다. 현종 때 스님들에게 술 양조 금지령이 내리기도 하였으나 연등회나 팔관회 등의 행사로 절에는 술이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절에 대한 조주금지령은 유명무실하게 되고 산 속의 유명한 절일수록 언제나 술이 있었고 술맛 또한 일품이었다고 한다. 고려 문종 때는 나라의 의식용 술을 빚는 양온서라는 직제를 처음으로 두었다. 후에 장례서, 사온서로 이름이 바뀌어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고려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사온서로 이름이 남게 되었다가 내자사로 합쳐졌다. 문화, 역사가 자연스럽게 흘러 가듯이 주점의 형태도 차츰 특색있는 모습을 나타나기 시작해서 조선말에는 술을 판매하는 것이 정착화되어 있었다. 술의 대부분은 각 가정에서 빚어지고 있었고 술을 판매하는 곳에서는 소량씩 빚어 일반인에게 판매하는데, 빚는 사람에 따라 술의 질도 천차만별이었고 그만큼 좋은 술도 많았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내자사에서 누룩 만드는 일과 술 담글 때 쓰는 정제한 곡식, 좋은 물 등을 관장하여 서민의 술과는 달리 양반들만을 위한 고급주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사실로 볼 때 당시의 반상격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다양해진 주점형태 영조 초기에 술파는 계집이 생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전까지는 주모가 있어 자기 집에서 술을 빚어 일반을 상대로 방에서 술을 팔았는데 이러한 것을 매주가라고 하고 그후 손님과 주인이 내외하는 주점이 출현하였다. 내외술집은 겉으로 보아서는 보통의 가정집이지만 대문 옆에 '내외주가'라고 써서 술병 모양으로 테를 둘러 붙여두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례히 내외술집임을 알아 차렸다. 내외술집은 그 시절에 행세하던 집 노과부가 생계에 쪼들려 건너방이나 뒷방을 치우고 넌지시 술을 파는 것을 말하는데 비록 술장사는 할지라도 예의는 지키면서 술을 팔았다. 술은 가양주에 안주로는 탕, 묵, 편육 등을 준비해 놓고 손님을 맞았다. 특이한 것은 술을 잔 수로 계산하지 않고 주전자 수로 계산하는데 손님은 세 주전자 값을 지불한다. 이는 내외술집의 수지를 맞춰주려는 따뜻한 인정으로 한 주전자를 마셔도 꼭 세주전자 값을 지불했다 한다. 또한 안주인 여자는 외간 남자와 서로 대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므로 안에서 술상만 차려 놓으면 그 집 종이 술 심부름을 했다. 술 심부름하는 아이가 없는 집에서는 마치 중간에 전하는 사람이 있는 듯이 남녀가 대화를 했다. 그래서 내외술집이란 명칭도 내외의 분별을 하면서 술을 파는 집이란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 흔히 내외술집을 "팔뚝집"이라고도 부른다. 대중이 모여드는 술집으로는 목로주점이 있는데 이는 큰 길가에서도 볼 수는 있으나 뒷골목이나 으슥한 곳에 더 많았다. 목로주점의 발달은 시장이 발달하면서 부터인데 이러한 시장은 시골사람들의 술장을 벌여놓는 길고 좁은 목판 같은 탁자상으로 큰 목로에서는 안주를 늘어놓고 손님을 끌곤 했다. 목로주점에서는 술 한 잔에 반드시 안주가 딸려나와 안주값을 따로 지불하지 않는데 안주로 너비아니, 술국 등이 준비된다. 목로주점에서는 앉는 의자가 일체 없기 때문에 누구든 서서 마시는게 상례로 흔히 선술집, 사발 막걸리집, 대포집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걸상에 걸터앉아 탁자에서 마시는 대중주점으로 변하게 되었다. 70년전 서울의 유명한 목로주점은 동대문 밖 '흔코집' 종로의 '동양루' 안국동의 '곰탕집' 등이다. 당시에는 약주를 도매하는 술집이 있었는데 이곳이 헌주가이다. 