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과 死

노벨평화상 수상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별세…향년 100세

含閒 2025. 1. 7. 09:19

노벨평화상 수상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별세…향년 100세

김유진 기자2024. 12. 30. 06:37
 
AP연합뉴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100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퇴임 후 40여년 동안 세계 평화와 인도주의 실현 및 빈곤·질병 퇴치를 위해 헌신한 그는 가장 존경받는 미국 전직 대통령으로 불린다. 재임 시절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인권 개선을 압박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했고, 북핵 위기 해결을 위해 직접 방북하는 등 한반도와도 인연이 깊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날 조지아주의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카터재단이 밝혔다. 미 언론들은 카터 전 대통령이 이날 오후 3시45분쯤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10월 100번째 생일을 맞아 최장수 역대 미 대통령 기록을 세운 카터 전 대통령은 오랫동안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 등으로 투병해 왔다. 고인은 지난해 2월부터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돌봄을 받아오던 중이었으며, 지난 11월 치러진 미 대선에도 우편투표로 한 표를 행사했다.

‘인권외교’ 기치…경제 불황 악화
퇴임 후 분쟁 중재·보건 증진 ‘노벨평화상’

1977년 제 39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카터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인권과 민주주의 확장을 외교 정책의 전면에 내세우고, 환경보호 등을 강조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중재해 78년 9월 중동 평화의 기초를 마련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을 이뤄낸 것은 대표적인 외교 성과로 꼽힌다. 카터 전 대통령은 당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초청해 비밀 협상을 주선했다. 중국과도 정식으로 수교했다.

그러나 스태그플레이션과 제2차 오일쇼크에 따른 경제 불황이 확산하면서 카터 전 대통령은 재임기 동안 첫 해를 제외하고 내내 20%대의 저조한 지지율을 면치 못했다. 특히 79년 11월 이란 과격파 학생들이이란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을 인질로 삼은 사건은 그의 재선 도전에 최대 악재로 작용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80년 4월 특수부대를 투입해 인질 구출작전을 벌였으나 미군 8명이 숨졌다.

인권을 앞세운 도덕주의 외교 정책의 효과성에도 의문이 제기됐다. 소련에 대해 반체제 탄압을 공개 비판하는 동시에 미·소 전략무기제한협정2(SALT II)을 체결하며 군비 경쟁 완화를 추구했지만,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결국 카터 전 대통령은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에 크게 패배했고,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백악관을 떠나야 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07년 2월 아프리카 가나에서 의료진이 기니벌레를 제거하는 동안 어린이를 위로하고 있다. 카터재단제공

하지만 퇴임 후부터 그의 진면목이 발휘됐다. 이듬해 1982년 카터재단을 설립하고 민주주의·평화·인권 증진, 보건·교육 개선, 불평등 해소에 뛰어들었다. 세계 각지의 민주주의 취약국에서 선거감시 활동을 지원했고, 아프리카 전염병 확산의 주원인인 기니벌레 퇴치에 매진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내가 마지막 기니 벌레 개체보다 오래 살 것”이라며 의지를 보였는데, 실제로 감염 사례가 1986년 350만건에서 2021년 14건으로 급감했다.

빈곤층 주거를 해결하기 위한 해비타트 프로젝트(사랑의 집짓기) 운동도 전개했다. 카터 부부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에 직접 연장을 들고 벽돌을 쌓거나 집을 수리했다. 부부의 손길이 닿은 집은 무려 14개국 4400채에 이른다. 그는 2002년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민주주의·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1994년 6월16일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국가주석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카터재단 제공
한반도 평화에도 깊은 관심
주한미군 철수 갈등·김일성 담판

한국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대선 후보 시절 박정희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을 문제삼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 그는 취임 후 주한미군 4~5년 내 철군 및 전술핵 철수 계획을 제시했다. 1979년 7월 방한 당시 회담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군 철군에 강력히 반대하자 한국의 자체 국방비 확충과 긴급조치 9호 해제 등 인권 개선을 요구하며 설전을 벌였다. 한미동맹 역사상 최악의 정상회담이자, 양국 관계 긴장이 파국 직전까지 고조됐던 순간이었다. 결국 의회와 군의 반대로에 부딪혀 철군 구상은 주한미군 3600명 감축에서 끝났다. 인권 외교를 앞세웠던 카터 행정부는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신군부를 사실상 용인해 논란을 자초했다.

 

국제분쟁 해결에 열의를 보인 그에겐 북한 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도 중요한 과업이었다. 그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북핵 1차 위기가 고조된 1994년 6월 평양을 찾아 김일성 주석과 두차례 면담하고, 북한의 핵개발 동결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특별사찰 수용을 이끌어냈다. 대북제재·압박을 강화하던 빌 클린턴 행정부의 기조에서 다소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왔지만,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은 북·미 고위급 대화와 그해 10월 제네바합의 체결로 이어졌다.

특히 그가 김 주석에게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제안해 7월 말 남북이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로 하면서 화해 무드가 조성됐다. 하지만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됐다. 2010년과 2011년에도 그는 억류된 미국인 석방 교섭을 위해 방북했으나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과 회담하지 못했다.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 찬사

카터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보여준 소박하고도 헌신적인 행보는 그를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 미국 전직 대통령’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백악관에서 나와 아내 로잘린과 함께 플레인스의 원래 거주지로 돌아간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부부의 결혼 77주년이던 지난해 11월 아내가 96세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한번도 부유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적이 없다”던 카터 전 대통령은 고액 연설이나 기업 이사직을 마다한 채 공익 활동에 투신했다.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지 매주 일요일마다 동네 교회의 주일성경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민주당 원로로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집권기 민주주의 후퇴 움직임에 우려를 드러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2020년 대선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벌인 2021년 1월6일 의회 폭동 사태를 강력 규탄하며 “소중한 민주주의의 상실을 피하기 위해 변화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1979년 3월9일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과 부인 로잘린 카터가 중동 순방 도중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기차 안에서 촬영된 사진.카터도서관 제공

카터 전 대통령은 1924년 10월1일 땅콩·면화농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지아공대를 거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2차대전 이후 첫 건조된 잠수함에서 복무했고, 원자력추진잠수함 개발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1953년 부친이 사망하자 해군 대위로 전역해 땅콩농장 가업을 잇기 시작한 그는 흑백 분리가 극심했던 당시 민권운동에도 힘을 보탰다.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 1970년 조지아 주지사에 차례로 당선된 그는 1976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전국적 지명도는 낮았지만, 닉슨게이트 여파로 기성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던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은 ‘정직’ ‘선량함’을 키워드로 앞세워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남북전쟁 이후 남부 지방 ‘딥사우스’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그가 최초였다. 취임식 연설을 마친 대통령이 백악관까지 이어지는 대로를 도보로 행진하는 전통도 그가 시작했다.

그의 대통령 재임기는 ‘유약한’ ‘실패한’ ‘인기없는’ 등의 수식어로 표현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재평가 작업도 일고 있다. 인종차별 해소, 화석연료 사용 감소, 여성과 유색인의 연방판사 및 행정부 고위직 등용, 국립공원 지정 확대 등 시대를 앞서간 정책들을 추진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10년 10월4일 워싱턴의 아이비 시티 근처에서 해비타트 프로젝트(사랑의 집짓기)가 진행하는 주택 건설 현장에 참여해 나무에 못을 박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