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탄핵, 민주주의의 새 시작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부둥켜안고 환호했다. 모아 잡은 두 손에 핏대가 섰다. 12·3 쿠데타로부터 123일째 되던 날, 시민들은 헌법을 무너뜨리려던 권력자의 야욕을 헌법의 이름으로 단죄했다. 4월4일 금요일 오전 11시22분,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 윤석열을 파면했다.
이견 없는 재판관 전원일치 판결이었지만 이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한국 사회는 전례 없던 긴장을 경험했다. 4월1일 오전, 헌법재판소(헌재)가 선고 일정을 발표한 직후부터 헌재 주변은 엄격한 통제 대상이 되었다. 경찰은 기동대 1만4000여 명을 서울에 배치했고, 헌재 본관으로부터 반경 150m 내 일반인 접근을 제한하며 이 일대를 이른바 ‘진공상태’로 만들었다.



시민들은 경찰차 벽 너머에서 인내했다. 헌법재판소를 중심으로 서울 종로구 율곡로 서쪽에는 탄핵 인용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와 철야 농성이 이어졌다. 선고 하루 전인 4월3일 밤에는 천막과 텐트, 그리고 헌재 앞 집회의 상징이 된 이른바 ‘은박 담요(스페이스 블랭킷)’가 동원됐다. 전날 오후부터 모인 시민들은 마음을 졸이며 헌재 판결의 순간을 대형 스크린으로 함께 지켜보았다.
4월4일 오전 11시, 재판관들이 착석하고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결정문을 읽기 시작하자 일시적인 고요함이 찾아왔다. ‘주문’을 읽는 순간은 가장 마지막이었지만, 시민들은 행간에서 민주주의의 승리를 점차 확신했다. 문 대행의 입에서 ‘않습니다’ ‘아닙니다’와 같은 표현이 나올 때마다 시민들은 환호했다.
“피청구인이 주장하는 의혹은 병력을 동원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고성 계엄 또는 호소형 계엄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계엄법이 정한 계엄 선포의 목적이 아닙니다.”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결의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으므로 이는 피청구인의 법 위반에 대한 중대성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결정문 낭독이 이어질수록 들뜬 숨소리가 거리를 채웠다. 그리고 끝내, 123일간 쿠데타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이 승리했다.


윤석열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과 단체들이 남쪽 삼일대로 방면에서 맞불 집회를 열었지만, 그 규모와 열기는 민주주의의 회복을 염원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와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국민의힘은 4월3일까지 탄핵 반대 농성장에 천막을 쳤지만, 막상 4월4일 오전 7시40분경에는 천막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율곡로 동쪽과 탑골공원 인근에도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렸으나 참여 열기는 저조했다. 대통령 관저가 있는 한남동 일대에도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주도하는 집회가 열렸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동료 시민이나 헌재를 향해서가 아니라, 관저 속에서 선고 결과를 마주할 윤석열을 향했다.
기세등등하던 탄핵 반대 세력은 정작 선고 당일 가장 허약한 모습을 보였다. 한남동 집회에 모습을 나타낸 전광훈 목사는 “헌재의 오늘 판결문은 사기다. 광화문으로 모이자”라고 말했지만, 손현보 부산 세계로교회 목사는 영상을 통해 “세이브코리아는 이제 비상 기도를 끝낸다. 이제는 각자가 교회에서 개인적으로 기도하자”라며 사실상 대규모 집회 종료를 선언했다.


파면된 윤석열은 선고 직후 123자짜리 입장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입장문에도 12·3 쿠데타에 대한 반성은 담겨 있지 않았다. 윤석열이 머문 자리는 폐허만 남았다. 그 자리에서, 시민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민주주의의 씨앗을 다시 틔울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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