제조장의 규모도 비교적 컸으며 부업도 하였는데 탁주와 백주가 그것이다. 헌주가의 술 대금은 선금이거나 현금으로, 선금의 100원 정도 걸어 놓고 일정 기간에 한 번씩 계산을 하곤 했다. 이와 비슷한 규모를 가진 것이 소주가인데 소주의 제조, 판매를 주로 하던 곳으로 서울의 소주가는 공덕리에 50-60호로 규모가 작은 것들을 합치면 100호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 이남에서는 탁주가를 겸하는 일이 많았다. 헌주가, 소주가가 도매를 주로 하는 술집이라면 병주가는 소매를 하는 주점으로 병술집, 바침술집이라고 한다. 병주가는 문간에 병을 그려 붙이고 중간에 바침술집이라고 표시하는데 이곳에서는 탁주, 백주, 과하주, 소주를 헌주가나 소주가에서 사와 소매를 하였으나 탁주만은 대개 집에서 만들어 판매하였다. 우리나라는 길가의 30리 정도의 지점마다 장승을 세워 이정표 구실을 하게 하였는데 그곳마다 주막이 있어 도보여행자를 위한 휴식처를 제공하고 갈증 해소는 물론 숙박시설까지 겸하는 서민의 쉼터 역할을 하였다. 주막은 어디나 술국자를 들고 술항아리에서 술을 떠주는 주파가 있었는데, 주파는 술양푼을 거냉하여 술장에 술을 부어 주는 것이 소임이다. 주막에서는 외상장부가 퍽이나 인상적인데 벽에는 수많은 작대기가 그어져 있다. 소위 외상장부라 불리는 것이 주막의 벽이었다. 주파나 손님이나 피차간에 글을 모르므로 자기들만의 통용되는 문자가 작대기 표시였던 것이다. 외상술 한 잔씩 할 때마다 흙벽에는 작대기가 하나씩 그어졌다. 주파도 꼬박꼬박 장부를 챙기지 않았고, 손님 또한 외상장부에 기입하지 않고 슬쩍 도망하는 일도 없었다 한다. 아마도 당시에는 서로 믿고 신뢰하는 상거래가 확실했었나 보다. 술과 함께 항상 결부되는 것은 여자, 당시에도 젊은 여자가 술상에 나와 앉아 아양도 부리고 노래도 하며 술을 파는 집이 있었는데 이를 색주가라 불렀다. 본디 서울의 주가에는 여자가 나와 접대하는 일이 없었으나 세종시대에 중국에 가는 사신들의 수행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홍제원에 집단으로 색주가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 뒤로 이를 본따서 서울 성안 여기저기에 색주가가 집단으로 생겼는데 이는 주막의 후신으로 매주에서 매색까지 겸하는 색주가로 변신한 것이다. 색주가의 문앞에는 용수에 갓모를 씌운 장목을 꽂아 세우고 그 옆에 조그마한 등을 달아 놓아 다른 술집과 구별하게끔 하였다. 그 외에 소규모이지만 술지게미에 물을 부어 길어낸 막걸리인 모주를 만들어 판매하는 모주가가 있었고, 여름철에는 광주리에 술을 담아 이고 다니면서 파는 광주리 장사도 있었다. 그 후 일제시대, 해방, 6.25 등을 거치면서 침체되어있던 술집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60-70년대에는 경제발전이 되면서 새로운 주점 형태들이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싸구려 대포집은 낭만과 멋을 찾는 문인들의 자그마한 공간에 불과했는데 이도 오래가지 못하고 대부분 헐리게 되고, 서울 시내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곳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푸짐한 안주와 막걸리 한 사발에 우리의 소박한 정이 담겨 있었다. 지금처럼 술외상 때문에 얼굴을 찌푸린 적도 없는 우리네의 순수한 마음은 술집에 있어서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 듯하다. 갖은 친절과 봉사는 상술에 불과하다. 술외상값 갚을 날짜가 하루만 밀려도 매몰차게 뒤돌아서는 몰인정이 오늘날의 술집 풍토가 되었다. 마음의 안식을 주던 부담없는 공간과 주파의 손때묻은 막걸리 한 잔이 사뭇 아쉬운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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